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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수복) 연중 제22주일 독서·복음 해설
  • 김수복
  • 등록 2016-08-27 11:59:38
  • 수정 2016-09-03 01:02: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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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독서(집회 3,17-21.28-31)

<너 자신을 낮추면 하느님께 은총을 받으리라>


얘야, 네 일을 온유하게 처리하여라. 그러면 선물하는 사람보다 네가 더 사랑을 받으리라. 네가 높아질수록 자신을 더욱 낮추어라. 그러면 주님 앞에서 총애를 받으리라. 높고 귀한 사람들이 많이 있지만 주님께서는 온유한 이들에게 당신의 신비를 보여 주신다. 정녕 주님의 권능은 크시고 겸손한 이들을 통하여 영광을 받으신다. 너에게 너무 어려운 것을 찾지 말고 네 힘에 부치는 것을 파고들지 마라. 거만한 자의 재난에는 약이 없으니 악의 잡초가 그 안에 뿌리내렸기 때문이다. 현명한 마음은 격언을 되새긴다. 주의 깊은 귀는 지혜로운 이가 바라는 것이다. 물은 타오르는 불을 끄고 자선은 죄를 없앤다. 은혜를 갚는 이는 앞날을 내다보는 것이니 그가 넘어질 때에 도움을 얻으리라.


시편(67)

하느님께서는 외로운 이들에게 

집을 마련해 주시나이다


제2독서(히브 12,18-19.22-24ㄱ)

<여러분이 나아간 곳은 시온 산이고 살아 계신 하느님의 도성이다>


형제 여러분, 여러분이 나아간 곳은 만져 볼 수 있고 불이 오르고 짙은 어둠과 폭풍이 일며 또 나팔이 울리고 말소리가 들리는 곳이 아닙니다. 그 말소리를 들은 이들은 더 이상 자기들에게 말씀이 내리지 않게 해 달라고 빌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이 나아간 곳은 시온 산이고 살아 계신 하느님의 도성이며 천상 예루살렘으로, 무수한 천사들의 축제 집회와 하늘에 등록된 맏아들들의 모임이 이루어지는 곳입니다. 또 모든 사람의 심판자 하느님께서 계시고, 완전하게 된 의인들의 영이 있고, 새 계약의 중개자 예수님께서 계시며, 그분께서 뿌리신 피, 곧 아벨의 피보다 더 훌륭한 것을 말하는 그분의 피가 있는 곳입니다. 


복음(루카 14,1.7-14)

<자신을 높이는 이는 낮아지고 자신을 낮추는 이는 높아질 것이다>


예수님께서 어느 안식일에 바리사이들의 지도자 가운데 한 사람의 집에 가시어 음식을 잡수실 때 일이다. 그들이 예수님을 지켜보고 있는데, 예수님께서는 초대받은 이들이 윗자리를 고르는 모습을 바라보시며 그들에게 비유를 말씀하셨다. “누가 너를 혼인 잔치에 초대하거든 윗자리에 앉지 마라. 너보다 귀한 이가 초대를 받았을 경우, 너와 그 사람을 초대한 이가 너에게 와서, ‘이분에게 자리를 내 드리게.’ 할지도 모른다. 그러면 너는 부끄러워하며 끝자리로 물러앉게 될 것이다. 초대를 받거든 끝자리에 가서 앉아라. 그러면 너를 초대한 이가 너에게 와서, ‘여보게, 더 앞 자리로 올라앉게.’ 할 것이다. 그때에 너는 함께 앉아 있는 모든 사람 앞에서 영광스럽게 될 것이다. 누구든지 자신을 높이는 이는 낮아지고 자신을 낮추는 이는 높아질 것이다.”가난한 이들을 초대하여라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초대한 이에게도 말씀하셨다. “네가 점심이나 저녁 식사를 베풀 때, 네 친구나 형제나 친척이나 부유한 이웃을 부르지 마라. 그러면 그들도 다시 너를 초대하여 네가 보답을 받게 된다. 네가 잔치를 베풀 때에는 오히려 가난한 이들, 장애인들, 다리저는 이들, 눈먼 이들을 초대하여라. 그들이 너에게 보답할 수 없기 때문에 너는 행복할 것이다. 의인들이 부활할 때에 네가 보답을 받을 것이다.”  




연중 제22주일 독서·복음 해설



제1독서(집회 3,17-21.28-31) 해설

<너 자신을 낮추면 하느님께 은총을 받으리라>


겸허함과 거만함: 하느님께서는 ‘보잘것없는 사람들’에게 당신 마음을 쏟으시며 그들로부터 찬양을 받고 싶으시다.


오늘날까지도 역사기록은 위인과 영웅과 전쟁과 정복과 거대한 건축과 도시를 중심으로 쓰인다. 그러나 집회서의 저자는 하느님의 지혜가 오히려 보잘것없는 사람들과 노예들과 억눌리며 사는 무수한 이름 없는 천민들과 더욱 가까이 있고, 하느님의 지혜가 펼쳐지는 방법도 사람들이 흔히 상상하는 바와 거리가 멀다는 것을 우리에게 상기시켜 주고 있다.


