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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수복) 주님 세례 축일 독서·복음 해설
  • 김수복
  • 등록 2016-01-09 12:43:40
  • 수정 2016-01-09 12:47: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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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독서(이사 42,1-4.6-7)

<보라, 내가 마음에 드는 종이로다>


여기에 나의 종이 있다. 그는 내가 붙들어 주는 이, 내가 선택한 이, 내 마음에 드는 이다. 내가 그에게 나의 영을 주었으니 그는 민족들에게 공정을 펴리라. 그는 외치지도 않고 목소리를 높이지도 않으며 그 소리가 거리에서 들리게 하지도 않으리라. 그는 부러진 갈대를 꺾지 않고 꺼져 가는 심지를 끄지 않으리라. 그는 성실하게 공정을 펴리라. 그는 지치지 않고 기가 꺾이는 일 없이 마침내 세상에 공정을 세우리니 섬들도 그의 가르침을 고대하리라.   주님인 내가 의로움으로 너를 부르고 네 손을 붙잡아 주었다. 내가 너를 빚어 만들어 백성을 위한 계약이 되고 민족들의 빛이 되게 하였으니 보지 못하는 눈을 뜨게 하고 갇힌 이들을 감옥에서, 어둠 속에 앉아 있는 이들을 감방에서 풀어 주기 위함이다. 


시편(28) 

주님께서 당신 백성에게 평화의 복을 주시리라 


제2독서(사도 10,34-38)

<하느님께서 성령을 그에게 부어 주셨다>


베드로가 입을 열어 말하였다. “나는 이제 참으로 깨달았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사람을 차별하지 않으시고, 어떤 민족에서건 당신을 경외하며 의로운 일을 하는 사람은 다 받아 주십니다. 하느님께서 예수 그리스도 곧 만민의 주님을 통하여 평화의 복음을 전하시면서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보내신 말씀을 여러분은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요한이 세례를 선포한 이래 갈릴래아에서 시작하여 온 유다 지방에 걸쳐 일어난 일과, 하느님께서 나자렛 출신 예수님께 성령과 힘을 부어 주신 일도 알고 있습니다. 


이 예수님께서 두루 다니시며 좋은 일을 하시고 악마에게 짓눌리는 이들을 모두 고쳐 주셨습니다. 하느님께서 그분과 함께 계셨기 때문입니다.”  


복음(루카 3,15-16.21-22)

<너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다>


백성은 기대에 차 있었으므로, 모두 마음속으로 요한이 메시아가 아닐까 하고 생각하였다. 그래서 요한은 모든 사람에게 말하였다. “나는 너희에게 물로 세례를 준다. 그러나 나보다 더 큰 능력을 지니신 분이 오신다. 나는 그분의 신발 끈을 풀어 드릴 자격조차 없다. 그분께서는 너희에게 성령과 불로 세례를 주실 것이다. 


온 백성이 세례를 받은 뒤에 예수님께서도 세례를 받으시고 기도를 하시는데, 하늘이 열리며 성령께서 비둘기 같은 형체로 그분 위에 내리시고, 하늘에서 소리가 들려왔다. “너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다.” 




◇ 주님 세례 축일 ~ 독서·복음해설 ~


제1독서(이사 42,1-4.6-7) 해설

<여기에 나의 종이 있다. 내 마음에 드는 이다>

 

하느님께서 뽑고 하느님 마음에 드는 주님의 종은 ‘이스라엘 백성을 위한 약속’으로 선포되고, ‘모든 사람과 모든 백성의 빛’으로 선포된다.


‘종에 대한 노래들’(이사 42,1이하; 49,1이하; 50,4이하; 52,13이하)은 알 수 없는 인물에 대하여 말하고 있다. 주님의 종, 그는 누구인가? 카이사르인가, 이스라엘인가, 예언자(즉 제2이사야)인가, 아니면 메시아인가? 누구를 가리키고 있는지 가려내기가 힘들다. 여러 가지 뜻으로 해석할 수 있겠지만 그 모두 하느님께서 가져다주시는 구원이 계속 극적인 형태를 띤다는 것을 암시한다. 하느님께서는 종이라고 부를 수 있는 여러 인물들을 통하여 당신의 구원을 이루신다.


