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사 메일전송
세상에 눈을 떴을때, 내 신앙은 삶이 되었다
  • 문미정 / 곽찬
  • 등록 2017-06-16 15:58:43
  • 수정 2017-06-20 11:26:34

기사수정


▲ 평화의 샘 윤순녀 대표 ⓒ 곽찬


건물 옥상에 올라가면 한강 너머로 국회의사당이 보이고, 오른쪽으로 고개를 돌리면 절두산순교성지가 보이는 국제가톨릭형제회(AFI-아피, Association Fraternelle Internationale) 전진상 센터에는 다채로운 이력을 가진 아피(AFI) 회원들이 살고 있다. 사단법인 평화의샘 윤순녀 (수산나) 대표도 그 중 한 사람이다. 


오전 10시, 윤순녀 대표 집은 갓 지은 밥 냄새로 가득했다. 우리와 함께 먹을 밥이었다. 입으로는 우리 질문에 쉴 새 없이 대답을 하면서도 손은 연신 움직여 우리가 혹여나 아침을 못 먹고 왔을까봐 미리 준비해둔 간식을 내왔다. 과거 사회운동 당시 길거리에서 투쟁 하는 이들이 배를 곪을까 데려다 솥을 걸고 밥을 지어 배불리 먹였던 윤 대표다웠다. 


지난 5월 27일, ‘민주헌법쟁취 국민운동본부결성 30년 기념식’에서 유시춘 작가는 “기록되지 않은 것은 역사가 아니다”라고 발언하면서 그 동안 우리는 기록 소각의 역사를 살아왔다고 안타까워했다. ‘기록 소각의 역사라니!’ 충격과 무거운 책임감에 편집회의를 열고 우리가 소각된 역사를 부활시켜보자고 힘을 모았다. 


그렇게 역사 부활의 여정에서 첫 걸음으로 찾아간 사람이 윤순녀 대표다. 


지오세(JOC)를 만나 세상에 눈 뜨다 


1962년 제2차 바티칸공의회가 시작되던 그 해, 고등학생이었던 윤 대표는 누가 데려간 것도 아닌데 스스로 성당을 찾아갔다. 이듬해 가톨릭에서 수산나라는 본명으로 세례를 받았다. 고등학교 졸업 후 직장을 다니던 중 한 친구의 권유로 가톨릭노동청년회(JOC-지오세, Jeunesse Ouvriere Chretienne) 모임에 참석했다. 무슨 모임인지도 모르고 간 곳에서 또래의 청년들이 서로 ‘남의 문제’, ‘어려운 사람들’ 이야기를 나누는 모습을 보면서 마음속에서 회개가 일어났다고 회고했다. 


‘나랑 같은 스무살, 스물 한 살인데… 나는 내 생각만 하고 살지 않았나? 남을 위해 살아보았나?’


나 자신만의 세상을 벗어나 눈을 크게 뜨게 한 지오세와의 첫 만남이었다. 윤 대표의 표현을 빌리자면 지오세에 홀딱 반해, 1년간의 예비자들 모임 끝에 1965년 10월, 지오세 선서를 했다. 필리핀에서 아시아 지도자 훈련을 받고 1968년부터 1972년까지는 지오세 전국회장을 맡았다. 당시 윤 대표가 가장 가까이에서 만날 수 있는 노동자는 버스 안내원이었다. 윤 대표는 버스 안내원들과 친하게 지내면서 그들의 노동환경도 알아갔다. 제일 큰 화두는 이른바 ‘삥땅’ 문제였다. 


당시 18시간에 가까운 중노동에 비해 저임금으로 일해야 했던 안내원들은 ‘삥땅’으로 부수입을 올렸고, 회사측은 이를 막고자 안내원들을 추궁하고 몸수색을 하는 등 감시가 점차 심해졌다. 억울함과 수치심에 세상을 등지는 안내원도 생겼다. 이에 지학순 주교는 생존을 위한 “삥땅은 죄가 아니다”라는 유명한 말을 남겼다. 윤 대표는 지 주교와 함께 버스 안내원 처우 개선을 위한 운동에 나서기도 했다. 


▲ 「한국가톨릭노동청년회 50년의 기록」에 수록된 사진


이를 시작으로 윤 대표는 노동문제에 본격적으로 뛰어들기 시작했다. 성탄절이 다가오자 윤 대표는 산에서 주운 솔방울에 금칠을 해서 내다판 돈으로 성당에 버스 안내원을 초대해 떡국을 끓여 대접하기도 했다. 


그전까지 지오세 활동이 그저 ‘신앙생활’에 가까웠다면 70년대에 들어서면서 노동자들이 있는 현장으로 들어가 그 생활이 삶이되기 시작했다. 1970년대 중반부터는 노동자들이 권리를 주장하면서 노사간 갈등이 빈번히 벌어졌다. 1970년 11월 13일 전태일 열사 분신 사건이 일어난 지 한 달 후 전태일 열사 어머니가 사무실을 찾아와 노동자 교육을 부탁하기도 했다. 


