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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수복) 사순 제4주일 독서·복음 묵상
  • 김수복
  • 등록 2017-03-24 17:08:57
  • 수정 2017-03-27 20:17: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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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독서(1사무 16,1ㄴ-7.10-13ㄱ) 해설

<다윗을 이스라엘 왕으로 기름 바르다>


원래 한 권으로 되어 있던 사무엘기 상‧하권은 이스라엘 안에 군주제도가 탄생하였음을 기념하기 위하여 쓰여졌다. 저자의 관심사는 역사적인 기록에 있지 않고 신학적이고 정치적인 의미를 밝히는 데 있었다. 이스라엘 백성이 다른 백성들처럼 왕을 갖고 싶다고 요구했음을 증명한다(1사무 8,5). 이것은 또한 주님을 불신한다는 증거였다. 이스라엘의 왕이신 하느님을 배신하는 꼴이 되었다. 동시에 비록 군주제도로 왕을 세울지라도, 하느님께서 계속 이스라엘의 참된 왕으로 남아계신다는 증거도 되었다. 다윗에 이르러 이스라엘 왕국이 강력해진다. 다윗은 하느님으로 하여금 이스라엘의 참되고 유일한 왕으로 드러나실 수 있게끔 해드리는 단순한 도구 역할만을 수행했기 때문에 하느님의 마음에 드는 흡족한 왕이었다.


이미 다윗의 머리에 기름을 부을 때에 그가 단지 하느님의 도구에 지나지 않음이 드러났었다. 사무엘이 받은 명백한 명령을 보면 그 사실을 알 수 있다(1절). 하느님께서 사무엘에게 어디로 가야할지 장소를 일러주신다. “내가 너를 베들레헴에 사람 이사이에게 보낸다” 사무엘은 장남을 보고 그가 아닌가 생각하지만, 하느님께서는 다른 아들을 택하신다(7절). 양을 치다가 불려온 막내 다윗이 하느님의 선택을 받는다. 이 이야기에서 유일하게 행동하는 분은 하느님이시다.


사람은 외모를 보지만, 하느님께서는 속마음을 보신다(구약성경에 자주 나오는 표현이다. 1열왕 8,39. 예레 11,20; 12,3; 17,10; 20,12; 시편 7,9; 44,21등).


하느님께서 하필 다윗에게 기름을 부으라고 명령하신 사실은 하느님께서 예측할 수 없는 분이심을 드러낸다. 보잘것없고 무시당하는 사람을 선택하심은 하느님의 오래된 습관처럼 보인다. 하느님께서는 이스마엘이 아니라 이사악을 택하고(창세 17,19-21), 에사우가 아니라 야곱을 택하고(창세 25,23), 크고 강한 백성이 아니라 보잘것없는 이스라엘 백성을 택하셨다(참조. 신명 7,7; 1코린 1,27이하). 다윗에게 기름을 바른 사실은 또한 하느님의 충실하심을 드러낸다. 하느님께서는 다윗・다윗 집안과 더불어 행동하신다. 정말 하느님의 외아드님이 ‘다윗의 자손’으로 와서 당신 십자가와 부활로써 주님이 되고 영원한 왕이 되셨던 것이다.


시편 (22) 해설

<주님은 나의 목자, 나는 아쉬울 것 없어라>


이 시편은 믿는 사람이 하느님을 믿고 자신을 맡기는 신뢰를 표현하고 있다. 하느님께서는 당신 백성을 돌보시고 백성 한 사람 한 사람을 돌보는 참된 목자이시다.


하느님을 목자라고 부르는 것은 자연적으로 유목민이었고 목자였던 성조(聖祖)들의 하느님을 연상하게 한다. 목자이신 하느님의 눈에는 백성이 땅 위에 있는 양떼, 순례자처럼 보일 것이다. 동시에 이스라엘의 왕 다윗을 연상하게 한다. 다윗은 양치는 목동이었다가 하느님께 뽑혀 백성의 목자가 되었고, 유일하고 참된 왕이신 하느님의 도구가 되었다. 


