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사 메일전송
(김수복) 연중 제12주일 독서·복음 해설
  • 김수복
  • 등록 2016-06-18 12:31:00
  • 수정 2016-06-18 12:37:34

기사수정


제1독서(즈카 12,10-11)

<창으로 찔렀던 자를 쳐다보리라>


나는 다윗 집안과 예루살렘 주민들 위에 은총과 자비를 구하는 영을 부어 주겠다. 그리하여 그들은 나를, 곧 자기들이 찌른 이를 바라보며, 외아들을 잃고 곡하듯이 그를 위하여 곡하고, 맏아들을 잃고 슬피 울듯이 그를 위하여 슬피 울 것이다. 그날에 므기또 벌판에서 하닷 림몬을 위하여 곡하는 것처럼 예루살렘에서도 곡소리가 크게 울릴 것이다. 


시편(62)

<하느님, 당신은 저의 하느님, 저는 당신을 찾습니다>


제2독서(갈라 3,26-29)

<그리스도와 하나 되는 세례를 받은 여러분은 다 그리스도를 입었습니다>


형제 여러분, 여러분은 모두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믿음으로 하느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그리스도와 하나 되는 세례를 받은 여러분은 다 그리스도를 입었습니다. 그래서 유다인도 그리스인도 없고, 종도 자유인도 없으며, 남자도 여자도 없습니다. 여러분은 모두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하나입니다. 여러분이 그리스도께 속한다면, 여러분이야말로 아브라함의 후손이며 약속에 따른 상속자입니다 


복음(루카 9,18-24) 

<사람의 아들은 많은 고통을 겪어야 하리라>


예수님께서 혼자 기도하실 때에 제자들도 함께 있었는데, 그분께서 “군중이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하고 물으셨다. 제자들이 대답하였다. “세례자 요한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어떤 이들은 엘리야라 하고, 또 어떤 이들은 옛 예언자 한 분이 다시 살아나셨다고 합니다.”  예수님께서 다시, “그러면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하시자, 베드로가 “하느님의 그리스도이십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그것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고 엄중하게 분부하셨다. 

예수님께서는 이어서 “사람의 아들은 반드시 많은 고난을 겪고 원로들과 수석 사제들과 율법 학자들에게 배척을 받아 죽임을 당하였다가 사흘 만에 되살아나야 한다.” 하고 이르셨다. 예수님께서 모든 사람에게 말씀하셨다. “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오려면, 자신을 버리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 정녕 자기 목숨을 구하려는 사람은 목숨을 잃을 것이고, 나 때문에 자기 목숨을 잃는 그 사람은 목숨을 구할 것이다.  




연중 제12주일 독서·복음 해설



제1독서(즈카 12,10-11) 해설

<창으로 찔렀던 자를 쳐다보리라>


즈카르야는 이사야 다음으로 신약성경에서 가장 많이 인용된 예언자다(참조. 요한 19,37). 즈카르야서가 취한 문학유형은 ‘예언자다운 탄식’이다. 즈카르야서는 종말론적 내지 묵시문학적 묘사를 통하여 이름을 드러내지 않는 신비스럽고 비할 데 없이 불가사의한 인물을 소개하고 있다.


‘주님의 날’, 예루살렘이 구원받는 시간에 대한 종말론적 환시를 보는 가운데, 예언자는 거룩한 도시 예루살렘과 하느님께서 사랑하시는 이스라엘 백성의 해방과 전면적인 쇄신이 고통 받는 신비스러운 인물에 의하여 이루어지는 것을 본다. 창으로 찔린 그 사람의 고통을 통하여 이루어지는 것을 본다. 즈카르야는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인류역사가 기다리는 사람, 십자가에 못 박혀 죽은 사람을 예견하고 있다.


메시아라는 인물에 관하여 제2즈카르야는 분명하게 상반되는 두 가지 개념을 제시한다. 즉, 평화를 가져다주는 빛나는 인물로도 제시하고, 한편 고통과 탄식에 파묻힌 인물로도 제시한다. 자기 백성의 죄악으로 말미암아 가슴이 창에 찔려 죽게 될 인물로도 제시한다.


그 인물을 그처럼 이중적으로 묘사하게 된 동기는 아마도 정치적 상황이 바뀐 데서 비롯된 것 같다. 즈카르야는 여기에서 ‘충실한’ 왕이면서도 애석하게 일찍 죽은 수수께끼 같은 요시야라는 인물을 상기시키는 듯싶다.


메시아 왕은 ‘수난하는 종’이 되어 죽음으로써 모든 사람의 고통과 죽음을 깨부수실 것이었다. ‘수난하는 종’이신 그분은 오늘날에도 당신을 따르는 사람들의 수난과 죽음을 통하여 인류를 해방과 구원으로 이끄신다.


