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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은 생계수단이기 전에 인격의 자리다
  • 지성용
  • 등록 2026-06-30 13:3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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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Vatican Medi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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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1년 5월 15일, 교황 레오 13세는 「Rerum Novarum(새로운 사태)」을 반포했다. 산업혁명이 인간의 손을 기계의 부속품으로 만들고, 노동자의 땀을 자본의 이윤으로 바꾸던 시대였다. 교회는 그때 처음으로 근대 사회의 “새로운 사태” 앞에 서서 물었다. 인간의 노동은 상품인가, 인격의 표현인가. 


그로부터 정확히 135년이 지난 2026년 5월 15일, 레오 14세는 「Magnifica Humanitas」를 반포했다. 날짜는 우연이 아니다. 그것은 하나의 신학적 응답이다. 19세기의 공장이 노동자의 몸을 삼켰다면, 21세기의 인공 지능은 노동자의 시간, 주의력, 데이터, 감정, 심지어 미래의 가능성까지 삼키려 한다. 새로운 사태는 다시 왔다. 다만 이번에는 더 조용하고, 더 세련되고, 더 보이지 않는 얼굴로 왔다. 


노동은 생계수단이기 전에 인격의 자리다


「Magnifica Humanitas」는 사회교리의 오래된 출발점을 다시 붙든다. 교회는 노동 안에서 “사회 문제 전체를 이해하기 위한 본질적 열쇠”를 본다.1) 이 말은 단순한 경제 분석이 아니다. 인간을 어떻게 볼 것인가에 대한 신앙의 선언이다. 그리스도교 전통에서 노동은 벌이 아니다. 노동은 인간이 세상 안에서 자기 인격을 드러내고, 공동선에 참여하며, 하느님의 창조 활동에 응답하는 자리다. 성 베네딕도의 “기도하고 일하라”는 말은 수도원의 규칙만이 아니다. 인간다운 삶의 질서다. 기도 없는 노동은 쉽게 착취가 되고, 노동 없는 기도는 쉽게 공허한 영성이 된다. 그래서 회칙은 분명히 말한다. “노동은 단순한 도구가 아니라 우리 삶의 존엄을 표현하고 키운다.”2) 이 문장은 짧지만, 그 안에는 사회교리의 핵심이 들어 있다. 


인간은 일자리가 있어서 존엄한 것이 아니다. 인간이 존엄하기 때문에 그의 노동이 보호되어야 한다. 순서가 바뀌면 모든 것이 무너진다. 일하는 사람만 쓸모 있고, 생산하는 사람만 가치 있으며, 성과를 내는 사람만 존중받는 사회가 되면 노인, 장애인, 실업자, 병든 사람, 아직 일터에 들어가지 못한 청년은 모두 사회의 가장자리로 밀려난다. 그러나 복음은 그렇게 말하지 않는다. 인간의 존엄은 생산성에서 오지 않는다. 인간의 존엄은 하느님의 모상에서 온다. 노동은 그 존엄을 표현하는 길이지, 존엄을 허락받기 위한 시험장이 아니다. 


AI는 노동을 해방하는가, 노동자를 길들이는가


오늘 우리는 인공 지능이 노동을 해방할 것이라는 말을 자주 듣는다. 반복 업무를 줄이고, 생산성을 높이고, 사람에게 더 창조적인 시간을 돌려줄 것이라고 말한다. 틀린 말은 아니다. 그러나 절반만 맞는 말은 때로 거짓말보다 위험하다. 「Magnifica Humanitas」는 150항에서 오늘의 변화를 정확히 짚는다. 자동화, 로봇공학, 인공 지능이 서로 결합하면서 노동의 구조 자체가 빠르게 바뀌고 있다.3) 문제는 변화 그 자체가 아니다. 문제는 그 변화가 누구를 위해 설계되고 있느냐는 것이다.


