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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수복) 연중 제14주일 독서·복음 해설
  • 김수복
  • 등록 2016-07-02 10:17:29
  • 수정 2016-07-02 10:21: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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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독서(이사 66,10-14ㄷ)

<보라, 내가 예루살렘에 평화를 강물처럼 끌어들이리라>


예루살렘을 사랑하는 이들아 모두 그와 함께 기뻐하고 그를 두고 즐거워하여라. 예루살렘 때문에 애도하던 이들아 모두 그와 함께 크게 기뻐하여라. 너희가 그 위로의 품에서 젖을 빨아 배부르리라. 너희가 그 영광스러운 가슴에서 젖을 먹어 흡족해지리라. 주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신다. “보라, 내가 예루살렘에 평화를 강물처럼 끌어들이리라. 민족들의 영화를 넘쳐흐르는 시내처럼 끌어들이리라. 너희는 젖을 빨고 팔에 안겨 다니며 무릎 위에서 귀염을 받으리라. 어머니가 제 자식을 위로하듯 내가 너희를 위로하리라. 너희가 예루살렘에서 위로를 받으리라.” 이를 보고 너희 마음은 기뻐하고 너희 뼈마디들은 새 풀처럼 싱싱해지리라. 그리고 주님의 종들에게는 그분의 손길이 드러나리라. 


시편(65)

온 세상아, 하느님께 환호하여라. 

그 이름의 영광을 노래하여라


제2독서(갈라 6,14-18)

<나는 예수님의 낙인을 내 몸에 지니고 있습니다>


형제 여러분, 나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는 어떠한 것도 자랑하고 싶지 않습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말미암아, 내 쪽에서 보면 세상이 십자가에 못 박혔고 세상 쪽에서 보면 내가 십자가에 못 박혔습니다. 사실 할례를 받았느냐 받지 않았느냐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새 창조만이 중요할 따름입니다. 이 법칙을 따르는 모든 이들에게, 그리고 하느님의 백성 이스라엘에게 평화와 자비가 내리기를 빕니다. 앞으로는 아무도 나를 괴롭히지 마십시오. 나는 예수님의 낙인을 내 몸에 지니고 있습니다. 형제 여러분,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총이 여러분의 영과 함께하기를 빕니다. 아멘. 


복음(루카 10,1-12.17-20 또는 루카 10,1-9) 

<너희의 평화가 그 사람 위에 머물리라>


그 뒤에 주님께서는 다른 제자 일흔두 명을 지명하시어, 몸소 가시려는 모든 고을과 고장으로 당신에 앞서 둘씩 보내시며,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수확할 것은 많은데 일꾼은 적다. 그러니 수확할 밭의 주인님께 일꾼들을 보내 주십사고 청하여라. 가거라. 나는 이제 양들을 이리 떼 가운데로 보내는 것처럼 너희를 보낸다. 돈주머니도 여행 보따리도 신발도 지니지 말고, 길에서 아무에게도 인사하지 마라. 어떤 집에 들어가거든 먼저 ‘이 집에 평화를 빕니다.’ 하고 말하여라. 그 집에 평화를 받을 사람이 있으면 너희의 평화가 그 사람 위에 머무르고,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되돌아올 것이다. 같은 집에 머무르면서 주는 것을 먹고 마셔라. 일꾼이 품삯을 받는 것은 당연하다. 이 집 저 집으로 옮겨 다니지 마라. 어떤 고을에 들어가든지 너희를 받아들이면 차려 주는 음식을 먹어라. 그곳 병자들을 고쳐 주며, ‘하느님의 나라가 여러분에게 가까이 왔습니다.’ 하고 말하여라. ((어떤 고을에 들어가든지 너희를 받아들이지 않으면 한길에 나가 말하여라. ‘여러분의 고을에서 우리 발에 묻은 먼지까지 여러분에게 털어 버리고 갑니다. 그러나 이것만은 알아 두십시오. 하느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습니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그날에는 소돔이 그 고을보다 견디기 쉬울 것이다.” 

일흔두 제자가 기뻐하며 돌아와 말하였다. “주님, 주님의 이름 때문에 마귀들까지 저희에게 복종합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나는 사탄이 번개처럼 하늘에서 떨어지는 것을 보았다. 보라, 내가 너희에게 뱀과 전갈을 밟고 원수의 모든 힘을 억누르는 권한을 주었다. 이제 아무것도 너희를 해치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영들이 너희에게 복종하는 것을 기뻐하지 말고, 너희 이름이 하늘에 기록된 것을 기뻐하여라.”)) 




