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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수복) 연중 제15주일 독서·복음 묵상
  • 김수복
  • 등록 2017-07-14 16:42:57
  • 수정 2017-07-14 17:00: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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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독서(이사 55,10-11) 해설

<내 입에서 나가는 말은 반드시 내가 뜻하는 바를 이룬다>


북부 왕국 이스라엘이 멸망한 다음, 남쪽 왕국 유다도 바빌로니아 세력에 의하여 파괴당했다. 성전과 율법과 예루살렘 도시 전체가 파괴당했다. 이렇게 하여 하느님의 백성은 낯선 땅으로 강제로 이주당해야 했다.


그런 엄청난 불운과 재앙 앞에서, 하느님 백성의 믿음은 기가 꺾였다.


많은 히브리인들이 정복자들의 우상숭배를 받아들였다. 다만 보잘 것 없는 적은 ‘남은 무리’가 자기네 신앙을 충실히 보존했다. 시련을 거친 그들의 신앙은 용광로를 거쳐 나온 황금마냥 예언자들의 말씀에 힘입어 생기를 되찾았다. 바야흐로 새로운 사태가 빚어지고 있었다. 동쪽에서 새로운 세력이 등장하여 성장하고 있었다. 그 세력은 키루스의 세력이었다. 바빌로니아는 그 거만한 자세 때문에 침략을 당할 것이다. 그의 신 벨과 그 화려한 경신례와 축제(이사 47,5; 46,1-2)도 바빌로니아를 구해줄 힘이 없을 것이다.


이 역사의 변천 과정을 지켜보고서, 이사야 예언자는 하느님의 계획이 역사 사건들을 사람으로서는 감히 넘볼 수 없는 모양으로 지배하고 이끌고 계신다는 사실을 알아차린다.


오로지 하느님의 약속과 행동과 말씀만이 흔들림이 없으며 영구히 지속한다. 사실 우주는 창조하신 하느님의 말씀이 이스라엘의 거룩한 역사 가운데 일어나는 사건들을 이끌어간다. 위대한 능력과 미리 내다볼 수 없는 지혜를 지진 하느님께서 당신의 구원 계획을 수립하고 단호히 밀고 나가신다. 천지 창조로부터 이집트 탈출에 이르기까지, 그리고 아브라함을 부르신 때로부터 군주 제도의 출현에 이르기까지, 하느님 말씀의 권능은 분명히 드러났으며 또한 미래에 대한 보증이 되었다.


이제 하느님께서는 그와 똑같은 권능으로 더 위대한 사업을 이루시려 하신다. 이미 패망하고 굴욕을 겪은 당신 백성 가운데서 ‘남은 사람들’에게 해방을 안겨주는 사업을 이루려 하신다.


비가 하늘에서 내려 땅을 적시고 결실을 맺게 하듯이, 하느님께서는 그 ‘남은 무리’를 해방하여 새로운 백성으로 만드실 것이다.


마침내 하느님의 말씀인 그리스도께서는 기필코 하느님의 뜻을 인류 안에 이룩하여 인류가 한 마음 한 뜻으로 일치하여 아버지 하느님께 찬미와 감사를 드리면서 친교의 기쁨과 행복을 누리게 하실 것이다.


시편 (64) 해설

<하느님, 시온에서 당신을 찬양함이 마땅합니다>


이 시편에서는 하느님의 용서와 땅의 결실을 노래한다. 하느님의 백성은 하느님의 용서를 받아야만 비로소 하느님의 여러 가지 고귀한 은총을 받을 수 있다.


인류가 아버지의 뜻이 땅에서도 이루어지기를 기원하면서 나눔과 화합과 일치를 위해 노력할 때, 하느님께서 일용할 양식을 넉넉히 주실 것이다.


제2독서(로마 8,18-23) 해설

<모든 피조물은 하느님의 자녀들이 나타나기를 간절히 기다리고 있다>


로마 8에서 바오로는 그리스도인의 생활이 어떠해야 하는지를 말하고 있다. 바오로에게 신자들이 겪는 수난과 죽음은 자기들이 받을 유산을 완전히 결정적으로 누리게 될 날에 대한 희망을 가꿔주고 길러주는데 꼭 필요한 요소들이다.


또한 다른 모든 피조물도 사람들이 모두 구원받음에 따라 함께 구원받을 것이다. 히브리인들에게 사람과 우주의 관계는 우호적이며 평화로운 관계이다. 사람과 더불어 창조된 세상은 사람의 운명을 어떤 모양으로든 함께 나누어 받고 있다. 사람이 죄를 범하면 우주도 망가지고, 사람이 평화를 이룩하면 우주도 복을 받으며,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시는 날 사람과 더불어 결정적으로 구원받을 것이다.