제2독서(에페 5,8-14) 해설

<죽은 이들 가운데서 일어나라 그리스도께서 너를 비추어 주시리라>


“여러분이 지금은 주님 안에 있는 빛입니다”(8절). 바오로는 분명히 세례에 대하여 말하고 있다. 세례를 ‘비추심’으로 알아듣는다. 또 그리스도인이 세상의 빛이신 그리스도의 존재에 온전히 참여하는 것으로 알아듣는다. 세례를 통하여 ‘죽을 운명에 처한 사람’이 생명을 받으라고 부르심을 받고, 그리스도를 빛으로 삼는 영원한 생명을 받으라고 부르심을 받는다(참조. 묵시 21,23). 그러니 “빛의 자녀답게 살아야 한다”(8절). 빛의 ‘열매’와 어둠의 ‘행위’를 구분하고 대조한다(9절, 11절). 빛의 ‘열매’는 하느님께서 성령을 통하여 사람 안에서 생산해 내시는 결실이고, 어둠의 ‘행위’는 이기적인 ‘자아’가 만들어내는 결과이다. 빛의 자녀는 그냥 착한 일을 해내는 사람에 그치지 않고, 하느님께서 그 안에 머물러 계시면서 당신의 업적을 펼치시는 사람이다. 이 권고에 이어 마지막으로 ‘성령을 충만히 받고’ 감사의 기도를 올리라고 초대한다(참조. 5,18-20).


복음(요한 9,1-41 또는 요한 9,1.6-9.13-17.34-38) 해설

<가서 씻고 앞을 보게 되어 돌아왔다>


요한 9는 히브리인의 축제 초막절에 해당하는 부분에 속한다(7-9장). 초막절은 파스카 축제와 오순절 축제를 완성하는 축제였다. 이집트에서 벗어난 해방(파스카)과 토라(모세오경, 율법)의 선물(오순절)은 하느님의 성령의 선물과 죽은 사람들의 부활로 특징 지워지는 메시아 시대의 왕국으로 우리를 인도한다. 초막절 분위기는 온통 빛과 기쁨으로 휩싸인다(예수님을 세상의 빛으로 제시한다). 초막절 예절 중 하나는 실로암의 물을 떠다가 제단에 붓는 예절이었다. 이 예절은 풍작을 기원하는 기우제(祈雨祭)와 같았다. 이와 같이 물은 새로운 생명을 약속하고 또한 성령의 선물과 새로운 창조를 약속했다.


예수님께서 이제 한 소경 앞에 서신다. 어둠 속에 있는 사람, 죄악에 얽매인 세상 앞에 서신다. 왜 죄악이 있는지를 따지는 일은 아무 쓸모가 없다. 죄악이 어디서 비롯되는지를 알면 되는 것이다.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영광을 드러내는 일 한 가지만을 생각하신다. 죄악은 하느님으로 하여금 당신의 아들을 보내기로 결단을 내리시게 한다. 그래서 성 아우구스티누스는 “오, 복된 죄여!”라고 부르짖었다.


예수님께서는 흙을 개어서 소경의 눈에 바른 다음 실로암 연못으로 보내신다. 이것은 새로운 창조의 자리인 세례를 가리킨다. 요한은 그 연못 이름의 뜻이 ‘파견된 사람’이라고 분명히 함으로써, 빛을 준 것은 물이 아니고 파견되어 오신 그리스도이심을 밝힌다.


이때 신앙고백이 나온다. “예수님이라는 분이 나를 보게 하셨습니다”(11절). “그분은 예언자이십니다”(17절). “그분이 죄인인지 아닌지는 모릅니다. 그러나 이 한 가지, 제가 눈이 멀었는데 이제는 보게 되었다는 것은 압니다”(25절). “그분이 하느님에게서 오지 않으셨다면 아무 것도 하실 수 없었을 것입니다”(33절). “주님, 저는 믿습니다”(38절). “예수님께 경배하였다”(38절). 신앙을 고백하면서 흠숭을 드리고 있다.


신앙고백으로부터 사명이 나온다. 사람들에게 그리스도를 권한다는 것은 ‘성령과 진리’ 안에서 그분을 흠숭하게 만드는 데까지 이르러야 한다.


묵상

 

세례는 믿음의 빛이다


오늘 전례가 제시하는 성경독서들은 우리로 하여금 세례와 파스카(죽음에서 부활의 생명으로 건너감)의 신비에 대하여 묵상하도록 한다. 세례를 받음으로써 우리는 믿음의 빛을 받아 그릇됨과 거짓의 어둠으로부터 생명의 빛으로 건너가게 되며,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의 신비 속으로 들어가게 된다.

 

빛을 향하여 가는 여행길


태어나면서부터 소경이었던 사람을 보게 해주신 예수님께서는 ‘세상을 비추는 빛’, ‘보게 해주는 분’, ‘아버지를 계시하는 분’이시다. 그 소경은 예수님의 말씀에 즉시 순종한다. 이 순종은 신뢰를 나타내고 믿는 행위였다.


소경은 단순히 그냥 보게 될 뿐 아니라, 믿음의 선물을 받아 주님을 알고 흠숭하게 된다.