연중 제14주일 독서·복음 해설



제1독서(이사 66,10-14ㄷ) 해설

<보라, 내가 평화를 강물처럼 끌어들이리라>


이사 56-66은 이사야서 마지막 부분이다. 지리적인 중심지는 예루살렘이고, 추정되는 시대는 귀양살이 후 20년경, 그러니까 에즈라와 느헤미야 시대 이전(B.C. 458-445) 및 성전 재건 이전일 것이다.


저자는 자기 저작 앞에 나온 성경들을 풍부하게 이용하고 있다. 오늘 독서에서 예루살렘이 자기 자녀들을 어머니다운 정성으로 위로한다는 표현은 독특한 것이다.(11-12절). 그 때까지 성경에서는 예루살렘을 결실을 풍성하게 맺는 신부로 묘사했지만, 애정에 넘치는 어머니로는 묘사한 적이 없다. 예루살렘이 자기 자녀들에게 주는 위로는 하느님께서 주시는 위로와 똑같은 성질의 것이다.


예루살렘은 그 역사상 전적으로 몰락한 적이 있다. 예루살렘은 망하고, 그 주민은 귀양살이로 붙들려가고, 그야말로 하느님께서 온갖 위로를 거두어 가신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하느님께서 예루살렘을 버리신 것은 잠시일 뿐(이사 54,1), 당신 홀로 참된 위로자이심을 보여주기 위함이었다.


하느님께서는 귀양살이로 벌한 다음, 돌아와 당신 백성을 위로하신다. “위로하여라, 위로하여라, 나의 백성을. 너희의 하느님께서 말씀하신다.”(이사 40,1) 주님께서 주는 위로는 성경 다른 곳에서 여러 가지 모양으로 묘사된 것처럼, 구원하여 주시는 힘찬 개입이다. 그분은 목자처럼(40,11), 애정 깊은 어진 아버지처럼(이사 54,7), 자애롭고 감미로운 어머니처럼 오실 것이다(이사 66,11). 그러나 현재에 내려지는 ‘위로들’은 결정적인 위로의 전주곡일 뿐이다. 우리는 미래에 주어질 결정적인 구원에 희망을 걸고 있다.


새로운 예루살렘인 그리스도의 신비체, 그리스도처럼 살아가는 큰 무리 공동체가 모든 사람과 모든 백성에게 결정적인 위로와 구원을 안겨줄 날이 반드시 오고야 말 것이다.


시편(65) 해설

<온 세상아, 하느님께 환호하여라. 그 이름의 영광을 노래하여라>


이 시편은 하느님께서 베푸신 온갖 은혜에 감사드리고 환호하는 찬미가이다. 시편작가는 깊은 종교적 감각으로 모든 성공을 하느님께 돌리고, 하느님께 감사하는 마음을 드러내야 할 필요성을 느낀다. 시편 작가는 또한 개인적으로도 자기가 하느님께 은총을 입었음을 깨닫고, 하느님께서 자기에게 해주신 놀라운 일을 사람들에게 선전하고 전파하려 한다.


하느님께서 사람들을 위하여 행하신 놀라운 일들을 두고 당신을 찬양해야 한다. 또 자꾸만 넘어지고 빗나가는 사람들에게 끝까지 인내와 용서와 자비를 거두지 않으신 하느님을 찬미해야 한다.


제2독서(갈라 6,14-18) 해설

<내 몸에는 예수님의 낙인이 찍혀 있다>


갈라티아 신자들에게 보낸 서간 마지막 인사말인 6,11-18에는 그 편지의 신학적 가르침을 종합하는 몇 구절이 나온다. 바오로 사도는 자기 손으로 직접 마지막 인사말을 쓴다. 당시 편지 쓰는 요령은 편지내용을 받아쓰게 한 다음, 마지막 부분과 서명만을 자필로 쓰는 식이었다(참조. 2테살 3,17; 1고린 1,21-24; 콜로 4,18).


바오로는 자기를 반대하는 사람들이 품고 있는 은밀한 의도를 폭로한다. 그들은 하느님을 섬기는 데 몰두하지 않고, 박해를 피하기 위해 사람들의 비위를 맞추려 애쓴다고 말한다. 할례를 무슨 영예인 양 강요하는 유다인들과 반대로, 바오로는 그리스도의 십자가만을 영광으로 삼는다. 그 때문에 바오로는 세상 재물과 권세에 대한 욕심에 조금도 사로잡히지 않고,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리스도, 부활하신 그리스도, 새로운 사람만이 그의 마음을 온통 사로잡고 있다.


