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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수복) 사순 제4주일 독서·복음 묵상
  • 김수복
  • 등록 2018-03-09 17:52: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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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독서(2역대 36,14-16.19-23) 해설

<주님의 분노는 이스라엘 백성의 귀양살이로 나타나고, 주님의 자비는 이스라엘 백성의 해방으로 나타났다>


역대기 상·하권은 에즈라서 및 느헤미야서와 더불어 하나의 작품을 이루고 있다(역대기 하권의 마지막 부분은 에즈라서의 첫 부분과 동일하다). 아담으로부터 시작하여 성전과 예루살렘의 재건에 이르기까지(5세기 말엽까지) 이스라엘 백성의 역사는 파란만장한 것이었다. 역대기 저자가 생각하기에, 그 같은 이스라엘 백성의 역사는 예루살렘 성전과 경신례를 그 핵심으로 삼고 있었다. 예루살렘 성전과 경신례가 자기네 역사를 규정한다고 생각했다. 이스라엘 백성이 하느님께 충실하면 역사가 순탄한 길을 걷고, 반면에 하느님께 불충하면 백성 위에 하느님의 책벌이 떨어졌다.


역대기 하권의 끝부분인 오늘 독서에 군주시대 말년에 대한 종합적인 평가가 내려져 있다. 임금들과 사제들의 우두머리들이 ‘성전을 모독하고 더럽힐 지경에 이르기까지’ 하느님께 불충하였다. 그들의 마음이 굳어져 더 이상 그냥 돌아설 수가 없을 정도가 되었다. 하느님의 대변자인 예언자들의 경고도 더 이상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결국 하느님이 책벌을 내리시기로 결단을 내리지 않으실 수 없게 되었다. 그 책벌은 귀양살이로 나타났다. 역대기 저자는 이스라엘 백성이 안식일을 지키지 않았기 때문에, 하느님이 이스라엘 백성의 땅을 쉬게 하신 것이라고 여긴다(21절).


그렇지만 귀양살이가 당신 백성에게 내리시는 하느님의 최후 말씀이 아니었다. 하느님이 성전을 재건하시기 위하여 페르시아 왕 고레스를 일으켜 세우신다(23절). 경신례를 정상적으로 바치도록 하기 위함이었다. 이렇게 하여 이스라엘 백성은 토라에 규정된 두 가지 기능을 다해야 할 임무를 띤 하느님의 종으로 파악된다. 그 두 가지 기능은 땅을 경작하고 경신례를 바치는 일이었다. 그 두 기능의 수행 여부가 축복이나 저주를 불러일으키는 기준이 되었다.


인류를 대하시는 하느님의 방식은 오늘날에도 마찬가지다. 인류가 하느님이 내려주신 자원을 이용하되, 인류전체 공익에 사용하지 않고, 특정 부류의 욕심만 채우고 전쟁만 일삼으면, 하느님의 책벌을 받을 것이고, 나눔의 원칙에 입각한 평화공존을 추구해 나가면 축복을 받을 것이다. 나눔의 실천으로 표현되고 실현되는 인류 평화공존만이 진정한 경신례가 된다.


시편(136) 해설

내가 만일 예루살렘 너를 생각 않는다면 

내 혀가 입천장에 붙어버리리라


이 시편은 귀양살이하는 이스라엘 사람들이 하느님께 올리는 간청이다. 예루살렘에서 하느님께 경신례를 바치게 되어 있던 이스라엘 백성이 이스라엘 땅 밖에서 살아가야 하는 자기네 처지가 도무지 무의미함을 깨닫는다. “우리 어찌 주님의 노래를 남의 나라 땅에서 부를 수 있으랴?”


유다계 그리스도인이 아닌 우리에게는 그러한 탄식이 이상스럽게 들릴지 모른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어디에서나 하느님께 경신례를 바칠 수 있음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이 산도 아니고 예루살렘도 아닌 곳에서 아버지께 예배를 드릴 때가 온다.” 요한 4,21). 


그렇지만 우리는 그러한 탄식을 마치 어느 특정 지역에다 하느님을 묶어놓는 식의 물질주의적인 개념으로 알아들어서는 안 될 것이다. 구약과 모든 유다인들에게 특히 예루살렘은 하느님이 머무르시는 거룩한 장소로 간주되고 있었다. 이스라엘 백성에게서 예루살렘을 빼앗는 것은 마치 그리스도인들에게서 성체성사를 빼앗는 것과 같았다.


우리가 진정한 경신례를 하느님께 바칠 수 있는 것은 성체성사 곧 성찬례를 통해서이다. 성찬은 음식과 정(情)과 예수 그리스도의 몸과 피와 하느님 자녀가 되는 생명을 서로 나누는 잔칫상이다. 그 잔치를 위한 삶이 아니면 무의미한 삶이다!


