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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는다는 것은 인격적인 행위
  • 김수복
  • 등록 2018-09-07 12:38: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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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독서(이사 35,4-7ㄴ) 해설

<귀머거리의 귀가 열리고 벙어리의 입이 열리리라>


이사 34-35는 종말론적 성격이 짙은 대목으로서 이사야의 ‘제2묵시록’이라 칭한다. 반역하는 족속들이 심판을 받고 단죄를 당하기 전에 주께서는 당신 백성에게 구원을 마련하신다. 35장에는 앞장의 흔적이 아무것도 없다. 34장에는 주께서 뭇 민족들과 나라들에게 심판을 내리시는 장면이 묘사되어 있다.


에돔은 심판과 단죄를 받아 박살당한 나라들의 전형으로 묘사되어 있다. 주께서 보츠라에서 에돔 사람들을 죽이고, 에돔 땅은 유황이 타오르는 역청 바다가 되고, 폐허가 된 땅 위에는 음흉하고 사나운 짐승들이 우글거리게 된다.


그러나 35장에는 이스라엘 백성의 승리가 빛난다. 변형된 사막에서 새로운 탈출을 체험한 뒤, 이스라엘은 시온 산에서 하나의 백성으로 확립되고 에덴동산처럼 변화된 땅에서 살게 된다. 여기서는 분명히 분산되어 헤매던 백성이 순례하는 모습으로 장엄하게 되돌아오는 상태를 묘사하고 있다.


35장 전체가 환희로 넘치고, 약한 자와 핍박받는 자와 불구자들에 대한 애정 어린 관심으로 넘친다. 환희로 시작되고 환희로 끝난다. “광야와 메마른 땅은 기뻐하여라....”(1절) “기쁨과 즐거움이 그들과 함께 하여 슬픔과 탄식이 사라지리라.”(10절)


그러나 중심 부분에서 저자는 구원의 놀라운 효과를 묘사하고 있다. 그 효과로 자연이 활력을 얻어 활짝 꽃피고, 약한 자들과 불구자들이 안정을 얻고 치유된다. 절름발이가 그냥 걷는 것이 아니라 춤추듯이 뛰어다니고, 말 못하던 혀가 그냥 말하는 것이 아니라 그 안에서 샘들이 솟아오른다. 그 모든 것이 낙원으로 돌아가는 것 같다.


구원에 대한 이 같은 시적 묘사는 주께서 당신 백성의 운명을 본래의 광채로 회복하시는 활동을 그린 묘사다. 하느님이 이루어 주시는 구원은 시간의 제약을 넘어서고, 이스라엘 백성이라는 단순한 제약을 넘어서서, 모든 사람·모든 백성·우주 만물이 하느님과 완전히 재결합하는 구원이다. 그러므로 신약에서 메시아께서 가져다주시는 결정적 구원을 묘사하기 위해 이 대목이 언급되는 것은 지극히 자연스런 일이다(참조. 마르 7,37).


시편(145) 해설 

<내 영혼아, 주님을 찬양하여라>


이 시편은 다섯 개의 ‘알렐루야’ 시편 가운데 첫 번째 것으로서 “억울한 이들에게 올바른 일을 하시며 굶주린 이들에게 빵을 주시고 붙잡힌 이들을 풀어 주시고 눈먼 이들의 눈을 열어 주시며 꺾인 이들을 일으켜 세우시는” 구원자이신 하느님을 찬양하는 노래이다(7-9절. 참조. 마태 9,30; 사도 26,18).


주께서 당신께 충실한 사람들과 항상 함께 계시므로, 그들은 더 이상 두려워 떨 필요가 없다. 주께서는 나그네·고아·과부·실업자·일용직 노동자·비정규직 노동자·농부·천덕꾸러기들을 지켜 주는 분이시다. 가진 것 없고 의지할 데 없는 사람들에게 무관심하거나 무시하거나 천대하거나 괴롭히는 사람은 악한 사람으로 그들을 보호하시는 하느님한테서 벌 받을 각오를 해야 한다.