시편(62) 해설

<하느님, 당신은 저의 하느님, 저는 당신을 찾습니다. 제 영혼이 당신을 목말라합니다>


하느님을 애타게 찾는 시편작가의 목마름으로 전례 회중은 즈카르야가 하는 말을 듣고서 신비스럽고 높으신 분을 향한 어두우면서도 집요하고 지칠 줄 모르는 긴장을 자기 안에 되살린다. 그분은 말할 수 없는 고통을 받고 창에 찔려 높이 매달려 모든 사람이 나누어받을 새 생명의 원천이 되신다.


사람이 목말라하고 간절히 기다리는 구원자는 신비스럽게도 지독한 고통과 멸시와 죽음을 당하는 인물이다. 이는 곧 이승살이에서는 고통과 멸시와 죽음을 그분과 더불어 그분처럼 적극적으로 흔연히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음을 가르치고 있다. 빛나는 승리와 영광과 부활은 가난한 사람들 및 억눌리는 사람들과 더불어 고통과 멸시와 죽음을 당한 뒤에 받게 되어 있다.


제2독서(갈라 3,26-29) 해설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우리는 하느님의 자녀가 된다>


유다인들의 율법주의로 돌아가려는 갈라티아 신자들을 앞에 두고, 이 대목에서 바오로는 하느님의 자녀가 누리는 온전한 자유를 얻으려면 율법에 얽매인 옛 사람으로부터 벗어나야 한다고 말한다. 신앙으로써 그리스도와 맺은 새로운 관계, ‘그리스도 안에’ 살게 된 새로운 삶은 그들을 하느님의 자녀로 만든다. 그리스도께서 보내 주신 성령을 받아들이고 성령의 지시를 따라 사는 사람은 누구나 하느님의 자녀다. 바오로는 그런 사람은 누구나 그리스도를 “옷 입듯이 입는다”라고 표현한다.


그리스도 안에 들어가고 그리스도를 옷 입듯이 입고 그리스도의 성령을 생명으로 삼은 사람들 사이에는 그 어떤 차별도 있을 수 없다. 유다인이나 그리스인이나 종이나 자유인이나 남자나 여자나 백인이나 흑인이나 황인이나 아무런 차별이 없다. 그리스도의 생명과 성령만이 모든 사람의 보편적 일치를 가져다줄 수 있다. 아브라함을 통하여 하느님께서 온 인류에게 해주신 약속은 모든 사람이 그리스도 안으로 들어가고 그리스도의 생명으로 살아갈 때 완성되며, 그때에는 모든 사람과 모든 백성이 아무런 차별 없이 하느님의 자녀로서 상속을 받게 될 것이다.


복음(루카 9,18-24) 해설

<그리스도께서 구세주시라고 고백하려면 생명을 내걸어야 한다>


이 부분은 예수님께서 당신이 예루살렘으로 올라가 수난과 죽음을 당하리라고 세 번에 걸쳐 예고하신 가운데 그 첫 번째다.


수난과 죽음은 사람들 한가운데서 살아가시는 예수님을 이해하는 열쇠가 된다. 예수님께서 당신 사명과 직무를 수행하시자, 군중이 당신이 어떤 메시아이신지 참모습을 깨닫지 못하고, 요한을 목 베어 죽인 헤로데는 혼란에 빠지며(루카 9,9), 군중은 기를 쓰고 예수님을 따라온다. 이때 예수님께서는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실 당신의 시간’이 다가왔음을 예고하신다.


빵을 많게 하여 군중을 배불리 먹인 다음, 예수님께서 조용한 곳으로 물러가신 것은 깊은 신학적 의미를 가지고 있다. 이제 ‘고통과 죽음을 당하실 주님의 종’은 인류 전체를 위한 결정적인 구원의 잔치를 준비하신다. 예수님께서 마련하실 잔치는 이스라엘 민족이 로마의 자리를 대신 차지하여 세계를 정복하고 지배하도록 해주는 구원과 잔치가 아니었다. 그 잔치는 이스라엘 민족 중심의 이기적인 닫힌 잔치일 수 없었다. 이스라엘 민족이 갈망하는 진정한 해방과 구원도 온 인류가 차별 없이 똑같은 형제자매로서 한 밥상에 둘러앉는 잔치에 참여하고 그 잔치를 마련하는 데 이바지함으로써만 이루어질 것이었다.


예수님께서 ‘하느님께서 보내신 그리스도’이심을 고백한 베드로와 신자들도 ‘인류가 한 밥상에 둘러앉아 벌이는 잔치’를 마련하기 위하여 예수님처럼 고통과 멸시와 십자가와 죽음을 기꺼이 받아들일 때 그리스도의 영광과 부활에 참여하게 되어 있다.


묵상

 

창으로 찔렀던 자를 쳐다보리라


고개를 들어 우러러 쳐다보는 것이 새로운 생명 안으로 들어가고 살아가는 첫걸음이다. 구약에서도 우러러 쳐다보는 사람들은 죽음에서 구출되었다(참조. 민수 21,9). 신약에서도 우러러 쳐다보는 사람들은 생명과 구원을 받는다(참조. 요한 1,35-46). 그러나 십자가에 매달리시는 시간에 사람이 되신 하느님을 외면하지 않고 똑바로 쳐다보는 것은 극적인 순간이 되며 선택의 기로가 된다(마르 14,39; 루카 23,47). 오늘날 우리 신앙생활에서도 그것은 똑같이 되풀이되고 있다.


