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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교구 사제연수회 : 해방신학의 역사 2
  • 김근수 편집장
  • 등록 2015-09-27 08:40: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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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5년 9월 16과 17일 마산교구 교육관에서 열린 마산교구 사제연수회에서 가톨릭프레스 김근수 편집장이 3회 강연한 내용을 6회에 걸쳐 싣는다. <편집자주>



오늘 남미에서 성서는 가난한 사람들의 눈으로 다시 읽혀지고 있다. 오늘의 억압 상황에서 하느님사랑과 이웃사랑이란 무엇인가? 이 질문은 여러 질문중 하나가 아니라 해방신학의 심장이 담긴 질문이다. 하느님과 이웃을 사랑하는 일은 그 사랑을 다짐한 사람에게 위험을 줄 수 있다. 박해 심지어 죽음도 당할 수 있다. 


남미와 한국의 교회 상황에서 가장 큰 차이는 무엇일까. 한국교회에서 거의 누구도 자기 생애에서 박해나 순교를 당할 가능성을 거의 상상하지 않는다. 박해나 순교는 지난날의 일이거나 다른 나라 일이다. 순교자 현양사업은 해도 순교당할 생각은 아예 없다. 박해나 순교와 아무 관계없는 신앙생활이 마치 당연한 듯 여겨지고 있다.


남미에서는 그렇지 않다. 남미에서 박해와 순교는 추억이 아니라 실제 상황이다. 억압받는 가난한 사람들을 사랑하는 것은 그들이 우리 형제자매라는 사실을 단순히  인정하고 아는 정도가 아니다. 그들에게 형제자매가 됨으로써 그들의 겪는 위험을 우리 스스로 함께 지는 일이다. 가난한 사람들을 사랑하는 것은 불편한 정도가 아니라 생명을 위협받는 일도 포함된다. 가난한 사람들을 사랑하는 것은 자기 목숨을 거는 일이요, 말 그대로 십자가를 지는 일이다. 



“오늘 우리에게 하느님에 대한 사랑은 먼저 무엇보다도 정의를 가장 목말라하는 사람들을 위한 해방의 노력에, 억압받는 사람을 위한 정의의 투쟁에 있다... 남미에서 가장 억압받는 사람들과 그 계층을 위해 개인적 구조적 차원에서 우리 자신을 봉사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인간을 그리고 하느님을 진정으로 사랑할 수 없다는 사실을 복음에서 배워야 한다.”(푸에블라 327) 


그리스도인의 회개는 가난한 사람들에게 우리 자신을 향하게 한다. 가난한 사람들을 외면하는 회개는 없다. ‘영원한 생명을 얻으려면 무엇을 해야 합니까’라는 질문에 예수는 가난한 사람에게 재산을 팔아 나누어 주라고 답하였다.(마르코 10,18-22) 최후 심판 기준, 즉 구원에 대한 질문에 예수는 교의신학이나 성사론, 교회법이 아니라 사회교리, 경제윤리로 답하였다. 오늘 우리가 깊이 새겨야 할 내용이다.


“교회는 그 자녀들 중 많은 이들, 특히 중산층 신자들 안에서 구체적으로 복음적 가난을 실천하는 숫자가 늘어감을 기뻐하고 있다.”(푸에블라 1151) “전체 교회가 가난한 사람들을 위한 우선적 선택을 하는 회개가 필요함을 우리는 인정한다.”(푸에블라 1134) “가난한 사람들을 위한 봉사를 위해 모든 그리스도인에게 끊임없는 회개와 정화를 요구하고 있다.”(푸에블라 1140)


제2차 바티칸공의회 이전에 신학공부는 주로 사제직을 준비하는 사람들을 위해 마련되었고, 신학의 내용과 방법은 오직 신학교 신학으로 축소되었다. 안셀무스 성인의 이해를 구하는 신앙이란 표어는 성 토마스 아퀴나스에서 큰 지지를 얻었다. 그러나 트리엔트공의회 이후 신학은 정의된 진리를 설명하고 이단을 비난하는 역할로 줄어들었다. 


제2차 바티칸공의회는 교회를 역사 안에서 하느님의 백성으로 이해하였다. 하느님의 백성은 사제뿐 아니라 평신도 등 모든 신자를 포함하는 용어였다. 해방신학은 여기서 더 나아갔다. 하느님의 백성은 해방신학에서 평신도를 포함할 뿐더러 그보다 먼저 가난한 사람들을 가리킨다. 하느님의 백성에서 평신도를 우선 떠올리는 사람이 있고, 가난한 사람을 떠올리는 사람이 있다. 