여기에서 이미 나자렛 예수님의 정신과 복음의 내용이 엿보인다.


결코 자기 자신을 과신하여 미혹에 빠지고 그 망상 때문에 정도에서 벗어남이 없이(24절), 두려운 마음으로 하느님께 지혜를 찾고 따라야 한다. 거만하고 완고한 자들은 커다란 위험에 맞닥뜨리고 낭패를 당할 것이다(26-29절).


시편(68) 해설

<하느님께서는 외로운 이들에게 집을 마련해 주시나이다>


이 시편은 이스라엘 역사에 대한 시적이고 종교적인 회상이다. 첫째 부분(1-10절)에서는 특히 이스라엘 백성이 약속된 땅 안으로 들어간 것을 기념한다. 그때 하느님께서는 약한 사람들과 비참한 지경에 빠진 사람들의 보호자로 당신 자신을 드러내 보여주었으며, 반대로 잘난 체, 가진 체하며 허세부리는 거만한 사람들에게는 준엄한 정의를 보이셨다(6절).


하느님께서는 고아들의 아버지고 과부들의 보호자고 외로운 이에게 집을 마련하는 분이고, 없는 이에게 땅을 마련하는 분이시다.


우리도 하느님을 닮아 억눌리고 가난한 사람들을 보호하고 그들에게 집과 땅을 마련해 주어야 하느님의 자녀요 신자다.


제2독서(히브 12,18-19.22-24ㄱ) 해설

<우리는 하늘나라의 시민이며, 거룩한 회중의 구성원이다>


첫 번째 계약의 경우에서, 히브리인들은 시나이 산 밑에서 두려워 떨고 있었으며, 천사들에게 둘러싸인 하느님의 엄위로우심 앞에 감히 가까이 갈 엄두를 내지 못하고 있었다. 이와 반대로 새로운 계약에서는, 모든 사람이 예외 없이 천상잔치에 초대를 받고 있다. 하느님과 친밀한 관계를 맺고 살도록 초대받고 있다.


하느님께서는 아직까지도 사람들과 잡다한 인간사에서 멀리 동떨어져 계시는가? 아니다. 하느님께서는 사람들 사이에 가장 가까이 계시고 사람들 속에 어김없이 계시고, 인간사회 속에 살아 계신다. 하느님의 도성과 하늘의 예루살렘과 수많은 천사들과 올바른 사람들의 영혼이 이미 사랑을 나누는 천상잔치를 지상에서 벌이고 있다. 은총과 평화의 세계가 이미 힘차게 자라고 있다.


복음(루카 14,1.7-14) 해설

<예수님의 새로운 가르침>


예수님의 가르침은 새롭기만 하다. 예수님께서는 가진 것 없는 겸허한 사람들이 높아지리라고 가르치신다.


예수님 시대에 지도급 인사들과 율법학자들은 자주 잔칫상을 벌여 놓고 어떤 덕행이나 또는 특정한 위대한 인물을 놓고 토론을 했다. 그런 토론은 때로는 흥미로웠을지 모르지만, 대부분 자기를 내세우기 위한 쓸모없고 해롭기까지 한 공론에 지나지 않았다.


안식일에 바리사이파의 한 지도자가 예수님을 초대하여 그 같은 토론 잔칫상에 앉으시게 한다. 그리고 예수님을 함정에 빠뜨리기 위하여 안식일에 병을 고쳐도 되느냐고 묻는다. 예수님께서는 묵묵히 병자의 손을 붙잡고 고쳐서 돌려보낸 다음, 안식일이라고 자기 아들이나 소가 우물에 빠졌는데 당장 구해 내지 않고 그냥 버려두겠느냐고 반문하신다. 온갖 규정과 법률은 그 자체가 목적이거나 절대적인 강제권이 있는 것이 아니고, 사람에게 이롭고 인간공동체 건설에 유익한 한에서 그 존재의 의미와 존재가치가 있는 것이다.


또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이 잔칫상에서 윗자리를 서로 먼저 차지하려고 애쓰는 작태를 눈여겨보시고는, 누구든지 자기 자신을 높이는 사람은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사람은 높아지리라고 말씀하신다. 사람끼리 높고 낮음이란 도무지 있을 수가 없는 것이다. 남이 나를 훌륭하게 본다거나 받들어 주기를 은근히 바라는 것은 도무지 당치 않는 심정이다. 남들보다 높이 되려는 경쟁심리는 다른 사람들을 이용하고 착취하려는 심리 외에 다른 것이 아니다. 사람이 사람에게 해 줄 수 있는 유일한 것은 몸 바침과 섬김과 협동뿐이다.


