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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와 ‘당신’이 만나 ‘결혼인격’을 형성한다
  • 김수복
  • 등록 2018-10-05 18:38: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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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독서(창세 2,18-24) 해설

<남자는 아내와 어울려 한 몸이 되었다>


창세기 2장의 본문은 하나의 이야기(설화)로서, 교리적인 설명이 아니고, 매우 어둡고 숨겨져 있을지라도 엄연한 사실에 대한 일종의 ‘역사서술’이다.


24절에서는 첫 사람이 더 이상 계속 말을 하지 않고, 원인론적 성격을 띤 저자의 결론적인 구절이 나온다.


저자는 남자와 여자 사이에 서로 이끌리는 매력을 설명하려 애쓴다. 저자는 남자와 여자가 애초부터 한 몸을 이루어 다시금 재결합하고 공동운명을 지향해 다는 긍정적인 답변을 내린다.


이 설화에 대한 성격 규정은 신학적인 관점에서도 중요하다. 실상 그 설화는 이미 존재하고 현존하는 어떤 상태로부터 출발된 것이지, 단순히 처음에 낙원에서 완전한 모습으로 있다가 후에 타락해 버린 어떤 상태로부터 출발된 것은 아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도 이 대목에 더 이상 다른 말을 덧붙이시지 않는다. 그러므로 부부의 결합은 단순히 법적인 차원의 결합이 아니라, 자연적이고도 신학적인 결합인 것이다.


시편(127) 해설 

<주님께서 우리에게 한 평생 모든 날에 복을 내리시도다>


지혜를 노래하는 이 시편은 시편 125와 그 성격이 같다. 이상적인 아내와 자식 복을 얻는 것은 사람이 올바르게 삶으로써 하느님 마음에 들게 된다는 표시가 된다. “네 집 안방에는 아내가 풍성한 포도나무 같고 네 밥상 둘레에는 아들들이 올리브나무 햇순들 같구나.”(3절) 


팔레스티나인에게 매우 친근한 이 두 상징들로 시편 작가는 이상적인 가정을 묘사한다. 포도나무와 올리브나무는 아내와 자식들을 상징한다. 올바르게 사는 아버지는 연륜이 쌓인 큰 나무 둥치와 같다. 하느님을 두려워하며 꿋꿋이 올바르게 하느님의 정의와 사랑을 실천하는 사람과 그 가정은 참된 복을 받을 것이다.


제2독서(히브 2,9-11) 해설

<예수님의 죽음은 모든 사람과 모든 백성에게 구원을 가져다준다>


이 대목은 그리스도께서 천사들보다 위에 계신다는 것을 주장하려 한다(2,5-18). 저자는 시편을 인용하여(8,5-7) 인간의 위대함에 대하여 말하고, 인간의 본성이 천사들의 본성보다 좀 못하다고 말한다(7절). 그 같은 인간 본성을 예수님께서 그대로 취하여 당신 것으로 삼으신다. 


사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당신을 낮추어 가난하게 살던 지상 생애 동안, 특히 수난과 죽음을 당하시는 동안 분명히 천사들보다 못한 존재이셨음이 틀림없다. 그렇지만 하느님 아버지께서는 당신 아들이 십자가의 죽음을 당하신 다음 그에게 영광과 영예의 관을 씌워 주고(9절), 외적으로도 하느님의 아들로서의 품위를 충만하게 되찾아 주신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의 아들다운 인생을 살고 십자가의 치욕스런 죽음을 거치신 다음, 하느님 아버지의 오른편 자리로 들어올려져 구세주 예수 그리스도, 부활하신 인간 예수 그리스도가 되셨다. 이렇게 하여 예수님의 죽음은 모든 사람과 모든 백성을 구원하는 보편적 효과와 결실을 가져왔다.


그러므로 고난과 십자가의 낮춤은 그리스도께서 천사들 위에 계시다는 사실을 조금도 손상시키지 않는다(10절).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와 당신처럼 살아가는 사람들을 거룩하게 해주시는 분이 똑같은 하느님 아버지이시다. 따라서 예수와 예수처럼 사는 사람들은 본성과 근원이 동일하다(11.14절). 따라서 예수처럼 살아가는 사람들이 겪는 고통과 죽음은 예수님께서 당하신 고통・죽음과 같은 성격으로서 반드시 부활의 영광이 뒤따른다.


예수님께서는 수난과 죽음을 받아들이심으로써 구세주로서 당신 사명을 완수하셨다. 자비롭고 충실한 가장 높으신 사제로서 당신 임무를 완수하셨다. 당신처럼 살아가는 사람들을 당신 십자가와 부활의 운명에 동참하게 하셨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당신처럼 살아가는 사람들을 거리낌 없이 ‘형제들’이라 부르셨다.


