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사 메일전송
(김수복) 연중 제13주일 독서·복음 해설
  • 김수복
  • 등록 2016-06-25 10:03:43
  • 수정 2016-06-25 10:06:34

기사수정


제1독서(1열왕 19,16ㄴ.19-21)

<엘리사가 일어나 엘리야를 따라나섰다>


님시의 손자 예후에게 기름을 부어 이스라엘의 임금으로 세워라. 그리고 아벨 므홀라 출신 사팟의 아들 엘리사에게 기름을 부어 네 뒤를 이을 예언자로 세워라.

엘리야는 그곳을 떠나 길을 가다가 사팟의 아들 엘리사를 만났다. 엘리사는 열두 겨릿소를 앞세우고 밭을 갈고 있었는데, 열두 번째 겨릿소는 그 자신이 부리고 있었다. 그때 엘리야가 엘리사 곁을 지나가면서 자기 겉옷을 그에게 걸쳐 주었다. 그러자 엘리사는 소를 그냥 두고 엘리야에게 달려와 이렇게 말하였다. “아버지와 어머니에게 작별 인사를 한 뒤에 선생님을 따라가게 해 주십시오.” 그러자 엘리야가 말하였다. “다녀오너라. 내가 너에게 무엇을 하였다고 그러느냐?” 엘리사는 엘리야를 떠나 돌아가서 겨릿소를 잡아 제물로 바치고, 쟁기를 부수어 그것으로 고기를 구운 다음 사람들에게 주어서 먹게 하였다. 그런 다음 일어나 엘리야를 따라나서서 그의 시중을 들었다. 


시편(15)

당신은 저의 주님, 

저의 행복 당신밖에 없나이다 


제2독서(갈라 4,31ㄴ-5,1.13-18)

<여러분은 자유롭게 되라고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형제 여러분, 우리는 여종의 자녀가 아니라 자유의 몸인 부인의 자녀입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를 자유롭게 하시려고 해방시켜 주셨습니다. 그러니 굳건히 서서 다시는 종살이의 멍에를 메지 마십시오. 

형제 여러분, 여러분은 자유롭게 되라고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다만 그 자유를 육을 위하는 구실로 삼지 마십시오. 오히려 사랑으로 서로 섬기십시오. 사실 모든 율법은 한 계명으로 요약됩니다. 곧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하여라.” 하신 계명입니다. 그러나 여러분이 서로 물어뜯고 잡아먹고 한다면, 서로가 파멸할 터이니 조심하십시오. 내 말은 이렇습니다. 성령의 인도에 따라 살아가십시오. 그러면 육의 욕망을 채우지 않게 될 것입니다. 육이 욕망하는 것은 성령을 거스르고, 성령께서 바라시는 것은 육을 거스릅니다. 이 둘은 서로 반대되기 때문에 여러분은 자기가 원하는 것을 할 수 없게 됩니다. 그러나 여러분이 성령의 인도를 받으면 율법 아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복음(루카 9,51-62)

<어디로 가시든지 저는 스승님을 따르겠습니다>


하늘에 올라가실 때가 차자, 예수님께서는 예루살렘으로 가시려고 마음을 굳히셨다. 그래서 당신에 앞서 심부름꾼들을 보내셨다. 그들은 예수님을 모실 준비를 하려고 길을 떠나 사마리아인들의 한 마을로 들어갔다. 그러나 사마리아인들은 예수님을 맞아들이지 않았다. 그분께서 예루살렘으로 가시는 길이었기 때문이다. 야고보와 요한 제자가 그것을 보고, “주님, 저희가 하늘에서 불을 불러 내려 저들을 불살라 버리기를 원하십니까?” 하고 물었다. 예수님께서는 돌아서서 그들을 꾸짖으셨다. 그리하여 그들은 다른 마을로 갔다. 