여기서 우리는 종-메시아의 소명과 임명을 볼 수 있다. 종은 성령의 힘을 받아 자기에게 맡겨진 사명을 수행한다. 재판을 한다. 3절에는 재판이 실제로 어떻게 진행될 것인가를 그려 주고 있다. 그 종이 와서 법정에서 피고에게 선고를 내릴 때, 부러진 갈대를 잘라 버리지 않고, 깜박거리는 등불을 꺼버리지 않는다. 종은 단죄하고 처벌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구원하기 위해서 재판을 한다.


이 재판은 단지 이스라엘 백성에게만 해당하는 것이 아니라 ‘땅 위에 사는 모든 백성’(5-6절)에게 해당한다. 이렇듯 종은 하느님과 세상 사이에 맺어지는 ‘계약’이 되고 ‘약속’이 되며, 모든 사람과 모든 백성의 ‘빛’이 된다. 이것이 이스라엘의 사명이요 예수님의 사명이며 마침내 교회의 사명이다.


시편(28) 해설

<주님, 당신의 백성에게 평화의 복을 주시리라>


자연의 세력과 능력은 오직 하느님께로부터 나온다. 당신 백성에게 힘을 주고 평화를 복으로 내려 주실 분도 하느님뿐이시다. 웅장하고 거창한 자연 현상도 하느님의 ‘목소리’다. 그 자연 현상도 하느님께서는 복을 내려 주는 도구로 삼으신다.


백성이 진정으로 복을 받으려면, 하느님의 영광을 찬양하고 천상 전례를 되울려야 한다.

 

제2독서(사도 10,34-38) 해설

<하느님께서 성령을 그에게 부어 주셨다>


성령으로 ‘기름부음’을 받으신 예수님께서는 병자를 낫게 하는 은혜를 베풀고 복을 내리면서 사람들 사이를 지나가셨다.


베드로는 ‘이방인들’에게 행한 첫 설교에서 역사를 통하여 이루어지는 하느님 활동의 심오한 연속성을 밝힌다. 신명 10,17(하느님께서는 사람 사이에 차별을 두지 않으신다.)과 이사 52,7과 61,1(이스라엘 백성에게 평화를 선포하도록 성령을 통하여 종을 부르고 임명하신다: 이사 42,1이하)을 인용하면서, 베드로는 “하느님께서는 사람을 차별하지 않으시고, 어떤 민족에게서건 당신을 경외하며 의로운 일을 하는 사람은 다 받아주십니다.”라고 말한다(35절).


이러한 구약시대의 예고는 예수님께서 받으신 세례로써 이루어졌다. 세례를 받으실 때 예수님께서는 ‘종’으로 세워지셨다. 예수님께서는 ‘백성을 위한 약속’이 되고(이사 42,6), ‘모든 사람의 주님’이 되어, 그들을 지옥의 권세에서 벗어나게 하실 수 있게 되었다(참조. 이사 42,7; 61,1).


복음(루카 3,15-16.21-22) 해설

<예수님께서 세례를 받으시고 기도하실 때 성령께서 그분에게 내려오셨다>


세례자 요한은 사람들이 던지는 질문에 대답한다(15절). 요한은 메시아가 아니고, 오셔야 할 ‘강력하신 분’을 예고하는 사람일 뿐이다. 그분이 오시면 ‘성령과 불’로써 세례를 베푸실 것이며, 그 세례는 알곡은 곳간에 들이고 쭉정이는 꺼지지 않는 불에 태우는 심판이 될 것이다(참조. 말라 3,1-3). 오셔야 할 그분은 분노의 날, 무서운 날을 가져오는 분이다(참조. 스바 2,14-18). 이같이 말하는 요한이 메시아에 관한 그릇된 관념을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다. 요한이 하는 말은 심오한 사실을 드러내고 있다. 사실 예수님께서는 심판을 내리신다(참조. 요한 12,31). 그러나 그 심판은 이 세상을 그릇되게 다스리는 통치자를 멸망하게 하는 심판이요, 우리 죄악을 없애 주고 우리에게 구원을 가져다주는 심판이다. 예수님께서는 율법이 이루지 못한 것을 실현하신다. 죄인을 구원하심으로써 죄악과 악마의 세력을 단죄하고 처벌하신다(참조. 로마 8,3-4).


