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사 메일전송
(김수복) 부활 제6주일 독서·복음 묵상
  • 김수복
  • 등록 2018-05-04 12:24:04

기사수정


제1독서(사도 10,25-26.34-35.44-48) 해설

<분열시키는 장벽이 무너졌다>


이 대목은 초대 교회사에서 획기적인 전환점을 가리키고 있다.


그 전환점은 에디오피아의 내시가 세례를 받은 사실로 준비되기도 했다(참조. 사도 8,26이하). 그 획기적인 전환점이란 하느님의 백성 안으로 들어오는 문이 이방인들에게도 활짝 열렸다는 사실이다. 그때까지만 해도 히브리인들의 사고방식에는 하느님의 백성이란 근본적으로 레위 법전이 규정한 정결법을 엄격하게 지키는 이스라엘 백성에 한정되어 있었다.


예수님께서는 이미 여러 기회에 그 장벽을 무너뜨리는 돌파구를 열어 놓으신 바 있다(참조. 마르 1,40이하; 5,1이하; 7,1-30 등). 그런데도 초대 교회는(베드로까지도) 그러한 개방성에 대하여 모종의 저항감을 가지고 있었다(참조. 사도 10,9-16). 결국 성령께서 적극 개입하여 그 장벽을 결정적으로 무너뜨리신다(44절).


사도행전 10장에 고르넬리우스의 회개가 기술되어 있지만, 그보다도 이방인들에게 전도해야할 사명을 절감하도록 베드로를 회개하게 하는 이야기가 더 강조된 것 같다(사도 15,2-11). 그리스도 안에서 이방인들도 하느님 백성 안으로 들어오게 되었다. 이방인들 역시 애초부터 하느님께 선택을 받고 있었다. 애초부터 하느님은 사람에 대해서 편견을 가지거나 편애하시는 법이 없었다. 하느님은 사람을 피부 색깔이나 외양이나 지능지수 따위로 특별한 호감이나 반감을 품으시는 법이 없다. 다만 한 가지 있다면, 마음씨를 어떻게 쓰는가를 정확하게 살펴 당신 은총을 내리실 뿐이다.


물로 세례를 받고 교적에 올라 있는 사람들만 성령을 받았다고 할 수 없다. 물로 세례를 받기 전에도 성령을 받은 사람들이 있었다. “이 사람들도 우리처럼 성령을 받았습니다.”(47절) 성당이나 교회당의 교적에 올라 있지 않아도 예수다운 마음씨를 지니고 예수를 따라 예수처럼 살고 ‘보편적 인간애’를 실천하는 무수한 사람들 속에는 성령께서 거처하고 활동하고 계신다.


시편(97) 해설

주님께서 민족들의 눈앞에 당신의 구원을 알리셨나이다


이 시편은 세상을 심판하러 오시는 주님의 종말론적 승리를 선포하는 찬미가이다. 오늘 전례에서 이 시편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이룩하신 하느님의 위대하신 업적을 항상 새롭게 경탄하라고 초대한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느님은 온 세상을 구원하는 주님이 되신다. 그것은 하느님이 아브라함과 그 후손에게 하신 약속 그대로이다(참조. 3절과 창세 12,3).


제2독서(1요한 4,7-10) 해설

<하느님은 사랑이시다 당신 자신을 내어주는 사랑이시다>


경탄을 자아내는 이 대목에서, 요한은 그리스도인이 지녀야 될 특징을 상기시킨다. 그리스도인은 하느님의 신비 자체를 간직하고 사는 사람이다. 인간은 본래 자기 스스로 혼자 능력으로는 사랑할 힘이 없다. 홀로 하느님만 사랑할 줄 아시니, 그것은 하느님이 사랑 자체이시기 때문이다. 아버지 하느님의 사랑은 당신 외아들에게 사람들이 지은 죄악을 대신 속량하도록 하시는 처사로 그 성격이 분명히 드러난다. 속량은 불결한 사람을 깨끗한 사람으로 만든다(참조. 레위 12,8.14.19-20). 


그러므로 그리스도께서 당신 자신을 제물로 바치신 속량행위는 유다인 이방인 할 것 없이 죄지은 인간들을 깨끗이 하여 하느님의 백성을 이루도록 한다. 아버지 하느님의 사랑은 그와 같은 것이다. 당신 외아들 그리스도의 십자가상 제사를 통하여 우리 죄지은 인간들이 깨끗해져서 하느님 백성의 구성원이 되고 약속받은 상속자가 되고 아버지의 사랑받는 상속자가 된 것이다.


