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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수복) 연중 제32주일 독서·복음 해설
  • 김수복
  • 등록 2016-11-04 21:13:04
  • 수정 2016-11-14 11:29: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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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독서(2마카 7,1-2.9-14)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일으키시어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하실 것이오>


그때에 어떤 일곱 형제가 어머니와 함께 체포되어 채찍과 가죽 끈으로 고초를 당하며, 법으로 금지된 돼지고기를 먹으라는 강요를 임금에게서 받은 일이 있었다. 그들 가운데 하나가 대변자가 되어 이렇게 말하였다. “우리를 심문하여 무엇을 알아내려 하시오? 우리는 조상들의 법을 어기느니 차라리 죽을 각오가 되어 있소.” 마지막 숨을 거두며 말하였다. “이 사악한 인간, 당신은 우리를 이승에서 몰아내지만, 온 세상의 임금님께서는 당신의 법을 위하여 죽은 우리를 일으키시어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하실 것이오.” 그다음에는 셋째가 조롱을 당하였다. 그는 혀를 내밀라는 말을 듣자 바로 혀를 내밀고 손까지 용감하게 내뻗으며, 고결하게 말하였다. “이 지체들을 하늘에서 받았지만, 그분의 법을 위해서라면 나는 이것들까지도 하찮게 여기오. 그러나 그분에게서 다시 받으리라고 희망하오.” 그러자 임금은 물론 그와 함께 있던 자들까지 고통을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여기는 그 젊은이의 기개에 놀랐다. 셋째가 죽은 다음에 그들은 넷째도 같은 식으로 괴롭히며 고문하였다. 그는 죽는 순간이 되자 이렇게 말하였다. “하느님께서 다시 일으켜 주시리라는 희망을 간직하고, 사람들의 손에 죽는 것이 더 낫소. 그러나 당신은 부활하여 생명을 누릴 가망이 없소.”  


시편(16)

주님, 깨어날 때 당신 모습으로 흡족하리이다


제2독서(2테살 2,16-3,5)

<하느님께서 힘을 복돋우시어 온갖 좋은 일과 좋은 말을 하게 해 주시기를 빕니다>


형제 여러분,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친히, 또 우리를 사랑하시고 당신의 은총으로 영원한 격려와 좋은 희망을 주신 하느님 우리 아버지께서, 여러분의 마음을 격려하시고 여러분의 힘을 북돋우시어 온갖 좋은 일과 좋은 말을 하게 해 주시기를 빕니다. 절 끝으로 형제 여러분, 우리를 위하여 기도해 주십시오. 주님의 말씀이 여러분에게서처럼 빠르게 퍼져 나가 찬양을 받고, 우리가 고약하고 악한 사람들에게서 구출되도록 기도해 주십시오. 모든 사람이 믿음을 가지고 있지는 않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성실하신 분이시므로, 여러분의 힘을 북돋우시고 여러분을 악에서 지켜 주실 것입니다. 우리는 주님 안에서 여러분을 신뢰합니다. 우리가 지시하는 것들을 여러분이 실행하고 있고 앞으로도 실행하리라고 믿습니다. 주님께서 여러분의 마음을 이끄시어, 하느님의 사랑과 그리스도의 인내에 이르게 해 주시기를 빕니다. 


복음(루카 20,27-38 또는 루카 20,34-38)

<그분은 죽은 이들의 하느님이 아니라 산 이들의 하느님이시다>


부활이 없다고 주장하는 사두가이 몇 사람이 예수님께 다가와 물었다. “스승님, 모세는 ‘어떤 사람의 형제가 자식 없이’ 아내를 남기고 ‘죽으면, 그 사람이 죽은 이의 아내를 맞아들여 형제의 후사를 일으켜 주어야 한다.’고 저희를 위하여 기록해 놓았습니다. 그런데 일곱 형제가 있었습니다. 맏이가 아내를 맞아들였는데 자식 없이 죽었습니다. 그래서 둘째가, 그다음에는 셋째가 그 여자를 맞아들였습니다. 그렇게 일곱이 모두 자식을 남기지 못하고 죽었습니다. 마침내 그 부인도 죽었습니다. 그러면 부활 때에 그 여자는 그들 가운데 누구의 아내가 되겠습니까? 일곱이 다 그 여자를 아내로 맞아들였으니 말입니다.”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이 세상 사람들은 장가도 들고 시집도 간다. 그러나 저 세상에 참여하고 또 죽은 이들의 부활에 참여할 자격이 있다고 판단받는 이들은 더 이상 장가드는 일도 시집가는 일도 없을 것이다. 천사들과 같아져서 더 이상 죽는 일도 없다. 그들은 또한 부활에 동참하여 하느님의 자녀가 된다. 그리고 죽은 이들이 되살아난다는 사실은, 모세도 떨기나무 대목에서 ‘주님은 아브라함의 하느님, 이사악의 하느님, 야곱의 하느님’ 이라는 말로 이미 밝혀 주었다. 그분은 죽은 이들의 하느님이 아니라 산 이들의 하느님이시다. 사실 하느님께는 모든 사람이 살아 있는 것이다.”))  




