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사 메일전송
(김수복) 부활 제6주일 독서·복음 해설
  • 김수복
  • 등록 2016-04-30 10:46:49

기사수정


제1독서(사도 15,1-2.22-29)

<성령과 우리는 다음의 몇 가지 필수사항 외에는 여러분에게 다른 짐을 지우지 않기로 결정하였습니다>


유다에서 어떤 사람들이 내려와, “모세의 관습에 따라 할례를 받지 않으면 여러분은 구원을 받을 수 없습니다.” 하고 형제들을 가르쳤다. 그리하여 바오로와 바르나바 두 사람과 그들 사이에 적지 않은 분쟁과 논란이 일어나, 그 문제 때문에 바오로와 바르나바와 신자들 가운데 다른 몇 사람이 예루살렘에 있는 사도들과 원로들에게 올라가기로 하였다.  

그때에 사도들과 원로들은 온 교회와 더불어, 자기들 가운데에서 사람들을 뽑아 바오로와 바르나바와 함께 안티오키아에 보내기로 결정하였다. 뽑힌 사람들은 형제들 가운데 지도자인 바르사빠스라고 하는 유다와 실라스였다.  

그들 편에 이러한 편지를 보냈다. “여러분의 형제인 사도들과 원로들이 안티오키아와 시리아와 킬리키아에 있는 다른 민족 출신 형제들에게 인사합니다. 우리 가운데 몇 사람이 우리에게서 지시를 받지도 않고 여러분에게 가서, 여러 가지 말로 여러분을 놀라게 하고 정신을 어지럽게 하였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사람들을 뽑아 우리가 사랑하는 바르나바와 바오로와 함께 여러분에게 보내기로 뜻을 모아 결정하였습니다. 바르나바와 바오로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위하여 목숨을 내놓은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또 유다와 실라스를 보냅니다. 이들이 이 글의 내용을 말로도 전할 것입니다. 성령과 우리는 다음의 몇 가지 필수 사항 외에는 여러분에게 다른 짐을 지우지 않기로 결정하였습니다. 곧 우상에게 바쳤던 제물과 피와 목 졸라 죽인 짐승의 고기와 불륜을 멀리하라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이것들만 삼가면 올바로 사는 것입니다. 안녕히 계십시오.” 


시편(66)

하느님, 민족들이 당신을 찬송하게 하소서


제2독서(묵시 21,10-14.22-23)

<하늘로부터 내려오는 거룩한 도성을 보여 주었습니다>


그 천사는 성령께 사로잡힌 나를 크고 높은 산 위로 데리고 가서는, 하늘로부터 하느님에게서 내려오는 거룩한 도성 예루살렘을 보여 주었습니다. 그 도성은 하느님의 영광으로 빛나고 있었습니다. 그 광채는 매우 값진 보석 같았고 수정처럼 맑은 벽옥 같았습니다.  그 도성에는 크고 높은 성벽과 열두 성문이 있었습니다. 그 열두 성문에는 열두 천사가 지키고 있는데, 이스라엘 자손들의 열두 지파 이름이 하나씩 적혀 있었습니다. 동쪽에 성문이 셋, 북쪽에 성문이 셋, 남쪽에 성문이 셋, 서쪽에 성문이 셋 있었습니다. 그 도성의 성벽에는 열두 초석이 있는데, 그 위에는 어린양의 열두 사도 이름이 하나씩 적혀 있었습니다. 

나는 그곳에서 성전을 보지 못하였습니다. 전능하신 주 하느님과 어린양이 도성의 성전이시기 때문입니다. 그 도성은 해도 달도 비출 필요가 없습니다. 하느님의 영광이 그곳에 빛이 되어 주시고 어린양이 그곳의 등불이 되어 주시기 때문입니다. 


