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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수복) 사순 제3주일 독서·복음 묵상
  • 김수복
  • 등록 2017-03-18 17:56:03
  • 수정 2017-03-27 20:18: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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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독서(탈출 17,3-7)

<우리에게 마실 물을 주소서>


백성은 그곳에서 목이 말라, 모세에게 불평하며 말하였다. “어쩌자고 우리를 이집트에서 데리고 올라왔소? 우리와 우리 자식들과 가축들을 목말라 죽게 하려고 그랬소?” 모세가 주님께 부르짖었다. “이 백성에게 제가 무엇을 해야 합니까? 이제 조금만 있으면 저에게 돌을 던질 것 같습니다” 그러자 주님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셨다. “이스라엘의 원로들 가운데 몇 사람을 데리고 백성보다 앞서 나아가거라. 나일 강을 친 너의 지팡이를 손에 잡고 가거라. 이제 내가 저기 호렙의 바위 위에서 네 앞에 서 있겠다. 네가 그 바위를 치면 그곳에서 물이 터져 나와, 백성이 그것을 마시게 될 것이다” 모세는 이스라엘의 원로들이 보는 앞에서 그대로 하였다. 그는 이스라엘 자손들이 시비하였다 해서, 그리고 그들이 “주님께서 우리 가운데에 계시는가, 계시지 않는가?” 하면서 주님을 시험하였다 해서, 그곳의 이름을 마싸와 므리바라 하였다.


시편(94)

오늘 너희가 그분의 소리에 귀를 기울인다면!

너희는 마음을 완고하게 하지 마라


제2독서(로마 5,1-2.5-8)

<성령을 통하여 우리 마음속에 하느님의 사랑이 부어졌습니다>


형제 여러분, 믿음으로 의롭게 된 우리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느님과 더불어 평화를 누립니다. 믿음 덕분에, 우리는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가 서 있는 이 은총 속으로 들어올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하느님의 영광에 참여하리라는 희망을 자랑으로 여깁니다. 그리고 희망은 우리를 부끄럽게 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받은 성령을 통하여 하느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어졌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아직 나약하던 시절, 그리스도께서는 정해진 때에 불경한 자들을 위하여 돌아가셨습니다. 의로운 이를 위해서라도 죽을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혹시 착한 사람을 위해서라면 누가 죽겠다고 나설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우리가 아직 죄인이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돌아가심으로써, 하느님께서는 우리에 대한 당신의 사랑을 증명해 주셨습니다.


복음(요한 4,5-42 또는 요한 4,5-15.19ㄴ-26.39ㄱ.40-42)

<물이 솟는 샘이 되어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할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야곱이 자기 아들 요셉에게 준 땅에서 가까운 시카르라는 사마리아의 한 고을에 이르셨다. 그곳에는 야곱의 우물이 있었다. 길을 걷느라 지치신 예수님께서는 그 우물가에 앉으셨다. 때는 정오 무렵이었다. 마침 사마리아 여자 하나가 물을 길으러 왔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나에게 마실 물을 좀 다오” 하고 그 여자에게 말씀하셨다. 제자들은 먹을 것을 사러 고을에 가 있었다. 사마리아 여자가 예수님께 말하였다. “선생님은 어떻게 유다 사람이시면서 사마리아 여자인 저에게 마실 물을 청하십니까?” 사실 유다인들은 사마리아인들과 상종하지 않았다. 예수님께서 그 여자에게 대답하셨다. “네가 하느님의 선물을 알고 또 ‘나에게 마실 물을 좀 다오’ 하고 너에게 말하는 이가 누구인지 알았더라면, 오히려 네가 그에게 청하고 그는 너에게 생수를 주었을 것이다” 그러자 그 여자가 예수님께 말하였다. “선생님, 두레박도 가지고 계시지 않고 우물도 깊은데, 어디에서 그 생수를 마련하시렵니까? 선생님이 저희 조상 야곱보다 더 훌륭한 분이시라는 말씀입니까? 그분께서 저희에게 이 우물을 주셨습니다. 그분은 물론 그분의 자녀들과 가축들도 이 우물물을 마셨습니다” 예수님께서 그 여자에게 이르셨다. “이 물을 마시는 자는 누구나 다시 목마를 것이다. 그러나 내가 주는 물을 마시는 사람은 영원히 목마르지 않을 것이다. 내가 주는 물은 그 사람 안에서 물이 솟는 샘이 되어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할 것이다” 그러자 그 여자가 예수님께 말하였다. “선생님, 그 물을 저에게 주십시오. 그러면 제가 목마르지도 않고, 또 물을 길으러 이리 나오지 않아도 되겠습니다” 