‘신앙생활’이 ‘삶’이 되어 노동자들과 함께 


7년간 지오세 활동을 했던 윤 대표는 1973년에 국제가톨릭형제회(AFI-아피)에 들어가기로 마음을 굳혔다. 


▲ 아피의 영성. 전(온전한 자아봉헌) 진(참다운 사랑) 상(끊임없는 기쁨) ⓒ 곽찬


그해 대학교에 들어가 사회복지 관련 공부를 하면서 인천 노동청의 카운슬러로 3년 동안 일 하기도 했다. 윤 대표는 노동자들에게 노동법과 노동자의 권리를 가르쳤다. 당시 노동자들은 노동청과 노동조합의 차이점도 모르던 시절이었다. 


YH공장으로 노동법 교육을 위해 나갔는데 다른 공장과는 달리, 관심을 보이며 YH노동자들의 질문이 빗발쳤다. 윤 대표는 노동자들에게 하고 싶은 일들을 할 수 있게 돕는 것이 노동조합이며, 여러분 스스로 만들 수 있다는 말을 전하고 왔다. 


이러한 발언이 상부기관에 보고 됐는지 이후 윤 대표는 해고를 당하고 3년간의 노동청 카운슬러 활동을 마쳤다. 노동조합 관련 발언에도 책임이 뒤따르는 삼엄한 시대였다. 


그러나 엄혹한 시절에도 윤 대표의 노동운동은 식을 줄 몰랐다. 외국을 다니며 국제경험을 쌓던 윤 대표는 5·18항쟁이 일어났다는 소식을 듣고 귀국을 서둘렀다. 6월 4일 한국에 들어와 제일 먼저 김수환 추기경을 찾아가 5·18항쟁 소식을 전한 외국신문을 내밀었다. 


▲ 광주 금남로 가톨릭센터 앞에서 대치 중인 시민들과 공수부대원, 경찰 (사진출처=5.18기념재단)


“추기경님이 보시더니 ‘남들은 딴 곳으로 나가려고 하는데 넌 왜 들어왔냐’고 하셔서, ‘나라에 난리가 났으면 싸우러 들어와야죠’라고 했던 기억이 나”


당시 서울 노동문제상담소에서 일하던 정양숙 (마리안나) 씨는 누런 봉투에 무언가를 담아 신부님께 갖다드리라고 했다. 윤 대표는 내용물이 무엇인지도 모르고 여기저기로 심부름을 다녔다. 후에 알고 보니 5·18항쟁의 진상을 알리는 광주 노동자, 학생들의 목소리를 녹음한 테이프였다. 


테이프는 외국에도 전달됐으며, 일본 가톨릭 정의평화위원회는 녹음 내용을 발표하기도 했다. 계엄사령부는 정양숙 씨와 사제들이 유언비어를 유포 했다면서 연행해 조사했다. 정양숙 씨는 보안사에 끌려가 모진 고문까지 당했고, 그 후유증으로 20여 년을 중풍으로 투병하다 2016년 4월 눈을 감았다. 정양숙 씨는 윤 대표 이전에 지오세 전국회장을 지냈으며 1967년 아피에 입회한 선배이기도 했다.


노동조합이라는 말조차 입에 올리기 힘들었던 독재정권 하에서는 노동운동, 5·18항쟁의 진상을 알려도 잡혀가는 시대였다. 윤 대표는 이 같은 일들을 회고하며, “그런 세상이 내가 노동사목을 하게 된 계기가 된 거죠”라고 말했다. 


1980년 7월 윤 대표는 인천 부평공단에서 메리놀외방선교회와 함께 노동사목 활동을 시작했다. 노동자들을 직접 만날 수 없어 그 가족들을 만나 교육을 시작했다. 


이 당시에도 과거 지오세 활동을 하거나 노동운동을 한 노동자들 블랙리스트가 존재해, 취직이 어려워지자 블랙리스트 철폐와 노동법 개정 청원 운동을 위한 조직이 절실해졌다. 이로써 1984년에 ‘노동사목전국협의회’가 만들어지고 윤 대표가 초대 회장을 맡아 1990년도까지 이끌었다.


“1984년에 노동사목협의회를 만들어서 하다 보니 87년 민주화투쟁과도 연결되고. 난 자연스럽게 내 생에 또 다른 사회운동장에 나가서 같이 살았던 것 같아요”


1987년 6월 10일, 전국에서 집회가 열렸지만 서울 성공회 대성당에서 열린 국본(민주헌법쟁취국민운동본부) 집회가 경찰에 막히자 시위대들은 명동성당으로 향했다. 이때 천주교사회운동협의회 공동대표이기도 했던 윤 대표는 시위대들이 명동성당으로 들어갈 수 있는 뒷길을 확보했다. 또, 수녀들이 시위에 함께 하도록 독려하기도 했다. 


