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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수복) 연중 제22주일 독서·복음 묵상
  • 김수복
  • 등록 2017-09-01 17:10: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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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예레미야 예언자.


제1독서(예레 20,7-9) 해설

<주님, 당신께서 저를 꾀시어 저는 그 꾐에 넘어갔습니다>


이스라엘 역사상 예레미야 예언자만큼 비극적인 생애를 보낸 인물도 없을 것이다. 그는 이스라엘 역사에서 가장 혼란한 시기에 살았다. 이스라엘 백성이 귀양살이하기 조금 전에 살았다. 그는 미움과 멸시와 유배를 당했다(15,10이하; 18,18; 20,10). 끊임없이 장벽에 부딪히고 생명의 위협도 여러 번 겪었다. 이렇게 무거운 시련과 짐을 진 예레미야 마음은 정말 미어지고 바수어지는 것만 같았다.


예레미야는 주님께 대들듯이 말씀드린다. 주님이 자기를 꾀었고, 자기는 어리숙하게 그 꾐에 넘어갔다고 말한다(7절). 하느님께서는 각 사람의 생애에 개입하고 침투하며, 당신을 받아들이기만 하면 그를 송두리째 차지하신다.


예레미야가 받은 소명은 위로의 전언은 아니라 경고하고 대적하는 전언이었기에, 그는 공동체의 배척을 받고 소외당하고 고독에 빠져야 했다. 그런 소명을 받은 사람은 외롭고 슬프고 고통스런 생애를 보내게 된다.


하느님의 말씀이 속으로부터 충동질을 할 때, 우리는 거역하기가 힘들다. 바오로는 “내가 복음을 선포하지 않는다면 나는 참으로 불행할 것입니다”(1코린 9,16)고 말한다. 하느님의 말씀은 태워 삼키는 불과 같고, 억누를 길 없이 뿜어 나오는 힘과 같다.


시편(62) 해설

하느님, 제 영혼이 당신을 목말라합니다


시편 작가는 원수들에게서 박해를 받고 울부짖는다. 그러면서도 그는 하느님의 곁에 살면서 하느님의 은총을 찬양하고픈 열정에 휩싸인다.


“하느님, 당신은 저의 하느님, 저는 당신을 찾습니다. 제 영혼이 당신을 목말라합니다”(2-3절). 하느님께로 향한 열망은 사람을 온통 불태운다. 그 동기는 단순하면서도 심오하다. 은총을 내리시는 하느님의 선함과 인자하심이 그 동기이다.


제2독서(로마 12,1-2) 해설

<여러분의 몸을 하느님 마음에 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바치십시오>


하느님의 말씀이나 복음은 그냥 과연 옳은 말씀이구나 하고 알고 넘어가고 말 성질의 것이 아니다. 우리 생활 자체를 바꾸지 않고는 복음을 받아들였다 할 수 없다. “이것을 알고 그대로 실천하면 너희는 행복하다”(요한 13,17)


그리스도께서는 한번이자 마지막으로 당신 자신을 하느님께 인류 구원을 위한 제물로 바치셨다. 이제 남은 것은 사람들이 그리스도를 따라서 하느님의 뜻인 인류의 화해와 일치를 위해서 자기 자신을 희생함으로써 서로 용서하고 용서 받으며 모두 하나 되는 길로 나아가는 일이다.


사회생활과 전례생활을 구분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참된 경신례는 하느님의 뜻에 따라 사회생활을 하고, 사회가 하느님의 뜻에 따라 움직이도록 온 몸에 바쳐 노력하는 일 바로 그것이다. 나부터 어떤 사람이건 하느님의 자녀로서 대접하고, 모든 사람이 서로 하느님의 자녀로 여기는 사회를 만들자면, 반드시 몸 바쳐 노력할 필요가 있다. 그 노력이야말로 하느님께서 기쁘게 받아주실 거룩한 산 제물이다.


복음(마태 16,21-27) 해설

<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오려면 자신을 버려야 한다>


예수님을 따른다 함은 ‘십자가에 못 박히신 분’을 따르는 것을 뜻한다. 베드로와 사도들은 이 점을 분명히 알아들어야 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제자가 된다는 것은 실천과 행동으로 입증되어야 함을 제자들에게 강조하여 설명하셨다.


예수님께서는 당신께 일어날 일을 미리 분명히 알고 계셨다. 당신이 예루살렘에서 이스라엘 종교 지도자들의 모함으로 수난하고 죽고 사흘 만에 부활하시리라는 것을 분명히 의식하고 계셨다.


스승의 그러한 예고를 듣고서, 베드로는 심한 충격과 마음이 동요와 공포를 느낀다. 살아계신 하느님께서 당신 외아들을 그렇듯 잔인하게 나 몰라라 하고 죽음에 부치실 수 있는가 의아해 했다. 그래서 베드로는 자기의 못마땅한 기분과 반감을 드러낸다. “맙소사, 주님! 그런 일은 주님께 결코 일어나지 않을 것입니다”


베드로의 그런 말은 예수님께서 받으신 소명의 깊은 뜻을 헤아리지 못한 언동이었다. 예수님께서는 광야에서 시험 당하실 때 사탄에게 하신 “사탄아, 내게서 물러가라”는 극언을 서슴없이 베드로에게 퍼부으신다. 베드로라는 교회의 초석도 그처럼 몰지각하고 실수하는 초석이었던 것이다.



