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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수복) 연중 제20주일 독서·복음 묵상
  • 김수복
  • 등록 2017-08-18 16:46: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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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독서(이사 56,1.6-7) 해설

<이방인들도 나의 거룩한 산으로 인도하리라>


이 대목(1-8절)은 이사야서의 셋째 부분이 시작하는 대목이다. 이사야서의 셋째 부분의 내용에 통일성이 부족한 것을 보면, 이 부분은 어떤 한 사람의 저자에 의하여 쓰여진 것이 나리라, 제2이사야의 가르침과 영향을 받은 ‘예언자 학교’에 속한 여러 사람들에 의하여 여러 시(詩)들이 수집되고 편집된 것으로 판단된다.


따라서 그 분위기는 바빌로니아 귀양살이에서 돌아온 공동체의 분위기다. 그 공동체가 수행해야 할 임무 중의 하나는 제2이사야의 가르침, 특히 온 인류가 구원을 받아야 한다는 보편주의에 따라서 성전의 경신례와 봉사를 재정비하는 일이었다. 제2이사야에 의하면, 하느님의 정의(正義)와 구원이 다가올 때, 그 결과는 이스라엘의 회복과 재건에 그치지 않고 모든 백성이 빛으로 나아오게 되는 데 있었다(49,6).


즈카르야는 ‘주님과 하나가 된’ 많은 나라들, 곧 하느님의 백성과 결합된 많은 나라들을 보았다(2,11). 그러나 이 주장은 실천면에서 큰 문제를 일으키고, 모세의 율법과도 어긋나는 듯이 보였다.


하느님의 백성에 들어오려는 이방인들을 어떻게 대할 것인가? 예언자는 그들을 받아들여야 한다고 대답한다.


예수님께서 그 말씀의 온전한 뜻을 분명하게 밝히셨다. 하느님의 정의와 구원은 모든 백성을 위한 것이다. 종족과 집단 사이에 가로 놓인 울타리가 걷어 치워진 것이다.


시편(66) 해설

하느님, 민족들이 당신을 찬송하게 하소서


추수를 감사드리는 찬미가이다(참조. 탈출 23,16). 땅의 소출을 선물로 받은 모든 백성은 참된 하느님을 알아 모시라고 부르심을 받았다. 모든 백성이 하느님께서 이룩하신 놀라운 업적을 보고서 하느님을 찬양하라고 부르심을 받았다. 실상 이스라엘이 선택된 것도 모든 백성의 구원을 겨냥한 것이었다.


제2독서(로마 11,13-15.29-32) 해설

<하느님께서는 모든 사람에게 자비를 베푸셨습니다>


여기에서 바오로의 머리를 꽉 메우고 있는 문제는 이스라엘의 불신과 불순종이다. 바오로의 설명으로는, 이스라엘의 불순종이 전체적인 것이 아니라 어디까지나 부분적이며(11,1-10), 결정적인 것이 아니라 일시적이며(11-24절), 하느님의 자비는 유다인들을 포함한 모든 사람들에게 열려있다는 것이다(25-32절). 끝으로 바오로는 하느님의 자비로운 지혜를 찬미한다(33-36절).


세상을 구원하시려는 하느님의 계획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마지막으로 드러났다. 그 계획은 이방인들에게나 유다인들에게나 똑같이 자비를 베푸신다는 것이다. 하느님의 자비는 아무에게도 차별을 두시지 않는다는 것이다(참조. 8,19-21).


“모든 사람이 죄를 지어서 하느님의 영광을 잃었습니다”(로마 3,23) 라고 바오로는 단언한 바 있다. 따라서 유다인이든 이방인이든 하느님의 자비하심 앞에 결코 자기를 내세우거나 자랑할 수 없다.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너그러움과 자비로움을 나타내기 위하여 모든 사람의 불충실도 이용하신다. 당신이 과연 어떤 분인가를 모든 사람의 약함과 무능을 통하여 열어 보이신다. 자비로운 하느님, 용서하시는 하느님 앞에 자포자기하거나 실망해야 할 사람은 아무도 없다.


복음(마태 15,21-28) 해설

<아, 여인아! 네 믿음이 참으로 크구나>


마태오는 예수님께서 이방인과 접촉하시는 보기드믄 광경 하나를 이야기 한다.


예수님께서 이방인들의 지방인 띠로와 시돈으로 가신다. 그때 그 지방에 사는 가나안 여자 하나가 마귀 들린 자기 딸을 고쳐 주시라고 큰 소리로 간청한다. 그 여자는 예수님을 ‘다윗의 자손이시여!’ 라는 메시아 칭호로 부른다. 이방인의 입에서는 나오기 힘든 칭호다. 여기서 강조하는 점은 유다인들이 예수님을 메시아로 받아들이지 않는 반면, 이방인들이 예수님을 메시아로 알아 뵙는다는 사실이다.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평소 사람을 인자하게 대한 것처럼 동정심이 일어나 즉시 도와줄 것 같지만, 아무 대답도 하지 않으신다. 여자가 계속 귀찮게 굴자 제자들이 예수께 문의드린다. 예수님께서는 “나는 오직 이스라엘 집안의 길 잃은 양들에게 파견되었을 뿐이다”라고 말씀하신다.