“사람들이 내가 ‘수녀’인 줄 알아” 수녀처럼 독신으로 사는 아피 회원이면서, 윤 ‘순녀’라는 이름 발음이 수녀와 비슷해 수녀로 종종 오해받는 윤 대표. 시대와 사람들의 아픔에 함께 하며 하느님을 따르는 삶은 수도자의 삶과 닮았다. 


▲ 박용수 작가 사진집 「민중의 길」에 담긴 길거리에서 투쟁 중인 시민들의 모습. 가장 오른쪽에 있는 여성이 윤순녀 대표. ⓒ 곽찬


윤 대표는 어쩌면 수도복을 입지 않아 더 자유롭게 현장에서 ‘터를 일구는 일’을 할 수 있었는지도 모른다. 천주교정의구현전국연합(이하 천정연) 공동대표를 지내기도 했던 윤 대표는 1997년도에는 비로소 제 단체들의 힘을 모아 지금의 서울 동숭동 천정연 건물을 구입하고 터를 잡기에 이른다. 그때까지 천주교 사회운동 단체들은 어디 한 군데 자리를 잡고 꾸준히 활동할 수 있는 기틀이 없었기에, 윤 대표는 그 동안 현장에서 만난 인연들을 설득해 후배들을 위한 귀한 터를 마련하는 일에 혼신의 노력을 기울였다.


이제 여성의 눈으로 교회를 보자 


그간의 사회 참여로 몸이 많이 상했던 윤 대표는 휴식을 취하며 여느 때와 다름없이 성경을 읽었다. 오천 명을 먹이신 예수님의 기적을 보는데, 오천 명은 여자와 아이를 제외한 남자만을 센 수였다. 그 부분이 유독 눈에 들어왔다. 그리고 의문이 들었다. 


‘왜 성서에서 여자 숫자는 제외 시켰을까?’

‘그러면 성서는 누가 썼을까?’

‘남자가 쓴 글이니까 남자 머릿속에는 여자가 없을 수도 있겠구나. 그럼 여성의 눈으로 성서를 보면 안 될까?’


스스로에게 던진 이 질문들은 여성신학의 출발점이 됐다. 때마침 메리놀수녀회에서 미국 메리놀신학교에서 열리는 여성신학심포지엄에 초대했다. 심포지엄에서 요한복음 3장과 4장을 비교하며 해설을 해주는데 그 순간 윤 대표의 눈이 떠졌다. 


요한복음 3장은 예수님과 니코데모의 대화를 담고 있다. 니코데모에게 신학적인 교리만을 가르쳤지만, 4장에서 예수님은 사마리아 여인에게 먼저 다가가 말을 걸면서 자신의 메시아성을 드러낸다.  


윤 대표는 왜 예수님이 여성을 필요로 하시는지를 깨달았다. 큰 기쁨을 느꼈다. 동시에 한국에 가면 교회 여성들의 눈을 뜨게 해야겠다고 결심했다. 윤 대표는 명동 전진상 교육관에서 메리놀수녀회 수녀를 초청해 여성신학 강좌를 열었다. 이러한 활동은 ‘새 세상을 여는 천주교여성공동체’(천여공) 결성으로 이어졌다. 


일본군 위안부 문제가 불거지자 윤 대표는 버선발로 달려가 함께 하며 할머니들을 모시고 미국, 일본으로 증언집회를 다녔다. 전쟁, 성폭력 트라우마가 80세가 넘는 나이에도 이어지는 것을 보고, 상처가 얼마나 깊이 새겨지는 것인지 깨닫고 성폭력 문제에 경각심을 갖게 됐다. 


필리핀의 한 대학에서 여성학을 공부하는 등 여성 의식을 키워나갔다. 1995년 북경에서 열린 제4차 세계여성대회에도 참석해, 당시 천여공의 회장으로서 여자수도회 장상연합회 여성분과(분과장 이영자 수녀)와 함께 9월 30일 전진상 교육관에서 ‘여성의 눈으로 교회를 보자’란 제목으로 세계여성대회 보고회를 열었다. 


여성에 대한 교회의 관심을 촉구하며 주교회의에 여성 관련 위원회 설치를 건의하기도 했다. 이후 주교회의 평신도사도직위원회에 ‘여성소위원회’가 설치됐다. 여성소위원회 초창기 위원으로 일했던 윤 대표는 주교회의 안에 여성 관련 위원회가 생겨 뿌듯하게 생각하면서도, 고착된 교회가 금방 변하기는 어려울 것이라는 한계를 분명히 인식했다. 


