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사 메일전송
(김수복) 대림 제2주일 독서·복음 해설
  • 김수복
  • 등록 2016-12-03 01:12:52
  • 수정 2016-12-06 12:01:46

기사수정



제1독서(이사 11,1-10) 해설

<메시아의 나라는 피상적인 외형을 넘어서 우리 인류 역사 안에 실현되어 간다>


이사야서의 이 대목은 메시아에 관한 예언을 담고 있다. 그리고 결론 구절(10절)이 나오는데, 이 구절은 후대에 첨가된 듯싶다.


- 다윗의 후손(1-5절). 이사야 예언자는 메시아를 신비스런 인물로 묘사하고 있다. 그는 왕권을 소유할 것이며, 정의롭고 평화스럽게 그 왕권을 행사하실 것이다. 당신 사명을 수행하기 위하여 성령의 온갖 선물(은총)을 충만히 지니실 것이다. 성령의 선물이 히브리어 성경에는 여섯 가지로 나오지만, 그리스어와 라틴어 번역문에서는 일곱 가지로 나온다.


- 우주적인 평화(6-9절). 이 유명한 구절들은 메시아 왕국의 평화를 비유로 서술한다. 주님을 알게 된 결과 약육강식하는 자연의 순서가 은혜로이 극복된다는 말씀이다.


- 이상향인가 아니면 현실인가? 이 예언은 단순한 이상향을 그린 것이 아니다. 그 예언은 다윗의 아들 예수님 안에서 이미 그대로 실현되었다. 예수님께서 ‘깃발로 세워지시고’(10절), 모든 백성이 그 주위로 몰려든다. 인류 한 가운데 예수님께서 살고 계심으로써, 인류는 한 걸음 한 걸음 ‘새로운 피조물’로 바뀌어간다. 정의와 평화가 인류를 다스린다. 믿는 사람들은 메시아 왕국이 이상향에 머물지 않고 늘 더욱 더 현실화하도록 갈망하고 노력해야 한다. 하느님과 일치하려는 갈망과 하느님의 평화를 맞아들이려는 열망을 세상에 나누어 주도록 힘써야 한다.


시편 (71) 해설

<주 하느님, 당신만이 저의 희망이시고 제 어릴 때부터 저의 신뢰이십니다>


이 시편은 아마 이스라엘 왕을 축성하고 그 축성일을 기념할 때 노래로 불렀을 것이다. 그러나 ‘왕의 아들’은 정의와 평화의 나라를 이 세상에 일으켜 세우러 오실 메시아를 가리킨다. 대림시기의 전례는 이 시편을 노래함으로써 평화의 왕이 오시기를 기다리는 심정을 나타낸다. 평화의 왕은 지상의 모든 백성에게 온갖 복을 베풀 것이다.


제2독서(로마 15,4-9) 해설

<그리스도인들은 서로 이해하고 감싸고 받아들임으로써 하느님을 받아들이고 하느님께 영광을 드린다>


- 성경을 인용함(4절). 바오로는 구약성경의 말씀을 인용함으로써 성경이 지닌 영구적인 가치를 강조하려고 한다. 성경의 말씀은 우리에게 힘을 불어넣어주고, 약속된 은총에 대한 희망을 굳게 간직하라고 격려한다.


- 그리스도 안에서 기운을 차리는 일(5-7절). 신자들은 예수님께서 남기신 사랑의 표양을 기억하면서, 모든 사람과 맺는 관계에서 화목과 애덕과 호의를 굳게 지켜야 한다. 그리스도께서 신자들을 받아들여 당신의 사람들로 삼으신 것처럼, 신자들도 모든 사람을 형제자매로 받아들여야 한다.


- 충실함과 자비로움(8-9절). “그리스도께서는… 행하셨다.”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자기네 주님이신 예수님의 표양이 결정적인 귀감이 되며, 동시에 그러한 예수님다운 태도와 처신이 실제로 가능하다는 증거가 된다. 그리스도께서는 히브리인도 받아들이고 외교인도 받아들이셨다. 그리스도인들도 신자와 비신자를 똑같이 받아들여야 한다.