제2독서(야고 2,1-5) 해설

<하느님은 가난한 사람들을 택하여 당신 나라를 차지하게 하셨다>


야고보는 그리스도인 공동체에게 교회생활이나 사회생활을 하는 가운데 사람을 차별대우하지 말라고 당부한다. 이미 구약 시대에도 사람을 차별대우하는 것은 심판을 받게 된다고 말한 바 있고(신명 1,17), “재판할 때 불의를 저질러서는 안 된다. 너희는 가난한 이라고 두둔해서도 안 되고, 세력 있는 이라고 우대해서도 안 된다.”(레위 19,15)고 당부했다.


신약성경에서도 이 같은 치우치지 않는 공정성은 하느님의 본질적 특성 중 하나다. “나는 이제 참으로 깨달았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사람을 차별하지 않으시고, 어떤 민족에서건 당신을 경외하며 의로운 일을 하는 사람은 다 받아주십니다.”(사도 10,34)고 베드로는 말한다. 따라서 “하느님이 사람을 차별하지 않으시니”(로마 2,11) 하느님 앞에서 모든 사람은 평등하며 똑같이 귀한 하느님의 자녀들이 되어야 할 사람이다.


그리스도인들의 모임에서 부자들이라 해서 특별한 관심과 대접을 받고, 가난한 사람들은 별로 대수롭지 않게 취급당하거나 무시당하는 사례가 있어서는 결코 안 된다고 야고보는 역설한다.


하느님은 “지혜로운 자들을 부끄럽게 하시려고 이 세상의 어리석은 것을 선택하셨다. 그리고 하느님께서는 있는 것을 무력하게 만드시려고, 이 세상의 비천한 것과 천대받는 것 곧 없는 것을 선택하셨다.”(1코린 1,27) 실상 하느님은 가난하고 약하고 억눌리는 노예들이던 이스라엘 사람들을 이집트의 억압에서 해방했고, 어떤 민족 가운데서나 그리고 인류 가운데서 가난하고 억눌린 사람들을 해방하는 구원사업을 전개하고 계신다.


하느님은 가난한 사람들을 택하여 당신 나라를 차지하게 하신다. 하느님 나라는 ‘나눔의 정의와 사랑’이 다스리는 나라다. 그런 하느님 나라를 이룩하라고 부르심을 받은 장본인들이 현실적으로 가난하고 억눌린 사람들이다.


그런 사람들을 외면하고 소외시키고 그런 사람들이 접근하기 쉬운 공동체라야 그리스도인 공동체다. 품팔이꾼이나 중소기업과 영세기업 노동자들이나 천덕꾸러기들이 안식할 수 있는 공동체다. 그런 사람들(하느님의 사람들)이 하느님의 나라를 펴기로 활동하는 공동체가 그리스도인 공동체다. 


복음(마르 7,31-37) 해설

<예수님께서는 귀머거리를 듣게 하고 벙어리를 말하게 하셨다>


▲ 지난 6월 18일, 민주적 사법개혁을 위한 미사 ⓒ 곽찬


먼저 복음서 안에서 기적이 가지고 있는 의미를 밝힐 필요가 있겠다. 기적이란 유다인의 공동체 안에 메시아께서 현존해 계심을 입증하는 증표이다. 그 기적은 또한 구약의 예언에 기초를 두고 있다. 기적은 단순한 물리적 치료를 넘어서 그리스도께서 지니신 권능의 참된 본질을 밝혀 준다. 그 본질은 ‘죄악에서 벗어나게 하는 일’이다.


그리고 몇몇 기적(마르 1,40-45; 5,21-43; 8,22-26)에서는 예수님께서 보인 메시아로서의 권능과 그 사건들을 한사코 감추시려는 예수님의 의도 사이에 긴장감이 엿보인다. 만일 예수님께서 하느님 아들이신 당신 영광을 드러내 놓고 밝히고, 군중의 열광을 받아들이셨다면, 당신 수난과 죽음은 불가능했을 것이고, 사람의 아들 메시아로서의 진정한 승리를 쟁취하지 못하셨을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메시아로서 ‘하느님 아들다운 인간 생애’를 완성하고 완수하고 성취시키심으로써 모든 인간으로 하여금 당신을 따르고 당신처럼 인생을 살아 낼 수 있다는 가능성을 보여주셔야만 했다. 그래서 당신이 하느님의 아들이심을 내세우지 않으셨다. 당신 기적들이 가리키는 바와 같이 가난하고 병든 사람들을 해방하기 위해서는 몸소 순수한 인간으로서 ‘완벽한 인간 승리’의 길을 열어 놓으셔야만 했다.