그들이 길을 가는데 어떤 사람이 예수님께, “어디로 가시든지 저는 스승님을 따르겠습니다.” 하고 말하였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여우들도 굴이 있고 하늘의 새들도 보금자리가 있지만, 사람의 아들은 머리를 기댈 곳조차 없다.” 예수님께서는 다른 사람에게 “나를 따라라.” 하고 이르셨다. 그러나 그는 “주님, 먼저 집에 가서 아버지의 장사를 지내게 허락해 주십시오.” 하고 말하였다. 예수님께서는 그에게, “죽은 이들의 장사는 죽은 이들이 지내도록 내버려 두고, 너는 가서 하느님의 나라를 알려라.” 하고 말씀하셨다. 또 다른 사람이 “주님, 저는 주님을 따르겠습니다. 그러나 먼저 가족들에게 작별 인사를 하게 허락해 주십시오.” 하고 말하였다. 예수님께서 그에게 이르셨다. “쟁기에 손을 대고 뒤를 돌아보는 자는 하느님 나라에 합당하지 않다.” 




연중 제13주일 독서·복음 해설


제1독서(1열왕 19,16ㄴ.19-21) 해설

<엘리사는 엘리야를 따라나서 그의 제자가 되었다>


엘리사가 소명을 받는다. 엘리야는 고요한 가운데 하느님을 만나고(19,11-13), 자기가 받은 사명의 의미를 다시 발견한다. 그 사명은 유일하신 하느님께 충실한 백성을 이루어내고 자기 사업을 이어받을 계승자를 찾아내는 것이었다.


그 계승자는 엘리사로서, 엘리야는 엘리사에게 자기 겉옷을 걸쳐 줌으로써 자기가 예언자로서 받은 권한과 능력을 넘겨준다(참조. 2열왕 2,14). 그 행위는 예언자가 되라는 소명을 효과적으로 나타내 준다.


엘리사는 모든 것을 버리고 엘리야를 따라나선다. 그와 마찬가지로 뒤에 예수님의 제자들이 모든 것을 버리고 스승을 따라나설 것이다. 엘리사는 아마도 부유했던 것 같다. 그러나 그는 엘리야의 제자가 되기 위해 서슴없이 모든 것을 포기한다.


엘리사가 “아버지 어머니에게 작별 인사를 한 뒤에 선생님을 따라가게 해 주십시오.”라고 말하자, 엘리야는 “다녀오너라. 내가 너에게 무엇을 하였다고 그러느냐?”라고 대답한다. 이는 엘리사가 책임감이 강하다는 것을 드러낸다.


사람이면 누구나 철이 들고 현실과 사회현상을 비판적으로 파악하기 시작하면서부터는 고요한 가운데 자기 양심 속에서 절대자 하느님의 부르심을 받게 되어 있다. 그럴 경우 물질과 명성 따위 부질없고 스러지고 말 것에 집착하지 말고 단호하게 그 부르심에 응하여 ‘함께 사는 세상’, ‘하느님을 섬기는 세상’을 건설하는 데 이바지해야 할 것이다.


시편(16) 해설

<당신은 저의 주님, 저의 행복 당신밖에 없나이다>


올바른 사람, 하느님께서 보호해 주셔서 행복해 하는 사람, 자기 장래를 하느님께 맡기고 살아가는 사람이 부르는 노래와 기도를 이 시편에서 볼 수 있다. 하느님께 자신을 맡기는 그 같은 신뢰는 죽음 너머에까지 연장되는 신뢰다(10절).


올바른 사람은 주님만을 자기 모든 선익(자기 몫, 유산)으로 여기고, 하느님과 맺는 정다운 관계와 친교만을 자기 기쁨(자기 잔)으로 여기며, 다른 모든 것 위에 하느님을 선택한다. 하느님께서는 올바른 사람 곁에 항상 보호자로 계시며, 그 때문에 올바른 사람은 위험한 가운데서도 안전과 평온을 유지할 수 있다.


신약성경에서는(사도 2,25-31; 13,35-37), 이 시편을 메시아와 관련지어 해석하여, 예수님과 예수님의 부활에 적용한다.


제2독서( 갈라 4,31ㄴ-5,1.13-18) 해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해방하여 주셔서 우리는 자유로운 몸이 되었다>


우리는 자유로운 시대에 살고 있다. 노예를 종살이에서 벗어나게 하려고 돈을 치르듯이,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속량하려고 당신 수난과 죽으심과 피와 목숨을 우리 대신 몸값으로 지불해 주셨기 때문이다. 이제 사람은 사람의 노예가 아니게 되었다. 사람이 사람 위에 올라설 수도 없게 되었으며, 사람이 다른 사람에게 짓눌리거나 빼앗겨서는 결코 안 되게 되었다.