그래도 그 여자는 끈질기게 예수께 간청하여 허락을 받아내고야 만다. 마태오는 장엄하게 그 여인의 믿음을 찬양하는 것으로 이야기를 끝맺는다.


이 이야기의 절정은 기적에 있는 것이 아니라, 가나안 여인의 신앙고백에 있다. 이 이야기는 틀림없이 교회에 이방인들을 받아들여야 할 것인가 말 것인가 하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끼워 넣었을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믿는 사람이라면 어느 누구도 물리치지 않으신다.


묵상


구원은 모든 사람을 위한 것


하느님 앞에서는 유다인, 그리스인, 선인, 악인이 있는 것이 아니라, 단지 당신이 구원하시려는 사람이 있고 인류가 있을 따름이다. 모든 사람과 온 인류를 구원하려는 ‘하느님의 자비’의 보편적 특성은 성경에 직접 표현되어 있지는 않다. 구약에서 이스라엘 백성은 자기들을 하느님께서 선택하신 백성으로 알고 있었기 때문에, 하느님 사랑의 보편성을 쉽사리 뚜렷하게 인정하기가 힘들었다. 


그러나 구약에서 특권적이고 제한적인 선민의식과 보편주의적 개방성 사이의 끊임없는 갈등과 대립은 신약의 선명하게 보편주의적인 경향에서 그 해결을 보게 된다. 비록 예수님께서 당신의 사명이 이스라엘 공동체에 한정된다고 말씀하고 계시지만, 당신의 제자들은 즉시 예수님의 메시지와 사명이 구약의 유다이즘의 한계에 갇힐 수 없음을 깨달았다. 


원시 그리스도인 공동체에서 몇몇 무리들이 복음이 모든 사람에게 열려 있음을 인정하지 않고, 이스라엘의 국수주의적이고 율법주의적인 한계 속으로 물러서려는 경향을 보이고 있었다. 사도행전과 바오로의 서간들에 나오는 이 두 경향 사이의 다툼은 마지막에 가서 하느님 나라의 시민이 되는 것은 문화·사회·종족의 차별이 없이 모든 사람에게 열려 있다는 결론으로 마무리되었다.


하느님의 나라와 복음의 보편성을 더 잘 이해하기 위해 두 가지의 설명을 덧붙일 수 있다. 


- 하느님의 자비는 전적으로 무상으로 거저 베푸시는 선물이며, 따라서 그 누구도 자기의 자격이나 힘이나 공로로 하느님의 자비를 받게 되었노라고 말할 수 없다. 구원하는 분은 하느님이시고, 하느님께서는 사랑하기 때문에 구원하며, 구원하면서 “너는 누구냐? 어디 출신이냐? 무엇을 했느냐?”라고 결코 묻지 않으신다. 오직 구원을 바라고 받아들이려는 겸허한 마음 자세를 갖추고 있으면 된다.


- 가나안 여인에 대한 예수님의 태도를 살펴보면, 겸허하고 신뢰에 찬 믿음이 얼마나 중요하며 본질적이며 기본적인가를 알 수 있다. 어떤 백성, 어떤 부족에 속하고 어떤 신조를 가지고 있느냐는 전혀 문제가 되고 있지 않다. 이런 의미로 가나안 여인은 우리에게 많은 것을 가르치고 있다.


그리스도인으로 자처하는 우리도 자칫하다가는 안이하고 피상적이며 지식의 수준에서 믿음을 지녔다고 착각하면서, 복음의 알맹이와 신선함에는 아주 동떨어져 있는 상태에 머물러 있게 된다.


관용의 정신


이제까지 우리는 그리스도의 메시지가 지닌 보편적 특성을 살펴보았다. 그러나 그 특성이 우리 개개인 자신과는 별로 관계가 없는 것으로 오해해서는 안 된다.


우리 시대의 사회적 진보와 진화는 국수주의를 점진적으로 극복해 나가야 할 단계에 와 있음이 분명하다. 정치·경제·사회 분야에서도 폐쇄성을 지양하고, 인류의 일체성(一體性)과 보편성을 실현해야 할 필요성을 절감하고 있다. 이 같은 모든 요청과 당위(當爲)를 ‘개방’이라는 개념으로 표현할 수 있겠다.


