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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느님의 뜻이 무엇인지 깨달으라”
  • 김수복
  • 등록 2018-08-17 17:06:52
  • 수정 2018-08-17 19:39: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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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독서(잠언 9,1-6) 해설

<내가 주는 빵을 먹고 내가 주는 술을 마셔라>


9장에서 저자는 ‘지혜’와 ‘어리석음’을 대립시킨다. 먼저 오늘 독서에서 ‘지혜’가 잔칫상을 차려놓고 모든 사람을 초대한다. 지혜가 거처하는 집은 웅장하고 하늘에 있는 성전을 상상하게 한다.


집 주인이 고기와 빵과 술을 마련하고 시녀들을 보내서 사람들을 초대한다. 예언자들처럼 지혜는 ‘죄인들’, ‘어리석은 이들’, ‘속없는 사람들’을 초대한다. 그 초대는 간절하고 정에 넘치는 초대이다(잠언 1,22이하).


지혜는 예언자들이 사용하던 언어로 말하고, 또 하느님이 몸소 말씀하시는 것처럼 말하고 또 어떤 때는 예언자들처럼 협박하듯이 말한다(잠언 1,24-27).


그렇다면 ‘지혜’란 무엇인가? 지혜는 영원으로부터 영원히 존재하는 하느님의 예지이다(잠언 8,22-26; 집회 24,9). 지혜는 지극히 높으신 분의 입으로부터 나오는 숨기운과 말씀으로(집회 24,3) 전능하신 하느님의 숨결이요, 전능하신 그분의 영광이 쏟아 부어짐이요, 영원한 빛의 반영이요, 하느님의 활동을 비추는 거울이요, 하느님의 빼어난 모습이다(지혜 7,25이하).


지혜는 천상에 거처하며, 하느님 옥좌에 하느님과 더불어 앉아 있으며, 하느님과 뗄 수 없이 친밀한 관계를 맺고 있다(집회 24,4. 지혜 8,3; 9,4). 지혜는 시작도 없으며, 창조 당시에 이미 있었고(잠언 8,27-31), 우주를 계속 지배한다(지혜 8,1).


구원의 역사 안으로 하느님은 지혜를 파견하셨다. 지혜는 이스라엘 백성 가운데 ‘생명의 나무’처럼 심어졌고(집회 24,7-19), ‘율법’이라는 구체적인 형태로 자기 자신을 드러내보였다(집회 24,23-34). 지혜는 예언자들처럼 책망을 하기도 하고, 순응하는 자들에게 축복을 받으라고 초대하기도 한다(잠언 8,1-21).


신약성경에 나오는 ‘인간이 되신 말씀’과 아버지 사이의 관계에 대한 서술은 지혜에 대한 구약성경의 관념을 심화시켰다고 볼 수 있다(참조. 요한 1). 그리고 지혜가 차린 잔칫상은 메시아이신 예수님께서 차린 잔칫상을 연상시키고, 예수님께서 오늘도 당신 제자들을 통하여 온 인류를 초대하여 둘러앉게 하시려고 차려놓고 계시는 잔칫상을 연상시킨다.


시편(33) 해설

<너희는 맛보고 눈여겨보아라, 주께서 얼마나 좋으신지!>


시편작가는 하느님께 당신을 알아모시게 해 주신데 대하여 감사드린 다음(2-3절), 하느님을 알아모실 수 있는 유일한 길은 ‘하느님을 두려워하고(11절), 악과 거짓을 끊고(14절), 선을 행하고 평화를 찾아서는 일(15절)’임을 우리 모두에게 가르치고 있다.


그때에 하느님이 우리에게 아무것도 부족함이 없게 하고 영원한 생명과 행복을 주실 것이다. 그날에 배고팠던 사람들은 좋은 것으로 배부르게 되고, 부요했던 사람들은 빈손으로 돌려보낼 것이다(11절. 참조. 루카 1,53).