복음(요한 14,23-29)

<성령께서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기억하게 해 주실 것이다>


예수님께서 그에게 대답하셨다. “ 누구든지 나를 사랑하면 내 말을 지킬 것이다. 그러면 내 아버지께서 그를 사랑하시고, 우리가 그에게 가서 그와 함께 살 것이다. 그러나 나를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내 말을 지키지 않는다. 너희가 듣는 말은 내 말이 아니라 나를 보내신 아버지의 말씀이다. 나는 너희와 함께 있는 동안에 이것들을 이야기하였다. 보호자,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께서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시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기억하게 해 주실 것이다. 나는 너희에게 평화를 남기고 간다. 내 평화를 너희에게 준다. 내가 주는 평화는 세상이 주는 평화와 같지 않다. 너희 마음이 산란해지는 일도, 겁을 내는 일도 없도록 하여라. ‘나는 갔다가 너희에게 돌아온다.’고 한 내 말을 너희는 들었다. 너희가 나를 사랑한다면 내가 아버지께 가는 것을 기뻐할 것이다. 아버지께서 나보다 위대하신 분이시기 때문이다. 나는 일이 일어나기 전에 너희에게 미리 말하였다. 일이 일어날 때에 너희가 믿게 하려는 것이다. 




부활 제6주일 독서·복음 해설


제1독서(사도 15,1-2.22-29) 해설

<하느님께서는 사람을 차별대우하지 않으신다>


이 대목은 역사적으로 문제가 된 점 한 가지를 제시한다. 사도행전의 저자는 여기에서 두 번에 걸쳐서 열린 사도회의를 종합하고 요약하고 있는 것 같다. 첫째 회의는(1-12절) 그리스도교로 개종한 이방인들이 할례를 받아야 하는지 여부를 논의했다. 베드로가 주관한 그 회의에서 개종한 이방인들은 할례를 받지 않아도 된다고 결정이 내려졌다. 둘째 회의는 (13절 이하) 예루살렘 교회의 으뜸인 야고보가 주관했다. 베드로와 바오로는 이 둘째 회의에 참석하지 못했다. 이 둘째 회의에서는 이방인들에게 요구할 준수사항들이 논의되었다.


이방인들에게 요구한 최소한의 준수사항들도 실상 절대적인 의무 규정이 아니고, 다만 유다교에서 개종한 그리스도인들을 공연히 걸려 넘어지지 않게 하기 위한 준수사항이었다. 우상에게 바친 제물이나 피, 그리고 목 졸라 죽인 짐승을 먹지 말라는 규정을, 히브리인들은 하느님께서 노아에게 내리신 율법이라고 확신하고 따라서 모든 사람에게 유효한 율법이라고 확신하고 있었다. 그 율법을 어기는 것을 히브리인들은 우상숭배나 다름없이 여기고 있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주신 새로움이란 구원이 율법을 지켜서 당연한 권리처럼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해서 거저 내려진다는 사실에 있다. 율법준수는 다만 공으로 받은 구원에 대하여 하느님께 감사를 드리도록 우리를 인도하는 역할을 할 따름이다.


그리스도께서는 어느 특정한 관습이나 문화, 제도나 법률에 얽매이시지 않는다. 그분은 공동체를 이루는 집단이나 사회 속에 계시면서 사람들을 구원의 길로 인도하신다. 따라서 그리스도의 이름을 팔아서 다른 사회와 문화를 침략하거나 파괴하는 짓은 그리스도를 이용하고 배신하는 행위이다. 그리스도께서는 결코 사람을 차별대우하지 않으신다. 그리스도께서는 인종과 피부색, 동양과 서양, 남과 북 사이를 갈라놓고 가로막는 울타리를 헐어 내신 분이다.


시편(66) 해설

<하느님, 민족들이 당신을 찬송하게 하소서>


추수와 풍성한 수확을 감사하는 이 시편은 아마 초막절과 관련이 있는 성싶다. 풍성한 수확은 모두 하느님의 선물, 특히 성령의 선물로 여겼다. 한편 이 축제는 율법을 채우기 위하여 만방으로부터 모든 백성이 예루살렘으로 모여 드는 미래의 위대한 날을 바라보고 있다. 사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그 기대는 정말 실현되기 시작한다. 즉 그리스도 안에서 이방인들이 성령을 받고 하느님의 백성 안으로 들어오고 또 그로 말미암아 과거, 현재, 미래의 모든 사람이 성령을 받게 된 것이다.


제2독서(묵시 21,10-14.22-23) 해설

<친교의 기쁨이 흘러넘치는 나라>


새로운 예루살렘이 어느 날 갑자기 올 것인가? 반드시 그렇지만은 않을 것이다.