그리스도를 통하여 나타난 하느님의 우리 인간에 대한 사랑이 우리에게 사랑할 수 있는 능력을 준다. 인간들끼리 하느님의 똑같은 귀한 자녀로서 서로 애착하고 존중하고 위해 주는 사랑은 하느님을 아버지로 모시고 있다는 증표이며, 아버지의 사랑을 상속받았다는 증표이다. 그러한 사랑을 품고 있는 사람만이 그리스도인이고, 하느님의 신비 자체를 간직하고 있는 사람이다. 하느님 아버지께서는 당신 외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따라 그리스도처럼 자기 자신을 속량의 제물로 바치는 사람(그리스도인)들을 통하여 오늘도 당신 인류 구원사업을 계속해 나가신다.



복음(요한 15,9-17) 해설 

<순종하는 사람은 그리스도의 사랑 안에 머문다>


7-17절의 동심적(同心的) 구조를 살펴가노라면 본문의 뜻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ㄱ. 7ㄱ절: 예수님의 말씀을 간직하기-사랑의 계명:17ㄱ′절

ㄴ. 7ㄴ절: 구하는 대로 다 이루어질 것이다: 16bㄴ′절

ㄷ. 8ㄴ절: 많은 열매를 맺을 것이다: 16ㄱㄷ′절

ㄹ. 8ㄴ절: 제자들이 되는 것=벗들이 되는 것: 14-15ㄹ′절

ㅁ. 9절: 내가 너희를 사랑했듯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 즉 벗들을 위하여 생명을 바치기까지 사랑하여라: 13ㅁ′절

ㅂ. 10절: 사랑의 계명을 실천하면 그리스도의 사랑 안에 머물게 된다: 12ㅂ′절

ㅅ. 11ㄱ절: 기쁨에 넘치다: 11ㄴ′절


위 대목에서 우리는 넘치는 기쁨을 강조하려 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두 개의 동심원이 ‘처럼’이라는 단어로 서로 연결되어 있다. 그것은 본받아야 할 귀감을 제시한다기보다, 그 두 동심원이 공통적으로 살아 움직이게 하는 원천을 제시한다고 볼 수 있다.


첫째 동심원: 사랑

1. 성령의 활동을 통하여 형성되는 아버지와 아들 사이의 상호 사랑(9절).

2. 아버지의 외아들 예수 그리스도께서 사람이 되심으로 인하여 삼위(三位)의 내적 사랑이 모든 사람, 온 인류에게 확산된다(9ㄴ절).

3. 그 같은 아버지의 사랑을 받아야만 인간들은 서로 애착하고 위해 주고 사랑할 수 있는 능력이 생긴다(12절).


둘째 동심원: 순종

1. 아들이 아버지께 보이신 완벽한 순종(10ㄴ절)은 아버지로 하여금 아들의 청을 언제나 들어주시게 한다(참조. 요한 11,42).

2. 제자들이 하느님의 명령에 따르는 순종은 하느님으로 하여금 그들의 기도를 들어주시게 한다(10절과 16절).

3. 순종이라는 동심원을 바오로는 즐겨 사용한다. 순종으로부터 인간끼리의 형제애가 나오고 참된 자유가 나온다. 참된 자유는 제멋대로 날뛰는 자유방종이 아니라, 자기 욕망을 죽이고 하느님의 뜻에 따르는 자유를 말한다.


인간끼리의 형제애는 인간 본능이나 뜻에서 자발적으로 우러나오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뜻에 순종하는 사람 안에서 활동하시는 성령의 능력으로부터 우러나온다. “너희가 나를 선택한 것이 아니라, 내가 너희를 선택했다!” 하느님이 우리 마음속에 부어 주신 성령께서 우리로 하여금 하느님이 원하시는 바를 우리도 원하게 하신다(참조. 에제 36, 27).


충만한 기쁨은, 하느님의 활동 덕분으로 우리가 삼위일체 내(內)의 사랑에 참여하게 될 때, 즉 상호 순종의 영원한 실천을 통하여 아들의 모습 안에서 ‘영광에서 영광으로’ 변형되어 갈 때 비로소 얻어진다.

 

묵상


성령께서 사랑의 충동을 

우리 안에 일으키신다


진정한 사랑은 하느님께로부터 나오기 때문에, 사랑을 실천하는 사람은 누구나 하느님께로부터 태어난 사람이며, 그런 사람만이 하느님을 알고 있다. “하느님은 사랑 자체이시기 때문이다.” 요한은 계속 되풀이하여 “나의 친애하는 사람들이여, 서로 사랑하십시오.”라고 당부한다.