그 말을 하고 나서, 세례자 요한은 안심하고 사라질 수 있었다(19-20절). 그렇게 하여 심판이 시작된다. 루카 복음서는 세상에 대한 심판 그리고 하느님의 아들과 사탄이 겨루는 일대 전쟁을 계시하고 있다(참조. 4,1-12; 22,3).


그리고 “너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다.”라는 목소리가 들린다. 이 ‘아들’은 자연스럽게 시편 2,7절에 나오는 메시아 왕을 떠올리게 한다. 그리하여 심판은 새로운 창조가 된다.


그 하느님의 아들 예수님께서 기도하시자, 하늘이 열렸다(21절). 하느님께 거역한 아담(사람)은 하늘을 닫았지만, 순종하고 기도하는 예수님께서는 새로운 창조를 이룩하신다.


이제 예수님을 따라 하느님을 향하여 기도를 드리는 우리는 세상을 심판하면서 새로운 창조를 이룩하게 될 것이다.


묵상


예수님께서 받으신 세례와 우리가 받은 세례


‘주님의 드러나심’에 관한 신비를 기념하는 공현 축일은 전례적으로, 동방 박사들의 흠숭, 요르단 강에서 예수님께서 세례를 받으심, 가나에서 처음 행하신 기적이라는 세 가지 이야기에 대한 묵상을 통하여 펼쳐진다. 서방 교회의 전통은 동방 박사들의 흠숭에 관한 이야기를 공현 축일의 중심에 두고, 다른 두 가지 이야기는 보조적인 이야기로 취급한다. 세례 이야기는 공현 후 주일에 기념하게 함으로써 그 중요성을 강조한다.


예수님께서 받으신 세례


우리는 이미 복음서 해설에서 예수님께서 요르단 강에서 세례를 받으신 사건의 의미를 묵상한 바 있다. 여기서는 그 중에서 더 의미가 깊은 요소들을 몇 가지 살펴보기로 한다.


‘모든 의로움을 이루시다.’ 예수님께서 몸소 당신이 받으시는 세례를 설명하신다. ‘모든 의로움을 이루시기 위하여’ 세례를 받으신다고 말씀하신다. 이 신비스런 말씀의 뜻은 무엇인가?


예수님께서는, 요한이 메시아가 가까이 왔음을 선포하면서 베푸는 세례를 받음으로써, 세례자 요한의 사명이 참된 사명, 즉 하느님께로부터 받은 사명임을 증거하셨다. 예수님의 그 같은 태도와 처신은 당신의 길을 준비하는 선구자에 대한 공적 승인이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이 하느님께로부터 파견되어 오셨음을 군중들에게 믿으라고 요구하기 전에, 먼저 세례자 요한에게 고개 숙여 세례를 받아야 할 필요성을 느끼셨다(하느님께서 원하시는 모든 일을 다 채우심이 당연했다.).


다시 말하면, 요한도 하느님의 보내심을 받아 온 사람이고 주님의 길을 준비하기 위해 광야에서 외치는 목소리임을 공적으로 승인할 필요성을 느끼셨다. 예수님께서는 말로만이 아니라 겸손한 행동과 처신으로 세례자의 품위를 인정하신 것이다. 그리하여 죄인이 아니면서도 사람들 틈에 끼어 세례를 받으셨던 것이다.


또한 세례자 요한이 받은 사명이 하느님께로부터 받은 사명임을 인정함으로써, 예수님께서는 간접적으로 요한의 제자들과 군중에게 요한이 메시아의 오심을 증거하고 준비하도록 하느님께서 보내신 사람임을 인정하도록 요구하신다.


이처럼 요르단 강물에 예수님께서 내려가신 행위는 참회하고 구원을 기대하는 군중 속에 동참하시는 행위로서 중대한 메시아적 사건으로 변형된다.


‘메시아적 사건.’ 하느님께서 몸소 예수님을 당신의 가장 사랑하는 아들이라 선포하고 그 위에 당신 성령을 보냄으로써 세례자 요한의 선언을 장엄하게 인준하신다. 앞서 강조한 것처럼, 아버지의 말씀은 구약성경에 비추어 알아들어야 한다.


