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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 속 종교 1 (전영의)
  • 전영의
  • 등록 2015-05-27 11:04:30
  • 수정 2015-06-26 11:44: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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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닭장 속의 여우인가, 닭장 속의 닭인가

: 닭장 속의 여우를 통해 알아본 우리들의 군상-



이 소설(닭장 속의 여우)은 정치적 우화이다. 작가인 에브라임 키숀은 헝가리 부다페스트 은행 간부였던 아버지와 비서였던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다. 유대인이었던 그는 2차 세계대전 나치의 유대인 박해정책으로 강제수용소에서 고통스러운 시간을 보냈다.


1949년 금속공으로서 이스라엘에서 일을 하다가 석간신문 「마아리브」에 칼럼을 연재하면서 풍자작가로 이름을 알리기 시작했다. 그의 글은 소시민들의 일상, 관료주의에 대한 조롱, 정치인에 대한 풍자와 비판 등이 주를 이룬다.


▲ 에프라임 키숀


이 소설을 번역한 정범구 박사는 독일에서 정치학을 공부한 학자이자 시사평론가, 방송언론인이면서 현실 정치에 몸을 담았던 전 2선 국회의원이다. 현재는 정치일선에 물러나 서울과 무주를 오가며 생활하고 있지만 그가 선택한 이 책은 그의 마음을 읽어내기에 충분하다.


남과 북으로 나누어진 현 시대에 지역과 계층, 세대 간의 갈등과 반목이 계속되는 상황에서 우리는 국가운영을 담당하는 자들의 무능과 부패, 부도덕한 면모에 실망하였다. 특히 1년 전 세월호 사건이 명명백백하게 밝혀지지 않은 상황에서 정부의 대응은 유가족들과 시민들이 슬픔을 넘어 분노를 갖도록 만들었다.


추모하겠다는 유가족과 시민들에게 캡싸이신이 섞은 물대포를 뿌리고 여섯 겹의 차벽을 만들어 이들을 고립시키고자 하는 정부의 행태는 과연 우리를 국민으로 생각하는지, 혹여 자신들과는 다른 불가촉천민으로 생각하는 것은 아닌지 우려가 될 정도이다.


소설은 ‘둘니커’라는 정치인이 조용한 마을 킴멜크벨에 오면서 시작한다. 선하고 욕심이 없는 마을 주민들은 사적 소유가 없는 공동 경제생활을 한다. 외부세계와의 왕래가 없어 문명의 혜택을 거의 받지 못한 이곳은 산악지역이기에 물도 부족하고 전기도 들어오지 않는다.


마을의 대표나 지도자가 없지만 이들은 함께 모여 식사를 하고 이야기도 나누며 행복한 삶을 유지한다. 사람들이 알아보지 못할 것 같은 조용한 산골을 일부러 택해 들어온 둘니커는 사람들이 자신을 몰라보자 오히려 불쾌하게 생각하고 이 마을을 정치적으로 바꾸려고 맘을 먹는다.


이발사를 ‘사실상’ 읍장으로 내세우고 그를 주축으로 하는 여당을 만든다. 그는 구두장이를 야당의 수장으로 만들어 그와 반대편에서 대립각을 세우도록 만든다.


마차를 이발사에게 무료로 대여하여 읍장내외가 마차를 타고 마을을 돌아다니도록 만든다. 마차 위에 앉은 이발사는 사람들을 내려다보기 시작하고, 밭에서 쟁기질 하던 사람들은 그들을 올려다보기 시작하면서 이들의 수평적 관계는 상하 관계로 변질되기 시작한다.


이스라엘에서 도축은 중요한 종교적 의미를 갖는다. 율법에 맞게 도축해야만 그 고기를 사람들이 식용할 수 있다. 이런 이유로 도축 시 랍비가 참관하지만 랍비가 없을 경우는 백정이 양심적으로 율법에 맞게 도축한다.


둘니커는 이 마을에 랍비가 없기 때문에 백정이 사실상 ‘랍비’라고 말하며 그에게 랍비 대우를 하기 시작한다. 그는 점차 자신이 ‘사실상’ 랍비가 아닌 진짜 랍비로 착각을 하고 물이 나오지 않자 기우제를 연다.


그렇지 않아도 물이 거의 부족한 상황에서 그는 기우제를 열기 위해 마을의 모든 물을 모아 끓이고 그 물에 식기를 담그며 기도를 한다. 이러한 그의 모습이나 이를 믿고 따라서 기도문을 중얼거리는 사람들의 모습은 한 편의 코메디이다.