((예수님께서 그 여자에게, “가서 네 남편을 불러 이리 함께 오너라” 하고 말씀하셨다. 그 여자가 “저는 남편이 없습니다” 하고 대답하자,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다. “‘저는 남편이 없습니다’ 한 것은 맞는 말이다. 너는 남편이 다섯이나 있었지만 지금 함께 사는 남자도 남편이 아니니, 너는 바른 대로 말하였다” 여자가 예수님께 말하였다.)) “선생님, 이제 보니 선생님은 예언자시군요. 저희 조상들은 이 산에서 예배를 드렸습니다. 그런데 선생님네는 예배를 드려야 하는 곳이 예루살렘에 있다고 말합니다” 예수님께서 그 여자에게 말씀하셨다. “여인아, 내 말을 믿어라. 너희가 이 산도 아니고 예루살렘도 아닌 곳에서 아버지께 예배를 드릴 때가 온다. 너희는 알지도 못하는 분께 예배를 드리지만, 우리는 우리가 아는 분께 예배를 드린다. 구원은 유다인들에게서 오기 때문이다. 그러나 진실한 예배자들이 영과 진리 안에서 아버지께 예배를 드릴 때가 온다. 지금이 바로 그때다. 사실 아버지께서는 이렇게 예배를 드리는 이들을 찾으신다. 하느님께서는 영이시다. 그러므로 그분께 예배를 드리는 이는 영과 진리 안에서 예배를 드려야 한다” 그 여자가 예수님께, “저는 그리스도라고도 하는 메시아께서 오신다는 것을 압니다. 그분께서 오시면 우리에게 모든 것을 알려 주시겠지요” 하였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 여자에게 말씀하셨다. “너와 말하고 있는 내가 바로 그 사람이다” 


((바로 그때에 제자들이 돌아와 예수님께서 여자와 이야기하시는 것을 보고 놀랐다. 그러나 아무도 “무엇을 찾고 계십니까?”, 또는 “저 여자와 무슨 이야기를 하십니까?” 하고 묻지 않았다. 그 여자는 물동이를 버려두고 고을로 가서 사람들에게 말하였다. “제가 한 일을 모두 알아맞힌 사람이 있습니다.)) 와서 보십시오. 그분이 그리스도가 아니실까요?” 그리하여 그들이 고을에서 나와 예수님께 모여 왔다. 그러는 동안 제자들은 예수님께 “스승님, 잡수십시오” 하고 권하였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나에게는 너희가 모르는 먹을 양식이 있다” 하시자, 제자들은 서로 “누가 스승님께 잡수실 것을 갖다 드리기라도 하였다는 말인가?” 하고 말하였다. 예수님께서 다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내 양식은 나를 보내신 분의 뜻을 실천하고, 그분의 일을 완수하는 것이다. 너희는 ‘아직도 넉 달이 지나야 수확 때가 온다’ 하고 말하지 않느냐? 자,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눈을 들어 저 밭들을 보아라. 곡식이 다 익어 수확 때가 되었다. 이미 수확하는 이가 삯을 받고, 영원한 생명에 들어갈 알곡을 거두어들이고 있다. 그리하여 씨 뿌리는 이도 수확하는 이와 함께 기뻐하게 되었다. 과연 ‘씨 뿌리는 이가 다르고 수확하는 이가 다르다’는 말이 옳다. 나는 너희가 애쓰지 않은 것을 수확하라고 너희를 보냈다. 사실 수고는 다른 이들이 하였는데, 너희가 그 수고의 열매를 거두는 것이다” 그 고을에 사는 많은 사마리아인들이 예수님을 믿게 되었다.))