칼 라너는 ‘그리스도론은 인간학의 끝이요 시작이다’라고 말했다. 라너가 신학에서 인간 일반을 강조했다면, 해방신학은 인간 일반보다 좀 더 구체적으로 가난한 사람들을 강조하였다. 라너가 그리스도에게서 인간의 얼굴을 보았다면, 해방신학은 그리스도의 얼굴에서 가난한 사람들을 보았다.


해방신학의 특징 중 하나는 신학의 역할을 2차로 강조한 점이다. 신학은 사람들의 삶 이후에 출현한다. 헤겔식으로 신학은 황혼에서야 비로소 날기 시작하는 미네르바의 부엉이 같다. 먼저 삶이 있고 그 후 그 삶을 해석하는 신학이 있다.  교황 요한바오로2세는 푸에블라에서 열린 제3차 남미주교회의에서 가난한 사람들을 만나서 이렇게 말했다. “여러분은 하느님이 가장 사랑하는 사람들이므로, 교황은 여러분을 사랑합니다.”


전통신학에서 예수의 제자들을 좀 더 주목했다면, 해방신학은 제자들보다 가난한 사람들을 더 중시하였다. 성서의 두 주인공은 예수와 제자라기보다 예수와 가난한 사람들이라는 것이다. 성직자를 교회와 동일시하는 착각과 교만에 빠진 시대가 가톨릭교회사에 한때 있었다. 


지금은 그 반대 경향이라고 할까, 가난한 사람들을 교회라고 보기도 한다. 로메로 대주교는 가난한 사람들을 가리키며 ‘여러분이 교회입니다’라고 말한 바 있다. 성사권을 쥐고 있는 사제가 교회의 핵심일까, 하느님의 사랑을 먼저 받는 가난한 사람들이 교회의 핵심일까. 물론 양자택일의 문제는 아니겠다. 


신학자는 누구인가


불행하게도 이 주제는 가톨릭에서 거의 논의되지 않아 왔다. 신학자는 당연히 교회의 가르침을 수호하는 사람 아닌가. 신학자는 당연히 성직자이고 그러니 또한 남자 아닌가. 여성 신학자나 평신도 신학자에 대한 논의 정도가 아니다. 신학자는 누구 편을 드느냐 문제이다.


나의 스승 소브리노는 자주 이런 말을 했다. 우리 시대 가톨릭의 큰 문제 중 하나는 ‘가난한 사람들은 신학자가 될 수 없고, 신학자는 더 이상 가난하지 않다’는 것이다. (여기서 신학자 자리에 성직자를 대입해도 마찬가지다. 즉, 가난한 사람들은 성직자가 될 수 없고, 성직자는 더 이상 가난하지 않다.) 빈민층 출신중에 신학자가 탄생하지 않는다는 말이 아니다. 빈민층 출신중에 신학자가 되기 위한 기나긴 교육과정에 드는 돈을 감당할 여력이 있는 사람이 별로 없다는 것이다. 교구나 수도회의 도움으로 신학자가 된 빈민층 출신 신학자는 더 이상 빈민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는 신학자가 된 뒤에 교회 안에서 이미 명예, 돈, 지위를 얻어서 더 이상 빈민으로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빈민 출신으로 신학자가 간혹 된다 하더라도 신학자가 된 이후 더 이상 빈민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가 빈민을 편들 가능성은 크게 줄어든다는 것이다. 


신학자는 더 이상 가난하지 않다니, 성직자는 더 이상 가난하지 않다니, 무슨 말일까. 그가 검소하게 산다 하더라도 그가 부자와 권력자를 편들 가능성은 더 커진다. 농촌 지역 출신 사제들이 농민운동에 뛰어들 확률은 경험적으로 보아 크지 않다. 신학자는 가난한 사람을 보며 살기보다 종교지배층으로 살아갈 가능성이 더 크다는 것이다. 생각, 생활방식, 존재방식 등에서 그렇다는 말이다. 


부유층 출신 사제가 해방신학자가 될 확률은 크지 않다. 가난한 계층 출신이 해방신학자가 될 가능성도 크지 않다. 일단 신학자가 되면 부자와 권력자를 편들기 쉽다. 그는 이미 교회 안에서 권력층 또는 지배층에 속하기 때문이다. 본인의 출신 성분에 관계없이 가난한 사람들을 편드는 신학자가 될 확률은 크지 않다. 해방신학자는 남미에서도 역시 소수파에 속한다. 


부패한 교회는 부패한 세상에 저항하기 어렵다. 사회 민주화에 투신한 한국 사제들은 왜 교회 쇄신에 대부분 소극적일까. 한국 사제들은 왜 세속화에 깊이 물들고 말았는가. 우리가 심각하게 고뇌할 주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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