사람과 모든 피조물은 장차 나타날 영광을 생각하면서 지금 겪고 있는 고통을 달게 받아야 한다.


고통은 사람이 하느님의 뜻을 따르는 것이 자기에게 행복이 된다는 것을 망각하고 자기 자신만을 위해 사는 것이 최선이라는 그릇된 판단에 따라 사는 범죄의 결과이다. 그 같은 사람의 범죄는 자기 자신에게만 해악을 주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에게도 직접 악한 영향과 피해를 주고, 다른 사람들이 받는 고통의 직접 원인이 된다. 하느님의 뜻에 따라 하느님의 것인 능력과 재화를 모든 사람들의 공동선을 위해 사용하지 않고 자기 자신의 낭비와 출세를 위해서만 사용하는 불의한 범죄의 결과로 무수한 사람들이 굶주림과 병고에 시달리게 된다.


그러나 우리는 범죄의 결과로 받는 고통을 참고 견뎌야 한다. 범죄자를 무작정 미워하고 대적하기만 하면 회개와 화해와 일치는 불가능해진다. 누구든지 죄스런 이기적인 마음과 생활에서 완전히 벗어나 있지 못하기 때문이다. 크든 작든 이기심에 젖어 사는 우리는 서로 고통을 견디고 용서하고 회개해야 함께 구원의 길로 나아갈 수 있다. 이 말은 누구나 죄를 짓지 않기 위해 끊임없이 경계하고 노력해야 한다는 뜻으로 통한다. 그리하여 서로 용서하면서 ‘아파해 주는 사랑’이 일치와 구원의 유일한 길이다. 그러기 위해 받는 고통은 장차 누리게 될 영광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라고 생각해야 한다.



복음(마태 13,1-23 또는 마태 13,1-9) 해설

<좋은 땅에 떨어진 씨앗은 많은 열매를 맺는다>


마태오 복음서 저자는 이 대목으로 비유 이야기를 시작한다. 예수님께서는 이미 당신의 사도직을 수행하고 계셨다. 예수님의 설교는 갈릴래아의 주민들에게 큰 호응을 받았다. 그러나 히브리 종교의 공식 대표자들은 예수께 큰 적개심을 드러냈다. 그분이 행하신 행적(12,9-14; 12,1-8 등)은 한 편에서는 기쁨과 환호를 불러일으켰지만, 다른 한 편에서는 미움과 분노를 샀다. 여기서 예수님께서는 씨 뿌리는 사람의 비유를 말씀하신다.


농부가 씨앗을 뿌리고 수확을 기다린다. 하느님의 나라가 처음에는 보잘 것 없게 보이고 미약하게 보이며, 사방에서 반대와 방해에 부딪치지만, 그 내부에서 용솟음치는 생명력은 승리를 보장하고 있다. 그러므로 실망하거나 용기를 잃어서는 아니 되고, 하느님께서 틀림없이 온갖 상상을 초월한 풍성한 ‘수확’을 거두실 것을 믿고 모든 난관을 참고 극복해야 한다.


그리스도께서 하느님의 기쁜 소식을 선포하시고, 초대 교회가 그 기쁜 소식을 선포했을 때, 그 말씀을 듣는 청중은 마음 자세에 따라 받아들이기도 하고 거절하기도 했다. 받아들이거나 거절하는 것은 사람의 자유이다. 예수님께서는 사람의 자유를 존중하셨다.


좋은 땅과 비옥한 땅이란, 받아들인 기쁜 소식을 온갖 시련을 이겨내고 끝까지 생활로 실천하는 사람을 가리킨다.



묵상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이 품은 희망


특별히 예외적인 경우나 순간을 빼놓고는, 우리의 생애는 단조롭게 되풀이되는 일상사로 이어진다. 그 평범한 일상생활 중에 자칫하면 사람의 노력과 행위가 지닌 심오한 가치와 역할을 잊을 우려가 있다.


다만 긴급한 상황에 처하거나, 의식적인 노력의 과정을 통해서 어떤 깨달음을 터득하기 전에는, 너무도 습관적인 일상사 안에 숨겨진 중요한 의미를 깨닫기가 힘들다.


예수님께서도 하느님 나라의 신비를 열어 보이기 위하여, 평범한 일상생활에서 구체적인 소재들을 끄집어내셨다. 하느님 나라는 평범한 일상생활을 진지하게 고민하면서 살아가는 사람들 차지다.


꿈과 현실


농토에 씨앗을 뿌리는 농부의 태도는 미래를 희망하는 태도이다. 그 태도에는 걱정과 신뢰와 열망이 뒤섞여 있다. 그런 태도는 지능과 자유의지를 가진 사람의 자연스런 태도이다.