예수님을 본 사람은 많지만, 예수님을 사람이 되신 하느님으로 알아 뵙고 흠숭하는 사람은 믿음의 빛을 받은 사람들뿐이다. 말씀에 즉시 순종하여 실천하는 사람들뿐이다.


우리 속에 있는 눈멀음



소경은 실로암의 물에 눈을 씻고 나서 보게 되었다. 그 물은 예수님께서 “가서 씻어라” 하신 말씀에 힘입어 세례의 물이 되었다. 예수님께서는 니고데모와 나눈 대화에서 세례의 물을 사람의 다시 태어남과 연결 지으셨다.


교회의 많은 교부가 소경이 물로 씻고 빛을 보게 된 사건이 세례 때 다시 태어남을 상징한다고 여겼다. 이 사건은 또한 우리 각 사람도 그 소경처럼 생명의 빛을 얻을 수 있는 가능성을 보여준다. 부활하신 그리스도와 만나야만, 그리고 그분이 개입하셔야만 우리의 눈이 열리고 빛을 받을 수 있다.


믿음은 용감한 신앙고백과 열렬한 몸 바침을 요구한다. 예수님을 하느님께서 보내신 분이라고 주장했다 해서 그 소경은 공동체에서 추방당하고 죄인 취급을 받고, 그 부모까지도 그를 변호해주기를 거절한다. 이처럼 믿음의 길은 고독한 길이다. 믿음에 따라 진실을 지키고 보편적 사람사랑・인류사랑・자연사랑을 실천하는 길은 흔히 세상 사람들로부터 외면과 냉대를 받게 된다.


사무엘이 그랬던 것처럼 우리도 자칫 잘못하면 사람을 외양과 외모로 판단하고, 하느님의 눈으로 보지 않을 수가 있다. 진실한 사람과 올바른 사람을 알아주는 분은 하느님이시며, 하느님의 눈을 가진 사람들뿐이다.


그리스도께서는 세례 때 우리에게 모든 것을 새로운 믿음의 눈으로 바라볼 수 있는 능력을 주신다. 사람의 인생사와 역사의 사건들을 믿음의 눈으로 바라보면 그 의미가 아주 새롭게 변한다.



사순 제4주일 독서·복음



제1독서(1사무 16,1ㄴ-7.10-13ㄱ)

<다윗을 이스라엘 왕으로 세워 기름을 부었다>


주님께서 사무엘에게 말씀하셨다. “너는 언제까지 이렇게 슬퍼하고만 있을 셈이냐? 나는 이미 사울을 이스라엘의 임금 자리에서 밀어냈다. 그러니 기름을 뿔에 채워 가지고 떠나라. 내가 너를 베들레헴 사람 이사이에게 보낸다. 내가 친히 그의 아들 가운데에서 임금이 될 사람을 하나 보아 두었다” 사무엘이 여쭈었다. “제가 어떻게 갑니까? 사울이 그 소식을 들으면 저를 죽이려고 할 것입니다” 그러자 주님께서 말씀하셨다. “암송아지 한 마리를 끌고 가서, ‘주님께 제사를 드리러 왔다’고 하여라. 그러면서 이사이를 제사에 초청하여라. 그다음에 네가 할 일을 내가 알려 주겠다. 너는 내가 일러 주는 이에게 나를 위하여 기름을 부어라” 사무엘은 주님께서 이르시는 대로 하였다. 그가 베들레헴에 다다르자 그 성읍의 원로들이 떨면서 그를 맞았다. 그들은 “좋은 일로 오시는 겁니까?” 하고 물었다. 사무엘이 대답하였다. “물론 좋은 일이지요. 나는 주님께 제사를 드리러 온 것이오. 그러니 몸을 거룩하게 하고 제사를 드리러 함께 갑시다” 사무엘은 이사이와 그의 아들들을 거룩하게 한 다음 그들을 제사에 초청하였다. 그들이 왔을 때 사무엘은 엘리압을 보고, ‘주님의 기름부음 받은 이가 바로 주님 앞에 서 있구나’ 하고 생각하였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사무엘에게 말씀하셨다. “겉모습이나 키 큰 것만 보아서는 안 된다. 나는 이미 그를 배척하였다. 나는 사람들처럼 보지 않는다. 사람들은 눈에 들어오는 대로 보지만 주님은 마음을 본다”