예수님께 선포된 말씀은(“너는 나의 사랑하는 아들이다.”) 시편 2장에서 원래 이스라엘 왕좌에 오르는 왕에게 적용한 말씀이다. 따라서 그 같은 선언은 예수님을 왕으로 축성하는 말씀이요, 하느님께서 세우시는 나라의 머리로서 선언하시는 말씀이다. 예수님께서는 왕으로서의 특권을 받아 하느님의 계획에 절대적인 충성을 바치면서 그 권능을 행사하실 것이다.


동시에 ‘주님의 종’이라는 인물에 관한 언급으로써 우리에게 메시아이신 예수님의 특징적인 성격을 제시한다. ‘주님의 종’이 받은 사명이 거룩하고 예언적인 사명인 것처럼, 예수님께서 받으신 사명도 왕다운 사명이고 예언자다운 사명이다. 예수님께서 죄인들 틈에 끼어 세례를 청하는 것을 보고 요한도 놀란다. 이 사실은 메시아가 ‘반역자의 하나처럼’ 되고, ‘많은 사람의 죄를 짊어지게’ 되리라는 예언을 상기시킨다(이사 53,11-12).


‘새로운 세상의 시작.’ 요르단 강의 장면에서 특이하게 의미 있는 사실은 성령께서 비둘기의 형상으로 하늘에서 내려오셨다는 사실이다. 이 비둘기는 홍수가 끝나자 노아에게 푸른 잎사귀를 물어온 비둘기와 비교할 수도 있을 것이다(창세 8,8-12). 이 비둘기는 심판의 때가 지나고 은총의 때가 시작되었음을 가리키고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요르단 강의 장면은 무엇보다도 창조의 장면과 비슷하다. 창조 때 하느님의 영(성령)이 물 위를 휘돌아 하느님의 전능을 드러내고, 사랑에 찬 섭리로써 창조 사업을 완수하셨다. 똑같은 성령께서 요르단 강물 위로 내려와서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창조를 시작하고, 우주 안에 당신이 원래 품으신 자비와 사랑을 다시 일으키신다.


성령을 통하여 하느님께로부터 축성을 받은 메시아 예수님께서는 세상을 악의 세력에서 구출해 내어 새로운 세상을 시작해 놓으셨다. 하느님께서 성령을 부어 주심으로써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의 권능을 지니게 되고, 그 하느님의 권능으로 사람들을 치유하고 구원하실 것이다(사도 10,38).


그리스도인이 받은 세례


예수님께서 받으신 세례를 고찰하다 보면 자연히 우리가 받은 세례를 묵상하게 된다. 사실 세례를 받음으로써 우리는 메시아의 사건에 참여하게 되고 요르단 강에서 시작된 새로운 세계 속으로 들어가게 된다.


‘그리스도 안에서 세례를 받다.’ 세례는 바로 우리를 그리스도와 하나 되게 하는 성사이다. 성 바오로는, 그리스도인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세례를 받는다고 말한다. 이 성사를 통하여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그리스도와 함께’ 묻히며, ‘그리스도와 함께’ 결정적으로 부활할 것이다(로마 6.3-11; 콜로 2,12-13).


세례를 받음으로써 그리스도인은 자기의 머리요 구원자이신 분과 하나가 되고, 그분과 더불어 구원에 도달하기 위하여 그분의 운명을 자기 운명으로 삼는다. 세례 받은 사람 안에서 그리스도의 구원 사건, 특히 죽음과 부활이 새롭게 재현된다.


성 바오로는 이 사실을 유명한 말로 표현하고 있다. 그리스도인들은 “그리스도의 죽음과 하나 되는 세례를 받은 사람들”이다(로마 6,3). ‘옛 사람’이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고 “더 이상 죄의 종노릇을 하지 않게 되었다.”(로마 6,6) 그와 동시에 세례는 ‘새로운 삶’의 시작을 가리킨다(6,4). “여러분은 세례 때에 그리스도와 함께 묻혔고, …그리스도 안에서 그분과 함께 되살아났습니다.”(콜로 2,12)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이 되었다. 그리스도인 안에서는 새로운 생명이 살고 자라고 있다. 그리스도인은 자기 주님을 옷 입듯이 입고(갈라 3,27), 그리스도 안에서 살고, 그리스도께서 그 안에 사신다.


