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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수복) 예수님 성탄 대축일 독서·복음 해설
  • 김수복
  • 등록 2017-12-24 10:12:50
  • 수정 2017-12-24 10:19: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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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선 오브 갓` 중


제1독서(이사 52,7-10) 해설

<구원의 선포가 기쁨의 노래로 예루살렘에 울려 퍼진다>


제2이사야가 선언하는 위로의 전언은 언제나 새로운 탈출(귀양살이에서 돌아옴)에 대한 선언이다. 그 새로운 탈출은 이스라엘 백성의 유일한 목자이신 하느님의 돌아오심에 힘입어 이루어진다(참조. 이사40,1-11). 오늘 읽게 되는 이사야서의 대목은 다음과 같은 두 가지 요소가 담긴 단원의 결론이다. 새로운 탈출의 선언(51,1-16)과, 원수들이 다 쫓겨 갔으니 안심하고 일어서라고 초대받는 예루살렘(51,17-23)이 첫째 요소이고, 하느님이 시온으로 돌아오신다는 선언(52,1-12)이 둘째 요소다.


주님께서 오신다는 사실은 이스라엘 백성에게 커다란 확신과 기쁨이 될 것이다. 그렇다면 주님께서 어떻게 나타나실 것인가? 하느님은 수난하시는 종을 통하여 활동하고 개입하신다. 수난하시는 종은 죄의 벌을 몸소 대신 받고, 백성을 위하여 구원의 샘이 되실 것이다(52.13-53,12).


성 금요일이 없는 성탄은 생각할 수가 없다.


시편(97) 해설

<땅 끝마다 우리 주의 구원하심을 모두가 우러러 보았도다>


이사야는 하느님과 종의 업적을 선언하면서 “주님께서 모든 민족들이 보는 앞에서 당신의 거룩한 팔을 걷어붙이시니 땅 끝들이 모두 우리 하느님의 구원을 보리라”고 노래했다. 오늘의 시편이 다시금 “그분의 오른손이, 그분의 거룩하신 팔이 승리를 가져오셨다”고 노래한다.


하느님의 승리는 무기를 사용하여 얻어지는 승리가 아니다. 무기의 평화는 세상을 황무지로 만드는 죽음의 고요일 뿐이다. 하느님의 승리는 당신의 아들이 당신 오른편으로부터 오시어 십자가상의 죽음을 통하여 세상에 구원을 가져다줌으로써 이루어진다.


오늘 우리는 하느님이 우리에게 베푸시는 구원이 얼마나 귀중한가를 묵상하면서 기뻐 용약하자.


제2독서(히브 1,1-6) 해설

<하느님의 아들인 그리스도께서는 계시의 마지막 말씀이시다>


‘그런 아버지에 그런 아들’ 하느님이 보내신 분이 어떤 분이신지를 알기 위해서 앞에 말한 격언을 생각하면 충분할 것이다. 마구간에 숨어 계시고, 십자가의 ‘케노시스’(자기를 비움) 중에 계실지라도, 예수님께서는 언제고 ‘빛에서 나온 빛’이시다. 예수님께서는 육화하신(사람이 된) 하느님의 영광이시다. 지혜문학은 하느님의 영광을 하느님의 ‘지혜’라 부른다(참조. 지혜 7,25-27). 그리고 히브리인들은 지혜를 **‘세계나’, 즉 역사 안에 현존하시는 하느님의 영광이라 부른다.


전례 중에 예수님의 생애가 재현되는 것은 그 때문이다. 예수님께서는 지금 영광의 옥좌에 앉아 계시지만, 당신의 십자가 제사와 전례 중에 대신 속죄하는 제사로, 하느님께 끊임없이 우리를 위하여 간청을 드리고 계신다. 성탄은 끊이지 않고 새로운 의미를 길어내야 할 신비이다. 하느님의 엄청난 사랑과 놀라운 우리 구원을 거듭 새로운 각도에서 느껴야 할 신비다.


복음(요한 1,1-18 또는 요한 1,1-5.9-14) 해설

<말씀이 사람이 되어 우리 가운데 계셨다>


유다인들의 전승을 따르면, 하느님이 맨 첫날 창조하신 빛은 처음부터 ‘마지막 날’에 빛나기 위해 숨겨지고 보류되어 있다. 그래서 하느님은 나흘째 되는 날 ‘빛’을 창조하셨다. 그리스도가 바로 그 첫 빛이시다. 그 빛이 세상을 비춘다.


