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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수복) 부활 제4주일 독서·복음 묵상
  • 김수복
  • 등록 2018-04-20 14:18: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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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독서(사도 4,8-12) 해설

<베드로는 예수님의 이름으로 설교를 하기 시작하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만 구원을 받을 수 있다고 선언한다>


베드로와 사도들을 통하여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사명을 시공 안에서 계속 수행하신다. 그들은 예수님의 전언과 똑같은 전언을 선포해야 한다. 예수님의 구원 행적과 똑같은 행적을 보여 주고, 사람들과 법정 앞에서 예수와 똑같은 주장을 펴고 증거를 해야 한다. 그들은 그리스도 안에 이루어진 하느님의 업적을 영원히 지속시켜 가는 살아 있는 증인이 되어야 한다.


베드로는 요엘서의 예언을 인용하여(3,5) 주님의 이름으로 설교를 시작한다. 예수님의 이름을 믿는다 함은 곧 죽음과 죄악을 이기신 그분의 승리가 지금도 계속됨을 믿는다는 뜻이다. 그분의 이름으로 치유를 받고 세례를 받는다 함은 인간과 인류에게 베풀어지는 그분의 구원사업에 적극 협력함을 뜻한다. 그분의 이름을 부른다 함은 그분이 우리 곁에 함께 현존해 계심을 알고 있다는 뜻이다.


시편(117) 해설

집짓는 이들이 내버렸던 그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나이다

 

이 시편은 감사드리는 노래로서 아마도 초막절과 관계되는 시편일 것이다. 모두 함께 모여 주님께 집단적으로 찬미가를 부르면서, 다른 사람들에게도 함께 노래 부르도록 초대하고 있다.


오늘 이 시편으로 노래를 부르면서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거두신 승리를 두고 기쁨에 넘친다. 사람들이 그리스도를 소홀히 여기고 경멸했지만, 하느님은 놀라운 모양으로 그분을 부활하시게 하고 영광스럽게 해 주신다. 우리는 주께서 예수를 따라 예수처럼 살아가는 모든 사람들에게 오늘 이룩하신 놀라운 업적 때문에 감사드리는 찬미가를 부르는 것이다.


제2독서(1요한 3,1-2) 해설 

<하느님의 자녀답게 살아감으로써 아버지의 크신 사랑을 드러내고 모든 사람에게 하느님을 아버지로 받들어 모시도록 초대하자>


이 편지 첫째 부분에서 요한은 무엇보다도 하느님을 알아 모시고 하느님과 친교를 누리라고 말한 바 있다. 이와 똑같은 생각이 오늘 독서에서 아버지와 자녀 관계라는 측면에서 되풀이되고 있다. 


우리는 하느님에게서 태어난 자들이며(2,29), 이 새로운 태어남으로 인하여 우리는 하느님의 자녀가 되고 하느님의 생명에 참여하게 된다(요한 3,3-8).


그렇지만 죽어서 하느님의 자녀로 결정적으로 확정되기 전에는, 누구나 한시도 자신하거나 자만할 수 없지만 그렇다고 실망할 필요도 없다. 하느님의 자녀가 되는 과정은 일생 전반에 걸친 과정으로서 넘어지면 곧 일어서고 다시 넘어지지 않도록 안간힘을 쓰면서 앞으로 나아가는 피나는 노력과 투쟁의 길이다. “그리스도께서 순결하신 것처럼 자기 자신을 순결하게 지키도록” 노력하고 투쟁하는 길이다.


하느님의 자녀가 되는 길은 이제 누구에게나 열려 있다. 인간이면 누구나 하느님의 자녀가 되라고 초대받고 있다. 그리스도처럼 인간을 순수하게 사랑하기 위하여 생명을 바치고 그 생명을 나누어 주기로 작정한 사람은 누구나 하느님의 자녀가 된다.


복음(요한 10,11-18) 해설

<예수님께서는 진정한 목자가 지녀야 할 특징을 강조하고, 진정한 목자인지 거짓된 사기꾼인지를 가려 낼 수 있는 기준을 가르쳐 주신다>


착한 목자. 이 비유가 말하려 하는 바는 목자가 지녀야 될 헌신적인 자세이다. 착한 목자는 자기 양들을 위해서라면 자기 목숨을 바친다. 자기 양들을 잡아먹으려는 이리떼와 사투를 벌인다.


그리스도께서는 그런 착한 목자시다. 그리스도의 양떼는 한 사람 한 사람·모든 사람·온 인류다. 한 사람 한 사람을 이기심과 미움과 옹졸함이라는 이리떼에서 구해 내시려고 당신 생명을 바치셨다. 인류 역사에서 악마의 세력(개인이기주의와 가족이기주의와 집단이기주의와 국가이기주의) 때문에 기아와 질병에 시달리고 갇히고 고문당하고 학살당해 죽어가는 사람들을 구출해 내기 위해 피눈물과 피땀을 흘리며 고통과 고뇌를 겪고, 마침내 십자가상에서 당신 목숨을 바치셨다.