제2독서(에페 5,15-20) 해설

<하느님의 뜻이 무엇인지 깨달으라>


오늘 독서 대목은 그리스도인 공동체에 속한 모든 구성원들에게 윤리적 지침을 주고 구체적인 생활 실천을 지시해주고 있으며, ‘옛 사람’과 ‘새 사람’을 대조시키고(참조. 4,22), ‘새로운 피조물’에 어울리는 생활 곧 ‘성령 안에서 사는 생활’을 하라고 권고한다.


바오로가 주는 마지막 권고는 지혜로운 사람들이 되라는 권고다(15-17절). 그 권고는 바오로가 처음으로 행한 독창적인 권고가 아니다. 지혜에 관한 말은 이미 구약성경에 많이 나왔고, 복음서들에도 다시 나오고(참조. 마태 24,45-46), 사도들도 지혜에 대하여 말하고 있다(참조. 야고 1,5; 1코린  1,17-2,16).


지혜로운 사람은 하느님이 구원을 베푸시는 적당한 ‘때’를 가려 낼 줄 아는 사람이고, 신랑이 오시는 순간을 알아차릴 줄 아는 사람이고(마태 25,1-2), 나날이 들이닥치는 ‘주님이 오시는 순간’을 알아 낼 줄 아는 사람이다(로마 13,11).


따라서 그리스도인에게 지혜란 ‘주님의 뜻’을 구체적으로 찾아내는 데 있다(17절). 그리스도에게서 나타난 그 지혜는 우리가 ‘새 사람’으로서 ‘인간이 되어 오신 하느님의 아들’을 닮으려고 노력할 때 비로소 체득할 수 있다.


그 지혜는 비어 있고 깨끗이 치워진 우리 마음속에 고요한 가운데 성령께서 가르쳐 주시는 지혜다(18절). 그 지혜는 그리스도인들로 하여금 사회 안에서 다른 모든 인간들과 맺는 관계를 바꾸어 놓는다. 그리고 진정한 마음으로 주님을 찬양하고 하느님 아버지께 감사드리도록 한다.


복음(요한 6,51-59) 해설

<내 살은 참된 양식이며 내 피는 참된 음료이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직접 하신 말씀’과 요한 복음서 저자가 한 말을 구별하고 분리시키는 일은 사뭇 어려운 작업으로서 아직까지 만족스러울 만큼 성공을 하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 예수님께서 당신 청중에게 직접 하신 말씀과 요한 복음서 저자가 자기 독자들에게 예수님의 말씀을 회상하여 기록한 말을 구분해 내는 일이 지극히 어렵다는 것이다. 단지 55-56절이 성찬례의 의미를 가지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을 따름이다.


예수님의 말씀은 57절에서 구원에 관한 분명한 언급으로 끝난다. 이제는 유다인들이 “저 사람이 어떻게 자기 살을 우리에게 먹으라고 줄 수 있단 말인가?” 하고 따진다. 유다인들은 예수를 불신하지만, 예수님께서는 당신이 정말 ‘사람의 아들(메시아)’이며, 영원한 생명을 얻으려면 당신의 살과 피를 먹고 마셔야 된다고 주장하신다(참조. 창세 9,4).


예수님께서는 일반 음식을 다른 사람들보다 더 잘 먹고 더 누리는 것으로는 인간다운 참 생명을 얻을 수 없고, 오로지 당신 살과 피를 먹고 마셔야만 당신 생명‧참 생명‧부활할 생명‧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있다고 주장하신다. 그리스도의 생명만이 인간들이 서로 올바른 관계를 맺고, 하느님과 올바른 관계를 맺게 해 주는 유일한 근거와 원천이 된다.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와 믿는 사람 사이에 이루어지는 생명의 교류는 홀로 ‘살아 계신 분’ 하느님 아버지 안에 가장 깊은 원천을 두고 있다(마태 16,16. 2코린 6,16). 아버지께서는 생명이 샘솟는 영원한 샘이시다(참조. 5,21.26).


아버지께서는 당신 외아들을 통하여 그 생명을 믿는 사람들 위에 쏟아 부으신다. 하느님의 사랑(14,21-24: 16,27)과 하느님의 생명(7,6; 14,10이하) 그리고 하느님의 업적과 하느님을 알아모시는 일(10,14-15)은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직접 믿는 사람들에게 전달된다. 따라서 예수 안에서 하느님과 인간 사이의 완전한 일치가 실현된다(17,23).