‘성령 안에서 새로운 생명을 받아 살아간다.’ 바오로의 신학에 따르면, 세례 받은 사람은 ‘그리스도 안에’  있고, 동시에 ‘성령 안에 있다’(2코린 5,17; 로마 8,9). 그리스도와 성령께서 함께 그리스도인의 생활을 규정한다. 그것은 두 분이 다 하느님께로부터 당신 사랑을 증거하고 구원 사업을 수행하도록 보냄을 받은 분이시기 때문이다.


예수님께서 세례를 받으실 때 성령을 선물로 받으셨듯이, 세례를 받은 모든 사람도 성령을 선물로 받아 한 몸을 이룬다. ‘한 분이신 성령으로 세례를 받은 그들은’ 한 성령의 생명수를 받아 마신다(1코린 12,13). 세례의 성사는 아버지께서 사람들을 거룩하게 하고 올바르게 하라고 파견하신 그리스도의 힘과 성령의 개입으로 효력을 발휘한다(티토 3,4-6).


세례를 통하여 그리스도인은 하느님의 자녀가 되고, 마음속에 성령을 받아들이게 된다. 성령께서는 신자 안에서 ‘아버지!’ 하고 부르짖으신다. 세례를 받아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고, 속된 욕망에 따라 살지 않고, 성령 안에서 성령을 따라 사는 사람들은 결코 단죄 받지 않을 것이다. 


‘교회의 구성원이 된다.’ 이같이 그리스도와 하나가 되고 그분의 성령을 생명으로 받아 사는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의 신비체인 교회에 속하게 된다. 세례는 그리스도인들을 그리스도와 한 몸으로 만듦으로써, 그리스도께서 세례의 물로 거룩하게 하고 흠 없게 하여 깨끗하게 하신 공동체에 속하도록 한다(에페 5, 25-27).


교회의 단일성이란 신자들이 세례 때 받은 성령의 단일성에서 비롯된다. 사실 세례 받은 사람들 사이에는 어떠한 차별도 없다. 그들은 더 이상 속된 기준에 따라 살지 않는다. 세례는 그들로 하여금 옛 사람을 버리게 하고, 종족과 종교와 사회적 신분에 따른 어떠한 차별 대우도 용납하지 않게 한다. 


새로운 이스라엘 백성에 속하기 위해서는 ‘그리스도 안에서 할례를 받을’ 필요가 있다. 다시 말해서, 영적인 마음의 할례를 통하여 속된 생활을 벗어버릴 필요가 있다. 영적인 마음의 할례는 사람의 손을 빌어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세례를 통하여 성령을 선물로 받아야 이루어진다. “여러분은 또한 그분 안에서 육체를 벗어버림으로써, 사람 손으로 이루어지지 않는 할례 곧 그리스도의 할례를 받았습니다.”(콜로 2,11)


‘선교해야 하는 사명.’ 오늘의 축일은 우리로 하여금 예수님께서 받으시고 우리가 받은 세례의 의미를 묵상하게  한다. 우리가 거행하는 성찬례는 세례에 대한 인식과 세례가 우리 안에서 이루는 기묘한 업적에 대한 인식을 우리 안에 다시금 새롭게 할 기회가 된다. 동시에 우리의 선교적 사명을 거듭 새롭게 자각할 기회가 된다. 주님의 공현(주님께서 세상에 드러나심)은 시간과 역사 안에 계속 되어야 하고, 다른 모든 사람도 주님의 부르심에 자유로이 응답함으로써 그리스도를 만날 수 있게 해야 한다.


세례자 요한처럼 온 세상에 그리스도를 증거해야 한다. “과연 나는  보았다. 그래서 저분이 하느님의 아드님이시라고 내가 증언하였다.”(요한 1,34)



[필진정보]
김수복 : 살레시오 수도회에서 10년 동안 수도생활을 하고, 그 동안 서울 가톨릭 신학대학 6년을 수료했다. 40년 동안 5개 언어에서 성서와 신학 관련 서적을 우리말로 옮기는 번역노동자였다. 현재 사랑하는 마누라와 아들 둘, 손자 셋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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