선택의 자유가 있는 사람의 모든 계획은 자기가 속해 있는 사회의 다양한 영향을 받기 십상이다. 그러나 단순하게 적응하는 본능만으로는 사람다운 사람이 되지 못한다. 현실을 이겨내고 때로는 깰 필요가 있다. 더 나은 미래는 용기 있는 결단으로 열린다. 자기의 현실에 만족하여 안주하거나, 비겁하게 낙담해서는 미래가 열리지 않는다. 그런 태도는 희망으로 사는 신자의 태도가 아니다.


그리스도인의 희망


자기의 현실에 갇혀 있는 것은 그리스도인의 자세가 아니다. 끊임없이 모든 사람·인류 전체의 현실을 자기의 현실로 껴안고, 그 현실 안에서 자기 입장을 정하고 처신할 줄 알아야 한다. 그런 사람에게 미래는 무한한 성취의 가능성으로 다가선다. 그는 일상사라는 타성에 젖어 지루하고 재미없는 나날을 보내지 않고, 그 일상사에 아주 새로운 의미를 주고, 그 일상사의 의미를 한없이 깊게 하고 넓게 할 수 있다. 지극히 보람 있는 의무감에 사로잡혀 일상생활을 영위하고, 더 나아가 새로운 가능성을 차례로 발견할 수 있다. 그것은 성령께서 펼치시는 활동이다.


성령의 활동을 힘입은 그의 평범하고 보잘 것 없어 보이는 생활은 하느님 나라와 연관된다. 하느님의 뜻에 순응하려는 그는 하느님 사업의 도구가 된다. 이때 그에게는 하느님 사업 외에 더 큰 가치가 없다.


하느님 사업은 인류의 화합이요, 인류의 화합을 위하여 마음이 열리는 폭은 무한하다. 미소하다고 취급받는 사람이라도 그 마음이 열려 있는 그만큼, 비어 있는 그만큼 하느님으로 채워진다. 그런 사람은 겉보기와 달리 하늘나라에서 위대한 사람이다.



그러므로 외형적이고 수량적인 성취가 아니라, 일상사에 시달리는 사람들의 마음을 성령께서 어느 정도로 차지하고 계시느냐에 따라 하느님 사업의 성취가 달려있다. 하느님 홀로 거룩하시고 위대하시기 때문이다.


모든 사람은 바치고 섬기기 위해 수난하려는 마음의 능력만큼 그리스도와 닮을 수 있는 가능성을 얻는다. 하느님께서는 누구에게나 그 가능성을 제한하지 않으신다. 그리고 하느님께서는 사람의 능력에 의지하는 분은 아니시다. 당신의 능력만이 참 능력이다. 하느님의 능력이 발휘되는 곳은 하느님의 마음에 드는 겸허한 사람들에게서다.


따라서 누구에게나 무한한 수난의 가능성으로 희망의 길이 뻗어 있다.




연중 제15주일


제1독서(이사 55, 10-11)

<비는 땅에서 식물이 싹트게 한다>


비와 눈은 하늘에서 내려와 그리로 돌아가지 않고 오히려 땅을 적시어 기름지게 하고 싹이 돋아나게 하여 씨 뿌리는 사람에게 씨앗을 주고 먹는 이에게 양식을 준다. 이처럼 내 입에서 나가는 나의 말도 나에게 헛되이 돌아오지 않고 반드시 내가 뜻하는 바를 이루며 내가 내린 사명을 완수하고야 만다.


시편(64)

좋은 땅에 떨어진 씨는 열매를 맺었나이다 


제2독서(로마 8, 18-23)

<우리가 하느님의 자녀가 되기를 모든 피조물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형제 여러분, 우리는 육에 따라 살도록 육에 빚을 진 사람이 아닙니다. 여러분이 육에 따라 살면 죽을 것입니다. 그러나 성령의 힘으로 몸의 행실을 죽이면 살 것입니다. 하느님의 영의 인도를 받는 이들은 모두 하느님의 자녀입니다. 여러분은 사람을 다시 두려움에 빠뜨리는 종살이의 영을 받은 것이 아니라, 여러분을 자녀로 삼도록 해 주시는 영을 받았습니다. 이 성령의 힘으로 우리가 “아빠! 아버지!” 하고 외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성령께서 몸소, 우리가 하느님의 자녀임을 우리의 영에게 증언해 주십니다. 자녀이면 상속자이기도 합니다. 우리는 하느님의 상속자입니다. 그리스도와 더불어 공동 상속자인 것입니다. 다만 그리스도와 함께 영광을 누리려면 그분과 함께 고난을 받아야 합니다. 장차 우리에게 계시될 영광에 견주면, 지금 이 시대에 우리가 겪는 고난은 아무것도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사실 피조물은 하느님의 자녀들이 나타나기를 간절히 기다리고 있습니다. 피조물이 허무의 지배 아래 든 것은 자의가 아니라 그렇게 하신 분의 뜻이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희망을 간직하고 있습니다. 피조물도 멸망의 종살이에서 해방되어, 하느님의 자녀들이 누리는 영광의 자유를 얻을 것입니다. 우리는 모든 피조물이 지금까지 다 함께 탄식하며 진통을 겪고 있음을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피조물만이 아니라 성령을 첫 선물로 받은 우리 자신도 하느님의 자녀가 되기를, 우리의 몸이 속량되기를 기다리며 속으로 탄식하고 있습니다.


