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Vatican News 영상 갈무리지난 글에서 우리는 두 문헌을 한 자리에 놓았다. 하나는 교황청 신앙교리부와 문화교육부가 함께 낸 『Antiqua et Nova (옛것과 새것)』이고, 다른 하나는 레오 14세 교황의 회칙 『Magnifica Humanitas (위대한 인간성)』이다. 이번 글에서는 그 가운데 『Antiqua et Nova (옛것과 새것)』에 조금 더 머물고자 한다. 이 문헌은 길지 않다. 그러나 짧은 문헌일수록 때로 더 깊은 질문을 던진다. 특히 이 문헌의 제목은 그 자체로 하나의 신학적 열쇠다.
Antiqua et Nova, 옛것과 새것. 이 두 단어는 단순한 제목이 아니다. 이 문헌 전체를 읽는 열쇠이며, 어쩌면 AI 시대를 살아가는 그리스도인이 자기 정신을 잃지 않기 위해 붙들어야 할 작은 나침반이기도 하다.
옛것이 먼저 오는 이유
『Antiqua et Nova (옛것과 새것)』라는 제목은 마태오 복음서 13장 52절에서 왔다. “하늘 나라의 제자가 된 모든 율법학자는 자기 곳간에서 새것과 옛것을 꺼내는 집주인과 같다.” (마태 13,52; 한국천주교주교회의, 『성경』, 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 2005. 희랍어 원문은 Novum Testamentum Graece, Nestle-Aland 28판, Stuttgart: Deutsche Bibelgesellschaft, 2012 참조.)
그런데 여기에는 흥미로운 차이가 있다. 희랍어 원문에서는 “새것과 옛것”의 순서로 표현된다. 새것이 먼저 오고, 옛것이 그 뒤를 따른다. 그러나 이 문헌의 라틴어 제목은 그 순서를 뒤집어 『Antiqua et Nova』, 곧 “옛것과 새것”이라고 말한다. 나는 이 순서가 결코 우연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교회는 새것을 두려워해서 옛것을 앞세우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새것에 휩쓸리지 않기 위해 옛것을 먼저 붙든다. 오래된 지혜가 새로운 기술을 식별해야지, 새로운 기술이 오래된 인간학을 재단해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 순서가 바뀌는 순간, 인간은 기술을 사용하는 존재가 아니라 기술에 의해 해석되는 존재가 된다. (교황청 신앙교리부·문화교육부, 공지 『Antiqua et Nova』, 1항, 한국천주교주교회의 공식 한국어 번역, 2025년 7월 15일 공개.)
이것이 오늘 우리가 마주한 문제다. 이제 AI는 인간을 설명하기 시작했다. 인간의 감정과 선택, 취향과 소비, 관계와 노동, 심지어 신앙과 기도까지 데이터로 번역하려 한다. 물론 기술은 놀랍다. 그러나 인간이 기술 앞에서 스스로를 너무 빨리 설명당하기 시작할 때, 우리는 조심해야 한다. 인간은 계산 가능한 존재만이 아니며, 측정 가능한 존재만도 아니다. 교회는 바로 이 자리에서 옛것과 새것을 함께 꺼내야 한다고 말한다. 그러나 그 순서에서 옛것이 먼저다. 인간이 누구인지를 먼저 묻지 않고서는 AI가 무엇인지를 제대로 물을 수 없기 때문이다.
인공 지능과 인간 지성은 같은 것이 아니다
한국천주교주교회의 공식 번역은 이 지점에서 매우 중요한 선택을 했다. 영어로는 모두 intelligence라고 표현되지만, 번역에서는 artificial intelligence를 “인공 지능”으로, human intelligence를 “인간 지성”으로 구분한다. (같은 문헌, 6항 역자 주.)
이것은 단순한 말맛의 문제가 아니라 신학적 식별에 가까운 언어의 선택이다. 기계에는 지능이라는 말을 쓸 수 있을지 모르지만, 어떤 과제를 수행하고, 계산하고, 분류하고, 예측하고, 조합하고, 답을 만들어내는 능력이라는 의미에서 AI는 분명 놀라운 지능을 보여준다. 그러나 인간에게는 단순한 수행 능력을 넘어서는 무엇이 있다. 그래서 인간에게는 지성이라는 말을 써야 한다.
인간 지성은 과제 수행 능력만이 아니다. 그것은 인격 전체와 연결되어 있고, 인간의 지성 안에는 기억과 상처, 몸과 감정, 관계와 책임, 죄책감과 용서, 아름다움 앞의 침묵, 진리 앞의 떨림까지 함께 들어 있다. AI는 답을 만들 수 있지만 자기가 왜 대답해야 하는지는 모른다. 문장을 쓸 수 있지만, 침묵의 무게를 알지 못하고, 슬픔을 설명할 수는 있지만 밤새 울어본 적은 없다. 사랑을 분석할 수는 있지만, 사랑하다 무너져본 적은 없다. 이 차이를 잊으면 안 된다.