그 여자가 “저분은 제가 한 일을 모두 알아맞혔습니다” 하고 증언하는 말을 하였기 때문이다. 이 사마리아인들이 예수님께 와서 자기들과 함께 머무르시기를 청하자, 그분께서는 거기에서 이틀을 머무르셨다. 그리하여 더 많은 사람이 그분의 말씀을 듣고 믿게 되었다. 그들이 그 여자에게 말하였다. “우리가 믿는 것은 이제 당신이 한 말 때문이 아니오. 우리가 직접 듣고 이분께서 참으로 세상의 구원자이심을 알게 되었소” 




사순 제3주일 독서·복음 묵상


제1독서(탈출 17,3-7) 해설

<우리에게 마실 물을 주소서>


이집트 탈출이라는 사건은 히브리인들에게 단순히 한낱 지나간 역사 사건이 아니다. 이스라엘 백성으로서는 기초적인 사건이요, 항상 실제로 당하고 있는 상황이기도 하다. 하느님의 백성인 이스라엘 백성은 이스라엘 땅에 살고 있으면서도 늘 이집트 탈출의 상황에 처해 있었다. 그것은 이스라엘 백성이란 메시아를 기다리는 백성인 까닭이다. 새로운 하느님의 백성인 그리스도인들도 그리스도께서 당신의 영광 중에 오실 것을 기다리는 백성이요 항상 이집트 탈출과 같은 상황에 처해 있는 백성이다.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에서 40년간 헤매던 세월도 세상 역사 안을 걷고 있는 하느님 백성의 생활을 암시한다. 광야와 사막에서는 해결해야 할 근본적인 문제가 있다. 그것은 마실 물이다. 물은 비단 목을 축이고 갈증을 해소하는 데만 소용되는 것이 아니다. 물은 바로 생존과 직결되어 있고 물이 생명이었다. 생명이 하느님의 선물이듯이 사막에서 헤매던 이스라엘 백성에게 물의 선물은 “주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신다”는 확증과 맞먹었다(참조. 7절).


오늘독서에서도 두 가지 면이 강조되고 있다.


- 하느님께서 모세를 통하여 주시는 물이 바위에서 쏟아진다. 이것은 그 물이 단순히 화학기호로 표시할 수 있는 물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구원의 바위이신 하느님으로부터 흘러나와 시들어 죽어가는 백성을 되살아나게 하는 생명수라는 뜻이다. 하느님을 바위라고 표현하는 대목은 수없이 많다(신명 32,4.15.18; 1사무 2,2 등). 그 표현은 백성에게 내리신 약속에 대한 하느님의 충실하심을 가리킨다. 이런 의미에서 바오로는 그리스도 안에서 하느님의 모든 약속이 이루어졌기 때문에 이 바위를 그리스도와 동일시한다(참조. 1코린 10,4).


- 다시 살리고 생명을 주는 그 물은 모세를 통하여 호렙 산으로부터 흘러나온다(참조. 6절). 이스라엘 사람들은 누구나 하느님의 법률이 호렙 산에서부터 나왔음을 알고 있다. 하느님께서 모세에게 당신의 계명과 명령을 내리신 곳이 호렙 산이다(참조. 신명 4,10-15. 5,2이하. 말라 3,2). 결국 이스라엘의 생명은 하느님께서 그들과 맺어주신 계약 외의 다른 것이 아니고, 토라(하느님의 법률, 모세오경)를 그 증거로 삼는 계약 외의 다른 것이 아니다.