이와 같이 우스꽝스러운 광경은 지면 곳곳에 연출된다. 둘니커는 실질적 통치자로서 마을 사람들이 갈등을 반목하도록 만든다. 그는 마을의 양을 치는 목동을 경찰대장으로 만들고 평의회를 만들지만 세금을 부과할 때에는 특정 지위를 갖지 않은 12명에게만 부과한다.


사적 재산이 없는 이들에게는 사실 세금을 물릴 기준이 없었다. 그래서 납세자의 기준을 ‘문 세 짝 짜리’ 옷장을 가진 이들로 정하고, 이들에게만 세금을 부여하기로 한다. 둘니커가 부여한 권력을 가진 자들이 전부 제외되고 남은 12명의 이들은 사실 ‘문 세 짝 짜리’ 옷장을 가지고 있지도 않았다. 이들에게 강제적으로 세금을 걷으려다보니 평의회가 만든 세금 통보문도 아주 강제적이다.



귀하의 재정 상태를 검토한 결과 귀하의 소득으로 ‘문 세 짝 짜리’ 옷장을 구입하는 것이 가능하다고 결정되었다. 그러나 이 옷장은 사치물품으로 분류되었으므로 사치세와 별도로 징수 수수료를 부과한다. 이를 거부할 시 언급한 옷장을 차압할 것을 알린다.

– 살만 하시도프 ‘사실상’ 읍장



이 통보문은 전 정권 때부터 시작한 부자감세 정책과 담뱃값, 자동차세, 지방세 인상과 같은 서민증세 정책을 떠올리게 한다. 연봉 3800만원인 미혼 직장인이 세금을 380만원을 내는 게 현 사회의 현실이다.


미혼이어서 부양가족도 없고 자식도 없으니 소득공제를 받을 수가 없다고 한다. 전직 대통령의 건강보험이 2만원인데 학교에 재직하는 필자의 건강보험은 15만원을 훌쩍 넘는다. 아마도 대통령보다 필자가 더 부유한 듯싶다. 냉소적 웃음만 나올 뿐이다.


소설 속 인물들은 점차 권력의 맛을 알게 되고 권력을 가지고 있으면 무료 여행, 공금횡령, 친인척 비리 등이 가능하다는 것을 알게 된다. ‘사실상’ 읍장인 이발사는 고무도장을 외부에서 사기위해 처음으로 출장을 가게 된다. 공무 임에도 마을을 떠날 때 몰래 아내를 마차 뒤에 숨겨 여행을 한다.


고무도장을 살 돈으로 그림과 비싼 도자기를 사고 자신의 동생, 매제 등을 공직에 앉히기 위해 경비자리를 새로 만들어 그들에게 과한 급여를 제공한다. 평의원들은 둘니커가 주막주인의 아내와 내연의 관계인 것도 알면서 모른 척 하고 오히려 그의 환심을 얻기 위해 둘의 은밀한 만남을 주선하기도 한다.


소설이 쓰인 시기는 1980년대이고 소설의 시대배경은 1950-1960년대이지만 글을 읽는 내내 필자는 현재 우리 사회와 소설의 시공간이 오버랩 되었다. 권력을 새로 갖거나 유지하기 위해 마을 사람들은 농사일은 내버려 두고, 모여 앉아 정치와 선거 이야기만 한다.


이제 이발사파(읍장, 여당)와 구두장이파(야당)는 이루기 힘든 과한 공약을 내걸어 사람들의 환심을 얻고 서로 패싸움을 한다. 권력을 얻는 자들은 항상 법의 그물망에서 벗어난다. 이들은 공직에 있으며 부와 권력을 얻었지만 세금은 내지 않는다.


항상 세금을 내는 자들은 12명의 ‘문 세 쪽 짜리’ 파들이다. 이들은 이제 마을에서 불가촉천민이 되어 사람들의 무시를 당하고 마을의 경계 내에 들어올 수 없는 오클로스 즉 호모 사케르가 된 것이다.


사람들은 이들과 한 공간에 있는 것을 거부하지만 마을에 회관을 세우거나 무엇인가 돈이 필요할 때는 마을 평의회 회의를 통해 이들에게 세금을 부여한다. 과한 세금납부의무를 견디다 못한 ‘문 세 쪽 짜리’파 중 한명은 자신의 집을 처분하고 아내와 함께 산골 동굴에 잠적하게 된다. 재벌들에게는 이런 저런 이유로 세금을 면제하면서, 국민들에게는 세금을 인상하는 현 상황을 풍자하는 듯한 대목이다.