예수 그리스도와 그리스도인들이란 눈을 뜨게 하고 귀를 트이게 하는 사람들이다. 가난하고 약하고 굶주리고 병들고 죽어 가는 사람들, 가진 것 없고 의지할 데 없는 사람들, 일하지 않으면 당장 굶어야 하는 하층민들로 하여금 자기들도 어엿한 하느님의 자녀로서 떳떳한 대우를 받아야 함을 깨닫게 하고 ‘나눔의 정의와 사랑’을 자기 안에 먼저 심게 하고 사회 안에 실현하게 하는 사람들이다.


묵상


믿는다는 것은 인격적인 행위이다.


예수님께서는 기적을 행하면서 매우 뜻깊은 상징적인 행동을 취하신다. 마르코는 신학적인 의미를 돋보이게 하려고 의도적으로 예수님께서 취하신 그런 행동을 보고하고 있다. 예수님께서는 기적을 행하시기 전에 귀먹은 반벙어리를 군중으로부터 따로 멀리 데리고 가셔서 그를 치유해 주신다.


예수님께서는 당신 자신을 열어 놓으신다. 병을 고치고 건강을 되찾는 것은 언제나 인간이 하느님과 직접 인격적으로 만남으로써 이루어진다. 그리스도인이란 전력을 다하여 자기 자신을 열어 놓고 참으로 인격적인 만남을 이룰 수 있다는 가능성을 믿는 사람이다.


마르코는 자기 복음서 전체를 통하여 인간이 자기 자신을 열어 하느님과 인격적으로 만나고 다른 사람들과 인격적으로 만나게 되는 관계는 결코 익명의(이름을 감춘) 대중적인 관계일 수 없음을 분명히 밝히고 있다. 단순히 교회에 나간다거나 교회의 무슨 단체에 속하여 있다는 사실 때문에 자기가 그리스도인라고 생각하는 것은 지극히 위험한 착각일 수 있다.


그리스도인이란 단순히 믿지 않는 무리로부터 떨어져 나와 믿는 무리에 소속된 사람이 아니다. 내적인 마음의 변혁과 방향전환 없이는 그리스도인이라 스스로 말할 수 없다. 그리스도인이란 하느님의 능력으로써 완전히 새로운 현실과 인생 목적에 자신을 열어 놓는 사람이다.


기적은 볼 수 있는 행동을 통하여, 그리스도께 사로잡힌 그리스도인 안에서 무엇이 이루어지는가를 깨닫게 해 준다. 인격 전체의 존재론적 변혁이 이루어짐을 깨닫게 해 준다. 도저히 들을 수도 없고 말할 수도 없는 상태에서 참된 것을 말하고 들을 수 있는 상태로 바꿔짐을 깨닫게 해 준다. 생명으로 가득 찬 관계와 개방이 이루어짐을 깨닫게 해 준다. “보라, 내가 새 일을 하려 한다. 이미 드러나고 있는데 너희는 그것을 알지 못하느냐?”(이사 43,19)


하느님은 당신 말씀으로써 살아나는 기쁨, 생명의 기쁨을 선포하신다.


그래서 우리는 그리스도인 숫자가 수억 명이 되고 주일에 교회에 나오는 신자 수가 얼마고 하는 통계 숫자에 집착하거나 자부심을 가져서는 좀 곤란하다. 그 대신 우리가 이기심에서 얼마나 벗어났으며, 과연 다른 사람들을 섬기는 데 자기 생활과 생애의 의미를 걸고 있는지, 하느님 아버지의 뜻이 땅에서 한시바삐 이루어지도록 온 힘을 기울이고 있는지를 따져야 할 일이다.