앞으로 올 새로운 예루살렘은 현재 역사 한가운데서 실현해 가고 있음을 적어도 세 가지 요소가 드러낸다.


무엇보다 먼저 ‘예루살렘’이라는 명칭이 그렇다. 성경을 읽어 본 독자라면 누구나 예루살렘은 하나밖에 없음을 알고 있다. 그 예루살렘은 이스라엘 백성의 생활 심장부로서 유다 산들 위에 자리 잡고 있다. 분명 예루살렘은 하늘로부터 내려온 것처럼 보이지만 엄연히 땅위에 발을 딛고 서 있는 현실적인 예루살렘이다. 그런데도 우리 신자들은 그 사실을 너무 쉽게 잊어버리는 경향이 있다.


그리고 새 예루살렘은 ‘사도들’이라는 기초 위에 서 있다. 따라서 새 예루살렘은 성령을 받은 그리스도인들의 공동체인 교회이다.


새 예루살렘은 이미 그리스도를 닮은 사람들의 공동체로서 이미 이 지상의 인류 역사 가운데 시작되고 있으며 힘차게 자라고 있다.


마지막으로 새 예루살렘은 결코 70년경 잿더미가 된 예루살렘 성전이나 다른 어느 특정한 성전에 갇혀 있지 않는다. 하느님의 어린 양 그리스도와 그리스도를 따라 그리스도처럼 살아가는 사람들 자신이 바로 하느님의 성전이다(참조. 1코린 3,16; 2코린 6,6). 사실 그런 사람들 안에 하느님의 성령께서 거처하고 계시기 때문이다(1코린 6,19).


우리 속에서 그리고 우리가 모여 있는 그 한가운데서 활약하시는 성령의 활동, 그리고 친교의 기쁨을 함께 나누며 생활하는 새 예루살렘이 이미 역사 가운데 시작되었다. 우리는 이 예루살렘이 어느 날엔가 완성되리라는 믿음을 가지고 생활 안에서 그 날을 가리키는 새로운 증표를 늘 발견해 내야 한다.


복음(요한 14,23-29) 해설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성령을 보내주시어 우리와 친밀하게 지내시도록 하시겠다고 약속하신다>

 

이 대목의 핵심은 “주님, 저희에게는 주님 자신을 드러내시고 세상에는 드러내지 않으시겠다니 무슨 까닭입니까?”(22절)라고 유다가 던진 질문에 있다. 여기에서도 ‘그리스도의 나타나심’은 당신을 따르는 사람들의 공동체인 교회를 통하여 이루어진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다.


오늘 읽은 복음에서 중요한 점 몇 가지를 살펴보자면, 무엇보다 먼저 예수님께서 당신 제자들에게 평화를 선물로 주신다는 것이다. 이 선물이 지닌 특징은 두 가지다. 하나는 ‘세상이 주는 평화’(부와 권력의 착취와 독점이 가져다주는 안일과 향락)이고 다른 또 하나는 ‘그리스도께서 주시는 평화’(다른 사람에게 자신의 노동과 목숨까지 내놓고 나누는 친교의 기쁨이 우러나는 평화)이다. 그리스도께서 주시는 평화는 결국 당신 마음과 애정과 살과 피를 나누어 주시는 당신 자신 외에 다른 것이 아니다(참조. 에페 2,14). 평화는 휴전상태나 냉전 상태가 아니라 성령을 통하여 우리 가운데 거처하시는 당신 자신이시다.


26절에서 성령을 보내겠다고 하신 약속은 당신이 사람을 끔찍이 사랑하듯 당신을 본받아 사람을 사랑하려고 십자가를 지며 고통에 몸부림치면서 죽어 가는 사람들에게 당신 성령을 보내시겠다는 약속이다(참조. 15,21.28).


그 선물은 기쁨을 샘솟게 한다(28절). 그리스도께서 아버지께로 돌아가시면 성령을 보내실 것이다. 이는 당신 수난을 예고하기 전에 하신 말씀이다.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을 지극히 사랑하여 목숨을 바쳐 죽으려는 그 순간에 “성령을 쏟아 부으신다.”(요한 19,30) 그분이 죽으실 때 그분의 옆구리에서는 피와 물 그리고 성령께서 모든 인류에게 쏟아 부어졌다. 그 때문에 요한 복음서 저자는 “예수님께서 영광스럽게 되지 않으셨기 때문에, 성령께서 아직 와 계시지 않았던 것이다.”(요한 7,39)고 말할 수 있었다. 그 성령께서는 그리스도와 더불어 수난하는 사람들과 그 공동체에게 위로와 희망과 용기와 기쁨을 샘솟게 하신다.