「Antiqua et Nova」는 이미 경고했다. 인공 지능은 일상 업무를 대신하며 생산성 향상을 약속하지만, 실제 노동 현장에서는 노동자들이 기계의 속도와 요구에 맞추도록 강요받는 경우가 많다.4) 이것이 핵심이다. 기계가 인간을 돕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기계의 리듬에 맞추어 호흡해야 하는 상황. 이것이 오늘 일터의 현실이다. 콜센터 상담원은 알고리즘이 정한 응답 시간 안에 말해야 한다. 배달 노동자는 플랫폼이 계산한 동선과 속도에 맞추어 움직여야 한다. 사무직 노동자는 AI가 만든 보고서와 지표의 속도를 따라가야 한다. 교사와 상담자와 연구자마저 이제는 인간을 만나는 시간보다 시스템에 입력하고 증명하는 시간에 더 많이 붙들린다. 


이것은 진보가 아니다. 이것은 인간의 리듬을 기계의 리듬에 종속시키는 새로운 훈육이다. 그래서 회칙은 말한다. “단지 성과가 아니라 인격을 중심에 둔 시스템을 설계해야 한다.”5) 이 한 문장은 AI 시대 노동 윤리의 기준이 되어야 한다. 좋은 기술은 인간을 더 빨리 소모시키는 기술이 아니다. 좋은 기술은 인간이 더 인간답게 일하고, 쉬고, 관계 맺고, 성장하도록 돕는 기술이다. 


실업은 숫자가 아니라 삶의 붕괴다


인공 지능 시대의 가장 차가운 단어는 “효율”이다. 기업은 효율을 말하고, 정부는 혁신을 말하며, 시장은 경쟁력을 말한다. 그러나 그 말들 사이에서 사라지는 얼굴들이 있다. 해고된 노동자, 첫 일자리를 찾지 못하는 청년, 플랫폼의 불안정 노동에 매달리는 사람들, 중년 이후 다시 배워야 하지만 배울 시간과 돈을 갖지 못한 사람들이다.


「Magnifica Humanitas」는 성 요한 바오로 2세의 말을 다시 불러온다. 실업은 심각한 악이며, 특히 대규모로 확산될 때 진정한 사회적 재앙이 될 수 있다.6) 실업은 단순히 소득이 사라지는 사건이 아니다. 실업은 하루의 질서가 무너지는 사건이다. 아침에 일어날 이유가 약해지고, 사람을 만날 자리가 줄어들며, 가족 안에서 말수가 줄어든다. 자기 존중감이 흔들리고, 미래를 상상하는 힘이 약해진다. 오래 지속되는 실업은 한 사람의 경제 문제가 아니라 영혼의 상처가 된다. 


특히 청년에게 노동은 더 깊은 의미를 갖는다. 회칙은 노동이 단지 수입의 원천이 아니라 정체성이 형성되고, 관계가 짜이며, 책임을 배우고, 자기 소명을 식별하는 결정적 영역임을 환기한다.7) 청년이 일자리를 얻지 못한다는 것은 단지 월급을 받지 못한다는 뜻이 아니다. 자기 삶을 시작할 기회를 빼앗긴다는 뜻이다. 우리는 청년에게 “노력하라”고 쉽게 말한다. 그러나 사회가 시작 선을 지워버린 뒤에 노력만 요구하는 것은 폭력이다. AI 전환의 비용을 청년 개인에게 떠넘기면서, 다시 배우라, 더 경쟁하라, 더 유연해지라고 말하는 사회는 정의롭지 않다. 


보이지 않는 손들이 AI를 떠받치고 있다


AI는 마치 공중에서 작동하는 것처럼 보인다. 채팅창에 질문을 넣으면 즉시 답이 나오고, 이미지는 순식간에 생성되고, 번역은 매끄럽게 이루어지며, 데이터는 구름 위 어딘가에서 흐르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회칙은 이 환상을 찢는다. 