십자가를 영광으로 삼는다는 것은 온갖 허영심과 자기 과시욕을 버리고, 하느님만을 믿고 바라며 하느님께서 내려주시는 구원에 감사드리면서 사는 것을 의미한다. 개인적 및 집단적 이기주의에 사로잡힌 세상은 죄악과 악마에 사로잡힌 세상이요 육적인 세상이다. 이 세상은 죽고 부활하신 구세주께 대한 신앙으로 태어난 새로운 세상으로 교체되고 변형되어야 한다.


복음(루카 10,1-12.17-20 또는 루카 10,1-9) 해설

<너희 평화가 그 위에 머물 것이다>


루카 복음서만이 12제자(사도)와 구별되는 72제자에 대하여 말하고 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당부하시는 말씀들 가운데 마태오 복음서와 마르코 복음서가 사도들이 받는 사명에 관하여 언급한 요소들이 많이 발견된다(마태 10; 마르 6). 루카 복음서는 제자단으로부터 받은 특별한 전승들에 더 많이 기초를 두고 있다. 그리고 마태오 복음서는 그 두 가지 전승들을 이용하고 있고, 스승이 하신 다른 말씀들 특히 종말론적인 말씀을 덧붙인다. 마태오 복음서가 박해를 매우 강조한 반면, 루카 복음서는 사명을 받고 떠나는 제자들에게 예수님께서 주시는 실천적 권고들을 소개하는 것으로 그친다.


그 제자들은, 하느님 나라가 곧 오리라고 확신하면서, 세상 사람들이 흔히 꼭 필요하다고 여기는 수단들마저도 함부로 사용하지 않는다. 그들은 구차하게 목숨을 구하려고 비굴해지지 않고, 하느님 나라가 오도록 하기 위하여 과감히 몸 바친다. 그들이 보이는 처신과 행동은 하느님 나라를 증거하기 때문에 예언자적이다(4절). 그들이 끊임없이 돌아다니고 여행한 사실은 그리스도교는 결코 결정적인 제도로 고정될 수 없고, 항상 여행하는 상태에 있음을 표양으로 보여 준다(1베드 2,11; 히브 11,8-14). 일꾼은 주인이 주는 음식을 먹고 베푸는 대접으로 만족해야지, 더 푸짐한 밥상과 더 안락한 거처를 요구하는 것은 복음 설교에 장애가 될 뿐이다. 그들의 사명 수행은 세상을 심판하는 예언자다운 행위가 된다. 예수님의 제자들을 배척하고 박해하는 사람, 인권과 사회정의와 용서하는 위대한 사랑을 주장하는 예수님의 제자들을 끝까지 박해하고 고문하고 죽이는 사람은 엄한 심판을 받을 것이다(11-12절).


제자들은 자기들이 받은 사명을 수행하면서 하느님의 놀라운 업적을 많이 체험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제자들은 자기들을 통하여 하느님의 위업이 이루어졌다고 해서 자부할 일이 아니라, 자기네 이름이 하늘에 기록된 것을 기뻐하고, 자기네가 참으로 구원받고 있음을 깨닫고 기뻐할 일이다.


묵상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당신 위로를 주신다


“예루살렘을 사랑하는 이들아 모두 그와 함께 기뻐하고 그를 두고 즐거워하여라.… 어미가 제 자식을 위로하듯 내가 너희를 위로하리라. 너희가 예루살렘에서 위로를 받으리라. 이를 보고 너희는 마음은 기뻐하고 너희 뼈마디들은 새 풀처럼 싱싱해지리라.”(이사 66,10-14)


예언자는 일정한 역사적인 순간에 자기 백성을 위로하고 있다. 히브리인들이 풍요롭게 흥청거리면서 방종에 흐를 때, 예언자는 그들이 저지른 충실치 못한 죄악을 고발하고, 회개하여 하느님께 돌아오라고 강력하게 초대했었다. 그러나 이제 벌을 받고 귀양살이에서 돌아와 극심한 가난과 고통과 난관에 빠진 히브리인들에게 기쁨과 풍요로움을 약속하시는 하느님의 위로를 선포한다.