이렇게 이사이가 아들 일곱을 사무엘 앞으로 지나가게 하였으나, 사무엘은 이사이에게 “이들 가운데에는 주님께서 뽑으신 이가 없소” 하였다. 사무엘이 이사이에게 “아들들이 다 모인 겁니까?” 하고 묻자, 이사이는 “막내가 아직 남아 있지만, 지금 양을 치고 있습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사무엘이 이사이에게 말하였다. “사람을 보내 데려오시오. 그가 여기 올 때까지 우리는 식탁에 앉을 수가 없소” 그래서 이사이는 사람을 보내어 그를 데려왔다. 그는 볼이 불그레하고 눈매가 아름다운 잘생긴 아이였다. 주님께서 “바로 이 아이다. 일어나 이 아이에게 기름을 부어라” 하고 말씀하셨다. 사무엘은 기름이 담긴 뿔을 들고 형들 한가운데에서 그에게 기름을 부었다. 그러자 주님의 영이 다윗에게 들이닥쳐 그날부터 줄곧 그에게 머물렀다. 사무엘은 그곳을 떠나 라마로 갔다.


시편(22)

주님은 나의 목자, 

나는 아쉬울 것 없어라 


제2독서(에페 5,8-14)

<죽은 이들 가운데서 일어나라 그리스도께서 너를 비추어 주시리라>


형제 여러분, 여러분은 한때 어둠이었지만 지금은 주님 안에 있는 빛입니다. 빛의 자녀답게 살아가십시오. 빛의 열매는 모든 선과 의로움과 진실입니다. 무엇이 주님 마음에 드는 것인지 가려내십시오. 열매를 맺지 못하는 어둠의 일에 가담하지 말고 오히려 그것을 밖으로 드러내십시오. 사실 그들이 은밀히 저지르는 일들은 말하기조차 부끄러운 것입니다. 밖으로 드러나는 것은 모두 빛으로 밝혀집니다. 밝혀진 것은 모두 빛입니다. 그래서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잠자는 사람아, 깨어나라.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일어나라. 그리스도께서 너를 비추어 주시리라” 


복음(요한 9,1-41 또는 요한 9,1.6-9.13-17.34-38)