연중 제32주일 독서·복음 해설



제1독서(2마카 7,1-2.9-14) 해설

<우주의 왕께서는 당신의 율법을 위해 죽은 우리를 다시 살리셔서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할 것이다>


헬레니즘과 유다이즘이 부딪친 극적인 사건들이 마카베오기에 기록되어 있다.


유다인들 중에는 자기들을 헬레니즘 문화에 휩쓸리게 하려는 시도와 박해에 단호하게 저항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그 같은 박해는 안티오쿠스 4세 에피파네스(주전 175-163년) 때에 극심하게 가해졌다. 그는 문화적으로 그리고 종교적으로 통일된 왕국을 건설해 보려는 속셈으로 유다인들에게도 조상들로부터 물려받은 신앙과 전통을 포기하도록 강요했다.


그 박해와 수난사 가운데 어머니와 일곱 아들의 순교 이야기가 나온다. 마카베오기에 나오는 이 이야기는 표본적인 가치를 가지고 있다. 뛰어난 율법학자였던 엘르아잘이 순교한 것처럼(6,18-31), 어머니와 일곱 아들이 하느님의 율법을 거역하느니 차라리 죽음을 선택했다.


이 이야기는 그 자체만 가지고 볼 때에는 특별한 해설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어머니와 일곱 아들은 비록 고문을 당하고 학살당해 죽어 가지만 자기네가 영원한 생명으로 다시 살아나리라고 굳게 확신하고 있다. 또한 육체가 부활하리라는 확신을 명백하게 드러내고 있다. 저자는 분명한 의도로 이 이야기를 순차적으로 펼치고 있다. 아들들은 차례로 죽기 전에, 올바른 사람은 하느님의 법을 어기기보다는 차라리 죽음을 선택하고(2절), 하느님께서 틀림없이 올바른 사람을 측은히 여기실 것을 믿고(6절), 하느님께서 자기들을 영원한 생명으로 다시 살리실 것을 믿고(9절), 육체가 온전하게 회복되어 부활할 것을 믿고(11절), 끝까지 악을 고집하는 자들은 영원한 생명으로 부활할 수 없다는 것이며(14절), 하느님께서는 끝까지 악을 고집하다 죽는 사람들을 벌하신다는 것이며(17절), 올바른 사람은 악을 일삼는 사람들에게 박해와 고통을 받게 된다는 것이며(18-19절), 올바른 사람들이 당하는 죽음은 속죄의 가치를 가지고 있다고(37-38절) 주장한다.


이렇게 이스라엘인들은 박해를 당함으로써 ‘올바른 사람의 목숨 바침과 부활의 신학’을 깊게 했다.


시편(17) 해설

<주님, 깨어날 때 당신 모습으로 흡족하리이다>


오로지 하느님께서만 충실하고자 온갖 박해와 고문을 받고 죽음을 당하는 올바른 사람이 바치는 기도다.


죽기까지 하느님의 길만 꿋꿋이 따른 올바른 사람은 영원한 생명을 받아 부활할 것이다. 


죽음을 무릅쓰고 하느님을 선택한 올바른 사람은 자유와 친교와 행복의 원천이신 하느님을 뵈옵고 흡족할 것이다.


제2독서(2테살 2,16-3,5) 해설

<하느님 우리 아버지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힘을 북돋우시어 온갖 좋은 일을 하고 좋은 말을 하게 해 주시기를 빕니다>


테살로니카 신자들에게 보낸 짧은 둘째 서간에서 바오로는 하느님께서 테살로니카인들을 선택하셔서 믿음을 굳게 해 주셨음을 감사드리고 그들을 격려하고 기도를 부탁하면서(2,13-3,5) ‘재림의 징표들’에 관한 말을 끝맺는다.