그런 의미로 저자는 예수님께서 하느님의 “아드님이시지만 고난을 겪으심으로써 순종을 배우셨다. 그리고 완전하게 되신 뒤에는 당신께 순종하는 모든 이에게 영원한 구원의 근원이 되셨다.”(5,8-9)고 말할 수 있었다.


복음(마르 10,2-16 또는 마르 10,2-12) 해설

<결혼은 취소할 수 없는 남자와 여자의 결합이다>


예수님께서 옛 사람들의 인위적 전통을 극복하고 ‘하느님의 말씀’에까지 소급하도록 하신 것처럼(7,1-13), 이제 또다시 그분께서는 이스라엘 사람들의 완고한 마음 때문에 모세가 잠정적으로 허용한 규정을 극복하고 남녀 결혼의 성격을 하느님의 창조 질서에까지 소급하도록 하신다. 


예수님께서는 또다시 율법의 규정들이 잠정적이라는 것과, 이제는 완전한 질서·창조의 질서·종말론적 질서·영원하신 하느님의 질서에까지 도달해야 한다고 강조하신다. 실상 유다인들의 종말론에서 마지막 때(시기)는 부활의 시기요 새로운 창조의 시기였다.


여기서는 율법 해석에 대하여 율법학자들 식으로 벌이는 논쟁이 아니라, 율법학자들이나 바리사이들과 달리 초자연적 권위를 가지신 가르침이 나온다(마르 1,22). 이는 유다인들의 영향을 배격하기 위한 초대 교회의 호교론적 설명이 아니라, 메시아적 기쁜 소식에 포함된 내용에 대한 선언이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의 나라가 인간들 사이에 현존해 있음을 선포하셨지만, 간접적으로 하셨다. 당신 행동과 처신으로써 시대가 완전히 새롭게 바뀌었음을 보여 주지만, 당신께서 혁명적으로 행동하시는 이유를 명시적으로 설명하시지는 않았다.


이혼의 경우를 두고서도 예수님께서는 부부 결합의 동기와 성격과 가치를 성경에서 이끌어 내신다. 예수님께서는 신명 24,1이하를 해석하지 않고, 창세기에 기록된 하느님의 창조 계획에까지 소급하신다. ‘완고한 마음’은 단지 ‘다루기 힘들다.’는 말이 아니고(참조. 신명 10,16; 예레 4,4; 집회 16,10), 하느님이 세우신 질서와 계획에 반대하는 인간의 방자한 반역을 지칭한다.


마르 16,14절에서는 ‘완고한 마음’이 ‘믿기를 거절하는 것’과 동일시된다. 모세의 율법은 한사코 창조질서에 반역하려드는 인간성을 감안하고 특히 여성을 보호하려는 목적에서 그러한 규정을 두었을 뿐, 남자와 여자에 대한 근본적인 하느님의 계획을 망가뜨리려 한 것이 아니었다.


둘째 부분에서 마르코 복음서 저자는 어린이들에 관하여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들을 모아 놓았다. 어린이들은 가난한 사람들 및 힘없는 사람들과 같은 서열에서 보아야 한다. 그런 사람들은 자기의 공로를 내세울 줄 모르고 다만 겸허한 자세로 하느님의 나라를 ‘받아들일’ 태세가 갖추어져 있다.

 

묵상


결혼과 그 가치

은혜로운 삶


결혼이라는 우리 생애의 한 전환점에서, 삶은 선물이라는 느낌을 한층 더 갖게 된다. 이런 때일수록 우리에게는 우리의 출생, 성장, 결혼이 새삼 은혜로운 것들로 보인다. 우리 자신이 스스로 삶을 벌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삶이란 선물을 받았다. 우리의 부모님들은 아무런 이해타산 없이 은혜롭게도 우리를 길러 주셨다. ‘내’가 배우자의 출생과 성장에 아무런 기여를 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배우자는 지금 이곳에서 고맙게도 ‘내 사람’으로 다가오고 있다. 삶은 선물이다. 또한 은혜다. 이 은혜로운 삶에 대하여 감사의 정을 지녀 마땅하겠다.

 