사람의 가치 또는 인격의 가치가 오늘날 계속해서 더욱 새롭게 돋보이고 강조되고 있음이 사실일진대, 우리는 그보다 훨씬 더 강력한 의미로 사람의 진정한 보편주의적 개방성이 그리스도의 복음의 핵심을 이루고 있음을 인정할 일이다. 다시 말하자면 그리스도의 복음은 그 어떠한 사람도 빼놓지 않고 모든 사람을 전면적으로 받아들이는 내적 태도를 요구하고 있다. 그리스도인라면 울타리와 장벽과 국경을 인정하지 않는다. 인종에 차별을 두지 않는다. 그는 다만 사람을 사람이기 때문에 존경하고 사랑할 뿐이다. 


따라서 그리스도인이 전해야 할 메시지는 모든 사람, 혈육으로 가깝거나 멀거나, 동족이거나 아니거나, 자기 나라 사람이거나 먼 나라 사람이거나, 일할 능력이 많거나 적거나 없거나, 가난하거나 병신이거나, 어떠한 신념을 지녔거나, 수탈과 탄압과 불의를 저지르고 있는 사람들까지도, 그가 하느님 자녀가 되라고 초대받은 사람인 까닭에 한없이 존경하고 받아들이고 위해 주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 같은 근본 원리는 교회의 공식 태도와 신자 각자의 처신에 분명히 드러나야만 한다. 



연중 제20주일 독서·복음


제1독서(이사 56,1.6-7)

<나의 집은 모든 민족들을 위한 기도의 집이라 불리리라>


주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신다. “너희는 공정을 지키고 정의를 실천하여라. 나의 구원이 가까이 왔고 나의 의로움이 곧 드러나리라. 주님을 섬기고 주님의 이름을 사랑하며 주님의 종이 되려고 주님을 따르는 이방인들, 안식일을 지켜 더럽히지 않고 나의 계약을 준수하는 모든 이들. 나는 그들을 나의 거룩한 산으로 인도하고 나에게 기도하는 집에서 그들을 기쁘게 하리라. 그들의 번제물과 희생 제물들은 나의 제단 위에서 기꺼이 받아들여지리니 나의 집은 모든 민족들을 위한 기도의 집이라 불리리라”


시편(66)

하느님, 민족들이 모두 당신을 찬송하게 하소서 


제2독서(로마 11,13-15.29-32)

<하느님의 은사와 선물은 철회될 수 없습니다>


형제 여러분, 이제 나는 다른 민족 출신인 여러분에게 말합니다. 나는 이민족들의 사도이기도 한 만큼 내 직분을 영광스럽게 생각합니다. 그것은 내가 내 살붙이들을 시기하게 만들어 그들 가운데에서 몇 사람만이라도 구원할 수 있을까 해서입니다. 그들이 배척을 받아 세상이 화해를 얻었다면, 그들이 받아들여질 때에는 어떻게 되겠습니까? 죽음에서 살아나는 것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하느님의 은사와 소명은 철회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도 전에는 하느님께 순종하지 않았지만, 이제는 그들의 불순종 때문에 자비를 입게 되었습니다. 마찬가지로 그들도 지금은 여러분에게 자비가 베풀어지도록 하느님께 순종하지 않지만, 이제 그들도 자비를 입게 될 것입니다. 사실 하느님께서 모든 사람을 불순종 안에 가두신 것은, 모든 사람에게 자비를 베푸시려는 것입니다. 


복음(마태 15,21-28)

<네 믿음이 참으로 크구나!>


예수님께서 그곳을 떠나 티로와 시돈 지방으로 물러가셨다. 그런데 그 고장에서 어떤 가나안 부인이 나와, “다윗의 자손이신 주님,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제 딸이 호되게 마귀가 들렸습니다” 하고 소리 질렀다. 예수님께서는 한마디도 대답하지 않으셨다. 제자들이 다가와 말하였다. “저 여자를 돌려보내십시오. 우리 뒤에서 소리 지르고 있습니다” 그제야 예수님께서 “나는 오직 이스라엘 집안의 길 잃은 양들에게 파견되었을 뿐이다” 하고 대답하셨다. 그러나 그 여자는 예수님께 와 엎드려 절하며, “주님, 저를 도와주십시오” 하고 청하였다. 예수님께서는 “자녀들의 빵을 집어 강아지들에게 던져 주는 것은 좋지 않다” 하고 말씀하셨다. 그러자 그 여자가 “주님, 그렇습니다. 그러나 강아지들도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는 먹습니다” 하고 말하였다. 그때에 예수님께서 그 여자에게 말씀하셨다. “아, 여인아! 네 믿음이 참으로 크구나. 네가 바라는 대로 될 것이다” 바로 그 시간에 그 여자의 딸이 나았다. 




[필진정보]
김수복 : 살레시오 수도회에서 10년 동안 수도생활을 하고, 그 동안 서울 가톨릭 신학대학 6년을 수료했다. 40년 동안 5개 언어에서 성서와 신학 관련 서적을 우리말로 옮기는 번역노동자였다. 현재 사랑하는 아내와 아들 둘, 손자 넷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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