시편 (94) 해설

<오늘 너희가 그분의 소리에 귀를 기울인다면! 너희는 마음을 완고하게 하지 마라>


이 시편은 계약을 기리는 전례를 위한 시편이다. 계약을 기리는 전례는 백성이 속죄하는 제사를 바치면서 하느님의 법률을 충실히 지키겠노라고 새로이 다짐함으로써 절정에 달한다.

새로운 ‘오늘’을 다짐하기 위하여 마싸와 므리바를 상기한다. 마싸(=마싸아)는 유혹을 뜻하고, 므리바는 불목과 경쟁을 뜻한다. 백성은 언제나 이집트 탈출과 같은 상황에 처해 있다.


오늘도 하느님의 법률을 지키면 살 것이다. 이러한 동기로 백성은 하느님 앞에서 기쁨에 넘치는 축제를 지낸다. 하느님의 자비로우심에 힘입어 백성은 자기 선조들의 죄악에 머물지 않고, 모든 세대가 늘 하느님의 법률(모든 사람을 하느님의 자녀로 여기는 형제애)을 실천하여 생명을 받아 누릴 수 있는 ‘오늘’ 선택과 결단을 내려야 할 상황에 처해 있다.


제2독서(로마 5,1-2.5-8) 해설

<성령을 통하여 우리 마음속에 하느님의 사랑이 부어졌다>


로마 신자들에게 보낸 서간에서 바오로는 복음을 제시하려 한다(1,1). “복음은 먼저 유다인들에게 그리고 그리스인에게까지, 믿는 사람이면 누구에게나 구원을 가져다주는 하느님의 힘이기 때문입니다. 복음 안에는 하느님의 의로움이 믿음에서 믿음으로 계시됩니다. 이는 ‘의로운 이는 믿음으로 살 것이다.’ 라고 기록된 그대로입니다”(로마 1,16-17).


바오로는 히브리인들이나 이방인들 누구나 모든 사람이 죄악의 권세 밑에 놓여 있다고 말한 다음(1,18-3,20), 그리스도의 업적이야말로 죄인들로 하여금 하느님과 올바른 관계를 맺게 해주는 업적이라고 말한다. 그것은 순전한 은총이요, 거저 주시는 선물이다(참조. 3,24). 단순한 믿음이 아니라 십자가를 동반하는 믿음이 사람으로 하여금 하느님과 올바른 관계를 맺게 한다. 십자가를 각오하고 걸머지는 믿음만이 참된 믿음이다(3,21-5,11).


바오로는 결론으로 그리스도의 이 같은 업적을 제시하고, 하느님과 올바른 관계를 맺는 일이 우리를 하느님과 실제적으로 화해하게 하고 우리에게 구원을 가져다준다고 말한다.


그리스도인이 지니는 희망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우리를 위하시는 하느님 사랑의 결정적인 표현이요 증거인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이 희망은 우리를 실망시키지 않는다. 십자가로부터 두 가지 선물이 흘러나오기 때문이다. 성령과 구원이 그것이다. 우리는 하느님을 ‘아버지’라 부르게 하시는 성령을 선물로 받고, 그 결과로 구원을 받았다.


복음(요한 4,5-42 또는 요한 4,5-15.19ㄴ-26,39ㄱ.40-42) 해설

<물이 솟는 샘이 되어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할 것이다>


요한 복음서에는 유다인의 축제가 지닌 중요성이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세 가지 축제 곧 파스카 축제(과월절 2,13.6,4.11,55), 초막절(7,2) 축제, 봉헌절 축제(10,22)를 우리에게 이야기하고 있다.