제2독서(에페 2,4-10) 해설

<죄로 죽었던 여러분이 은총으로 구원을 받았습니다>


에페소서 제1부에서 바오로는 ‘하느님의 신비’(참조. 1,9) 곧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리스도를 하느님이 만물의 유일한 머리로 삼으셨음을 밝힌다(참조. 1,10). 그리고 2장에서 바오로는 어떻게 하여 우리가 신앙 안에서 파스카 사건에 연관되어 있는가를 설명한다. “하느님께서는 그리스도 안에서 그 능력을 펼치시어, 그분을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일으키시고 하늘에 올리시어 당신 오른 쪽에 앉히신 것처럼”(1,20), “잘못을 저질러 죽었던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습니다. - 여러분은 이렇게 은총으로 구원을 받은 것입니다. - 하느님께서는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우리를 그분과 함께 일으키시어 그분과 함께 하늘에 앉히셨습니다.”(2,5-6) 하느님이 파스카 때 그리스도에게 행하신 바를 우리들에게도 행하신다.


바오로가 강조하는 바는, 세례로써 우리의 이기적인 자아가 묻히고(참조. 로마 6,4), 하느님이 우리 안에 새로운 인간이신 그리스도를 태어나게 하고 우리 행위의 주체가 되게 하셨다는 사실이다. 우리는 하느님이 우리에게 바라시는 것을 자력으로 깨달을 수 없지만, 우리 속에서 살고 계시는 그리스도께서는 그것을 알고 계시며 그것을 이루어 주신다.


우리가 진리와 생명의 길을 깨닫고 구원을 받는 것은 하느님의 자비로운 은총을 받아서 된 것이지 인간 자신의 능력이나 공로로 얻은 것이 아니기 때문에 아무도 결코 자랑할 것이 없다. 자랑하고 찬미할 분은 오로지 은총과 자비를 베푸시는 하느님뿐이시다.


복음(요한 3,14-21) 해설

<하느님은 세상을 구원하시려고 당신 외아들을 보내셨다>


예수님께서 니고데모와 나누신 대화는 예수님께서 당신 제자들과 첫 번째로 지내신 파스카(2,13-4,54) 때 제시된다. 십자가에 못 박혀 죽임을 당하고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새로운 성전으로 제시한 다음(참조. 2,13-22), 요한은 그 사실에서 우러나오는 결과들을 설명한다(히브리인들에게 3장, 사마리아인들에게 4,1-42; 이방인들에게 4,43-54).


오늘 복음에서 읽은 대목은 바리사이 니코데모가 대표 격으로 나와 있는 히브리인들과 관계되는 내용이다. 에제키엘 예언자는 이미 앞으로 올 시대의 세 가지 요소를 예고한 바 있다. 새로운 성전(에제 40-47), 죽은 자들을 다시 살리시는 성령의 활동(에제 37), 새로운 마음을 선물로 주시어 “내가 세워준 규정을 따라 살 수 있고 나에게서 받은 법도를 실천할 수 있게 하심”(에제 36,25-27)이 그 세 가지 요소이다.


요한은 에제키엘의 그 예언이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어졌음을 강조하려 한다. 그리스도께서 바로 새로운 성전이요(요한 2,13이하), 성령께서 새로운 창조를 일으켜 인간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신다는 것을(요한 3,3이하) 강조하려 한다.


여기서 주목해야 할 점은 새로운 성전이 다름 아닌 십자가에 못 박혀 죽임을 당하신 그분이시라는 사실이다(14절). 요한에게 파스카 사건은 근본적으로 두 가지가 아니다. 죽음과 부활을 따로 떼어놓을 수 없다. 죽음과 부활은 단 하나의 사건이다. 부활하신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신 파스카의 발현들은, 십자가에 못 박혀 들어 올려진 일이 동시에 영광 중에 들어 높여진 일이라는 사실을 증명하는 사건들 외에 다른 것이 아니다.


십자가는 하느님의 사랑이 드러나는 증표다(16절). 왜냐하면 십자가를 통해서 하느님 안에서 온 세상이 영원한 생명을 찾아 얻게 되기 때문이다.


모든 인간을 사랑하셨기 때문에 십자가에 못 박혀 사형 당하신 그리스도께서 부활의 승리를 거두셨음을 믿고, 그리스도처럼 모든 인간을 사랑하기 위해 살아가려고 노력하는 사람은 구원을 받아 영원한 생명을 받지만, 이기심과 욕심에 사로잡혀 행실이 악한 사람은 인간을 사랑하기를 포기하므로 구원을 받지 못한다.