아버지께서는 사랑이시다. 사랑은 자기 자신을 쏟아 붓고 내주고 나누어 주고 바치는 것이다. 아버지께서는 당신 외아들 안에 충일해 계신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 사랑의 자기표현이고, 우리 인간 조건에 적응시킨 당신 자신의 표현이시다.


사랑은 생명이다. 우리는 아들이 베푸신 사랑으로 말미암아 새로운 생명을 받아 다시 태어났고, 그 생명으로 살고 있다. 아들이 베푸신 사랑은 “우리 죄를 대신하여 우리를 속량해 내시기 위하여 당신 자신을 제물로 바치시는 사랑”이다. 사랑은 지금 이 시각에 구체적으로 각 사람에게 실현되는 사랑이지 무슨 추상적인 조건이 아니다.


사랑은 엄연한 인격을 가지고 계신 예수 자신이며, 하나의 사건이요, 그분의 사람 되심과 생애와 죽음과 부활을 통하여 이루어진 구원이다. 그 사건은 정체되어 고여 있는 사건이 아니고 언제나 시대 상황에 적응하고 있는 사건이다. 따라서 구원은 끊임없이 실현되어 나간다.


성령께서는 예수님의 사랑이요 아버지의 사랑이시다. 성령께서는 그리스도의 구원 활동을 그치지 않고 계속하신다. 성령께서는 우리 마음속에 당신 자신을 쏟아 부어 아들을 통하여 구원을 베풀어 주시는 아버지의 사랑의 신비를 깨닫게 해 주고, 사랑 자체이신 하느님의 생명에 참여하게 하신다. 그 생명으로 우리는 하느님과 말할 수 없이 친밀한 관계를 맺게 된다.


우리 인간들끼리 서로 정을 주고 위해 주는 사랑은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께서 서로 나누시는 사랑의 반영이요 표시이다.


온갖 인정(人情)과 특히 가난하고 못나고 당하는 천대받는 사람들에 대한 애착은 삼위일체의 사랑에서 비롯된다.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신 것과 똑같이 나는 너희 인간들을 사랑하였다. 너희 인간들은 내 사랑 안에서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서로 사랑하여라.” 예수님께서 인간들을 위하여 당신 자신을 제물로 바치셨듯이 우리도 서로 상대방과 모든 인간들을 위해 자기 자신을 바치라는 말이다. “벗들을 위해 자기 생명을 바치는 것보다 더 큰 사랑은 없다.” 이제 인간은 서로를 위하여 자기 생명을 내걸고 헌신해야 한다.


예수님께서는 모든 것을 인간들에게 내놓고 바치셨다. 이렇듯 사랑은 끝이 없다. 인간이 인간들을 예수처럼 사랑하려면 끝이 없다.


너희는 내 벗들이다

 

“너희가 나를 택한 것이 아니라, 내가 너희를 택했다.” “우리가 하느님을 먼저 사랑한 것이 아니라, 하느님이 우리를 먼저 사랑하셨다.”


우리는 모든 것을 그저 받았을 따름이다. 무엇보다도 우리 인간들에 대한 그리스도의 형언할 수 없이 뜨거운 사랑을 받았다. “내가 너희에게 명한 것을 행하기만 하면, 너희는 내 벗들이 될 것이다.” 그분의 명령은 하나뿐이다. 사랑뿐이다. 사랑해야만 우리는 그리스도의 사람이 된다. 만일 사랑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살았다고 할 것이 없다. 그리스도께서 사람을 사랑한 것처럼 우리도 사람을 사랑하지 않으면 우리 안에 하느님의 생명이 없다.


“사랑하는 여러분, 하느님께서 우리를 이렇게 사랑하셨으니 우리도 서로 사랑해야 합니다.”(1요한 4,11) 우리 인간들은 모두 본래 가난하고 악하므로(마태 7,10), 서로 일으켜 주고 부축하고 꾸짖고 가르쳐 주면서 사랑하는 길을 걸어가야 한다. 우리는 항상 겸허하게 마음을 열고 다른 사람을 받아들여야 한다.


예수님께서 사람을 그렇듯 사랑하신 이유는 당신이 사람이 되어 오심으로써 모든 사람이 당신 형제가 되고 사랑하는 당신 아버지의 똑같은 귀한 자녀가 되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도 예수처럼 가까이 있거나 멀리 있거나 우리나라에 살거나 먼 나라에 살거나 사람을 가장 가까운 형제자매와 벗으로 여기고, 수많은 형제자매가 굶주리고 병들고 갇히고 고문과 죽음을 당하고 있는 지금 그들을 위해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지를 심사숙고를 결정하고 실천할 일이다.