묵상


출발점은 사람이 되신 하느님 자신이다


기쁨이 넘치는 밥상을 차려 주는 분은 사람이 아니라 하느님이시다. 하느님께서는 새로운 친교의 중개자를 통하여 사람들에게 기쁨에 넘치는 잔칫상을 마련해 주신다. 이제 사람을 부르시는 하느님의 초대는 엄연한 역사적인 사실로서 이루어진다. 하느님께서 몸소 사람이 되어 우리 역사 가운데로 들어오심으로써 이루어진다. 그 초대의 기쁜 소식은 다름 아닌 하느님 자신이시다. 하느님께서 사람을 찾아 만나기 위해 사람이 살고 있는 곳으로 오신 것이다.


하느님께서는 우리와 똑같은 사람, 우리 가운데 한 사람으로 되어 옴으로써 우리를 당신께로 부르신다. 이 사실이야말로 사람들이 하느님과 만나는 잔치의 출발점이자 도착점이다. 나자렛 예수님을 통해서 자기의 근본적인 무소유와 무자격을 깊이 체험한 가난한 사람들이 친교의 공동체에 도달할 수 있고, 자기 내부와 외부에서 오는 온갖 압력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다.


하느님께서 해방자 예수님을 통하여 사람들에게 말씀하시고, 사람들이 그 말씀에 자기 자신을 열어드릴 때, 하느님의 말씀은 새로운 창조를 이룩하고 당신 마음에 드는 아름다운 신부인 새로운 인류공동체를 만들어 낼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바리사이들처럼 스스로 잘난 체하고 스스로를 높이는 데 급급한 나머지 서로 헌신하고 협동하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거절할 경우, 세계는 파탄을 면치 못하게 될 것이다.


늦은 사람들한테로 가야 사람이 되신 하느님 그리스도를 만난다

 

그리스도께서는 가장 높으신 하느님의 자리와 권리를 조금도 주장하지 않고, 사람이 되어 시공 안으로 들어오고 갖가지 희노애락이 엇갈리는 역사과정 한가운데로 당신 자신을 내던지셨다. 사람들 가운데서도 가장 보잘것없는 사람으로 마구간에서 태어나고 구슬땀 흘리는 목수의 삶을 살고, 이름 없는 사람들 사이에서 고달픈 나날을 견딘 나머지, 큰 깨달음으로 구원의 기쁜 소식을 외치고, 끝내는 목숨까지 바치셨다. 그분은 자기와 똑같은 고달픈 인생들에게 지극한 애정을 느끼고, 머리 누일 자리도 없을 만큼 가난하게 살고, 발가벗긴 채 십자가에 매달릴 만큼 그들과 동고동락하셨다. 그분은 가난한 사람들과 억눌린 사람들에게 해방을 선포하고 가져다주는 기쁜 소식 자체이셨다. 천하고 가엾은 무수한 사람들에게 기울어지는 그분의 애정이야말로 기쁜 소식 자체였다.


가난하고 억눌리고 한 맺힌 사람들과 기쁨과 슬픔을 함께 나누는 진정한 애정이 없으면 그런 사람들 가운데, 그런 사람 중 한 사람으로, 그런 사람들을 통하여 계시는 그리스도와 만날 수도 없고 친분을 맺을 수도 없다.


사람은 누구나 오만과 자기분열과 비굴과 아첨과 멸시와 가혹함을 벗어나 회개할 필요가 있다. 사람은 다른 사람들 위에 올라서고 다른 사람들을 지배하고 싶은 생각을 벗어던질 필요가 있다. 경쟁이 아닌 협동, 독점이 아닌 나눔이 사람이 가야 할 올바른 길이다. 개인주의적인 경쟁사회가 아니라, 공동체적인 협동사회가 사람에게 맞는 이상적 사회다. 최대다수 개인들의 자유와 창의가 발휘되는 사회는 이기적인 사회가 아니라 공동체적인 사회다.


그러므로 스스로 자기 자신을 높이는 사람은 낮아질 것이고 자기 자신을 낮추는 사람은 높아진다는 것은 지당하신 하느님의 이치인 것이다. 자기자신위주, 자기자식위주, 자기나라위주의 독점성향의 발전주의는 먼저 자기 자신과 자기 자식과 자기 나라를 비인간화하고, 동시에 힘없고 가진 것 없는 사람들과 나라들에게 억압과 착취의 굴레를 씌운다. 독점적 발전이 아니라 사람다운 공동발전이라야 인간과 인간사회에 쓸모가 있고, 그 공동발전의 핵심요소는 사람들끼리 나누는 친교이다. 사람은 남이 나를 알아주고 떠받들어주기 위해 살지 않고, 남에게 나를 바쳐 헌신하기 위해 살아야만 그리스도인답게 가난한 사람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고 억눌린 사람들에게 해방을 선포하는 사람다운 사람이 된다.




[필진정보]
김수복 : 살레시오 수도회에서 10년 동안 수도생활을 하고, 그 동안 서울 가톨릭 신학대학 6년을 수료했다. 40년 동안 5개 언어에서 성서와 신학 관련 서적을 우리말로 옮기는 번역노동자였다. 현재 사랑하는 아내와 아들 둘, 손자 셋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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