 

묵상


거저 주시는 사랑,

요구하시는 사랑


옛날 사람들은 불가항력적인 자연세력들이나 불가사의한 현상들과 사건들에 대한 공포에 사로잡혀 있었고 물신숭배에 빠져 있었다. 신성(神性)을 자비와 사랑의 힘으로 느낀다거나 인간들을 개별적으로 보살펴 주는 어떤 힘으로 느낀다기보다, 오히려 자기네 운명을 장악하고 기분에 따라 좌지우지하는 막연하고 막강한 세력으로 여기고 있었다.


현대에 사는 우리마저도 앞날을 예측할 수 없는 우리 운명 앞에 두려움으로 전전긍긍하는 형편이다. 흔히 우리는 하느님을 우리와 동떨어져 있는 막연한 세력이나 보편 개념쯤으로 간주하고, 우리 현실생활이나 실존과는 무관한 어떤 것으로 간주한다.


사랑이 나타나다.


인간들이 사용하는 모든 말마디들 가운데서 신비로우신 하느님을 조금이나마 깨닫게 해 주는 말마디는 ‘사랑’이라는 낱말이다.


인간들이 서로 간에 맺는 온갖 관계에서, 사랑은 흔히 부족한 인간이 더 많이 소유하고자 하는 열망이라고 정의된다. 사랑이 소유욕으로 정의된다. 그러나 진정한 사랑은 그와 반대로 자기 자신을 주는 것이고 바치는 것이다. 하느님께서도 몸소 그와 같은 사랑의 충동을 못 이겨 인간들에게 당신 자신의 생명을 나누어주시기 위해 당신의 말씀이자 행동이신 당신 외아들을 인간들과 똑같은 인간이 되게 하고 가장 모범적인 인간, 가장 인간다운 인간, 가장 순수한 인간의 생애를 살도록 하셨다.


인간이 위대한 까닭은 그리스도께서 인간이 되어 주셨기 때문이다. 하느님이 먼저 인간을 그처럼 사랑하셨기 때문에 인간은 하느님과 뗄 수없이 친밀한 관계를 맺게 된 것이고, 그 하느님과의 친밀한 관계에서 인간의 고귀한 가치가 비롯되고 우러난다.


그래서 인간을 귀중히 알고 인간을 위해 자기 자신을 내어주고 자기 자신을 바치는 생애가 사랑을 실천하는 생애요, 인간다운 생애이다. 자기 자신과 제 식구의 안일과 번영만을 위한다는 폐쇄적인 자세를 벗어나, 인간을 인간이기 때문에 외부적인 온갖 조건이나 차이를 극복하고 각 사람 인류 전체를 귀중히 알고 그들에게 자기 자신을 바치고 나누어주는 마음씨와 자세가 인간다운 가치 있는 생애를 살아가는 유일한 원동력이다.


그리스도께서 아버지 하느님의 의향대로 순수한 인간다운 인간으로서 인간사랑을 실천하시다 보니까, 십자가에 못 박혀 죽임을 당하셨다. “친구들을 위하여 목숨을 내놓는 것보다 더 큰 사랑은 없다.”(요한 15,13).


인간들을 사랑하러 와서, 인간들을 사랑하려고 가만히 살펴보니까, 억눌리고 가난하고 빼앗기고 배고프고 병들고 천대받는 사람들이 부지기수고 태반이어서, 그들을 떳떳한 인간으로 풀어주고 낫게 하고 어엿한 자존심을 일깨워 사는 맛과 기쁨과 보람을 안겨 주기 위해 몸 바치는 인생길을 택하여, 사탄이 안일과 권세를 주겠다고 무진 유혹을 해도 기어이 물리치고 뿌리치면서, 끝장을 내 보이셨다. 그 끝장이 십자가 사형이었다.


그리스도를 따르는 사람들이 지닌 증표는 십자가다. 십자가는 이 세상에서 살아가는 인생살이가 결코 남을 이기고 짓누르고 많이 차지하려 싸우고 명성・소비・향락을 더 많이 누리라는 터전이나 시간이 아님을 가리킨다. 인간을 순수하게 인간이기 때문에 사랑해 보려고 몸부림치고, 나 아닌 사람들, 내 부모・형제・자식 아닌 다른 사람들도 똑같이 사랑해 보려고 몸부림치고, 죽도록 혹사당하고 빼앗기고 인간 아닌 것처럼 취급당하는 실업자・일용직 노동자・비정규직 노동자・농민・서민들과 가난한 나라 사람들을 풀어 주려고 몸부림치는 인생임을 말해 준다. 그러다가 미움을 사고 모함을 받고 박해를 받고 감옥에 갇히고 어떤 때는 생명까지 내놓아야 하는 처절한 마당이요 시간임을 분명히 해 준다.