묵상


성찬례와 그리스도인의 성숙


그리스도인으로서 생활하다 보면, 어느 시점에 가서 성찬례가 신자 생활에서 어떤 비중을 차지하고 어떤 의미를 지니는지를 묻게 된다. 그 같은 반성은 개인적인 것일 수도 있고 단체적인 것일 수도 있다.


▲ ⓒ 문미정


만나고 나누는 성찬례는 공동체적 성격과 사회적인 성격을 띤다. 그리스도인은 인간을 무한히 초월하고 인간보다 무한히 위대하신 분에 대한 믿음, 인류 역사 가운데 항상 살아 계시고 현존하여 계신 하느님께 거는 기대와 희망, 인간들 사이에 이기주의적 장벽을 무너뜨리고 모든 사람과 모든 백성이 평등한 형제로서 서로를 위해 주는 사랑을 나누어주어야 할 사명을 띠고 있다.


그 나눔으로만 개인은 자기 자신을 풍요롭게 할 수 있고 진정한 인격적 성숙에 도달할 수가 있다. 성찬례에 참여하는 그리스도인은 모든 사람과 진정한 사랑의 만남을 가져야 하며, 더 이상 인간차별과 분파심과 증오와 전쟁을 받아들이지 말아야 한다.


그리스도인들이 심혈을 기울이는 그 ‘나눔과 만남’의 노력은 언뜻 보기에 비록 보잘 것 없는 것 같아도 인류 전체를 송두리째 변화시키고 변형시키고야 말 것이다.


세상에는 그리스도인이라고 자칭하는 사람들 숫자가 굉장히 많지만, 미움과 이기심과 전쟁은 아직 사라지지 않고 있다. 그리스도인이라고 자부하는 사람들 가운데 사회적 책임을 망각하고 기피하는 자들이 많기 때문이다. 초기 그리스도인들은 당시 사회와 세계의 문제를 외면하지 않고, 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부딪히면서 박해와 순교까지를 감수하였던 것이다.


오늘 읽은 첫째 독서 잠언에는 지혜가 “너희는 와서 내 빵을 먹고 내가 섞은 술을 마셔라. 어리석음을 버리고 살아라. 예지의 길을 걸어라.”라고 말한다. 성찬식탁에 나오는 음식을 먹고 그리스도인은 성숙해져서 세상에 대하여 가지고 있는 자기 사명과 책임감을 다할 수 있어야 한다.


성찬례는 새로운 선택을 촉구한다.


‘당신 살과 피를 제물과 음식으로 주시는’ 예수와 일치한다는 것은 우리의 구체적인 처신과 태도와 행동을 반성하고 바로잡음을 뜻한다. 우리는 성찬례 안에서 ‘자기 자신을 다른 모든 사람을 위하여 깡그리 바치신’ 그리스도의 생명과 생활을 우리의 생명과 생활로 삼아야 한다.


세계 도처에서 굶어 죽어가고 비참한 생활을 하고 있는 수많은 사람들과 가장 가난하고 천하고 약한 사람들에게 자기가 가진 것뿐 아니라, 그리스도처럼 자기 살과 피까지 나누어 먹으라고 내주기로 생활방향을 정해야 한다.


인류 가운데 20% 정도의 사람들만이 어느 정도 풍족한 소비생활을 하고, 나머지 80%인 인류 대부분은 억압과 천대와 빈곤과 병고에 시달리고 있다. 우리나라에서도 마찬가지로 20% 정도의 사람들만이 누릴 만큼 누리고, 나머지 실업자·일용직 노동자·비정규직 노동자·중소기업과 영세기업 노동자·영세자영업자·서민들은 하루하루 살아가기가 숨 가쁠 지경이다.

 

이런 상태는 참아 주고 견뎌주어야 할 좋은 상태가 아니라, 한시 바삐 고치고 바로잡아야 할 악한 상태다. 물질이란 하느님이 만드셨으므로 참으로 좋은 것이다. 돈은 굶주리고 병든 사람에게 건강이 되고, 몇 십 만원이 없어 병원에도 못 가고 죽어 가는 사람에게는 바로 생명이 된다.