부활 제6주일 독서·복음


제1독서(사도 10,25-26.34-35.44-48)

<말씀을 듣는 모든 이에게 성령께서 내리셨다>


그 다음 날 그는 카이사리아에 들어갔다. 코르넬리우스는 자기 친척과 가까운 친구들을 불러 놓고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베드로가 들어서자 코르넬리우스는 그에게 마주 나와 그의 발 앞에 엎드려 절하였다. 베드로가 입을 열어 말하였다. “나는 이제 참으로 깨달았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사람을 차별하지 않으시고, 어떤 민족에서건 당신을 경외하며 의로운 일을 하는 사람은 다 받아 주십니다. 베드로가 이러한 일들에 관하여 이야기하고 있을 때, 말씀을 듣는 모든 이에게 성령께서 내리셨다. 베드로와 함께 왔던 할례 받은 신자들은 다른 민족들에게도 성령의 선물이 쏟아져 내리는 것을 보고 깜짝 놀랐다. 이 다른 민족 사람들이 신령한 언어로 말하면서 하느님을 찬송하는 것을 들었기 때문이다. 그때에 베드로가 말하였다. “우리처럼 성령을 받은 이 사람들에게 물로 세례를 주는 일을 누가 막을 수 있겠습니까?” 그러고 나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으라고 그들에게 지시하였다. 그들은 베드로에게 며칠 더 머물러 달라고 청하였다. 


시편(97)

주님께서 민족들의 눈앞에 

당신의 구원을 알리셨나이다.


제2독서(1요한 4,7-10)

<하느님은 사랑이시다>


사랑하는 여러분, 서로 사랑합시다. 사랑은 하느님에게서 오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이는 모두 하느님에게서 태어났으며 하느님을 압니다.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하느님을 알지 못합니다. 하느님은 사랑이시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의 사랑은 우리에게 이렇게 나타났습니다. 곧 하느님께서 당신의 외아드님을 세상에 보내시어 우리가 그분을 통하여 살게 해 주셨습니다. 그 사랑은 이렇습니다. 우리가 하느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라, 그분께서 우리를 사랑하시어 당신의 아드님을 우리 죄를 위한 속죄 제물로 보내 주신 것입니다. 


복음(요한 15,9-17)

<친구들을 위하여 목숨을 내놓는 것보다 더 큰 사랑은 없다>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신 것처럼 나도 너희를 사랑하였다. 너희는 내 사랑 안에 머물러라. 내가 내 아버지의 계명을 지켜 그분의 사랑 안에 머무르는 것처럼, 너희도 내 계명을 지키면 내 사랑 안에 머무를 것이다. 내가 너희에게 이 말을 한 이유는, 내 기쁨이 너희 안에 있고 또 너희 기쁨이 충만하게 하려는 것이다. 이것이 나의 계명이다.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 친구들을 위하여 목숨을 내놓는 것보다 더 큰 사랑은 없다. 내가 너희에게 명령하는 것을 실천하면 너희는 나의 친구가 된다. 나는 너희를 더 이상 종이라고 부르지 않는다. 종은 주인이 하는 일을 모르기 때문이다. 나는 너희를 친구라고 불렀다. 내가 내 아버지에게서 들은 것을 너희에게 모두 알려 주었기 때문이다. 너희가 나를 뽑은 것이 아니라 내가 너희를 뽑아 세웠다. 너희가 가서 열매를 맺어 너희의 그 열매가 언제나 남아 있게 하려는 것이다. 그리하여 너희가 내 이름으로 아버지께 청하는 것을 그분께서 너희에게 주시게 하려는 것이다. 내가 너희에게 명령하는 것은 이것이다. 서로 사랑하여라.





[필진정보]
김수복 : 살레시오 수도회에서 10년 동안 수도생활을 하고, 그 동안 서울 가톨릭 신학대학 6년을 수료했다. 40년 동안 5개 언어에서 성서와 신학 관련 서적을 우리말로 옮기는 번역노동자였다. 현재 사랑하는 아내와 아들 둘, 손자 넷이 있다.
TAG
키워드관련기사
0
  • 목록 바로가기
  • 인쇄


가스펠툰더보기
이전 기사 보기 다음 기사 보기
모바일 버전 바로가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