세상이 그 빛을 몰라보는 것은 당연한 것 같다. 빛이라 하면 흔히 태양밖에 생각하지 못하는 우리는 태양까지 무색케 하는 참된 빛이신 그리스도를 알아보기가 쉽지 않다(참조. 루카 23,44). 그렇지만 어떤 사람들은 빛이신 그리스도를 알아보았다. 그것은 그들이 다른 사람들보다 낫기 때문이 아니고, 하느님이 그 빛을 알아볼 수 있는 능력을 베풀어 주셨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들은 하느님께로부터 태어난 사람들이다.


그 때문에 육화(하느님이 사람이 되심)는 그들의 인생길을 비추는 빛이 된다. 하느님의 아들이 사람이 되심으로써 평범한 사람이었던 그들도 하느님의 자녀가 된 것이다. 하느님의 아들이 세상 안에 당신 거처를 잡으심으로써 ‘세상 사람들’도 아버지의 품속에서 하늘의 거처를 잡을 수 있게 하셨다. “아무도 하느님을 본 적이 없다. 아버지와 가장 가까우신 외아드님 이신 그분께서 알려 주셨다” 신자는 하느님을 실제로 ‘본다’(참조. 요한 14,9). 십자가에서 하느님의 영광이 드러났기 때문이다(참조. 요한 17,1-5).


이 빛은 베들레헴의 가난한 마구간을 비추어 하느님의 궁전으로 만들었듯이, 우리의 평범한 삶을 비추어 승화시킨다.


묵상


우리 가운데 살기 위해 오셨다.

사람들 가운데 한 사람이 되신 하느님


하느님의 끝없는 사랑의 표현은 구체적으로 사람을 믿어 주시는 행동으로 나타난다. 하느님 사랑의 증명은 언제나 하느님이 사람을 믿어 주신다는 선언이 된다.


하느님은 사람을 망하게 내버려 두시지 않는다. 비참한 운명과 악의 심연으로 떨어지도록 그냥 놓아두시지 않는다. 사람의 회복가능성을 믿어 주신다.


베들레헴의 하느님은 단순히 사람들에게 전언과 선물과 약속을 보내 주는 전능하신 분이 아니다. 하느님 자신이 전언이 되고 선물이 되고 확실한 온갖 약속이 되신다.


하느님은 우리 각자에게 이렇게 말씀하시러 오신다. “나는 너와 똑같은 사람이다. 너처럼 사람으로서 겪는 모험을 겪는다. 너처럼 살아가기 위해 길을 간다. 하루하루 일하고 땀 흘리면서 희망과 기쁨과 슬픔과 몰이해와 궁핍 속에 가정을 꾸리고 우정을 나누며 살아간다.… 너처럼 더 나은 세상을 꿈꾸고, 너와 더불어 반발하기도 한다”고.


우리의 하느님은 성탄과 더불어 사람으로서 첫발을 내딛으신다.


하느님은 우리가 처한 생존의 조건을 넘어서 멀리 바깥에 계시는 하느님이 아니시다. 전적으로 사람의 처지를 당신의 처지로 삼으신다. 사람의 허약함, 불확실성, 가난함, 품위, 자유, 위대성을 당신 것으로 삼으신다. 온갖 비인간화의 뿌리인 죄악을 빼놓고, 인간적인 모든 것을 취하신다.


하느님은 사람들로 하여금 참으로 인간적이게 하기 위해 사람이 되셨다. 사람들을 온전한 기쁨 가운데 성장하지 못하도록 막는 온갖 방해물과 올가미에서 자유롭게 하려고 사람이 되셨다. 하느님과 사람이 함께 사랑의 꿈을 이루도록 하려고 사람이 되셨다. 사랑은 하느님과 사람의 마음속에 숨겨진 신비이다.


성탄의 하느님은 사람들과 사랑에 빠지신 하느님이다. 마치 당신이 하느님이심을 잊기나 한 듯이, 갓난아기로 숨어드신다. 수많은 아기들 중의 한 아기가 되신다.


하느님은 사람들을 휩쓸어 버리는 하느님으로 오신 것이 아니다. 이해심 깊고 양순하고 인내심 깊은 분으로 살아가신다. 그분의 능력은 다름 아닌 사랑이다. 그분은 차지하러 오신 것이 아니라 자유롭게 하러 오셨다.