묵상


성령과 교회


서로 같은 형제자매인 모든 사람을 온 정성을 바쳐 섬김으로써 우리는 그리스도를 증거할 수가 있다. 어떤 부류의 사람들이든 사람에 대한 그리스도인의 태도는 반드시 성령의 무한하신 자유를 두려운 마음으로 존중하는 것이라야 한다. 그리하여 그리스도와 성령의 신비가 사람들에게 전달되도록 하고 다른 부수적인 외부적 요소를 강요해서는 결코 안 된다. 왜냐하면 성령께서는 모든 사람을 당신 안에 받아들이고, 여러 가지 모양으로 활동하면서 모든 사람을 한 가족으로 만들고자 하시기 때문이다.


우리는 성령의 무한한 신비를 어떻게 모든 사람에게 증거하고 전달할 수 있을까? 또한 우리가 그리스도처럼 이 세상을 살아가려는 공동체인 교회라고 할 때 우리는 모든 사람을 구원하기 위해 무엇을 해야 할까? 그것은 그리스도께서 하신 것처럼 사람을 사랑하는 것이고  자기가 바라는 것을 자기 자신이 먼저 해 주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독단과 독선을 넘어서 자신을 열고, 인위적이며 비인간적인 요소들을 걷어내고, 그리스도와 성령께서 내 안에 거침없이 오실 수 있도록 자신을 비우는 것이다. 특정한 지역의 문화나 이념을 다른 지역에 옮겨 심고 강요하려는 행위는 그리스도께서 당신 죽음과 부활로써 보내 주신 성령을 거역하는 행위가 된다. 왜냐하면 모든 시대, 모든 지역, 모든 문화 속에 이미 성령께서 활발하게 활동하고 계시고 모든 사람들의 관습이나 문화를 받아들이고 계시기 때문이다.


또한 개인의 명성이나 자기중심의 사고방식도 은밀한 악마적인 욕심에서 시작되므로 구원적인 성과를 거둘 수 없을 뿐더러 다른 사람을 위해 아무것도 할 수 없다. 다른 사람을 위해 몸 바치겠다는 생각이 좀처럼 나지 않으면 진리와 거리가 생긴 탓이다. 진리와 진실은 오로지 그리스도와 성령뿐이시므로 우리는 겸손하고 가난한 마음으로 그 진리가 다치지 않도록 해야 한다. 그러므로 서로 다른 문화와 관습에서 다양한 가치를 발견하고 성령의 지시에 따라 몸 바칠 자세를 갖출 수 있어야 한다. 성령만이 예수님께서 당신 생애 동안 가르치신 바를 알아듣게 하고 아버지와 그리스도께서 이루신 사랑으로 인도하여 새로운 창조와 구원에 이바지하게 하신다.


우리 형제자매인 모든 사람에게, 몸 바치는 사랑 외에 다른 부담을 지우지 않도록 하고, 모든 사람이 하느님을 아버지로 모신 형제자매임을 증거하고, 그러한 사랑 앞에서는 세상의 그 어떤 권세와 폭력도 무너질 수밖에 없다는 확신을 보여 주어야 한다. 우리는 모든 사람 안에 계신 성령 앞에 겸손한 애정을 기울여 순종하는 자세를 취하면서 그리스도처럼 모든 사람을 섬길 수 있어야 한다.




[필진정보]
김수복 : 살레시오 수도회에서 10년 동안 수도생활을 하고, 그 동안 서울 가톨릭 신학대학 6년을 수료했다. 40년 동안 5개 언어에서 성서와 신학 관련 서적을 우리말로 옮기는 번역노동자였다. 현재 사랑하는 아내와 아들 둘, 손자 셋이 있다.
TAG
키워드관련기사
0
  • 목록 바로가기
  • 인쇄


가스펠툰더보기
이전 기사 보기 다음 기사 보기
모바일 버전 바로가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