윤 대표는 마지막으로 남는 건 ‘젠더 문제’일 것이라고 말했다. 이를 깨달은 것은 1980년대 노동운동을 하면서였다. 


▲ ⓒ 곽찬


“계층문제, 사회정의문제에 신부님들의 동의는 잘 돼. 젠더문제를 말하면 신부님, 남성들은 ‘왜 여성부를 따로 만드냐. 그럴 거면 남성부도 만들어야지’ 하는데, 너무 많은 걸 누렸던 사람들은 그에 대한 불편함을 몰라요. 인식 자체가 없어요”


한국도 시대가 달라지면서 발전을 거듭했지만 인권문제에 있어서 갈 길은 멀고, 젠더 문제는 한 번에 해결되지 않을 것이라고 담담하게 말했다.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 활동을 하면서 한 사람에게 깊게 새겨진 상처를 여실히 본 윤 대표는 1998년 천주교성폭력상담소, 1999년 가출청소년 쉼터인 평화의 샘을 열었으며 2015년에는 평화위기교육센터, 심리상담센터를 포함하는 ‘사단법인 평화의 샘’을 꾸려가고 있다. 


앞으로의 계획은? … “오늘을 살아요”


동에 번쩍, 서에 번쩍 마치 홍길동 같다고 해야 할지, 대한민국 격동의 시기를 종횡무진한 윤 대표는 현재 아피 회원들과 함께 독서모임을 이어가고 있다. 이번에 함께 읽고 있는 책은 「우주적 영성을 위하여 - 떼이야르의 발견」이다. 또, 세종로성당에서는 실버여성들과 함께 「가문비 나무의 노래」를 읽고 있다. “이런저런 과정으로 여기까지 왔는데, 여기서 그냥 안착하려면 의미는 없는 거야”라면서 독서모임을 시작하게 된 이유를 말했다.


윤 대표는 1980년대 민주화운동 당시 박용수 작가가 현장을 생생하게 담은 사진집 「민중의 길」을 보여주면서, “촛불 시위가 그냥 촛불 시위가 아니야. 이런 것들이 다 축적 된 거야”라고 말했다. 


그리고 책을 한 권 더 꺼내오더니 우리에게 선물했다. 「한국가톨릭노동청년회 50년의 기록」이었다. 윤 대표는 “한국 교회 기록의 산 증인이 되세요”라고 응원의 메시지를 남겼다. 


▲ ⓒ 곽찬


마지막으로 앞으로의 계획을 묻자, 윤 대표는 “나는 오늘을 사는 사람이야”라며 웃으며 망설임 없이 답했다. 


주어진 일 속에서 살았던 것 같고, 그 자체가 계획이었던 것 같아. 지금은 노동, 농민, 여성… 가리지 않고 세상 안에서 시대의 징표가 어떤 것인지 그때그때마다 깨달으면서 살려고 해요. 지금 여기, 오늘을 살고 싶어요.


엄혹하지만 사람다운 삶의 열망으로 뜨거웠던 시대의 길을 걸어온 윤 대표는 삶의 여정을 이렇게 고백했다.


세상에 눈을 뜨니 사회문제가 보이고, 사회문제가 여성인권운동이 되고, 여성인권운동이 환경운동이 되었어요. 내가 숨 쉬고 사는 모든 것 중 나와 관계 아닌 것이 없잖아요. 계속 연결되다보니 시대에 따라 자연스럽게 변화되면서 시대에 필요한 활동을 내 삶으로 살게 된 것 같아요.


▲ ⓒ 곽찬


그간 걸어온 길을 담담하게 들려주던 윤 대표는 자신에 대해 “난 항상 시작을 하는 사람이야”라고 표현했다. 그도 그럴 것이, 윤 대표는 황량하기만 한 땅을 일구고 씨앗을 뿌리는 일을 주로 해왔다. 그러자니 성취하고 성과에 만족하는 기쁨은 다음 세대에서 맛보았다. 


그러나 분명 열매와 기쁨은 그간 윤 대표가 곳곳에 뿌린 씨앗에서 시작되었음을 짐작할 수 있었다. 아마도 어떤 씨앗은 아직 땅 속에서 웅크리고 싹 트기 좋은 시절을 기다리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소각된 역사의 부활을 위해 야심차게 내디딘 첫 발에서 우리는 오십년이 넘는 세월동안 삶으로 신앙생활을 이어온 굳건한 여인을 만났다. 기억과 언어의 공유로 우리가 경험하지 못한 지난 시간을 공감하면서 부활은 ‘기억’하는 일에서 시작된다는 깨달음을 얻었다. 다음 여정에 불을 지핀 귀한 깨달음이었다. 


TAG
키워드관련기사
0
  • 목록 바로가기
  • 인쇄


가스펠툰더보기
이전 기사 보기 다음 기사 보기
모바일 버전 바로가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