자유롭게 되었다 함은 무엇인가를 할 수 있게 되었다는 의미가 아니다. 자유롭다는 것은 육체의 욕정을 채우려 하지 않고, 성령께서 이끄시는 대로 살아가는 것을 말한다. 성령께서는 우리를 절대자 하느님과 친교를 맺도록 열어 주지만, 육체의 욕망과 육정은 우리를 우리 자신 안에 갇히게 한다. 자기 안에 갇힌 사람은 자기밖에 모르고 자기 가족과 자기 친구밖에 모르며 자기 나라밖에 모른다. 그런 이기주의와 자기중심주의를 벗어나서 진정 사람에게 열리고 인류전체에 열린 사람이라야 자유로운 사람이다. 자유인들만이 증오와 분열과 전쟁을 이겨내고 합심과 친교의 기쁨을 창조해 낼 수 있는 사람이다. 자유인들만이 다른 사람을 자기 욕망과 야욕을 충족시키기 위한 이용물로 여기지 않고, 다른 사람들에게 자기 노동과 땀과 생명까지 바칠 수 있는 사람들이다.


복음(루카 9,51-62) 해설

<예수님을 따라 예루살렘을 향하여 가는 길>


우리도 예루살렘을 향하여 간다. 예수님께 예루살렘을 향하여 나아가시는 것은 단호한 결단에 의해서였다. 예수님께서는 예루살렘에서 기다리고 있을 죽음을 똑똑히 알고 받아들이시는 것이다. 우리도 예수님을 따라가면 반드시 치욕과 수난과 죽음이 기다리고 있는 장소에 다다르게 된다는 것을 똑똑히 의식할 필요가 있다. 사회의 온갖 병리현상과 구조악은 결코 우리를 그냥 놔두지 않을 것이다. 하느님을 편들고 억울한 형제들을 편들어 반대하고 부딪치는 우리를 가두고 때리고 죽이기까지 할 것이다.


우리는 끝까지 예수님을 따른다. 스승 예수님의 삶을 이어가는 우리의 삶은 지상의 재물과 권세와 세력과 결탁하거나 영합할 수 없고, 그것들을 차지하고 누리는 것이 인생목표가 될 수 없다. 예수님처럼 우리도 ‘머리 둘 곳조차 없는’(58절) 사람이 되고, 뒤를 돌아보지 않는(62절) 사람이 된 다음, 억울하게 당하는 하느님의 백성을 해방하기 위하여 박해와 고문과 죽음까지라도 무릅쓰고 몸 바쳐 행동할 것이다.


우리는 막중한 소명을 받았다. 오늘도 그리스도께서는 우리 모든 사람 마음속에 당신 성령을 통하여 재촉하고 자극을 주신다. 사람이 온 세상을 다 얻을지라도 제 목숨, 참 생명을 잃으면 아무 소용이 없다고 일깨워 주고, 그러니 목숨을 내걸고 내던져 당신을 섬기고 인간해방과 인류해방을 위해 일생을 바치라고 부르신다. 그러한 자기헌신 안에만 인생의 참된  성취가 있다고 가르치신다.


묵상


제자가 된다는 의미


성경 안에서 우리는 스승-제자 사이의 관계에 관하여 흔히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심오한 관념을 발견하게 된다. 제자가 된다는 것은 단순하게 스승이 제시하는 가르침을 이해하는 정도에 그치지 않고, 생활의 도리에 대한 스승의 특별한 가르침을 받아들여 자기 것으로 삼는 것을 뜻한다.


성경에 나오는 제자가 지닌 또 다른 특징은, 그가 스승이 하는 인간적인 말을 따르지 않고, 예언자가 되었든 현자가 되었든, 스승의 가르침을 통하여 전달되는 하느님의 말씀을 따른다는 점이다. 예언자들의 신탁에 따르자면, 메시아 시대에는 더 이상 지상의 스승들을 필요로 하지 않고, 우리 모두가 주님의 제자가 되고(이사 54,13), 직접 주님을 알게 될 것이다(예레 31,34).