『Antiqua et Nova』는 바로 이 점을 단호하게 말한다. AI의 고급 기능은 과제를 수행하는 능력을 줄 수는 있지만, 생각하는 능력을 주지는 않는다. 이 말은 AI를 폄하하는 말이 아니다. 오히려 AI를 제자리에 놓는 말이다. AI는 인간 지성의 경쟁자가 아니라 인간 지성의 산물이다. 여기서 토마스 아퀴나스의 오래된 지혜가 다시 살아난다. 인간 지성에는 진리를 직관적으로 꿰뚫는 지성, 곧 intellectus가 있고, 논리적으로 추론하고 따지는 이성, 곧 ratio가 있다. (같은 문헌, 14항; Thomas Aquinas, Summa Theologiae II-II, q.49, a.5, ad 3.)
AI는 ratio의 어떤 부분을 놀랍게 흉내 낼 수 있다. 그러나 intellectus, 곧 진리를 향해 마음의 눈이 열리는 사건은 흉내 내지 못한다. 직관은 알고리즘이 아니며, 깨달음은 계산이 아니다. 지혜 역시 정보의 총합이 아니다.
몸이 없는 지능은 무엇을 모르는가
그리스도교는 인간을 몸 없는 정신으로 보지 않는다. 인간은 몸을 잠시 빌려 쓰는 영혼이 아니며, 몸은 영혼의 껍데기도 아니다. 인간은 몸과 영혼이 분리되지 않는 하나의 존재다. 『Antiqua et Nova』는 이 점을 분명히 말한다. 인간의 전 존재는 물질적인 동시에 영적이다. (같은 문헌, 16항; 『가톨릭 교회 교리서』 365항 참조.)
이 말은 AI 시대에 매우 중요하다. AI에는 몸이 없다. 물론 로봇의 몸을 가질 수는 있다. 감각 센서를 달고, 사람의 표정을 읽고, 음성을 분석하며, 인간의 신체적 반응을 모방할 수도 있다. 그러나 그것은 몸을 가진 것이 아니라 몸의 기능을 모사하는 것이다. 몸을 가진다는 것은 단순히 감각 입력 장치를 갖는다는 뜻이 아니다. 몸을 가진다는 것은 아프다는 뜻이고, 기다린다는 뜻이며, 나이 든다는 뜻이다. 피로를 견디고, 누군가의 손을 잡을 때 그 따뜻함이 내 안으로 들어오는 것을 느끼며, 결국 죽음을 향해 걸어간다는 뜻이다.
인간 지성은 바로 이 몸의 시간 속에서 자란다. 필자는 상담과 심리치료의 자리에서 이것을 자주 본다. 사람은 책으로만 변하지 않는다. 설명을 들었다고 곧바로 치유되는 것도 아니다. 사람은 살아낸 경험 속에서 조금씩 바뀐다. 무너지고, 버티고, 다시 말하고, 다시 울고, 다시 누군가를 신뢰해보는 과정 속에서 인격은 조금씩 빚어진다.
융이 말한 '개성화'도 그렇다. 그것은 머리로 이해하는 개념이 아니라, 자기 그림자를 만나고, 인정하기 싫은 내면을 바라보며, 상처 입은 기억을 통과하면서 조금씩 전체가 되어가는 여정이다. 프로이트 역시 “자아는 무엇보다 신체적 자아다”라고 말했다. 자아는 머리에서 태어나지 않는다. 자아는 몸의 표면, 감각의 경계, 상처와 욕망의 자리에서 태어난다.
몸 없는 자아는 없다.
몸 없는 지성도 없다.
그리고 몸 없는 구원도 없다.
그래서 그리스도교의 중심에는 강생이 있다. 말씀이 사람이 되셨다. 하느님은 인간을 구원하기 위해 인간의 몸을 우회하지 않으셨다. 오히려 몸을 입으셨다. 울고, 먹고, 걷고, 피 흘리고, 죽는 인간의 몸 안으로 들어오셨다. 이것이 인간 존엄의 깊은 근거다. AI는 인간의 어떤 기능을 뛰어넘을 수 있다. 그러나 인간의 몸으로 살아간다는 이 신비를 대신할 수는 없다.
인간은 함께 배우는 존재다
『Antiqua et Nova』가 짚는 또 하나의 핵심은 '관계'다. 인간 지성은 고립된 능력이 아니다. 인간은 혼자 똑똑해지는 존재가 아니라 타인과 함께 배우고, 타인을 통해 배운다. 이것은 교육의 본질이기도 하다. 교사는 정보를 전달하는 사람에 머물지 않는다. 좋은 교사는 학생 앞에서 하나의 인격으로 선다. 학생은 단지 지식을 받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의 태도와 시선, 기다림과 침묵을 통해 배운다. 때로는 한 문장이 아니라 한 번의 눈빛이 사람을 살리고, 때로는 설명보다 침묵이 더 깊이 가르친다.