하느님은 단죄하고 벌주고 갈라놓는 심판자로 오신 것이 아니다. 용서와 화해를 가져다주고 베푸신다. 갈라진 사람들을 한데 묶고, 마음들이 멀어진 인류에게 형제애의 평화를 주러 오셨다.


하느님은 나를 위해 오고, 마지막 한 사람까지를 위해 오셨다


주님께서는 나를 위해서도 오셨다. 이제는 나도 더 이상 실망하거나 포기하지 않아도 된다. 내 인생이 볼품없다거나 의미 없다고 어느 누구도 감히 말할 수 없게 되었다. 주님께서는 나도 존중해 주신다. 주님의 눈에는, 가난하거나 부유하거나, 사회적 지위가 높거나 낮거나, 선망의 대상이거나 무시와 천대의 대상이거나, 성공했다는 인생이거나 실패했다는 인생이거나 그런 것이 가치기준이 아니다.


그분은 그냥 나를 사랑하고 존중하신다. 나는 무엇보다 먼저 사랑받고 구원받을 필요가 있는 까닭이다. 그분의 눈에는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이 모두 보석처럼 귀중하다. 이제 더 이상, 서로 사람인 우리는 모두 하느님의 사랑을 받고 있는 관계로 나누어지거나 갈라질 수 없다. 어느 누구도 소외시키거나 배척할 수 없게 되었다.


사람이면 모두 나와 똑같이 하느님의 사랑을 받고 있는 관계로 위대하고 중요한 존재인 것이다. 우리는 이제부터 보잘 것 없게 여겼을지도 모르는 사람들을 존중하고 존중받도록 노력하기 시작해야 할 것이다. 꼴찌가 첫째 되어야 한다. 첫째들이 참으로 사람답게 변하기 위해서다.


베들레헴에서 아기로 태어나신 하느님, 모든 사람에게 배척당하고 말구유 위에 누인 아기 하느님, 말씀 한 마디 없이 그저 고요히 계시기만 하는 아기 하느님은 복음적인 혁명을 선포하고 계신다. 권세 있는 자를 자리에서 내치고, 천대받는 꼴찌들을 들어 높이신다.


하느님이 맨 꼴찌가 되셨다. 그것은 맨 꼴찌로 하여금 하느님처럼 높여지게 하기 위함이다. 하느님의 비천함은 사람의 참된 위대함을 이룩하여 준다.


동방에서 온 세 박사들이 이 어린 아기의 발치에 선물을 놓을 때, 그들은 인류의 역사가 바야흐로 ‘대변혁’의 길을 걸어야 함을 선언하고 있었다. 사람을 위한 역사가 되고 사람을 대적하는 역사가 되지 않기 위해서는 대변혁의 길을 걸어가야 함을 선언하고 있었다.


동방 박사들은 로마 제국에서 가장 미소한 갓난아기에게 황금과 향을 바침으로써, 재산과 권세와 명성이라는 우상들을 영구히 깨부순 것이다. 그 어떤 몰약도 동방 박사들이 바친 것만큼 무덤 안에서까지 헛됨 또는 영광을 썩지 않게 보존해 줄 수 있는 향료가 없을 것이다. 몰약은 사람을 위하는 사랑에 헌신하는 생애만이 죽음을 넘어서 다시 태어나기를 기다리는 사람들의 기억에 간직될 만한 가치가 있다는 상징이 된다.


성탄으로, 인자(사람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는 가난한 사람들・억눌리는 사람들과 더불어 수난하기 시작하신다. 그렇게 함으로써 그들에게 승리를 마련하신다. 행복선언으로 시작하여 하느님 아들의 부활로 절정에 달할 것이다.




예수님 성탄 대축일 독서·복음



제1독서(이사 52,7-10)

<땅 끝들이 모두 우리 하느님의 구원을 보리라>


얼마나 아름다운가, 산 위에 서서 기쁜 소식을 전하는 이의 저 발! 평화를 선포하고 기쁜 소식을 전하며 구원을 선포하는구나. “너의 하느님은 임금님이시다.” 하고 시온에게 말하는구나. 

들어 보아라. 너의 파수꾼들이 목소리를 높인다. 다 함께 환성을 올린다. 주님께서 시온으로 돌아오심을 그들은 직접 눈으로 본다. 예루살렘의 폐허들아 다 함께 기뻐하며 환성을 올려라. 주님께서 당신 백성을 위로하시고 예루살렘을 구원하셨다. 