이 같은 개념에 비추어 우리는 예수님의 제자가 된다는 것이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는지 쉽게 알 수 있다. 복음서들에서, 제자란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받아들이고, 그분의 인격에 자기 전 존재를 내걸고 매달리는 사람을 가리킨다. 이 제자됨은 항구히 지속되는 생활조건을 말한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믿는 사람들에게 항상 스승이 되어 주실 것이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당신과 함께 있도록, 즉 당신 생명에 친밀하게 참여하고 당신 인격과 당신 운명에 깊이 동참하고 나누도록 부르심을 받고 있다. 예수님의 제자가 됨으로써 우리는 스승을 중심으로 삼는 새로운 존재가 되어 새로운 생활을 하게 된다. ‘스승과 함께 있다.’는 것은 그분의 구원 사업에 참여함을 뜻한다.


바오로가 내리는 정의에 따르면, 제자가 된다는 것은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스도와 더불어 살아감’을 뜻한다. 이 표현은 주님과 주님께 속한 사람들 사이에 맺어지는 영적 관계를 나타낸다. 새로운 아담(사람)이신 그리스도께서는 당신 안에 당신께 속한 모든 사람들을 껴안으신다(로마 5,15). 그리스도께 속한 사람들은 그리스도의 수난과 죽음과 부활을 함께 하며 그분과 친교를 맺는 사람들이다.


극심한 시련 가운데서도 스승의 운명에 동참한 예수님의 제자들은(마르 10,38-39) 약속된 나라를 차지할 것이다(마태 19,28-29). 아버지께서 몸소 당신 아들을 따른 제자들에게 영예를 안겨주실 것이다.


예수님을 뒤따르는 길


제자로서 무엇인가를 이해하는 이 같은 시각은 예수님을 따라 예수님과 더불어 걸어가려 하는 우리에게 중대한 과제들을 안겨준다.


먼저, 우리를 주님과 맺어 주는 관계에 철저함이다. 그 관계는 우리 존재와 실존과 생활을 근본적으로 뒤바꾸어 놓고 새롭게 만든다. 우리는 이제 마음 내키는 대로 아무렇게나 욕심대로 살아갈 수 없고, 우리 귀감이신 예수님의 말씀에 맞추어 살아가야 하게 되었다.


이제 우리 생명과 생활은 우리 것이 아니게 되었다. 그리스도를 본받는다는 것은 그리스도의 생활방식대로 살아간다는 뜻이고, 그리스도의 제자가 된다는 것은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스도의 생명으로’ 그리스도다운 삶을 살아간다는 뜻이다. 이제는 더 이상 내가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내 안에서 그리스도께서 살아가신다는 뜻이다. 이기심과 욕심에 사로잡힌 옛 사람을 청산하고 그리스도처럼 사람을 순수한 애정으로 대하는 새 사람이 된다는 뜻이다.


오늘 복음은 우리에게 그리스도를 따르자면 용기를 내야 한다고 말한다. 구세주이신 사람의아들(인자)은 머리 둘 자리도 없는 분이시다. 예수님을 따르자면 피상적이고 감상적인 태도로는 불가능하다. 예수님의 철저한 가난을 실천적으로 받아들여야만 가능하다. 희생이 필요하며, 자기 욕심을 깡그리 버리고 포기해야만 가능하다.


 예수님을 따르자면, 단호하게 결단을 내리고, 자꾸만 미련이 남아서 뒤를 돌아보는 일이 있어서는 안 된다. 많은 사람을 구하기 위하여, 그리고 세상의 죄를 없애기 위하여 하느님의 어린 양 그리스도와 더불어 철저한 가난과 십자가를 끝까지 지고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들은 분명 부활하는 영광과 환희를 맛볼 것이다.



[필진정보]
김수복 : 살레시오 수도회에서 10년 동안 수도생활을 하고, 그 동안 서울 가톨릭 신학대학 6년을 수료했다. 40년 동안 5개 언어에서 성서와 신학 관련 서적을 우리말로 옮기는 번역노동자였다. 현재 사랑하는 아내와 아들 둘, 손자 셋이 있다.
TAG
키워드관련기사
0
  • 목록 바로가기
  • 인쇄


가스펠툰더보기
이전 기사 보기 다음 기사 보기
모바일 버전 바로가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