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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줄 밥은 곧 나의 살이다”
  • 김수복
  • 등록 2018-08-10 12:46:48
  • 수정 2018-08-13 17:41: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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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독서(1열왕 19,4-8) 해설

<하느님이 보내신 천사가 엘리야를 부축한다>


19장은 17-18장에 나오는 문체와 성격이 동일하다. 그러나 엘리야 예언자가 처해 있는 상황은 대조적이다. 카르멜 산에서 주님과 엘리야는 바알과 그 예언자들을 대적하여 완전한 승리를 거두었고, 그에 따라 백성은 자기 하느님을 선택하고 환호하여 맞아들였다(18,20-40).


그러나 이제 엘리야가 자기가 겪은 실패와 백성이 배교하는 것을 보고 실망하는 장면이 나온다. 바알의 예언자들을 학살한 사건(18,40. 19,1)으로 말미암아 엘리야는 이제벨 여왕으로부터 노여움을 사고, 급기야는 피신하지 않을 수 없었다(19,3). 메마르고 갈증 나게 하는 사막은 엘리야에게 더욱 심한 절망감을 안겨 주었다. 엘리야는 자기 자신이 무력함을 통감하면서 주님께 도우심을 간청한다.


엘리야가 피신한 사건에는 신학적 의미가 담겨 있다. 예언자의 도피행각은 이집트 탈출 사건과 같은 의미를 띠고 있다. 엘리야가 시나이 산(호렙 산)으로 간 것은 하느님이 거기에만 현존하신다 해서가 아니었다. 엘리야가 감행해 온 모든 투쟁은 계약을 충실히 지키게 하기 위함이었고, 순수한 신앙을 다시 일으켜 세우기 위함이었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참된 하느님이 당신 자신을 성조들에게 계시하고 계약을 맺어 주신 장소로 발걸음을 향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리고 엘리야가 낙담해 있는 장면은 실의에 빠진 하갈(창세 21,14-21)을 연상시킨다. 하갈은 자기 아들 이스마엘이 덤불 밑에서 죽어가는 것을 차마 눈뜨고 보지 못하고 울부짖고 있었고, 엘리야도 싸리나무 덤불 밑에 주저앉아 죽여 달라고 주님께 간청했다.


그 두 경우에 다 천사가 나타나서 음식과 물을 제공한다. 이는 모세가 시나이 산을 향해 행진하는 백성에게 바위에서 솟아나게 한 물과 하늘에서 내리게 한 만나를 또한 연상시켜 준다(탈출 1,1-35; 17,1-7). 사막 한가운데서 기적적으로 물과 음식을 받아먹고 기운을 차린 엘리야는 자기 목숨과 생애도 이스마엘이나 사막을 유랑하던 이스라엘 사람들 목숨처럼 귀중함을 체험한다. 그렇게 하여 다시금 엘리야는 이스라엘 백성을 인도하여 하느님과 맺은 계약을 충실하게 이행하도록 해야 하는 자기 사명을 통감하게 된다.


자기 마음속 깊은 데서, 양심에서 진실한 목소리를 들은 사람은, 그 목소리를 자기 자신에게와 사회 속에 실천하고 실현하기 위해, 사막에서처럼 죽도록 고통스러울지라도, 하느님이 베푸시는 생수와 음식으로 기운을 차리고 용기백배하여 자기 사명을 꿋꿋이 완수해야 한다.


시편(33) 해설

<너희는 맛보고 눈여겨보아라, 주께서 얼마나 좋으신지!>


이 시편은 하느님께 감사를 드리는 노래다. 시편작가에게는 하느님을 알고 하느님을 섬기는 것이 행복이다. 그는 하느님이 자기를 보호해 주신 데 대하여 감사드린다.


‘없는 이들과 가엾은 이들’이 자기가 본래 ‘가진 것 없는 가난뱅이’임을 인정하고 하느님께 달아들 때, 비로소 하느님이 그들을 온갖 무서움에서 건져 주고 모든 근심 걱정을 씻어 주고 진을 친 당신 천사를 보내어 그들을 구해 주실 것이다.