오늘자 신문에 또 부고가 실렸다. 세 자매가 생활고를 이기지 못해 자살했다는 뉴스가 내내 필자의 마음을 아프게 했다. 불과 얼마 전 세 모녀의 자살사건, 끊이지 않고 생활고에 자살하는 이들의 뉴스가 연이어 들려온 지 얼 마 안 되어 또 듣게 된 소식이다.


그런데 이 소식 바로 옆에는 한국전력 부지를 작년에 매입한 현대 정몽구 회장이 삼성 이부진 회장과 손을 잡고 세계 최대의 면세점을 아이파크 몰에 세운다고 한다.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세워지는 타워들이나 공항 면세점에 모인 사람들을 보면 과연 불경기가 맞나 싶지만, 조금만 눈을 돌리면 자본에 의해 휘둘리고 압박받는 사람들의 고통이 눈에 들어온다.


먹고사는 문제가 해결되지 않다 보니 선거철에 돈 20만원을 준다고 하면 바로 그쪽에 투표하는 노인들을 누가 탓할 수 있으랴 싶다. 진실을 가리고 사람들을 세뇌시키는 잘못된 언론들도 문제이고 현 정치사회의 문제에 무지하거나 이를 나와 상관없는 일인 양 외면하는 이들도 문제이지만, 푼돈을 미끼로 표를 얻어 권력을 계속 움켜쥐려하는 자들이 더 문제일 것이다.


이런 상황 안에서 둘니커의 변화는 주목할 만하다. 그동안 둘니커는 자신을 몰라보는 산골마을 사람들에게 직위를 붙여줌으로써 정치적 욕망을 불러일으키고 이들을 자신의 뜻대로 움직였다. 그러나 커질 대로 커져버린 마을주민들의 욕망은 이제 둘니커도 주체하기 힘들 지경이었다.


이제는 날 때부터 읍장이 되기 위해 태어난 사람처럼 행동하는 이발사와 그의 부인, 선거에 당선되기 위해 구두를 무료로 만들어주는 구두장이, 학교 수업시간에 자신들에게 유리한 정치적 수업만을 하여 아이들이 자연스레 구두장이를 지지하도록 세뇌시키는 백정 야곱(그는 백정이자 ‘사실상’ 랍비이기에 이제는 ‘사실상’ 선생이 되어버렸다.) 등 사람들의 가치관은 권력, 정치, 물질에만 치중되어 있다.


킴멜크벨의 교육제도는 변했고 아이들의 가치관마저 변했다. 이제 아이들의 꿈은 ‘행복한 킴멜크벨 마을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니라 ‘경찰대장이나 읍장이 되는 것’이다. 기념파티는 선거운동으로 변하고 이발사파와 구두장이파 사이에는 네거티브 선거전이 이루어진다.


과한 선거공약과 상대후보와 가족에 대한 인신공격, 상대후보공약에 대한 비방 등이 이루어진다. 둘니커는 “더 이상 이런 난장판은 안 된다”고 말하며 흥분한 마을 주민들을 원래대로 되돌려놓고 싶어 하지만 이제 주민들은 그를 조롱하고 비웃는다.


발전기를 들여와 마이크로 연설을 하는 이들은 주민들이 소음으로 고통 받는 다는 것을 생각하지 않는다. 마이크 볼륨을 최대치로 올려놓아 산골은 쩌렁쩌렁 울리고 자신들의 고막마저 터져버렸지만 이들은 개의치 않는다.


치열한 선거전을 치르던 이들은 이제 모래 포대를 쌓아놓고 총을 쏘며 서로를 죽인다. 며칠 전부터 먹구름이 밀려오더니 폐허가 된 마을에 폭풍우가 내리고 비는 거대한 급류를 만든다. 그동안 감금되어 있던 둘니커의 방에 물이 차오르자 그제야 이발사가 문을 열어주고 그가 방에서 나오는 순간 이발사의 집은 무너져버린다.