그리스도를 참되게 따르려는 사람은 자신을 내세우고 자신의 명성을 찾을 것이 아니라, 생명까지라도 바칠 각오로 수난과 십자가의 길을 택해야 한다.


이기심을 채우는 잘못된 자신의 길에서 끊임없이 돌아서고, 다른 사람들도 돌아서게 하여 구원받도록 노력하는 길은 그리스도처럼 수난하고 십자가에 못 박히는 길 밖에 없다.


묵상


십자가의 논리


“누구든 지 내 뒤를 따라오려면, 자신을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는 예수님의 말씀은 인생살이의 슬픔과 고통과 짐스러움을 별 수 없이 소극적으로 지루하게 견뎌나가지 말고, 수난과 고통의 적극적인 의미와 가치를 깨달으라는 말씀이다. 그리스도를 충실히 따르고, 그분의 구원 업적에 참여하자면, 필연적으로 외로운 수난의 길을 가게 되어 있다.


선택의 자유가 있기 때문에 사람은 주위의 분위기와 상황에 적당히 타협하면서 안일하게 중간 길을 갈 수도 있다. 그러나 그리스도를 따른다 함은 그리스도다운 의미를 지닌 생애를 살아간다는 뜻이다. 그리스도를 닮은 생애를 살아가려면 자기가 처한 환경과 상황을 날카롭게 비판해야 한다. 그리하여 버릴 것은 버리고, 끊을 것은 끊고, 단호하게 포기하고 단절한 다음, 새로운 가치를 세우고 키워가야 한다. 그 과정을 끊임없이 새로이 거듭 되풀이해야 한다. 그 과정은 참된 생명을 얻기 위하여 ‘자기를 버리는’ 과정이다. 참된 생명을 잃는다면 제 아무리 많은 재산을 모으고 이름을 떨쳐도 아무짝에도 쓸모없다. 


‘십자가’는 남에게서 부당하게 겪는 고통을 생각하기 이전에, 먼저 자기 자신과 대결하여 이기심과 공명심과 불의(不義)의 경향에로 기우는 자신을 억누르고 숨을 끊어놓는 피나는 노력을 가리킨다. 그리스도의 길과 하느님 나라가 이루어지는 방식은 그러한 것이다. 먼저 각 사람이, 사회와 세계 속에서 모든 사람・온 인류와 하나 되어 살기로 인생목표를 세우고서, 자기 자신의 욕심을 채우려는 한없는 욕망, 한없이 재산을 모아 이기적인 향락의 울타리를 쌓고 싶은 욕망, 자기가 남보다 우수함을 뽐내고 남을 부리고 남위에 서고 싶은 헛된 욕망을 죽여 가는 길이요 방식이다. 남을 욕하기 전에, 먼저 자기 자신을 개선하고 마음을 고쳐먹을 때 남을 도울 수 있는 여력이 조금이라도 생기는 것이다.


불의(不義)한 사회를 바로잡는 십자가


각 사람이 자기 마음속에 도사리고 있는 이기심과 공명심과 불의를 버리는 일이 급선무이다. 그러한 노력이 전제되지 않고서, 다른 사람을 바로잡아주고 불의한 사회구조를 바꿔놓겠다고 나서는 것은 어처구니없는 짓이다. 그런 사람의 활동은 전혀 구원의 효과를 거둘 수 없다. 먼저 자기 자신을 바로잡는 노력은 일생을 걸쳐 계속되어야 하며, 그 노력은 한이 없다. 그리스도를 닮아가는 정도는 은총이 무한한 만큼 무한하기 때문이다. 이것이 일생을 거쳐 자기를 버리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그리스도를 따르는 길이다.


우리가 사회 속에서 모든 사람과 관계를 맺고 살며 인류와 연관되어 그 속에 살고 있는 까닭에, 그와 같은 자기 극복은 단지 개인 성화의 차원이 아니고, 필연적으로 사회를 ‘참으로 사람다운 사회’가 되도록 기여하는 자기극복이 되는 것이다. ‘사람다운 사회’란 사람들이 서로 하느님의 자녀로서 존중하고 위해주는 사회이다. 그 같은 사회를 만들기 위해 불완전하고 나약한 사람들은 서로 견디고 부축하고 용서하고 용서받을 필요가 있다. 포용과 관용의 정신으로 서로 잘못을 견뎌주고 용서해 주기 위해 감수하는 십자가가 필요하다. 대들고 싸우고 다투고 경계하고 감시하고 빼앗고 더 빼앗는 짓은 그리스도의 길이 아니다.