그것은 그처럼 인간(당신의 양)을 사랑하시는 당신의 사랑을 인간들끼리 서로 나누게 하시기 위함이었다. 그리스도께서는 하느님의 외아들이신 당신의 생명을 인간들에게 바치고 나누어 주셨다. 그처럼 헌신적 사랑을 본질로 하는 그리스도의 생명을 나누어 받은 인간들도 서로 그 생명에 어울리는 사랑의 생활 곧 다른 인간들에게 자기 생명을 나누어 주고 바치는 생활을 하라고 부르심을 받은 것이다.


“하느님 아버지께서는 그리스도께서 목숨을 바치기 때문에 그리스도를 사랑하고”(17절), 우리도 그리스도를 따라 가난하고 병들고 억눌리고 갇히고 학살당하는 모든 사람들에게 자기 목숨을 바쳐야만 하느님 아버지의 사랑을 받을 수 있고 하느님의 자녀로 인정을 받을 수 있고 정의로운 사람으로 인정을 받을 수 있다. 


묵상


예수 그리스도 안에만 

인류가 해방되고 구원받을 길이 있다.


부활 시기 전례로부터 인도와 빛을 받아 우리는 그리스도의 신비가 지닌 ‘헤아릴 길 없는 풍요’ 속으로 계속 파고들 수가 있다.


이번 주일 첫째 독서도 역시 사도행전에 의한 독서다. 사도행전은 사도들이 유다인들과 이방인들에게 죽임을 당하고 부활하신 그리스도와 그분이 우리에게 가져다주신 구원을 끊임없이 되풀이하여 선포하고 있음을 보여 주는 책이다.


사도 3에서는 요한과 함께 성전으로 올라가는 베드로가 앉은뱅이를 낫게 하여 일어서게 하는 기적을 이야기한 바 있다. 무엇을 좀 달라고 구걸하는 가난한 앉은뱅이를 응시하면서 베드로는 “나는 은도  금도 없습니다. 그러나 내가 가진 것을 당신에게 주겠습니다. 나자렛 사람 예수님의 이름으로 말합니다. 일어나 걸으시오.”(3,6)라고 말한다.


베드로가 행한 이 기적을 유다인들의 종교 지도자들인 수석 사제들은 못마땅해 했다. 그래서 요한과 베드로를 잡아 감옥에 가뒀다.


이처럼 사도들이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자기네 임무와 사명을 수행하자, 곧바로 유다인들의 지도자들・당국자들과 부딪히게 된다. 예수를 고발하고 사형당하게 한 장본인들인 수석 사제들이 또한 사도들을 붙잡아 문초한다. 예수를 잡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임으로써 그로부터 결정적으로 벗어나고 그의 조용하면서도 위협적인 가르침으로부터 아주 벗어났다고 안심하고 있는 판에 느닷없이 그의 제자들이 그의 이름으로 병자들을 고쳐 주면서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여 살아 계신다고 주장하니, 그들은 “살아 있는 그 사람”과 다시 대결하지 않으면 안 될 판국에 이르렀다.


그래서 별 수 없이 사제들은 ‘배운 것이 없는 천한’ 예수님의 제자들을 박해하기 시작한다. 그렇지만 예수님의 제자들은 인간적인 유식함이나 유능함이 아닌 성령의 비추심과 능력을 받아 확신에 찬 자기네 믿음을 주저하지 않고 선포한다. 유다인들의 우두머리들 앞에서 천한 어부 행색을 한 베드로가 ‘성령으로 충만하여’(4,8) 자기가 행한 기적에 관한 질문을 받고서 “여러분 모두와 온 이스라엘 백성은 이것을 알아야 합니다. 나자렛 사람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곧 여러분이 십자가에 못 박았지만 하느님께서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다시 일으키신 바로 그분의 이름으로, 이 사람이 여러분 앞에 온전함 몸으로 서게 되었습니다.”(4,10) 라고 분명히 선언한다.


그들이 배척하고 죽인 그 예수님께서 이제 새로운 영적 건물의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셨다: “그분 말고는 다른 누구에게도 구원이 없습니다. 사실 사람들에게 주어진 이름 가운데에서 우리가 구원받는 데 필요한 이름은 이 이름밖에 없습니다.”(4,12)


당신 생명을 바치시는 목자


예수님께서는 착한 목자시다. 당신 양떼가 이리떼에게 잡아먹히지 않게 하려고 목숨을 바치고 싸워낸 목자시다.


착한 목자인 예수님께서 지켜 주시는 양떼는 어떤 특정한 사람들이나 특정한 집단이 아니다. 그분은 온 인류를 ‘한 목자를 따르는 한 양떼’로 만들려 하신다.