물은 마을의 모든 추악한 것들을 휩쓸고 내려가 버린다. 전기가 안 들어오던 마을에 전신주가 배달되지만 모든 것이 휩쓸려 내려가는 상황에서 물에 둥둥 떠다니는 전신주는 이제 필요가 없었다. 둘니커와 그의 비서 체프는 ‘문 세 짝 짜리’ 옷장을 뗏목 삼아 겨우 그 곳에서 벗어나 텔아비브 마을로 향한다.


실제 닭들의 아이큐는 모르겠지만 서구 유럽에서 닭은 멍청한 사람들을 비유할 때 쓰는 말이다. 닭장 안의 닭처럼 단순하게 살아가는 킴멜크벨 사람들 사이에 여우인 둘니커가 들어오면서 닭장은 변하기 시작한다. 계층이 생기고 권력과 탐욕이 자리하게 된다.


시골의 작은 마을 킴멜크벨은 우리 사회의 민낯을 여과 없이 보여주는 창이다. 닭장 속의 닭들이 변하면서 상대적으로 여우인 둘니커의 정신적 성장이 눈에 띤다. 닭장 안에서 군림하고 싶었으나 닭장에 갇혀 이제 나오지 못하는 여우는 어리석지만 동시에 현명해진다.


자신이 그동안 해왔던 정치의 결말이 킴멜크벨에서 잘못되었음을 확인 한 것이다. 농사꾼들의 조롱과 비웃음에 자신이 완전히 바보가 되었다고 말하면서 자신의 어리석음을 깨닫고 스스로를 조롱하는 순간 역설적으로 그는 진짜 현명한 여우가 된 것이다.


필자는 소설을 읽는 내내 ‘2005년에 작고한 이스라엘 작가가 꼭 현대 한국사회를 사는 것처럼 어찌 이런 풍자 소설들을 썼을까’라는 놀라움을 떨칠 수 없었다. 1980년대에 쓴 이 소설은 지금 썼다고 해도 무방할 정도로 현대적 감각을 지니고 현 정치사회의 부정부패와 비리를 조목조목 짚어 낸다.


마을의 이발사, 구두장이, 백정, 목동과 같은 이들은 본시 평범한 이들이었다. 그런데 이들이 직위를 갖게 된 순간부터 자신들을 타인들과는 다른, 훨씬 높은 사람이라고 생각을 하고 어떤 권리를 누리고자 한다.


현대의 정치인들, 성직자들도 마찬가지이다. 이들은 본래 우리와 같은 동등한 사람들이다. 정치인들은 국민들을 위해 일하는 종이며, 성직자 역시 신의 말씀을 전달하고 몸소 실천하는 종이다. 그런데 문제는 자신들이 종이 아닌 주인이라 생각할 때 나타난다.


선거에서 표를 얻을 때, 세금을 걷을 때만 시민들을 필요로 하는 이들은 여전히 시민들을 불가촉천민이라 생각하는 잠재된 의식을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닌지 싶다. 세월호 유가족들이 그렇게 만나서 이야기 하고 싶어하는데도 외면한 이들의 태도는 그리 읽혀질 수밖에 없다.


국민이 존재하지 않으면 국가도, 정치인도 존재할 수 없다. 마찬가지로 신자가 존재하지 않으면 종교도, 성직자도 역시 존재할 수 없다. ‘신자가 존재하지 않는데 성직자가 존재할 수 있을까? 현실 정치를 외면하고 사회문제를 외면하는 신부, 승려, 목사들이 진정한 성직자라 할 수 있을까? 로마가 외면했던 천민들, 민중들을 모아 빵과 물고기를 나누어 주던 예수가 지금 존재한다면 이들은 예수를 받들었을까? 군중들을 설교하고 무지한 민중들을 일깨우던 예수가 이들에게는 상당히 머리 아픈 존재는 아니었을까?’ 라는 생각이 드는 것은 비단 필자뿐만이 아닐 것이다.


정치와 종교가 그들만의 리그가 되어버린 현 시대에 우리는 닭장 속의 닭이 되어서는 안 될 것이다. 이들이 현명한 여우가 되기를 바란다면 우리부터 현명한 여우가 되어야 하지 않을까 생각해본다.




덧붙이는 글

전영의 : 전남대학교 국어국문학과 대학원을 졸업했으며 국어국문학·현대소설비평·동아시아 비교문학 전공이다. 문학박사·문학평론가이며, 현재 전남대학교 국어국문학과 강의교수로 재직 중이다. 2015년 9월부터 중국 상해 복단대학교 (Pudan National University) 한국어문학과에 교환교수로 1년간 재직할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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