하느님의 말씀을 그대로 따르기 위하여 자기 생존과 뿌리를 뒤흔드는 위험을 감수하는 사람은 억누를 길 없는 승리의 함성을 지르고 기쁨에 넘친 노래를 부를 수 있다. 그런 사람들을 통하여 가난한 사람들 가운데 하느님의 말씀이 선포되고 받아들여진다.




연중 제23주일 독서·복음



제1독서(이사 35,4-7ㄴ)

<그때에 눈먼 이들은 눈이 열리고 귀먹은 이들은 귀가 열리리라>


마음이 불안한 이들에게 말하여라. “굳세어져라, 두려워하지 마라. 보라, 너희의 하느님을! 복수가 들이닥친다, 하느님의 보복이! 그분께서 오시어 너희를 구원하신다.” 그때에 눈먼 이들은 눈이 열리고 귀먹은 이들은 귀가 열리리라. 그때에 다리 저는 이는 사슴처럼 뛰고 말 못하는 이의 혀는 환성을 터뜨리리라. 광야에서는 물이 터져 나오고 사막에서는 냇물이 흐르리라. 뜨겁게 타오르던 땅은 늪이 되고 바싹 마른 땅은 샘터가 되리라.” 


시편(145)

내 영혼아, 주님을 찬양하여라


제2독서(야고 2,1-5)

<하느님께서는 세상의 가난한 사람들을 골라 당신 나라를 차지하게 하셨다>


형제 여러분, 영광스러우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면서, 사람을 차별해서는 안 됩니다. 가령 여러분의 모임에 금가락지를 끼고 화려한 옷을 입은 사람이 들어오고, 또 누추한 옷을 입은 가난한 사람이 들어온다고 합시다. 여러분이 화려한 옷을 걸친 사람을 쳐다보고서는 “선생님은 여기 좋은 자리에 앉으십시오.” 하고, 가난한 사람에게는 “당신은 저기 서 있으시오.” 하거나 “내 발판 밑에 앉으시오.” 한다면, 여러분은 서로 차별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또 악한 생각을 가진 심판자가 된 것이 아니겠습니까? 나의 사랑하는 형제 여러분, 들으십시오. 하느님께서는 세상의 가난한 사람들을 골라 믿음의 부자가 되게 하시고, 당신을 사랑하는 이들에게 약속하신 나라의 상속자가 되게 하지 않으셨습니까? 


복음(마르 7,31-37)

<예수님께서는 귀먹고 말 더듬는 이를 듣고 말하게 하셨다>


예수님께서 다시 티로 지역을 떠나 시돈을 거쳐, 데카폴리스 지역 한가운데를 가로질러 갈릴래아 호수로 돌아오셨다. 그러자 사람들이 귀먹고 말 더듬는 이를 예수님께 데리고 와서, 그에게 손을 얹어 주십사고 청하였다. 예수님께서는 그를 군중에게서 따로 데리고 나가셔서, 당신 손가락을 그의 두 귀에 넣으셨다가 침을 발라 그의 혀에 손을 대셨다. 그러고 나서 하늘을 우러러 한숨을 내쉬신 다음, 그에게 “에파타!” 곧 “열려라!” 하고 말씀하셨다. 그러자 곧바로 그의 귀가 열리고 묶인 혀가 풀려서 말을 제대로 하게 되었다. 예수님께서는 이 일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고 그들에게 분부하셨다. 그러나 그렇게 분부하실수록 그들은 더욱더 널리 알렸다. 사람들은 더할 나위 없이 놀라서 말하였다. “저분이 하신 일은 모두 훌륭하다. 귀먹은 이들은 듣게 하시고 말 못하는 이들은 말하게 하시는구나.” 




[필진정보]
김수복 : 살레시오 수도회에서 10년 동안 수도생활을 하고, 그 동안 서울 가톨릭 신학대학 6년을 수료했다. 40년 동안 5개 언어에서 성서와 신학 관련 서적을 우리말로 옮기는 번역노동자였다. 현재 사랑하는 아내와 아들 둘, 손자 넷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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