16-17절에서 바오로는 하느님 아버지께서 우리를 사랑하시고 은총을 베푸시어 영원한 위로와 좋은 희망을 주신다는 것을 상기하게 하면서 테살로니카 신자들을 축복하고 격려한다.


위로는 희랍어로 ‘파라클레신’이며, 용기와 자신감을 불어넣어 준다는 뜻을 가진 단어다. ‘좋은 희망’은 하느님 은총의 풍요한 결실과 결과를 가리킨다.


3,1-2에서 바오로는 주님의 말씀이 속히 퍼져 찬양을 받도록 끊임없이 기도하라고 초대한다. 주님의 말씀이 사람들 사이에서 강력한 영향력과 효과를 발휘하도록 끊임없이 기도하라고 초대한다.


복음(루카 20,27-38 또는 루카 20,34-38) 해설

<아브라함의 하느님, 이사악의 하느님, 야곱의 하느님께서는 죽은 이들의 하느님이 아니라 살아 있는 이들의 하느님이시다>


공관 복음서들은 예수님께서 겪으신 수난이야기를 여러 가지 사실과 말을 엮어가면서 준비하고 있다. 그리하여 예수님과 예루살렘 종교지도층 사이에 대립과 긴장이 쌓여가고 마침내 그 절정에 이른다.


특권층과 사제들로 구성된 사두가이들은 토라 또는 모세의 율법만을 최고 규범으로 여기고 있었다. 그런 사람들이 예수님을 함정에 빠뜨리기 위해 질문을 던진다. 부활에 관한 추상적인 질문이 아니라, 자식 없이 죽은 형의 아내를 동생이 맞아들여 대를 잇게 해 주어야 한다는 규정(참조. 신명 25,5이하)을 가지고 난감한 질문을 던진다.


이 질문을 받으신 예수님께서는 “저 세상에 참여하고 또 죽은 이들의 부활에 참여할 자격이 있다고 판단받는 이들은 더 이상 장가드는 일도 시집가는 일도 없을 것이다”고 답변하신다. 하느님 자녀로서 영원한 생명을 받아 부활한 사람들은 더 이상 결혼할 필요가 없는 상태에서 살게 된다는 말씀이다. 물론 세상에서 맺어진 부부의 인연은 영원히 이어지겠지만, 그 인연도 하느님을 아버지로 모시고 그리스도와 더불어 부활한 사람들이 모두 똑같은 형제자매가 된 영원한 친교 속으로 녹아들어간다는 말씀이다.


이어서 예수님께서는 부활이 무엇인지에 대하여 말씀하신다. 예수님께서는 탈출 3,2-6에서 “나는 아브라함의 하느님, 이사악의 하느님, 야곱의 하느님이다.”고 하신 하느님의 말씀을 인용하신다. 그러니 하느님께서는 분명히 살아 있을 성조들의 하느님이시라는 것이다. 하느님 안에서 죽은 사람들은 없어지지 않고 분명히 살아 있으며, 육체도 어느 날엔가 하느님 자녀로서 영원한 생명에 알맞게 부활한 육체를 드러내 보일 것이다. 유다인들의 사고방식에 따르자면, 영혼의 생명이 따로 있고 육체의 생명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다. 믿는 사람, 곧 올바른 사람에게는 죽음이 죽음이 아니요 새로운 삶으로 옮아감이다. 모든 사람이 그 진실을 목격할 날이 반드시 오고야 말 것이다.


묵상


부활


이번 주일에 읽은 성경 본문들은 사람의 죽음과 부활이라는 주제를 집중적으로 다루고 있다. 첫째 독서에서, 틀림없이 부활하리라는 확신이 어머니와 일곱 아들에게는 목숨을 바치기까지 하느님께 충실할 수 있는 자극제가 된다. 그들은 손목을 잘리고 혀를 끊기면서도 뚜렷한 의식과 용기를 가지고 죽음을 받아들인다. 믿음이 없는 사람들 눈에는 어처구니없이 생명을 버리는 것처럼 보일지라도, 그들에게는 하느님을 선택하고 하느님을 섬긴다는 이유로 당하는 죽음이 더 높고 고귀한 삶을 열어 주는 문이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오늘 복음이 매우 중요한 내용을 우리에게 말해 주고 있다. 사두가이들이 던지는 부질없는 질문에 예수님께서는 그들과 논쟁을 하시지 않는다. 또한 예수님께서는 죽은 다음 부활할 수 있는가 하는 가능성과 그 필연성에 대한 철학적인 논증을 펴시지도 않는다. 예수님께서는 단지 죽은 다음의 생명과 삶과 세계가 어떠한 것인지를 우리에게 말씀하시려 할 따름이다. 예수님의 답변은 사실에 대한 단순하고 소박한 주장일 뿐이다. 즉,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사랑하고, 그 사랑은 끝이 없다는 사실, 우리를 위하시는 하느님의 사랑은 일시적인 지상 생애에 한정되어 있지 않다는 사실을 주장하실 뿐이다.