결혼인격


이 순간 두 분은 인격적인 결합을 서약한다. 각 인격은 태초부터 종말에 이르기까지 한 번밖에 없는 유일무이한 가치다. ‘나’와 ‘당신’은 역사를 통틀어 단 한 번 출현하는 가치다. 어떤 무엇으로도 대치할 수 없는, 지극히 고유한 가치다. 고유한 ‘나’와 ‘당신’이 제3의 인격이랄 수 있는 ‘결혼인격’을 형성하기로 결단한 것은 엄청난 모험이 아닐 수 없다. ‘나’와 ‘당신’의 너무도 고유한 성격으로 말미암아 ‘결혼인격’에 금이 갈 수도 있기 때문이다. 완전한 자유로써 ‘결혼인격’의 형성을 서약할 수가 있으나 또한 그 자유로써 거부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고유한 두 인격이 제3의 인격인 ‘결혼인격’ 형성에 성공하는 비결은 배우자를 물질처럼 소유하는 것이 아니라, 그의 고유한 인격을 깊이 존중하면서 인격적 상통(相通)을 시도하는 것이다. 마음으로 이해하고, 호소하고, 응답하는 자세가 요구된다. 달팽이처럼 자기만의 집을 짓고 아집에 사로잡히면 ‘결혼인격’의 형성은 불가능하다. 그리고 우리가 타고난 엄청난 자유는 ‘결혼인격’을 파괴할 수 있는 두려운 힘을 지니고 있기 때문에, 생명이 다하는 그 날까지 끊임없이 인격적 상통을 새롭게 해야 할 것이다.


사회적 차원


인격적 상통이 두 분에게만 국한된다면 그것은 짝지은 이기주의에 불과하다. 두 분의 상통이 두 분의 보금자리 주민으로 점차 확대되어 가기를 간절히 소망한다. 두 분이 자리 잡은 주변에 인간미 넘치는 분위기가 점고(漸高)되기를 진심으로 기원한다. 분열을 일삼는 멸망의 연대성이 아니라 합일을 이룩하는 구원의 연대성에 가담하시기를 빈다. 연탄을 배달하는 아저씨에게도, 콩나물을 파는 아주머니에게도, 온종일 시달리는 버스차장에게도 따뜻한 눈길을 보내십시오, 언제고 어디서고 화해를 종용하십시오. 기쁨을 전파하십시오. 평화의 씨앗을 뿌리십시오.

 

무한한 차원


두 분이 아무리 ‘결혼인격’의 형성을 위해서, 또한 결혼의 사회적 차원을 구현하고자 노력할지라도, 인간의 타고난 제약성을 절감할 때가 있을 것이다. 역사적 차원의 모든 것이 한계성을 지닌 것처럼 가수들이 쉴 새 없이 입에 담는 사랑에도 한계가 있다. 두 분이 사랑의 가치를 진실로 소중히 여기신다면 그 사랑을 좀 더 높은 차원으로 승화시키기 부탁한다. 역사적 차원에 밀폐된 사랑이 아니라 무한한 차원으로 개방된 사랑을 추구하십시오. 살과 피로써 맺어지는 사랑을 영원한 사랑의 암호, 상징, 손짓처럼 체험할 수 있게 되면 그 사랑이야말로 인생의 막다른 골목에서도 결코 실망할 수 없는 사랑일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종교적 환상에 사로잡혀 인간적 사랑을 경시하라는 말은 아니다. 오히려 인간적 사랑에 진실로 충실할 때 영원한 사랑을 감지하는 눈이 열릴 것이다. 인간적 사랑을 무시하는 사상은 마니케이즘(Manichaeism)이지 그리스도교가 아니다. 영원하신 분이 우리에게 하사하신 차안(此岸)의 가치를 소중히 여기고 감사하는 마음으로 삶을 누리는 것이 올바른 자세다.


본회퍼는 1943년 12월 8일 베를린 테켈 육군형무소에서 그의 친구 베트게에서 보낸 서간에서 이렇게 설파했다. 


“…여인의 품에 안겨서 피안을 동경하라는 식일 수는 없다는 말입니다. 이것은 너그럽게 말해서 무미하고, 여하간 하느님의 뜻은 아닙니다. 다름 아닌 하느님이 우리에게 주는 바로 그것에서 하느님을 발견하고 사랑할 것입니다. 하느님이 우리로 하여금 압도적인 지상의 행복을 향락하게 할 때 하느님보다 더 경건해서는 안 되고 이 행복을 건방진 생각과 도발행위, 하느님이 준 것에서 전혀 만족하지 않으려는 일방적 종교적 환상으로 맥 빠지게 해서도 안 됩니다. 하느님 자신을 지상의 행복에서 발견하고 감사하는 자에게는 지상의 것이 일시적인 것에 불과하다는 것과, 그러므로 영원에 마음을 두는 데 익숙해지고 싶다는 생각을 주어 결국 ‘내 본향에 있고 싶도다.’를 조만간 진심으로 고백하게 할 것이 확실합니다. 여하간, 일에는 모두 제때가 있으며, 요는 하느님과 보조를 같이 하는 데 있고 몇 걸음 그를 앞서도, 한 걸음 뒤져도 안 될 것입니다. 결혼의 행복과 십자가, 그리고 남녀의 구별이 없는 하늘의 예루살렘을 모두 동시에 소유하려는 것은 오만입니다.” (허혁 편집, <성경과 신학>, 제 5권, 25면) (필자:정양모)




연중 제27주일 독서·복음



제1독서(창세 2,18-24)