주님께서 모든 민족들이 보는 앞에서 당신의 거룩한 팔을 걷어붙이시니 땅 끝들이 모두 우리 하느님의 구원을 보리라. 


시편(97)

땅 끝마다 우리 주의 구원하심을 모두가 우러러 보았도다


제2독서(히브 1,1-6)

<하느님은 아드님을 통하여 우리에게 말씀하셨다>


형제 여러분, 하느님께서 예전에는 예언자들을 통하여 여러 번에 걸쳐 여러 가지 방식으로 조상들에게 말씀하셨지만, 이 마지막 때에는 아드님을 통하여 우리에게 말씀하셨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아드님을 만물의 상속자로 삼으셨을 뿐만 아니라, 그분을 통하여 온 세상을 만들기까지 하셨습니다. 

아드님은 하느님 영광의 광채이시며 하느님 본질의 모상으로서, 만물을 당신의 강력한 말씀으로 지탱하십니다. 그분께서 죄를 깨끗이 없애신 다음, 하늘 높은 곳에 계신 존엄하신 분의 오른쪽에 앉으셨습니다. 그분께서는 천사들보다 뛰어난 이름을 상속받으시어, 그만큼 그들보다 위대하게 되셨습니다. 

 하느님께서 천사들 가운데 그 누구에게 “너는 내 아들, 내가 오늘 너를 낳았노라.” 하고 말씀하신 적이 있습니까? 또 ‘나는 그의 아버지가 되고 그는 나의 아들이 되리라.” 하고 말씀하신 적이 있습니까?  또 맏아드님을 저 세상에 데리고 들어가실 때에는 “하느님의 천사들은 모두 그에게 경배하여라.” 하고 말씀하십니다. 


복음(요한 1,1-18)

<말씀이 사람이 되시어 우리 가운데 사셨다>


한 처음에 말씀이 계셨다. 말씀은 하느님과 함께 계셨는데 말씀은 하느님이셨다. 그분께서는 한 처음에 하느님과 함께 계셨다. 모든 것이 그분을 통하여 생겨났고 그분 없이 생겨난 것은 하나도 없다. 그분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그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었다. 그 빛이 어둠 속에서 비치고 있지만 어둠은 그를 깨닫지 못하였다. 

하느님께서 보내신 사람이 있었는데 그의 이름은 요한이었다. ((그는 증언하러 왔다. 빛을 증언하여 자기를 통해 모든 사람이 믿게 하려는 것이었다. 그 사람은 빛이 아니었다. 빛을 증언하러 왔을 따름이다.)) 

모든 사람을 비추는 참 빛이 세상에 왔다. 그분께서 세상에 계셨고 세상이 그분을 통하여 생겨났지만 세상은 그분을 알아보지 못하였다. 그분께서 당신 땅에 오셨지만 그분의 백성은 그분을 맞아들이지 않았다. 그분께서는 당신을 받아들이는 이들, 당신의 이름을 믿는 모든 이에게 하느님의 자녀가 되는 권한을 주셨다. 이들은 혈통이나 육욕이나 남자의 욕망에서 난 것이 아니라 하느님에게서 난 사람들이다. 말씀이 사람이 되시어 우리 가운데 사셨다.  우리는 그분의 영광을 보았다. 은총과 진리가 충만하신 아버지의 외아드님으로서 지니신 영광을 보았다. ((요한은 그분을 증언하여 외쳤다. “그분은 내가 이렇게 말한  분이시다. ‘내 뒤에 오시는 분은 내가 나기 전부터 계셨기에 나보다 앞서신 분이시다.’” 그분의 충만함에서 우리 모두 은총에 은총을 받았다. 율법은 모세를 통하여 주어졌지만 은총과 진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왔다. 아무도 하느님을 본 적이 없다. 아버지와 가장 가까우신 외아드님 하느님이신 그분께서 알려 주셨다.))


또는 요한 1,1-5.9-14: 위 복음에서 괄호 (( )) 안의 것은 생략할 수 있다.




[필진정보]
김수복 : 살레시오 수도회에서 10년 동안 수도생활을 하고, 그 동안 서울 가톨릭 신학대학 6년을 수료했다. 40년 동안 5개 언어에서 성서와 신학 관련 서적을 우리말로 옮기는 번역노동자였다. 현재 사랑하는 아내와 아들 둘, 손자 넷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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