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족들의 복음화를 위한 미사 (2025.10.19) : 이사 2,1-5; 로마 10,9-18; 마태 28,16-20
오늘은 전교 주일입니다. 교회는 전교 사업에 종사하는 선교사와 전교 지역의 교회를 돕고자 해마다 10월 마지막 주일의 앞 주일을 ‘전교 주일’로 정하여, 신자들에게 교회 본연의 사명인 선교에 대한 의식을 일깨우고 있습니다. 그래서 오늘 미사의 지향은 민족들의 복음화입니다.
그래서 오늘 우리가 들은 하느님 말씀은 복음을 전하는 데 집중되어 있습니다. 먼저 첫 번째 독서에서 들으신 이사야 예언서의 말씀은, “세월이 흐른 뒤에 모든 민족들이 주님의 집이 서 있는 산으로 밀려들고, 수많은 백성이 모여 오리라.”(이사 2,2-3)고 예언하였습니다. 그리고 “하느님의 뜻이 모든 민족들에게 전해지고 이루어져서 평화가 찾아오리라.”(이사 2,4-5 참조)고 하였습니다. 특히 “칼을 쳐서 보습을 만들고, 창을 쳐서 낫을 만들리라.”(이사 2,4)는 말씀은 미국 뉴욕에 위치한 국제연합 건물에 커다란 글씨로 새겨져 있기도 합니다.
그리고 두 번째로 들으신 로마서 말씀은 예수님을 주님이시라고 고백하며 주님의 이름을 받들어 부르는 이는 모두 구원을 받으리라고 하였습니다. 더욱이 “기쁜 소식을 전하는 이들의 발이 얼마나 아름다운가!”(로마 10,15) 하는 말은 선교사를 위한 찬사입니다.
또한 마태오 복음에서는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하신 명령을 들으셨습니다. “나는 하늘과 땅의 모든 권한을 받았다.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들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명령한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여라. 보라, 내가 세상 끝 날까지 언제나 너희와 함께 있겠다.”(마태 28,18-20)
예수님의 이러한 명령에 따라서 교회는 지난 2천년이 넘는 오랜 세월 동안 복음을 전해 왔습니다. 복음을 전하는 이 일을 ‘전교’라고도 부르고, ‘선교’라고도 부르며, ‘복음화’라고도 부릅니다. 이 일이 이렇게 여러 가지 용어로 불리우는 데에는 사정이 있습니다.
전교라는 말은 아직 신자가 아닌 이들에게 예수님의 복음을 전해서 세례를 받게 한다는 뜻입니다. 지금도 이 말은 많이 쓰이고 있습니다. 그래서 전교의 달에 전교 주일을 지내고 있습니다. 사실 오늘 복음에서 들으신 대로, 아직 믿지 않는 이들에게 복음을 가르치고, 삼위일체이신 하느님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어서, 예수님의 가르침을 지키게 하는 일은 가장 기본적인 일입니다.
하지만 전교 활동만으로는 하느님의 사랑이 충분히 전해질 수 없다는 한계가 있습니다. 그래서 쓰이게 된 말이 선교입니다. 선교는 전교 활동만이 아니라 도움을 필요로 하는 모든 이들에게 봉사하는 활동을 필요로 합니다. 사회 안에서 복음적 가치에 부합하도록 행하는 교회의 모든 활동이 선교입니다. 그래서 외국에 나가 활동하는 선교사들은 신자들을 위해서는 성사집행을 하지만, 비신자들을 위해서는 믿음을 강요하기보다 그들에게 봉사합니다.
그런데 지금으로부터 반 세기 전에 열렸던 제2차 바티칸 공의회에서는 교회에 대한 많은 성찰을 한 결과, 1974년에 선교에 대한 주교 시노드가 열렸고 여기서 복음화라는 새로운 용어가 나왔습니다. 복음화는 단순히 비신자들에게 세례를 주는 전교활동을 하거나 세상에서 봉사하는 선교활동만을 뜻하지 않고, 세상을 복음적으로 변화시키는 활동까지 뜻한다는 것입니다.
요즘에 와서는 ‘새 복음화’라는 용어까지 등장했습니다. 새 복음화는 요한 바오로 2세 교황님께서 처음 쓰셨는데 이를 베네딕도 16세 교황님께서는 날로 신앙의 열기가 식어가는 유럽의 재복음화에 방점을 두어 사용하셨습니다. 그런데 프란치스코 현 교황님께서는 ‘복음의 기쁨’이라는 사도적 권고를 통해서 더욱 근본적인 취지로 새 복음화를 해야 함을 강조하셨습니다. 바로 복음화의 사회적 차원이 필요하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실상 이는 오늘 복음에서 들으신 예수님의 명령 말씀만이 아니라 하느님 나라의 복음을 선포하시면서 그분이 보여주시고 실천하신 바를 온 교회 신자들이 본받자는 내용입니다. 온 교회는 무엇보다도 자신의 사명으로 하느님 나라를 세상에 드러나게 하는 사회의 새로운 복음화로 부르심 받았고, 여기에는 사회적이고 경제적이며 문화적인 수많은 도전들이 가로 놓여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교황님께서는 사회적 차원을 올바로 다루지 않으면 복음화 사명의 참되고 본질적인 의미가 계속 왜곡될 위험이 있다고 단언하셨습니다.
프란치스코 교황의 가르침에 따르면, 예수님께서 인간의 몸을 취하셔서 모든 이를 위하여 돌아가셨다고 고백한다는 것, 그리고 성령께서 모든 사람 안에서 활동하고 계심을 고백한다는 것은 다른 이들의 선익을 바라고 찾고 배려하기 시작한다는 의미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주님으로 고백하는 것은 신앙의 사회적 임무 즉 형제애와 정의를 실천하는 삶을 열린 마음으로 받아들이게 됩니다.
이러한 삶은, 모든 사람의 얼굴 안에서, 즉 가난한 이들, 굶주린 이들, 감옥에 갇힌 이들, 소외된 이들, 존엄성을 침해당한 모든 이들의 얼굴 안에서 예수님의 얼굴을 알아보는 일로 드러납니다. 예수님께서 온 누리의 구세주이시라고 신앙을 고백하는 일, 그러니까 우리가 신앙인이 된다는 것은 자기의 구원만을 위해서가 아니라 다른 이들의 구원을 위해서 마음을 여는 것입니다. 도움을 필요로 하는 이웃의 필요에 기꺼이 응답하게 되는 것입니다. 바로 이를 위해서 신자들의 친교가 필요합니다. 이 친교는 신자들끼리만 나누는 것이 아니라 이웃에게 봉사하기 위해서 필요한 것입니다. 그래서 신자들이 교회 안에서 나누는 친교는 봉사를 위한 친교여야 합니다.
모든 그리스도인은 이 세상을 더 나은 곳으로 만드는 일에 진력하라는 하느님의 부르심을 받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 일에 선의를 가진 모든 이들과 협력하라는 부르심도 받고 있습니다. 이러한 부르심을 소홀히 하는 전교활동은 이웃 교파나 이웃 종교와 본의 아니게 경쟁하는 부작용을 낳을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복음화 활동에 있어서는 우리 자신의 신앙고백과 함께 다른 이들과의 협력관계가 매우 중요합니다. 그리하여 새 복음화를 하려는 신앙인들은 세상의 공동선과 사회평화를 위해 일해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