이 말은 오늘날 우리에게도 딱 들어맞는다. 하느님께서 약속하시는 위로는 감상적인 값싼 동정이 아니다. 하느님께서는 가진 것 없고 의지 할 데 없고 얽매여 있고 고통 받는 사람들에게 당신 위로를 주려 하신다. 하느님께서는 사람들로 하여금 당신의 소유인 모든 재물과 권세와 능력과 건강과 자유를 인류가 공유하고 공평하게 나눔으로써 서로 친하게 지내기를 바라신다. 하느님께서 인류에게 주고자 하시는 위로는 바로 그러한 위로로서 하늘나라의 결정적인 행복으로 이어질 위로다. “내가 좋아하는 단식은 이런 것이 아니겠느냐? 불의한 결박을 풀어 주고 멍에 줄을 끌러 주는 것, 억압받는 이들을 자유롭게 내보내고 모든 멍에를 부수어 버리는 것이다. 네 양식을 굶주린 이와 함께 나누고 가련하게 떠도는 이들을 네 집에 맞아들이는 것, 헐벗은 사람을 보면 덮어 주고 네 혈육을 피하여 숨지 않는 것이 아니겠느냐? 그리하면 너의 빛이 새벽빛처럼 터져 나오리라.”(이사 58,6-8)


하느님의 위로가 당신께 바라는 가난한 사람들에게 내려지도록 그리스도인들과 모든 사람은 최선을 다할 필요가 있다. 정치・경제・문화를 비롯한 온갖 사회 구조와 제도를 억압받는 사람들을 자유롭게 하도록, 주린 사람들에게 밥을 주도록, 집이 사람들에게 없는 집을 주도록 개혁할 필요가 있다.


너희의 이름이 하늘에 기록된 것을 기뻐하여라


하느님 나라의 실현과 가난한 사람들이 받는 위로는 두 가지 국면을 가지고 있다. 그것은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역사 한가운데서 실현되고 있으며,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실 때에만 영원한 생명 안에서 완성되리라는 것이다(참조. 마태 13,24; 13,31; 22,2; 24,45; 25,14).


예언자의 전언이 메시아 나라 안에서 더 완전하게 실현될 것이었듯이,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도 당장 그대로 실현된 것이 아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들이 그 말씀을 실현시켜 갈 것이지만, 억압받는 모든 사람이 해방되고, 고통 받은 모든 사람이 위로받고, 가난한 모든 사람이 기쁨을 얻는 것은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시는 날에야 완전히 이루어질 것이다.


그리스도께서는 맡은 사명을 수행하고 돌아온 제자들에게 그들을 통하여 이루어진 위업 때문에 자만심을 품을 일이 아니라, 그들의 이름이 하늘에 기록되고, 하늘나라에 자리를 얻은 것을 기뻐하라고 말씀하신다. 그리스도의 말씀을 실천하면 사회 변혁에 엄청난 위력을 발휘하게 된다. 그러나 새로운 세계를 이루어가는 그 위대한 변혁이 마치 자기들이 잘나고 유능해서 이루어졌다고 오판할 것이 아니라, 자기들을 통하여 하느님의 능력이 발휘되었을 뿐임을 인정하고, 자기들은 다만 두려운 마음으로 하늘나라에 속하도록 간구하는 수밖에 없다.


하느님 나라는 내세에서만 실현되고 영신적 내지 심정적 차원에서만 실현된다고 착각하는 잘못은 새로운 사람과 새로운 세계 형성에 조금도 이바지하지 못하고 오히려 정치적 목적과 야욕에 이용당하기 십상이다. 정의와 사랑이 지배하는 하느님 나라는 지상 역사 한가운데서 실현되어가며,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시는 날 완성되어 시공을 포함하고 초월하는 영원 속으로 들어가게 될 것이다. 모든 사람은 예수님의 제자가 되어 하느님의 정의와 사랑이 다스리는 사회변혁 즉 하느님 나라의 실현을 위해 몸 바침으로써만 자기 성취와 구원을 얻게 되고, 그 구원이 사람의 진정한 기쁨의 샘이 된다.




[필진정보]
김수복 : 살레시오 수도회에서 10년 동안 수도생활을 하고, 그 동안 서울 가톨릭 신학대학 6년을 수료했다. 40년 동안 5개 언어에서 성서와 신학 관련 서적을 우리말로 옮기는 번역노동자였다. 현재 사랑하는 아내와 아들 둘, 손자 셋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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