하느님의 것인 재산을 지나치게 소유하여 소비하고 있는 소수 특권층 사람들과 부유한 나라 부자들의 생활은 불의한 생활이다. 그들의 욕심과 이기심을 보호하고 더 채우기 위한 인권탄압과 무기개발과 판매와 전쟁도발 때문에, 인류 대부분이 헐벗고 굶주리고 수난하고 학살당한다. 이러한 상황에서 가난한 사람들은 어떻게 처신해야 할 것인가? 아무리 애걸복걸해도 굳어지고 얼음 같은 그들의 마음이 눈 하나 까딱하지 않을 때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그들의 마음을 돌이켜 구원하기 위해 무엇을 할 수 있는가? 무력으로 같이 대들고 싸워보았자 어림없다. 몽둥이질과 무력으로 때려잡으면 속수무책이다. 증오를 증오로 맞서고 칼을 칼로 맞서서는 문제가 풀릴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그들을 깨우치기 위해서는 가난한 사람들이 깨어나 뭉치는 윤리적인 힘을 기르는 길 밖에 없다. 자기네 수난은 그들의 불의 때문에 빚어진다는 사실을 똑똑히 깨닫고 고통을 견디되 그들을 돌아서게 하기 위해 싸우다가 견뎌야 한다.


빈곤과 비참과 멸시받음은 사람이 받아서는 안 될 악이다. 그 악을 깨부수고 그 악에서 벗어나기 위한 노력은 반드시 충돌과 박해를 불러온다. 소수의 불의한 사람들이 돌아서려면 하느님의 매질을 당해야 한다. 가난한 사람들이 그들을 꾸짖는 것은 그들이 미워서가 아니라, 사람다운 사람으로 바꾸어 자기들 속에 받아들이려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 투쟁하고 박해를 받고 순교까지 하는 것이다.


▲ ⓒ 최진



중 제22주일 독서・복음


제1독서(예레 20,7-9)

<주님의 말씀이 저에게 날마다 비웃음거리만 되었습니다>


주님, 당신께서 저를 꾀시어 저는 그 꾐에 넘어갔습니다. 당신께서 저를 압도하시고 저보다 우세하시니 제가 날마다 놀림감이 되어 모든 이에게 조롱만 받습니다. 말할 때마다 저는 소리를 지르며 “폭력과 억압뿐이다!” 하고 외칩니다. 주님의 말씀이 저에게 날마다 치욕과 비웃음거리만 되었습니다. ‘그분을 기억하지 않고 더 이상 그분의 이름으로 말하지 않으리라’ 작정하여도 뼛속에 가두어 둔 주님 말씀이 심장 속에서 불처럼 타오르니 제가 그것을 간직하기에 지쳐 더 이상 견뎌 내지 못하겠습니다. 


시편(62)

하느님, 저의 하느님,

제 영혼이 당신을 목말라하나이다


제2독서(로마 12,1-2)

<여러분의 몸을 산 제물로 바치십시오>


형제 여러분, 내가 하느님의 자비에 힘입어 여러분에게 권고합니다. 여러분의 몸을 하느님 마음에 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바치십시오. 이것이 바로 여러분이 드려야 하는 합당한 예배입니다. 여러분은 현세에 동화되지 말고 정신을 새롭게 하여 여러분 자신이 변화되게 하십시오. 그리하여 무엇이 하느님의 뜻인지, 무엇이 선하고 무엇이 하느님 마음에 들며 무엇이 완전한 것인지 분별할 수 있게 하십시오. 


복음(마태 16,21-27)

<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오려면, 자신을 버리고 나를 따라야 한다>


그때부터 예수님께서는 당신이 반드시 예루살렘에 가시어 원로들과 수석 사제들과 율법 학자들에게 많은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하셨다가 사흗날에 되살아나셔야 한다는 것을 제자들에게 밝히기 시작하셨다. 그러자 베드로가 예수님을 꼭 붙들고 반박하기 시작하였다. “맙소사, 주님! 그런 일은 주님께 결코 일어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돌아서서 베드로에게 말씀하셨다. “사탄아, 내게서 물러가라. 너는 나에게 걸림돌이다. 너는 하느님의 일은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만 생각하는구나!”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오려면, 자신을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 정녕 자기 목숨을 구하려는 사람은 목숨을 잃을 것이고, 나 때문에 자기 목숨을 잃는 사람은 목숨을 얻을 것이다. 사람이 온 세상을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슨 소용이 있겠느냐? 사람이 제 목숨을 무엇과 바꿀 수 있겠느냐? 사람의 아들이 아버지의 영광에 싸여 천사들과 함께 올 터인데, 그때에 각자에게 그 행실대로 갚을 것이다. 





[필진정보]
김수복 : 살레시오 수도회에서 10년 동안 수도생활을 하고, 그 동안 서울 가톨릭 신학대학 6년을 수료했다. 40년 동안 5개 언어에서 성서와 신학 관련 서적을 우리말로 옮기는 번역노동자였다. 현재 사랑하는 아내와 아들 둘, 손자 넷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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