요한의 의도는 아마 예수님 안에서 그 모든 축제가 완성되었음을 보여주려는 데 있었을 것이다. 그 축제들은 과거의 사건을 기념하면서도 언제나 그 사건들의 의미가 완전히 채워지고 완성될 미래를 지향하고 있었다. 그 완성은 그리스도 안에서 달성될 것이었다.


이렇게 볼 때 우리는 요한 2를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지내신 첫 번째 파스카 이야기 속에 끼워 넣을 수 있을 것이다. 이 이야기 속에서 요한은 예수님을 새로운 성전으로 제시한다(2,13-22). 그 성전 안에서 모든 백성이 하느님을 흠숭하러 모여들 것이다. 히브리인(3장)과 사마리아인(4,1-42)과 이방인(4,46-54)이 모여들 것이다. 요한은 파스카의 의미와 내용이 풍부하기 때문에 이제 6장에서는 예수님의 또 다른 면모, 즉 ‘생명의 빵’으로 예수님을 제시한다. 이상의 두 차례에 걸친 파스카 축제의 의미는 마침내 세 번째의 파스카 축제에, 즉 사람의 아들이 십자가 위에 매달리시는 시간에 다다른다.


그리하여 우리는 4장에서 예수님께서 사마리아 여인과 만나시는 장면을 보게 된다. 사마리아인의 기원은(적어도 성경의 전승을 따르자면) 북부 왕국(이스라엘 왕국)이 망하여 아시리아로 끌려갈 때에 이방인 계통의 다섯 부족들도 강제로 이민을 가게 되었는데, 그들에게까지 거슬러 올라간다(참조. 2열왕 17,24-41). 


사마리아인은 유다인에게 지독히 미움을 받고 있었으며, 반(半)이방인이라 해서 무시를 당하고 있었다. 2열왕 17,41에서는 사마리아들이 하느님을 섬긴다면서 자기네 우상을 섬긴다고 비방한다. 그 우상은 다섯 부족을 상징하는 다섯 여인들을 가리키는 우상들이었던 것 같다. 더구나 여인이라 하면 히브리인의 예식에서는 부차적인 위치밖에 차지하지 못했다.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님 안에서 호렙 산으로부터 솟아오른 생명수와 하느님의 말씀, 영원한 생명을 주기 위해 분출되는 하느님의 말씀이 여인과 사마리아인에게 다다른다. 요한이 그들도 예수님을 믿었다고 말하면서 표현하려고 한 내용이 바로 그런 것이다. 4,20-24에 나오는 대화가 특히 중요하다. 


사마리아인은 자기네 산인 ‘그리짐 산’에서 하느님께 예배를 드렸고, 히브리인들은 예루살렘에 있는 시온 산에서 예배를 드렸다. 이 점이 그들 사이에 끊임없는 쟁점이 되어왔다. 어떤 장소에서 하느님께 흠숭을 드리는 것이 옳은가를 놓고 논쟁을 벌였다. 


예수님께서는 히브리인이 하느님을 알고 흠숭하며(그들을 하느님께서 신부로 삼으셨다) 그들에게서 구원이 나온다고 답변하신다. 그러면서도 예수님께서는 모든 사람이 성령과 진리 안에서 아버지를 흠숭할 시대가 왔다고 말씀하신다. 그 흠숭의 중심에 하느님의 새롭고 결정적인 성전인 그리스도께서 계신다. 그 새로운 성전으로부터 영원한 생명을 주는 물이 쏟아져 나와 모든 사람에게 흘러넘친다(참조. 에제 47,1-12).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리스도의 몸에서 물과 피가 쏟아져 흘렀다(참조. 요한 19,34). 이 물은 하느님의 말씀으로써, 그 말씀을 실천하는 자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는 ‘음식’이 된다(요한 ,35-40).