예수님께서 당신 생명을 바치신 것은 나를 포함한 모든 사람을 위해 바치신 것이고, 모든 사람에게 당신 애정과 생명을 나누어 주시려는 것이다.


따라서 인간이라면 누구나 감사하는 정과 기쁨에 넘쳐서 “아버지께서 우리에게 내려 주신 사랑이 얼마나 위대한가 보라.”고 외칠 수 있게 되었다. 하느님은 당신 외아들의 생명과 영광과 풍요한 상속에 우리 인간을 모두 참여시키려 하신다. 하느님 외아들의 생명과 영광과 상속은 인간의 소원과 상상을 초월하여 깜짝 놀랄 뜻밖의 것으로 나타날 것이다. 인간의 존귀함과 인생의 가치와 보람과 살맛은 바로 그리스도의 생명을 나누어 받는 데 있다. 


그리스도의 애정과 생명을 나누어 받으려면, 그리스도께서 인간을 사랑하여 자기 자신을 모조리 바치고 생명까지 바치신 것처럼, 우리도 인간에게 자기가 가진 모든 것과 애정과 생명까지 나누어 주고 바쳐야 한다. 더 많이 소유하고 더 잘나 보이려는 경쟁을 즉시 중단하여 포기하고, 나보다 가난하고 못나고 못 배우고 무능한 사람들에게 내가 가진 바와 능력과 노동을 나누어 주고 바치면서 더 섬기려는 경쟁을 벌이면, 그런 사람들에게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생명이 깃든다.



부활 제4주일 독서·복음


제1독서(사도 4,8-12)

<우리가 구원받는 데 필요한 이름은 이 이름밖에 없습니다>


그때에 베드로가 성령으로 가득 차 그들에게 말하였다. “백성의 지도자들과 원로 여러분,  우리가 병든 사람에게 착한 일을 한 사실과 이 사람이 어떻게 구원받았는가 하는 문제로 오늘 신문을 받는 것이라면, 여러분 모두와 온 이스라엘 백성은 이것을 알아야 합니다. 나자렛 사람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곧 여러분이 십자가에 못 박았지만 하느님께서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다시 일으키신 바로 그분의 이름으로, 이 사람이 여러분 앞에 온전한 몸으로 서게 되었습니다. 이 예수님께서는‘너희 집 짓는 자들에게 버림을 받았지만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신 분’이십니다. 그분 말고는 다른 누구에게도 구원이 없습니다. 사실 사람들에게 주어진 이름 가운데에서 우리가 구원받는 데에 필요한 이름은 이 이름밖에 없습니다.”


시편(117)

집짓는 이들이 내버렸던 그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나이다.


제2독서(1요한 3,1-2)

<하느님을 있는 그대로 뵙게 되리라>


형제 여러분, 아버지께서 우리에게 얼마나 큰 사랑을 주시어 우리가 하느님의 자녀라 불리게 되었는지 생각해 보십시오. 과연 우리는 그분의 자녀입니다. 세상이 우리를 알지 못하는 까닭은 세상이 그분을 알지 못하였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제 우리는 하느님의 자녀입니다. 우리가 어떻게 될지는 아직 드러나지 않았지만, 그분께서 나타나시면 우리도 그분처럼 되리라는 것은 알고 있습니다. 그분을 있는 그대로 뵙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복음(요한 10,11-18)

<착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자기 목숨을 내놓는다>


나는 착한 목자다. 착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자기 목숨을 내놓는다. 삯꾼은 목자가 아니고 양도 자기 것이 아니기 때문에, 이리가 오는 것을 보면 양들을 버리고 달아난다. 그러면 이리는 양들을 물어 가고 양 떼를 흩어 버린다. 그는 삯꾼이어서 양들에게 관심이 없기 때문이다. 나는 착한 목자다. 나는 내 양들을 알고 내 양들은 나를 안다. 이는 아버지께서 나를 아시고 내가 아버지를 아는 것과 같다. 나는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내놓는다. 그러나 나에게는 이 우리 안에 들지 않은 양들도 있다. 나는 그들도 데려와야 한다. 그들도 내 목소리를 알아듣고 마침내 한 목자 아래 한 양 떼가 될 것이다. 아버지께서는 내가 목숨을 내놓기 때문에 나를 사랑하신다. 그렇게 하여 나는 목숨을 다시 얻는다. 아무도 나에게서 목숨을 빼앗지 못한다. 내가 스스로 그것을 내놓는 것이다. 나는 목숨을 내놓을 권한도 있고 그것을 다시 얻을 권한도 있다. 이것이 내가 내 아버지에게서 받은 명령이다.




[필진정보]
김수복 : 살레시오 수도회에서 10년 동안 수도생활을 하고, 그 동안 서울 가톨릭 신학대학 6년을 수료했다. 40년 동안 5개 언어에서 성서와 신학 관련 서적을 우리말로 옮기는 번역노동자였다. 현재 사랑하는 아내와 아들 둘, 손자 넷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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