사순 제4주일 독서·복음


제1독서(2역대 36,14-16.19-23)

<이스라엘 백성의 귀양과 해방으로 주님의 분노와 자비가 나타난다>


모든 지도 사제와 백성도 이방인들의 온갖 역겨운 짓을 따라 주님을 크게 배신하고, 주님께서 친히 예루살렘에서 성별하신 주님의 집을 부정하게 만들었다. 주 그들 조상들의 하느님께서는 당신 백성과 당신의 처소를 불쌍히 여기셨으므로, 당신의 사자들을 줄곧 그들에게 보내셨다. 그러나 그들은 하느님의 사자들을 조롱하고 그분의 말씀을 무시하였으며, 그분의 예언자들을 비웃었다. 그러다가 마침내 주님의 진노가 당신 백성을 향하여 타올라 구제할 길이 없게 되었다. 그들은 하느님의 집을 불태우고 예루살렘의 성벽을 허물었으며, 궁들을 모두 불에 태우고 값진 기물을 모조리 파괴하였다. 그리고 칼데아 임금은 칼을 피하여 살아남은 자들을 바빌론으로 유배시켜, 그와 그 자손들의 종이 되게 하였는데, 이는 페르시아 제국이 통치할 때까지 계속되었다. 그리하여 주님께서 예레미야의 입을 통하여 하신 말씀이 이루어졌다. “이 땅은 밀린 안식년을 다 갚을 때까지 줄곧 황폐해진 채 안식년을 지내며 일흔 해를 채울 것이다.” 페르시아 임금 키루스 제일년이었다. 주님께서는 예레미야의 입을 통하여 하신 말씀을 이루시려고, 페르시아 임금 키루스의 마음을 움직이셨다. 그리하여 키루스는 온 나라에 어명을 내리고 칙서도 반포하였다. “페르시아 임금 키루스는 이렇게 선포한다. 주 하늘의 하느님께서 세상의 모든 나라를 나에게 주셨다. 그리고 유다의 예루살렘에  당신을 위한 집을 지을 임무를 나에게 맡기셨다. 나는 너희 가운데 그분 백성에 속한 이들에게는 누구나 주 그들의 하느님께서 함께 계시기를 빈다. 그들을 올라가게 하여라.” 


시편(136)

내가 만일 예루살렘 너를 생각 않는다면, 

내 혀가 입천장에 붙어버리리라.


제2독서(에페 2,4-10)

<잘못을 저질러 죽었던 우리가 은총으로 구원을 받았다>


형제 여러분, 자비가 풍성하신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사랑하신 그 큰 사랑으로, 잘못을 저질러 죽었던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습니다. ─ 여러분은 이렇게 은총으로 구원을 받은 것입니다. ─ 하느님께서는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우리를 그분과 함께 일으키시고 그분과 함께 하늘에 앉히셨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이렇게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우리에게 베푸신 호의로, 당신의 은총이 얼마나 엄청나게 풍성한지를 앞으로 올 모든 시대에 보여 주려고 하셨습니다. 여러분은 믿음을 통하여 은총으로 구원을 받았습니다. 이는 여러분에게서 나온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선물입니다. 인간의 행위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니 아무도 자기 자랑을 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하느님의 작품입니다. 우리는 선행을 하도록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창조되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선행을 하며 살아가도록 그 선행을 미리 준비하셨습니다. 


복음(요한 3,14-21)

<하느님께서 세상을 구원하시려고 아들을 보내셨다>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들어 올린 것처럼, 사람의 아들도 들어 올려져야 한다. 믿는 사람은 누구나 사람의 아들 안에서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려는 것이다. 하느님께서는 세상을 너무나 사랑하신 나머지 외아들을 내 주시어, 그를 믿는 사람은 누구나 멸망하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셨다. 하느님께서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시려는 것이 아니라 세상이 아들을 통하여 구원을 받게 하시려는 것이다. 아들을 믿는 사람은 심판을 받지 않는다. 그러나 믿지 않는 자는 이미 심판을 받았다. 하느님의 외아들의 이름을 믿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 심판은 이러하다. 빛이 이 세상에 왔지만, 사람들은 빛보다 어둠을 더 사랑하였다. 그들이 하는 일이 악하였기 때문이다. 악을 저지르는 자는 누구나 빛을 미워하고 빛으로 나아가지 않는다. 자기가 한 일이 드러나지 않게 하려는 것이다. 그러나 진리를 실천하는 이는 빛으로 나아간다. 자기가 한 일이 하느님 안에서 이루어졌음을 드러내려는 것이다.” 




[필진정보]
김수복 : 살레시오 수도회에서 10년 동안 수도생활을 하고, 그 동안 서울 가톨릭 신학대학 6년을 수료했다. 40년 동안 5개 언어에서 성서와 신학 관련 서적을 우리말로 옮기는 번역노동자였다. 현재 사랑하는 아내와 아들 둘, 손자 넷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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