묵상

 

하느님의 선물


“예수님께서 부자 청년에게 자발적인 가난을 요구하실 때, 그 요구는 중간 정도의 길이란 게 없음을 의미했다. 베드로가 거친 바다를 떠나도록 부르심을 받을 때, 그는 바로 일어서서 감연히 첫 발을 내디뎌야 했다. 그들에게 요구하신 것은 단 한 가지였다. 당신 말씀에 자신을 맡기는 것이었다. 세상의 그 어떤 안정보다도 이 말씀을 더 견고한 기초로 삼는 것이었다. 하느님의 말씀과 순종 사이를 이간질하고 방해하려고 노력하는 그 어떠한 세력도 하느님의 말씀 앞에 고개를 숙여야 한다. 선의, 양심, 책임감, 신심을 가장하고서 하느님의 말씀에 반대할 수도 있다. 그러나 예수님의 부르심은 그 모든 것을 무색하게 하고 굴복하게 하신다. 예수님께서는 바로 하느님의 말씀 자체이셨다. 예수님께서는 그냥 단순히 순종을 요구하셨다”(본‧회퍼)


극복해야 할 필요가 있다


사람이란 불운을 막아주는 안정의 필요성을 깊은 데서부터 절실히 느낀다. 그러한 사람에게 하느님께서는, 인간적인 온갖 안정을 포기하여 극복하고 오로지 당신께만 온전히 신뢰하고 의탁하라고 요구하신다.


“인간적인 온갖 희망이 다 끊겼어도 나는 하느님께 희망을 겁니다”고 하는 태도가 하느님의 목소리에 모든 것을 버리고 따라나선 아브라함의 태도였다. 이 말은 신자 각자의 종교 생활을 규정하는 말이다. 믿음이란 하느님께 자신을 맡기는 행위이며, 하느님께서 들어오실 수 있도록 자신을 비우는 행위이다. 나날의 생활에서 하느님 외의 다른 희망을 갖지 않는 행위이다.


‘마실 것을 주시오’


예수님께서는 믿음을 따라 살도록 사람을 도우려 하신다. 시카르의 우물가에 서 있던 사마리아 여인에게 “나에게 마실 물을 좀 다오”라고 청하신다. 목이 말라 물을 청하신 것이다. 그러나 갑자기 대화가 다른 방향으로 흐른다. 사마리아 여인 역시 다른 종류의 갈증으로 목이 타고 있었다. 진정한 사랑을 목말라하고 있었다.


이 같은 갈증을 풀려면, 다른 물이 필요했다. 예수님께서는 즉시 그 물을 주려 하신다. 그러나 사마리아 여인과 예수님 사이에 오해가 있다. 여인은 날마다 길으러 오는 우물 물만 생각했고, 예수님께서 주시겠다고 하시는 물은 다른 물이다. 그 물은 은총의 선물이고 생명을 주는 구원의 물이었다.


하느님께 대한 갈증


‘하느님의 선물’은 예수님과 만나는 일이다. 자기 앞에 서 계신 분을 발견하는(알아보는) 일이다. 예수님께서 주시겠다는 큰 ‘선물’은 단순한 물이 아니라, 말씀을 건네고 계시는 당신 자신이고, 무엇인가를 요구하고 계시는 당신 자신이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는 과연 누구신가? 오늘 복음에 나오는 대화 전체가 이 근본적인 질문에 집중되고 있다. 그리고 이러한 답변을 시도하도록 우리를 돕고 있다. 예수님께서는 구원을 위하여 세상에 온 하느님의 아들이시다.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외치셨다. “목마른 사람은 다 나에게 와서 마셔라. 나를 믿는 사람은 성경 말씀대로 그 속에서부터 생수의 강들이 흘러나올 것이다”(요한 7,37-38)




[필진정보]
김수복 : 살레시오 수도회에서 10년 동안 수도생활을 하고, 그 동안 서울 가톨릭 신학대학 6년을 수료했다. 40년 동안 5개 언어에서 성서와 신학 관련 서적을 우리말로 옮기는 번역노동자였다. 현재 사랑하는 아내와 아들 둘, 손자 넷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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