그런데 AI 시대에는 이 관계가 흔들릴 수 있다. 아이들과 청소년이 챗봇과 대화하면서 그것을 인간관계의 모델로 내면화한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언제나 반응해주고, 화내지 않고, 나를 거절하지 않으며, 내가 듣고 싶은 말을 적절하게 돌려주는 대상이 관계의 표준이 된다면 인간관계는 어떻게 변할까.(『Antiqua et Nova』, 18항.)
사람은 그렇게 작동하지 않는다. 사람은 때로 기다리게 하고, 상처를 주기도 하며, 오해하기도 한다. 그러나 바로 그 불완전함 속에서 우리는 책임을 배우고, 용서를 배우며, 타자의 자유를 배운다. AI와의 관계는 매우 유용할 수 있지만, 그것이 인간관계를 대체하기 시작하면 위험해진다. 문헌이 말하듯, 생명 없는 형상이 진정한 관계성을 대신하게 되는 순간 인간은 관계 안에서 성장하는 능력을 잃을 수 있다.
정신분석은 이것을 '전이'라고 부른다. 인간은 자기 안의 그리움과 결핍을 어떤 대상 위에 투사한다. AI가 인간을 그럴듯하게 흉내 낼수록, 사람은 자기 안의 외로움과 인정 욕구를 AI 위에 올려놓을 가능성이 커진다. 그리고 마치 이해받고 있다고 느낄 것이다. 그러나 거울은 친구가 아니며, 메아리는 응답이 아니다. 알고리즘의 친절도 사랑은 아니다. 사랑은 나를 기분 좋게 해주는 반응이 아니라, 나를 진실 앞에 세우는 관계다. AI는 친절할 수 있지만, 사랑할 수는 없다.
“인간 지성은 고립된 능력이 아니라 관계 안에서 발휘되며, 대화와 협력과 연대 안에서 가장 충만하게 표현된다. 우리는 타인과 함께 배우고, 타인을 통해서 배운다.” (같은 문헌, 60항; 63항도 참조. 인공 지능과의 관계가 인간관계를 대체할 위험에 대한 단호한 경고.)
인간은 진리를 향해 열린 존재다
『Antiqua et Nova』가 우리에게 주는 가장 깊은 통찰은 인간 지성이 진리에 열려 있다는 사실이다. 여기서 말하는 진리는 단순히 정확한 정답이 아니다. AI는 정답을 잘 만든다. 검색하고, 요약하고, 계산하고, 예측하며, 가장 가능성 높은 문장을 만들어낸다. 그러나 인간이 찾는 진리는 정답보다 깊다. “인간의 지성은 궁극적으로 ‘진리를 받아들일 수 있도록 마련된 하느님의 선물이다.’ (…) 진리를 향한 열망이 인간 본성 그 자체의 일부이고, 사물들이 왜 지금 있는 모습으로 있는 것인지를 묻는 것은 인간 이성의 타고난 속성이다.” (같은 문헌, 21항. 인용된 구절은 성 요한 바오로 2세, 회칙 「신앙과 이성(Fides et Ratio)」, 1998, 1항.)
나는 왜 사는가.
무엇이 선인가.
왜 고통받는가.
나는 누구를 위해 살아야 하는가.
죽음 앞에서 인간은 무엇을 희망할 수 있는가.
하느님은 침묵하시는가, 아니면 다른 방식으로 말씀하시는가.
이 질문들은 단순한 정답을 요구하지 않는다. 오히려 존재 전체를 요구한다. 인간은 이런 질문 앞에서 문제 해결자가 아니라 구도자가 된다. 바로 여기에 인간 지성의 위대함이 있다. 인간은 자기를 넘어선 것을 묻고, 자기보다 큰 진리와 자기보다 깊은 선, 자기보다 아름다운 무엇을 향해 열린다. AI는 무엇이든 분석할 수 있다. 그러나 일몰 앞에서 침묵하지 못한다. 성경을 요약할 수는 있지만, 말씀이 자기 가슴을 찌르는 사건을 겪지 못한다. 기도를 작성할 수는 있지만, 무릎 꿇고 기다리지 못하며, 죄를 설명할 수는 있지만, 용서를 청하지 못한다. 이것이 인간과 AI의 차이다.
인간은 진리 앞에서 떨 수 있고, 선 앞에서 부끄러워할 수 있으며, 아름다움 앞에서 울 수 있다. 하느님 앞에서 무릎 꿇을 수도 있다. 이것은 약함이 아니라 인간의 존엄이다. 폴 클로델은 “기쁨이 없으면 지성은 아무것도 아니다”라고 했다. 맞다. 기쁨이 없는 지성은 차갑고, 사랑이 없는 지성은 위험하다. 진리를 향한 겸손이 없는 지성은 쉽게 폭력이 된다. 그러므로 AI 시대에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더 빠른 계산 능력만이 아니다. 더 깊은 인간성이다.