복음(마태 3,1-12) 해설

<너희는 주님의 길을 마련하여라. 그분의 길을 곧게 내어라>


- 세례자 요한은 광야에서 회개하라고 설파하고 요르단 강물로 세례를 주었다. 그러나 요르단 강물은 기적적인 강물이 아니었다. 사람 생명을 근본적으로 바꾸어놓지 못했다. 그저 정결 예식일 따름이었다. 바리사이의 지식도, 그들의 착한 행적도, 아브라함을 믿고 의지함도 그들을 하느님과 올바른 관계를 맺게 해줄 수 없었다(9절). 하느님의 심판이 가까이 다가왔다. 죄악은 ‘주님의 날’에 떨어질 불에 태워 없어질 것이다(7.10절). 새 시대를 맞아들이려면 시급히 정신상태를 바꿔야 할 필요가 있다.


- 새로운 세례. 세례자 요한이 요르단 강에서 베푼 세례예식은 ‘오고 있는 나라’를 기꺼이 받아들이도록 준비하게 하는 회개의 세례였다. 그와 대조적으로 예수님께서 베푸신 세례는 생명을 주시는 성령과 불로써 이루어진다. 성령과 불이라는 말은 그 세례의 이중적인 면을 가리키는 것 같다. 생명(성령)을 주는 세례와 단죄하는(불) 세례를 가리키는 것 같다.


묵상


메시아를 기다림과 마음의 회개


이번 주일의 성경 본문은 우리에게 많은 가르침을 준다. 먼저 이사야의 예언을 보면, 장차 새로운 싹이 움터 나와서 그리로 세상 모든 백성이 모여들리라고 예고한다. 오늘 복음(마태 3,1-12)은 대망하던 구세주께서 가까이 다가와 계심을 선포하고 있다. 뉘우치고 마음을 깨끗이 하라고 강력히 촉구한다. 오고 계시는 메시아를 맞이할 채비를 갖추어 새로운 희망과 보편적 사랑에 마음을 열라고 초대한다.


메시아의 새싹


이사야서는 메시아를 이새의 뿌리에서 돋아나는 새싹으로 묘사한다. 조용히 움트는 작은 그 새싹은 레바논의 요란스런 나무들의 멸망과 대조를 이룬다. 이 작은 새싹 위에 주님의 성령께서 머물어, 가련한 사람들을 정의로운 판단으로 심판하고 평화를 피어오르게 할 것이다.


사람은 진실하게 하느님 앞에 서고 하느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는 순간마다 이사야처럼 평화를 전하게 된다.


정의롭고 평화가 넘치는 사회를 만들려고 거듭거듭 새로이 심혈을 기울이는 노력이야말로 하느님께서 계시하신 가르침에 철저하게 따르는 길이 된다.


오늘의 이사야서 본문에 나오는 이러한 요청은 우리를 당황하게 만든다. 결코 도달할 수 없는 이상향처럼 보일지 모른다. 과연 높은 데서 오는 도움과 힘이 아니고서는 그 요청이 이루어질 수 없다.


정의로운 사회는 순전히 기술적인 작업으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정의는 ‘주님의 성령’, ‘지혜와 슬기와 경륜과 용기를 주는 영’으로부터 나온다. 정의의 실현은 하느님의 성령께서 베푸시는 선물임과 동시에 사람들이 애쓴 노력의 결실이기도 한 것이다.


하느님의 나라가 가까웠으니 회개하라


세례자 요한이 오늘 복음에서 선포하는 전언이다. 메시아가 문전에 다가왔다. 그 전언은 사람들로 하여금 오시는 메시아를 맞이할 채비를 갖추도록 하고, 하느님의 나라가 올 때에 당황하여 허둥대지 않도록 하려는 전언이다.


회개의 세례. 세례자 요한이 호소하는 회개는 성령의 세례를 받는 데 없어서는 안 될 조건이다. 회개하고 성령의 세례를 받아야만 불타는 하느님의 분노에서 우리 자신을 구출해 낼 수 있다.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우리 신자로서도 시대의 징표(역사 현실 속에 숨어 있는 하느님의 뜻)를 읽어내려 노력하지 않거나 읽어내지 못한다면, 다시 말해서 우리 시대의 사건과 요청 안에서 하느님의 성령께서 어디에 계신지를 감지하지 못한다면, 인정사정없이 닥쳐오는 분노의 위협을 피할 수가 없다. 


우리가 하느님의 충실하심을 믿는다면, 하루하루가 바로 ‘분노의 날’이 되어, ‘검불을 태우고 알곡을 거두시기 위하여’ 즉 정의를 실천하시기 위하여 하느님께서 오고 계심을 깨달을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끊임없이 우리의 일상생활과 역사 가운데 오고 계시는 하느님을 증거해야 하고 또 오실 수 있도록 해야 한다. 