「Magnifica Humanitas」는 단호하게 말한다. 인공지능의 세계에는 비물질적이거나 마법적인 것이 아무것도 없다. 즉각적이고 완벽해 보이는 답변은 수많은 인간의 침묵하는 노동 위에 서 있다.8) 누군가는 데이터를 분류한다. 누군가는 혐오와 폭력과 음란과 죽음의 이미지를 걸러낸다. 누군가는 낮은 임금을 받고 모델 학습에 필요한 문장과 이미지를 정리한다. 누군가는 우리가 보지 않는 곳에서 하루 종일 화면 속 잔혹한 콘텐츠를 보며 그것이 안전한지 위험한지 표시한다. 그들의 눈과 신경과 마음은 AI의 깨끗한 화면 뒤에서 닳아간다. 그리고 더 아래에는 광산이 있다. 희토류와 광물을 캐는 사람들, 위험한 환경에서 일하는 청소년과 어린이들, 먼지와 독성과 붕괴 위험 속에서 몸을 내어주는 이들이 있다. 


우리가 “스마트”하다고 부르는 기술의 바닥에는 결코 스마트하지 않은 노동이 있다. 매끄러운 인터페이스 뒤에는 거친 손이 있고, 빠른 연산 뒤에는 상처 입은 몸이 있다. 한국의 신자들이 AI 창을 열 때, 그 화면 뒤에는 보이지 않는 노동의 사슬이 있다. 우리는 그 사슬을 보아야 한다. 보지 못하면 편리함은 쉽게 공범이 된다. 


새로운 노예제를 외면하지 말라


회칙이 가장 강하게 말하는 지점은 여기에 있다. “새로운 노예제에 맞선 투쟁은 인공지능과 디지털 변혁의 윤리적 식별을 위한 결정적 시금석이다.”9) 이 문장은 지나치게 강한 표현이 아니다. 오히려 정확하다. 노예제는 과거의 제도만을 뜻하지 않는다. 인간이 자신의 몸과 시간과 자유를 잃고, 타인의 이윤을 위해 소모되는 구조라면, 그것은 언제든 새로운 형태의 노예제가 될 수 있다. 


오늘의 노예제는 쇠사슬을 차고 오지 않는다. 계약서, 플랫폼 약관, 하청 구조, 데이터 작업, 알고리즘 평가, 글로벌 공급망의 이름으로 온다. 더 중요한 것은 회칙의 자기비판이다. 교회는 과거 노예제를 단죄하는 일에 충분히 빠르지 못했다. 인간 존엄을 말하면서도, 실제 역사 속에서는 너무 늦게 말했고, 너무 조심스럽게 말했고, 때로는 침묵했다. 회칙은 그 부끄러운 기억을 피하지 않는다. 그리고 묻는다. 디지털 시대에도 같은 잘못을 반복할 것인가. 


이 물음은 교회만을 향하지 않는다. 대학, 기업, 정부, 언론, 시민사회, 그리고 AI를 사용하는 우리 모두를 향한다. 우리는 편리함 앞에서 너무 쉽게 도덕적 질문을 멈춘다. 그러나 신앙인은 질문을 멈출 수 없다. 누가 이 기술로 이익을 얻는가. 누가 위험을 떠안는가. 누가 보이지 않게 되는가. 누가 침묵 속에서 소모되는가. 


모두를 위한 노동이 사라진 사회는 평화로울 수 없다


「Magnifica Humanitas」는 기술 발전이 곧 인간 발전이라는 순진한 믿음을 거부한다. 회칙은 경고한다. 사회가 인구의 작은 일부에게만 노동을 보장한다면, 많은 사람은 강요된 비활동, 책임의 부재, 일상의 헌신과 자극의 부재 속에 놓이게 된다. 그 결과 높은 기술 발전 수준과 정반대되는 인간적·문화적 빈곤이 생겨난다.10) 이것이 우리가 직면한 역설이다. 기술은 발전하는데 인간은 가난해질 수 있다. 생산성은 높아지는데 삶의 의미는 낮아질 수 있다. 데이터는 넘쳐나는데 관계는 메마를 수 있다. 사회는 더 빠르게 움직이는데 사람은 자기 자리를 잃을 수 있다. 