하느님께서는 살아 있는 성조들의 하느님으로서 당신 뜻과 계획에 따라 인류 역사를 이끌어 가는 하느님이시다. 하느님께서는 현세와 내세의 주님이고, 역사의 발걸음을 당신 목표에 맞추어 밀고 가는 하느님이시다. 우주와 만물과 모든 사람을 창조한 하느님께서는 온갖 인간적 계산을 초월하여 계시는 분이다. 하느님께서는 영원히 살아계시는 분이고, 당신이 바라시는 바는 오직 사람들이 죽지 않고 사는 것이다.


하느님께서 우리를 당신 사랑의 대화 상대로 선택하여 존재하게 하신 그 순간부터, 우리는 당신 불명성에 참여하도록 운명 지워져 있다. 하느님께 우리는 잠시 즐기는 노리개가 아니라, 영원히 당신의 소중한 자녀로 삼으려고 선택하신 존재들이다.


살아 있는 이들의 하느님


여기에서 우리는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 가운데 들어 있는 의미를 밝혀 내야 할 것이다.


살아계시는 하느님께서는 단지 예수님 한 분만을 위해 살아계신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예수 그리스도 덕에 우리 모든 사람이 살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이다. 예수님께서는 모든 사람에게 하느님의 생명을 가져다주신 분이다. 예수님께로부터 하느님 아버지의 생명을 받았기 때문에, 사람들은 참 생명 곧 영원히 행복한 친교의 삶을 누릴 수 있게 된 것이다. 하느님께서는 결코 온갖 종류의 금령과 제약으로 우리 생명을 옭죄는 분이 아니시다. 하느님께서는 오히려 기쁨의 하느님, ‘영원한 위로’와 ‘좋은 희망’을 안겨 주는 하느님이시다.


테살로니카인들에게 보낸 서간에 의한 둘째 독서는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은 우리에게 위로와 희망을 안겨 주는 사랑의 증표임을 가리켜 보이고 있다.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로 말미암아 우리는 용기를 가지고 목숨을 걸어놓고 올바른 길을 끝까지 갈 수 있게 되었다. 우리 생명이 죽음, 그것도 박해와 고문을 받다가 죽는 억울한 죽음으로 그대로 없어진다고 가정할 때, 구태여 옳은 일과 정의를 위해 몸 바칠 이유가 도무지 없어지고 마는 것이다. 올바르게 사는 사람들에게는 죽음이 마지막이 아니라 하느님 자녀로서 새롭고 놀라운 삶으로 옮아감이라는 진리가 반드시 필요하다. 이를 위해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의 뜻이 그대로 이루어지는 하느님 자녀들의 세상을 구현하시려다가 솔선수범하여 사형을 당하시고, 하느님께서는 당신 아들 예수님을 부활하게 하셨다. 그 사건으로 말미암아 인류사회를 친교의 공동체로 만들기 위해 몸 바치고 목숨까지 바치는 사람들은 부활을 확신하게 된 것이다.


부활은 그리스도를 따르는 사람들의 결단과 행동 안에 이미 실현되고 있다. 그 부활한 모습과 본모습은 사람의 상상과 소망을 초월하여 놀랍게 드러나고야 말 것이다. 또한 개인적인 결단과 행동만이 아니라, 그런 많은 개인들이 힘을 합친 집단적 결단과 행동의 결과로 친교의 공동체가 이루어질 때, 친교의 공동체로 모습이 새로워진 인류 가족은 이미 부활하여 있는 하느님의 가족이 되며, 하느님께서 정하신 때,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실 때에 영원한 새로운 차원으로 건너가게 되고, 그때에야 주님의 구원이 얼마나 위대한가를 모든 사람이 똑똑히 목격하게 될 것이다.




[필진정보]
김수복 : 살레시오 수도회에서 10년 동안 수도생활을 하고, 그 동안 서울 가톨릭 신학대학 6년을 수료했다. 40년 동안 5개 언어에서 성서와 신학 관련 서적을 우리말로 옮기는 번역노동자였다. 현재 사랑하는 아내와 아들 둘, 손자 셋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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