만일 우리가 하느님의 자유와 사랑을 실천하지 못한다면, 그러한 ‘오늘’은 분명히 ‘분노의 날’이 될 것이고 또 언제까지나 그러할 것임을 부인할 수 없다. “하느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는 말은 하느님의 나라가 이미 와 있다는 뜻으로, 하느님의 나라가 그 영원한 역사를 이미 시작했다는 뜻으로 알아들어야 한다. 이제는 하느님의 나라를 준비한다는 뜻이 아니라 하느님의 나라를 실현하고 우리의 생활 안에 끌어들여 우리의 일상생활을 다스리도록 한다는 뜻이다. 그리스도인이 품고 있는 희망은 다가오는 나라를 무작정 수동적으로 기다리는 데 있지 않고, 인류역사 가운데 하느님의 나라가 오도록 적극적인 노력을 구체적으로 펼치는 데 있다.


그리스도께서 여러분을 받아들이신 것처럼 여러분도 서로 받아들이십시오.


하느님의 성령께서 당신 권능의 옷을 우리에게 입혀주셔야만 우리는 열린 마음으로 로마서의 말씀(로마 15,4-9)을 받아들일 수가 있다. 바오로는 우리로 하여금 ‘예수 그리스도의 표양을 본받아’ 서로 똑같은 감정을 가질 수 있게 해주시는 ‘위로하시는 하느님’을 상기시킨다.


그리스도의 마음처럼 우리의 마음도 활짝 열려 가까이 있는 사람들에게나 멀리 떨어져 있는 사람들에게나 똑같은 이해와 관용과 용서를 베풀어야 한다. 우리 안에서 하느님의 능력으로 사랑을 베푸시는 성령의 빛을 받아 모든 사람을 받아들여 사랑해야 한다.


초대교회가 겪고 있는 분열과 논쟁(이론적 또는 실천적인 다툼)을 보고서, 바오로는 그 불화를 극복하고 해소하기 위해 그리스도께서 당신 표양과 가르치심으로 시작해 놓으신 ‘새 사람’을 제시함으로써 해결의 열쇠를 준다. 새로운 법과 생명과 전망과 믿음과 판단기준과 방법을 제시한다. 


새로운 사랑 즉 “그리스도께서 여러분을 기꺼이 받아들이신 것처럼, 여러분도 하느님의 영광을 위하여 서로 기꺼이 받아들이십시오”라는 새로운 사랑의 방식을 제시한다. 다른 사람들을 위하여 생명을 바치는 데까지, 특히 가장 멀리 떨어져 있는 사람들과 보잘것없는 사람들을 위해 생명을 바치는 데까지 사랑을 실천하라고 말한다. 그렇다고 자기의 고유한 인격과 개성을 내팽개치라는 말이 아니다. 오히려 그와 반대로 자기 자신을 다른 사람들에게 열어놓음으로써 더욱 풍요해지라는 말이다. 


이런 사랑을 세상에 분명히 드러나 보이기 위해서는 복음서가 초대하는 대로 교회 전체가 자신을 반성하여 깨끗해져야 하고 순수하지 못한 것으로부터 떠날 필요가 있다. 그래야만 교회는 참으로 ‘모든 백성의 어머니’ 역할을 할 수 있고, 하느님의 자비스런 사랑을 드러낼 수 있다. 그 때 가서야 비로소 교회는 다윗의 새로운 백성으로서 진정으로 모든 백성 가운데 깃발처럼 세워질 것이고, 모든 백성이 신뢰와 희망을 가지고 모여들 것이며, 그리하여 메시아에 관한 예언이 교회 안에서 충만히 실현될 것이다.



[필진정보]
김수복 : 살레시오 수도회에서 10년 동안 수도생활을 하고, 그 동안 서울 가톨릭 신학대학 6년을 수료했다. 40년 동안 5개 언어에서 성서와 신학 관련 서적을 우리말로 옮기는 번역노동자였다. 현재 사랑하는 아내와 아들 둘, 손자 셋이 있다.
TAG
키워드관련기사
0
  • 목록 바로가기
  • 인쇄


가스펠툰더보기
이전 기사 보기 다음 기사 보기
모바일 버전 바로가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