그런 사회는 오래 평화로울 수 없다. 일할 수 있는 자리, 기여할 수 있는 자리, 인정받을 수 있는 자리가 사라지면 사람은 분노하거나 체념한다. 분노는 혐오 정치로 흐르고, 체념은 우울과 고립으로 흐른다. 그러므로 노동의 문제는 단지 경제 정책의 문제가 아니다. 민주주의의 문제이고, 공동체의 문제이며, 영성의 문제다. 


변혁의 비용을 개인에게 떠넘기지 말라


회칙은 추상적 위로에 머물지 않는다. 156항은 구체적으로 말한다. 자동화와 인공지능의 도입은 고용 보호, 재교육, 노동자 참여의 검증 가능한 선택과 함께 이루어져야 한다.11) 중요한 말은 “함께”다. 일자리가 사라진 뒤에 개인에게 알아서 살아남으라고 말하는 것은 사회적 책임이 아니다. 기술 전환을 추진하는 기업과 정책을 설계하는 국가는 그 전환의 비용을 함께 져야 한다. 노동자는 변화의 희생자가 아니라 변화의 주체로 참여해야 한다. 


재교육도 마찬가지다. “배우라”는 말은 쉽다. 그러나 누가 비용을 낼 것인가. 누가 시간을 보장할 것인가. 누가 실패해도 다시 설 수 있는 안전망을 만들 것인가. 이 질문에 답하지 않는 재교육 담론은 또 하나의 책임 전가일 뿐이다. AI 시대의 정의는 단순히 신기술을 빨리 도입하는 데 있지 않다. 정의는 기술 전환 속에서도 사람이 버려지지 않게 하는 데 있다. 기술보다 먼저 사람을 세우는 것, 효율보다 먼저 생명을 묻는 것, 경쟁보다 먼저 공동선을 놓는 것. 이것이 교회가 말해야 할 사회교리의 언어다. 


인간이 일할 자리를 갖는 사회


「Rerum Novarum(새로운 사태)」의 시대에 교회는 산업자본주의의 공장 문 앞에서 노동자의 존엄을 말했다. 「Magnifica Humanitas」의 시대에 교회는 인공 지능과 플랫폼 자본주의의 서버 앞에서 다시 인간의 존엄을 말한다. 장소는 바뀌었지만, 질문은 같다. 인간은 무엇인가. 노동은 무엇인가. 기술은 누구를 위해 존재하는가. 


우리는 분명히 말해야 한다. 인간이 일자리 때문에 존엄한 것이 아니다. 존엄한 인간이기에 일할 자리를 보장받아야 한다. 인간이 기계의 속도에 맞추어 소모되는 사회가 아니라, 기술이 인간의 존엄을 섬기는 사회를 만들어야 한다. 


AI 시대의 노동 윤리는 이 한 문장에서 시작된다. 사람이 먼저다. 노동은 상품이 아니다. 기술은 인간을 대체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인간을 더 인간답게 살리기 위해 존재해야 한다. 이것이 「Rerum Novarum」에서 「Magnifica Humanitas」까지 이어지는 135년의 응답이다. 그리고 이것이 오늘 우리가 다시 들어야 할 복음의 사회적 목소리다.



1) 회칙 「Magnifica Humanitas」, 148항. 성 요한 바오로 2세, 회칙 「Laborem Exercens」 3항의 “사회 문제 전체를 이해하기 위한 본질적 열쇠” 표현 참조. 

2) 같은 문헌, 149항. 

3) 같은 문헌, 150항. 

4) 「Antiqua et Nova」, 67항. 「Magnifica Humanitas」 150항이 이를 인용함. 

5) 「Magnifica Humanitas」, 150항. 

6) 같은 문헌, 151항. 성 요한 바오로 2세, 「Laborem Exercens」 18항 참조. 

7) 같은 문헌, 167항. 미국 가톨릭 주교회의 자료 인용. 

8) 같은 문헌, 173항. 

9) 같은 문헌, 174항. 

10) 같은 문헌, 154항. 

11) 같은 문헌, 156항.









[필진정보]
지성용 : 천주교 인천교구 사제, 가톨릭관동대학교 중독재활상담학과 교수, 한국영성심리분석상담학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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