십자가에 못 박혀 계신 ‘사람이 되신 하느님’께 눈길을 떼지 않고 응시하는 일, 희생되신 어린 양이 부활하기까지 지켜보는 일, 우리와 함께 계시는 하느님 곧 인류와 더불어 인류 역사 한가운데서 살아가는 하느님께서 결정적으로 나타나실 때까지 지켜보는 일이야말로 우리 구원과 직결된 일이다.

그 일은 우리 안에 우리를 위하여 생명을 바치신 분의 능력이 힘차게 활동하도록 하는 것이요, 아버지의 이름에 대한 당신의 결정적인 증거를 드러내 보이시도록 하는 것이다. 또한 그 일은 사람이 되어 오시어 사람들에게 연민에 넘치는 사랑을 보여 준 하느님 아버지를 닮은 사람들이 되는 것이다.


십자가에 못 박혀 죽은 인간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는 일는 저주받은 사람들을 대신하여 저주를 받고(갈라 3,13) 죄인들을 대신하여 죄인 취급을 받으신(2고린 5,21) 그분의 삶을 자기 삶으로 선택하는 것이다. 동시에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분을 바라보는 일은 그분이 하느님의 아들로서 가지셨던 본래의 영광을 받아 들어 높여지셨듯이, 우리도 최후의 승리와 영광과 빛과 구원과 부활을 얻으리라고 확신하는 것이다.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리스도를 쳐다보는 극히 위험스런 일’은 결정적인 선택과 결단을 요구하는 일로서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으로서 사느냐 그렇지 않느냐를 판가름하는 기준점이 된다.


“이 사람을 보라, 사람이 되신 하느님을 보아라, 세상을 위하시는 하느님 사랑의 헤아릴 수 없는 신비를 보아라” -디트리히 본회퍼


그들은 울었다


사람이 되신 하느님께서 십자가에 돌아가신 사건을 앞에 두고서, 쳐다보고 바라볼 줄 아는 마음이 보이는 첫 반응은 뼈저리게 참회하는 일이다. “군중은 그 모든 광경을 바라보고 가슴을 쳤다”(루카 23,48)


십자가에 못 박히시는 예수님을 보고 여인들만 통곡한 것이 아니라, 예루살렘에서 베드로의 첫 설교를 들은 사람은 남녀노소 할 것 없이 마음속으로 통곡했다. “사람들은 이 말을 듣고 마음이 꿰찔리듯 아파하며 베드로와 다른 사도들에게 ‘형제 여러분,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하고 물었다”(사도 2,37)


요구되는 것은 ‘회개하는 일’이요, 목숨을 걸고 회개하는 일이다. 더 이상 내 마음속에 이기심과 자기중심주의라는 장벽과 장애물과 울타리를 치지 않기로 결단을 내리는 일이요, 그러기 위해서는 가진 모든 것뿐 아니라 생명마저도 버리기로 각오하는 일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생애를 본받고 따르는 일이야말로 십자가에 못 박히신 하느님의 말씀이 건네시는 결정적인 초대다.


십자가를 거치지 않고는 부활에 이를 수 없는 까닭이다.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리스도의 어리석음’ 외에 다른 참 지혜는 없다(1고린 2,2). 위기를 안겨 주는 십자가를 받아들이지 않고는 인생의 참 뜻을 깨달을 도리가 없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인류와 고통을 함께 나누려고 땅 위에 내려오셨다… 그분이 우리 사랑 때문에 겪으신 고통과 슬픔은 어떤 것이었던가? 그 고통과 슬픔은 사랑의 고통이요 슬픔이었다. 우주만물을 지으신 하느님, 인내롭고 매우 정이 많은 우리 아버지께서 어떤 모양으로든 우리와 더불어 고통과 슬픔을 나누시지 않겠는가? 또 사람을 돌보고자 헌신하는 그분이 인간 고통과 슬픔을 함께 느끼시지 않겠는가?… 하느님께서 우리 탈선을 견뎌 주시듯이, 하느님의 외아들께서도 우리가 마땅히 받을 고통과 슬픔을 당신이 대신 받으신다. 아버지께서 결코 무정한 분이 아니시기 때문이다” -오리게네스



[필진정보]
김수복 : 살레시오 수도회에서 10년 동안 수도생활을 하고, 그 동안 서울 가톨릭 신학대학 6년을 수료했다. 40년 동안 5개 언어에서 성서와 신학 관련 서적을 우리말로 옮기는 번역노동자였다. 현재 사랑하는 아내와 아들 둘, 손자 셋이 있다.
TAG
키워드관련기사
0
  • 목록 바로가기
  • 인쇄


가스펠툰더보기
이전 기사 보기 다음 기사 보기
모바일 버전 바로가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