돈이란 이처럼 귀중한 이용 가치가 있다. 모든 재화의 주인은 하느님이시다. 그 돈과 재화를 불의(不義)한 체제·제도·구조·법률을 이용하여 소수 사람들이 독점하는 짓은 강도행위와 조금도 다름없는 행위이다.


테러만 폭력이 아니라, 그런 부당한 사회질서·세계질서 자체가 엄청난 폭력이다. 우선 자기 자신부터 그 물질과 돈을 하느님의 뜻에 따라 모든 사람과 모든 백성이 골고루 나누어 사용하도록 내 놓은 다음이라야 그리스도처럼 ‘자기의 살과 피와 목숨’까지 내어놓고 정의로운 사회구현을 위해 헌신할 마음과 자격이 생기는 것이다.



연중 제20주일 독서·복음


제1독서(잠언 9,1-6)

<내 빵을 먹고 내가 섞은 술을 마셔라>


지혜가 일곱 기둥을 깎아 자기 집을 지었다. 짐승을 잡고 술에 향료를 섞고 상을 차렸다.  이제 시녀들을 보내어 성읍 언덕 위에서 외치게 한다. “어리석은 이는 누구나 이리로 들어와라!” 지각없는 이에게 지혜가 말한다. “너희는 와서 내 빵을 먹고 내가 섞은 술을 마셔라. 어리석음을 버리고 살아라. 예지의 길을 걸어라.” 


시편(33)

너희는 맛보고 눈여겨보아라, 주님께서 얼마나 좋으신지! 


제2독서(에페 5,15-20)

<주님의 뜻이 무엇인지 깨달으십시오>


형제 여러분, 미련한 사람이 아니라 지혜로운 사람으로서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 잘 살펴보십시오. 시간을 잘 쓰십시오. 지금은 악한 때입니다. 그러니 어리석은 자가 되지 말고, 주님의 뜻이 무엇인지 깨달으십시오. 술에 취하지 마십시오. 거기에서 방탕이 나옵니다. 오히려 성령으로 충만해지십시오. 시편과 찬미가와 영가로 서로 화답하고, 마음으로 주님께 노래하며 그분을 찬양하십시오. 그러면서 모든 일에 언제나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하느님 아버지께 감사를 드리십시오. 


복음(요한 6,51-59)

<내 살은 참된 양식이고 내 피는 참된 음료다>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살아 있는 빵이다. 누구든지 이 빵을 먹으면 영원히 살 것이다. 내가 줄 빵은 세상에 생명을 주는 나의 살이다.” 그러자 “저 사람이 어떻게 자기 살을 우리에게 먹으라고 줄 수 있단 말인가?” 하며, 유다인들 사이에 말다툼이 벌어졌다.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사람의 아들의 살을 먹지 않고 그의 피를 마시지 않으면, 너희는 생명을 얻지 못한다. 그러나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사람은 영원한 생명을 얻고, 나도 마지막 날에 그를 다시 살릴 것이다. 내 살은 참된 양식이고 내 피는 참된 음료다.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사람은 내 안에 머무르고, 나도 그 사람 안에 머무른다. 살아 계신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셨고 내가 아버지로 말미암아 사는 것과 같이, 나를 먹는 사람도 나로 말미암아 살 것이다. 이것이 하늘에서 내려온 빵이다. 너희 조상들이 먹고도 죽은 것과는 달리, 이 빵을 먹는 사람은 영원히 살 것이다.” 이는 예수님께서 카파르나움 회당에서 가르치실 때에 하신 말씀이다. 




[필진정보]
김수복 : 살레시오 수도회에서 10년 동안 수도생활을 하고, 그 동안 서울 가톨릭 신학대학 6년을 수료했다. 40년 동안 5개 언어에서 성서와 신학 관련 서적을 우리말로 옮기는 번역노동자였다. 현재 사랑하는 아내와 아들 둘, 손자 넷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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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기사에 1개의 댓글이 달려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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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nomem2018-08-18 18:48:59

    안뇽하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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