<가서 씻고 앞을 보게 되어 돌아왔다>


예수님께서 길을 가시다가 태어나면서부터 눈먼 사람을 보셨다. 제자들이 예수님께 물었다. “스승님, 누가 죄를 지었기에 저이가 눈먼 사람으로 태어났습니까? 저 사람입니까, 그의 부모입니까?” 예수님께서 대답하셨다. “저 사람이 죄를 지은 것도 아니고 그 부모가 죄를 지은 것도 아니다. 하느님의 일이 저 사람에게서 드러나려고 그리된 것이다. 나를 보내신 분의 일을 우리는 낮 동안에 해야 한다. 이제 밤이 올 터인데 그때에는 아무도 일하지 못한다.  내가 이 세상에 있는 동안 나는 세상의 빛이다”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시고 나서, 땅에 침을 뱉고 그것으로 진흙을 개어 그 사람의 눈에 바르신 다음, “실로암 못으로 가서 씻어라” 하고 그에게 이르셨다. ‘실로암’은 ‘파견된 이’라고 번역되는 말이다. 그가 가서 씻고 앞을 보게 되어 돌아왔다. 이웃 사람들이, 그리고 그가 전에 거지였던 것을 보아 온 이들이 말하였다. “저 사람은 앉아서 구걸하던 이가 아닌가?” 어떤 이들은 “그 사람이오” 하고, 또 어떤 이들은 “아니오. 그와 닮은 사람이오” 하였다. 그 사람은 “내가 바로 그 사람입니다” 하고 말하였다. 그들이 “그러면 어떻게 눈을 뜨게 되었소?” 하고 묻자, 그 사람이 대답하였다. “예수님이라는 분이 진흙을 개어 내 눈에 바르신 다음, ‘실로암 못으로 가서 씻어라’ 하고 나에게 이르셨습니다. 그래서 내가 가서 씻었더니 보게 되었습니다” 그들이 “그 사람이 어디 있소?” 하고 물으니, 그가 “모르겠습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그들은 전에 눈이 멀었던 그 사람을 바리사이들에게 데리고 갔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진흙을 개어 그 사람의 눈을 뜨게 해 주신 날은 안식일이었다. 그래서 바리사이들도 그에게 어떻게 보게 되었는지 다시 물었다. 그는 “그분이 제 눈에 진흙을 붙여 주신 다음, 제가 씻었더니 보게 되었습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바리사이들 가운데에서 몇몇은 “그는 안식일을 지키지 않으므로 하느님에게서 온 사람이 아니오” 하고, 어떤 이들은 “죄인이 어떻게 그런 표징을 일으킬 수 있겠소?” 하여, 그들 사이에 논란이 일어났다. 그리하여 그들이 눈이 멀었던 이에게 다시 물었다. “그가 당신 눈을 뜨게 해 주었는데, 당신은 그를 어떻게 생각하오?” 그러자 그가 대답하였다. “그분은 예언자이십니다” 유다인들은 그가 눈이 멀었었는데 이제는 보게 되었다는 사실을 믿으려고 하지 않았다. 그리하여 앞을 볼 수 있게 된 그 사람의 부모를 불러, 그들에게 물었다. “이 사람이 태어날 때부터 눈이 멀었다는 당신네 아들이오? 그런데 지금은 어떻게 보게 되었소?” 그의 부모가 대답하였다. “이 아이가 우리 아들이라는 것과 태어날 때부터 눈이 멀었다는 것은 우리가 압니다. 그러나 지금 어떻게 해서 보게 되었는지는 모릅니다. 누가 그의 눈을 뜨게 해 주었는지도 우리는 모릅니다. 그에게 물어보십시오. 나이를 먹었으니 제 일은 스스로 이야기할 것입니다” 그의 부모는 유다인들이 두려워 이렇게 말하였다. 누구든지 예수님을 메시아라고 고백하면 회당에서 내쫓기로 유다인들이 이미 합의하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의 부모가 “나이를 먹었으니 그에게 물어보십시오” 하고 말한 것이다. 그리하여 바리사이들은 눈이 멀었던 그 사람을 다시 불러, “하느님께 영광을 드리시오. 우리는 그자가 죄인임을 알고 있소” 하고 말하였다. 그 사람이 대답하였다. “그분이 죄인인지 아닌지 저는 모릅니다. 그러나 이 한 가지, 제가 눈이 멀었는데 이제는 보게 되었다는 것은 압니다” “그가 당신에게 무엇을 하였소? 그가 어떻게 해서 당신의 눈을 뜨게 하였소?” 하고 그들이 물으니, 그가 대답하였다. “제가 이미 여러분에게 말씀드렸는데 여러분은 들으려고 하지 않으셨습니다. 어째서 다시 들으려고 하십니까? 여러분도 그분의 제자가 되고 싶다는 말씀입니까?” 그러자 그들은 그에게 욕설을 퍼부으며 말하였다. “당신은 그자의 제자지만 우리는 모세의 제자요. 우리는 하느님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셨다는 것을 아오. 그러나 그자가 어디에서 왔는지는 우리가 알지 못하오” 그 사람이 그들에게 대답하였다. “그분이 제 눈을 뜨게 해 주셨는데 여러분은 그분이 어디에서 오셨는지 모르신다니, 그것 정말 놀라운 일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죄인들의 말을 들어 주지 않으신다는 것을 우리는 압니다. 그러나 누가 하느님을 경외하고 그분의 뜻을 실천하면, 그 사람의 말은 들어 주십니다. 태어날 때부터 눈이 먼 사람의 눈을 누가 뜨게 해 주었다는 말을 일찍이 들어 본 적이 없습니다. 그분이 하느님에게서 오지 않으셨으면 아무것도 하실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자 그들은 “당신은 완전히 죄 중에 태어났으면서 우리를 가르치려고 드는 것이오?” 하며, 그를 밖으로 내쫓아 버렸다.


그가 밖으로 내쫓겼다는 말을 들으신 예수님께서는 그를 만나시자, “너는 사람의 아들을 믿느냐?” 하고 물으셨다. 그 사람이 “선생님, 그분이 누구이십니까? 제가 그분을 믿을 수 있도록 말씀해 주십시오” 하고 대답하자, 예수님께서 그에게 이르셨다. “너는 이미 그를 보았다. 너와 말하는 사람이 바로 그다” 그는 “주님, 저는 믿습니다” 하며 예수님께 경배하였다. 그때에 예수님께서 이르셨다. “나는 이 세상을 심판하러 왔다. 보지 못하는 이들은 보고, 보는 이들은 눈먼 자가 되게 하려는 것이다” 예수님과 함께 있던 몇몇 바리사이가 이 말씀을 듣고 예수님께, “우리도 눈먼 자라는 말은 아니겠지요?” 하고 말하였다.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너희가 눈먼 사람이었으면 오히려 죄가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 너희가 ‘우리는 잘 본다’ 하고 있으니, 너희 죄는 그대로 남아 있다” 




[필진정보]
김수복 : 살레시오 수도회에서 10년 동안 수도생활을 하고, 그 동안 서울 가톨릭 신학대학 6년을 수료했다. 40년 동안 5개 언어에서 성서와 신학 관련 서적을 우리말로 옮기는 번역노동자였다. 현재 사랑하는 아내와 아들 둘, 손자 넷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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