<둘이 한 몸이 된다>


주 하느님께서 말씀하셨다. “사람이 혼자 있는 것이 좋지 않으니, 그에게 알맞은 협력자를 만들어 주겠다.” 그래서 주 하느님께서는 흙으로 들의 온갖 짐승과 하늘의 온갖 새를 빚으신 다음, 사람에게 데려가시어 그가 그것들을 무엇이라 부르는지 보셨다. 사람이 생물 하나하나를 부르는 그대로 그 이름이 되었다. 이렇게 사람은 모든 집짐승과 하늘의 새와 모든 들짐승에게 이름을 붙여 주었다. 그러나 그는 사람인 자기에게 알맞은 협력자를 찾지 못하였다. 그래서 주 하느님께서는 사람 위로 깊은 잠이 쏟아지게 하시어 그를 잠들게 하신 다음, 그의 갈빗대 하나를 빼내시고 그 자리를 살로 메우셨다. 주 하느님께서 사람에게서 빼내신 갈빗대로 여자를 지으시고, 그를 사람에게 데려오시자, 사람이 이렇게 부르짖었다. “이야말로 내 뼈에서 나온 뼈요 내 살에서 나온 살이로구나! 남자에게서 나왔으니 여자라 불리리라.” 그러므로 남자는 아버지와 어머니를 떠나 아내와 결합하여, 둘이 한 몸이 된다. 


시편(127)

주님께서 우리에게 평생 모든 날에 복을 내리시도다


제2독서(히브 2,9-11) 

<사람들을 거룩하게 해 주시는 분이나 거룩하게 되는 사람들이나 모두 한 분에게서 나왔습니다>


형제 여러분, 우리는 “천사들보다 잠깐 낮아지셨다가” 죽음의 고난을 통하여 “영광과 존귀의 관을 쓰신” 예수님을 보고 있습니다. 이렇게 그분께서는 하느님의 은총으로 모든 사람을 위하여 죽음을 겪으셔야 했습니다. 만물은 하느님을 위하여 또 그분을 통하여 존재합니다. 이러한 하느님께서 많은 자녀들을 영광으로 이끌어 들이시면서, 그들을 위한 구원의 영도자를 고난으로 완전하게 만드신 것은 당연한 일이었습니다. 사람들을 거룩하게 해 주시는 분이나 거룩하게 되는 사람들이나 모두 한 분에게서 나왔습니다. 그러한 까닭에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형제라고 부르기를 부끄러워하지 않으셨습니다.  


복음(마르 10,2-16)

<하느님께서 맺어 주신 것을 사람이 갈라놓아서는 안 된다>


바리사이들이 와서 예수님을 시험하려고, “남편이 아내를 버려도 됩니까?” 하고 물었다.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모세는 너희에게 어떻게 하라고 명령하였느냐?” 하고 되물으시니, 그들이 “‘이혼장을 써 주고 아내를 버리는 것’을 모세는 허락하였습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이르셨다. “너희 마음이 완고하기 때문에 모세가 그런 계명을 기록하여 너희에게 남긴 것이다. 창조 때부터 ‘하느님께서는 사람들을 남자와 여자로 만드셨다.’  ‘그러므로 남자는 아버지와 어머니를 떠나 아내와 결합하여, 둘이 한 몸이 될 것이다.’ 따라서 그들은 이제 둘이 아니라 한 몸이다. 하느님께서 맺어 주신 것을 사람이 갈라놓아서는 안 된다.” 집에 들어갔을 때에 제자들이 그 일에 관하여 다시 묻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누구든지 아내를 버리고 다른 여자와 혼인하면, 그 아내를 두고 간음하는 것이다. 또한 아내가 남편을 버리고 다른 남자와 혼인하여도 간음하는 것이다.” 사람들이 어린이들을 예수님께 데리고 와서 그들을 쓰다듬어 달라고 하였다. 그러자 제자들이 사람들을 꾸짖었다. 예수님께서는 그것을 보시고 언짢아하시며 제자들에게 이르셨다. “어린이들이 나에게 오는 것을 막지 말고 그냥 놓아두어라. 사실 하느님의 나라는 이 어린이들과 같은 사람들의 것이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어린이와 같이 하느님의 나라를 받아들이지 않는 자는 결코 그곳에 들어가지 못한다.” 그러고 나서 어린이들을 끌어안으시고 그들에게 손을 얹어 축복해 주셨다.




[필진정보]
김수복 : 살레시오 수도회에서 10년 동안 수도생활을 하고, 그 동안 서울 가톨릭 신학대학 6년을 수료했다. 40년 동안 5개 언어에서 성서와 신학 관련 서적을 우리말로 옮기는 번역노동자였다. 현재 사랑하는 아내와 아들 둘, 손자 넷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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