복음(마태 13, 1-23 또는 마태 13, 1-9)

<씨 뿌리는 사람이 씨 뿌리러 나갔다>


그날 예수님께서는 집에서 나와 호숫가에 앉으셨다. 그러자 많은 군중이 모여들어, 예수님께서는 배에 올라앉으시고 군중은 물가에 그대로 서 있었다.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많은 것을 비유로 말씀해 주셨다. “자, 씨 뿌리는 사람이 씨를 뿌리러 나갔다. 그가 씨를 뿌리는데 어떤 것들은 길에 떨어져 새들이 와서 먹어 버렸다. 어떤 것들은 흙이 많지 않은 돌밭에 떨어졌다. 흙이 깊지 않아 싹은 곧 돋아났지만, 해가 솟아오르자 타고 말았다. 뿌리가 없어서 말라 버린 것이다. 또 어떤 것들은 가시덤불 속에 떨어졌는데, 가시덤불이 자라면서 숨을 막아 버렸다. 그러나 어떤 것들은 좋은 땅에 떨어져 열매를 맺었는데, 어떤 것은 백 배, 어떤 것은 예순 배, 어떤 것은 서른 배가 되었다. 귀 있는 사람은 들어라” 


제자들이 예수님께 다가와, “왜 저 사람들에게 비유로 말씀하십니까?” 하고 물었다.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대답하셨다. “너희에게는 하늘나라의 신비를 아는 것이 허락되었지만, 저 사람들에게는 허락되지 않았다. 사실 가진 자는 더 받아 넉넉해지고, 가진 것이 없는 자는 가진 것마저 빼앗길 것이다. 내가 저 사람들에게 비유로 말하는 이유는 저들이 보아도 보지 못하고 들어도 듣지 못하고 깨닫지 못하기 때문이다. 이렇게 하여 이사야의 예언이 저 사람들에게 이루어지는 것이다. ‘너희는 듣고 또 들어도 깨닫지 못하고 보고 또 보아도 알아보지 못하리라. 저 백성이 마음은 무디고 귀로는 제대로 듣지 못하며 눈은 감았기 때문이다. 이는 그들이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마음으로 깨닫고서는 돌아와 내가 그들을 고쳐 주는 일이 없게 하려는 것이다’ 그러나 너희의 눈은 볼 수 있으니 행복하고, 너희의 귀는 들을 수 있으니 행복하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많은 예언자와 의인이 너희가 보는 것을 보고자 갈망하였지만 보지 못하였고, 너희가 듣는 것을 듣고자 갈망하였지만 듣지 못하였다” “그러니 너희는 씨 뿌리는 사람의 비유를 새겨들어라. 누구든지 하늘나라에 관한 말을 듣고 깨닫지 못하면, 악한 자가 와서 그 마음에 뿌려진 것을 빼앗아 간다. 길에 뿌려진 씨는 바로 그러한 사람이다. 돌밭에 뿌려진 씨는 이러한 사람이다. 그는 말씀을 들으면 곧 기쁘게 받는다. 그러나 그 사람 안에 뿌리가 없어서 오래가지 못한다. 그래서 말씀 때문에 환난이나 박해가 일어나면 그는 곧 걸려 넘어지고 만다. 가시덤불 속에 뿌려진 씨는 이러한 사람이다. 그는 말씀을 듣기는 하지만, 세상 걱정과 재물의 유혹이 그 말씀의 숨을 막아 버려 열매를 맺지 못한다. 좋은 땅에 뿌려진 씨는 이러한 사람이다. 그는 말씀을 듣고 깨닫는다. 그런 사람은 열매를 맺는데, 어떤 사람은 백 배, 어떤 사람은 예순 배, 어떤 사람은 서른 배를 낸다” 




[필진정보]
김수복 : 살레시오 수도회에서 10년 동안 수도생활을 하고, 그 동안 서울 가톨릭 신학대학 6년을 수료했다. 40년 동안 5개 언어에서 성서와 신학 관련 서적을 우리말로 옮기는 번역노동자였다. 현재 사랑하는 아내와 아들 둘, 손자 넷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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