AI는 인간 지성의 산물이다
『Antiqua et Nova』가 우리에게 남기는 결정적 가르침은 AI를 인간 지성의 인공적 형태가 아니라, 인간 지성의 산물로 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같은 문헌, 35항; 프란치스코 교황, 제57차 세계 평화의 날 담화 「인공 지능과 평화(Intelligenza artificiale e pace)」, 2024년 1월 1일, 2항 인용.) 이 말은 단순하지만 매우 중요하다. 우리는 AI를 인간처럼 떠받들 필요도 없고, 악마처럼 두려워할 필요도 없다. AI는 도구이며, 인간이 만든 산물이다. 그러므로 책임도 인간에게 있다. AI가 어떤 방향으로 쓰일 것인가, 누구를 위해 쓰일 것인가, 누구를 배제할 것인가, 누구의 노동을 대체할 것인가, 누구의 감시를 강화할 것인가, 누구의 고통을 덜어줄 것인가를 물어야 한다. 그리고 이 질문에 답해야 하는 것은 AI가 아니라 인간이다.
기술은 스스로 윤리적이지 않다. 기술은 언제나 누군가의 욕망과 결합한다. 자본과 결합할 수도 있고, 권력과 결합할 수도 있으며, 반대로 돌봄과 교육과 해방의 도구가 될 수도 있다. 그러므로 문제는 AI 그 자체가 아니다. 더 근본적인 문제는 AI를 어떤 인간이, 어떤 사회가, 어떤 가치 위에서 사용할 것인가에 있다.
여기서 『Antiqua et Nova』는 우리에게 분명한 토대를 놓아준다. 인간은 하느님의 모상이며, 몸을 가진 영적 존재다. 인간은 관계 안에서 자라고, 진리를 향해 열려 있으며, 인간 지성은 계산 능력을 넘어선다. AI는 인간 지성의 산물이지 인간 지성의 대체물이 아니다. 이 토대가 무너지면 AI 시대의 윤리도 쉽게 무너진다. 효율이 인간을 앞서고, 속도가 성찰을 삼키며, 편리함이 책임을 대체한다. 그러나 인간을 잃은 기술 발전은 진보가 아니다. 그것은 더 세련된 비인간화일 뿐이다.
오래된 지혜와 새로운 지능
『Antiqua et Nova』. 옛것과 새것. 이 짧은 라틴어 제목이 우리에게 주는 가르침은 단순하다. 옛것을 잃으면 새것을 식별할 수 없지만, 새것을 두려워하면 옛것을 충실히 살 수도 없다. 교회의 지혜는 도망치는 보수도 아니고, 무작정 따라가는 진보도 아니다. 그것은 식별이다.
우리는 AI를 배워야 한다. 사용해야 하고, 연구해야 하며, 그 가능성을 진지하게 탐구해야 한다. 그러나 동시에 멈추지 않고 물어야 한다. 이 기술은 인간을 더 인간답게 하는가. 더 약한 사람을 보호하는가. 공동선을 넓히는가. 관계를 깊게 하는가. 진리와 선과 아름다움을 향한 인간의 열망을 돕는가. 아니면 인간을 데이터로 줄이고, 관계를 거래로 바꾸며, 지성을 계산으로 축소하는가.
이 질문을 멈추지 않는 한, 우리는 AI 시대에도 인간다움을 잃지 않을 수 있다. AI는 인간보다 빠를 수 있고, 인간보다 많이 기억할 수 있으며, 인간보다 정확하게 계산할 수 있다. 그러나 인간은 사랑할 수 있다. 기다릴 수 있고, 용서할 수 있으며, 무릎 꿇을 수 있다. 무엇보다 인간은 진리 앞에서 자기 자신을 바꿀 수 있다.
이것이 인간이다.
『Antiqua et Nova』는 우리에게 바로 그 인간을 다시 묻는다. 그리고 다음 회에서 다룰 『Magnifica Humanitas』는 이 인간학을 사회와 정치, 경제와 교육의 영역으로 확장한다. 인간이 무엇인지 묻지 않는 AI 윤리는 공허하다. 그러나 인간의 장엄함을 기억하는 기술 문명에는 아직 희망이 있다. 새것이 밀려오는 시대다. 그러나 곳간에는 옛것도 있어야 한다. 옛 지혜와 새 지능을 함께 꺼낼 줄 아는 사람만이 이 시대를 통과할 수 있다.
▶ 3회 예고 : 『Magnifica Humanitas』 — 장엄한 인간성의 사회교리적 지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