하느님께 의탁하고 하느님의 힘에만 의지하고 하느님의 힘으로 투쟁하는 ‘없는 이들과 가엾은 이들’은 반드시 승리를 거둘 것이다.


제2독서(에페 4,30-5,2) 해설

<회개할 필요가 있다>


바오로는 에페소에 사는 그리스도인들에게 매우 구체적인 권고를 하고 있다. 거짓말하지 말고(25절), 성내지 말고(26절), 도둑질하지 말고 정직하게 부지런히 일하고(28절), 남을 해치는 말을 하지 말고 남에게 이로운 말만 하라고(29절) 권고한다.


31절에서는 독설과 격정과 분노와 고함소리와 욕설을 버리라고 권고한다. 그 모든 행실은 벗어던져야 할 ‘옛 사람’의 행실이라는 것이다(21-22절). 그리고 나서 ‘새 사람’이 요구하는 회개가 필요하다고 강조한다(4,30; 5,1-2).


이제 인간들은 하느님 아버지를 닮아, 아버지께서 당신 외아들을 어린 양처럼 제물로 삼아 우리가 지은 죄의 벌을 대신 받게 하신 것처럼, 우리 인간들도 서로 잘못으로 인한 결과와 죄의 벌을 대신 짊어지고 용서할 필요가 있다.


나약하면서도 자유의지와 선택권을 가진 인간들이 서로 어우러지고 뭉칠 수 있고 “서로 진정으로 위해 주고 아껴 주고 애착한다고 말할 수 있는” 기본 바탕과 조건은, 서로 감싸 주고 부축하고 보완하고 용서하는 마음 자세이다.


인간은 근본적으로 자기 자신을 미워하지 말아야 하듯이, 다른 인간에 대해서도 근본적인 미운 감정을 품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 하느님이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에게 가르쳐 주시는 진정한 사랑의 모습이다. 그렇다고 용서하는 사랑이 서로 잘못을 깨우쳐 주고 필요하면 매질해 주는 의무를 망각하라는 말은 아니다.


복음(요한 6,41-52) 해설

<내가 줄 밥은 곧 나의 살이다 세상은 그 밥을 먹고 생명을 얻게 될 것이다>



유다인들이 수군거리고, 웅성거리고, 불평을 한다는 표현은 요한 복음서에 자주 나오고, 사막에서 이스라엘 백성이 보여준 태도를 연상시킨다(참조. 탈출 16,2-12; 17,3-7; 민수 11,4 등).


‘사람의 아들’(메시아: 구원자)이 당신 자신이 누구신지 정체를 밝히자, 유다인들은 당장 오해와 반감과 불신을 표시한다(요한 5,16-20). 예수님께서 당신이 하늘로부터 내려오신 분이라고 주장하자(41절), 그들은 하느님을 모독한다고 귀를 막았다.


7,27에 “메시아께서 오실 때에는 그분이 어디에서 오시는지 아무도 알지 못할 터인데, 우리는 저 사람이 어디에서 왔는지 알고 있지 않습니까?”라고 그들은 의미 있게 논증하고 있다.


예수님께서는 그에 대한 답변으로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이끌어 주지 않으시면 아무도 나에게 올 수 없다.”(44절)고 말씀하신다. 마지막 때에는 가르침을 통하여 하느님을 알게 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이 몸소 당신을 체험하게 해 주실 것이었다(참조. 이사 54,13; 예레 31,31-34).


46절에서는 ‘하느님과 하나이신 사람의 아들’과 ‘믿는 사람’ 사이에는 엄연한 차이가 있음을 말하려 한다. 이 말은 ‘사람의 아들’(메시아)은 동시에 사람들과 하느님 아버지 사이의 중개자시라는 뜻이다.


47절에서는 ‘사람의 아들’이신 예수님께서 참된 생명을 주고 그 생명으로 살아가는 힘을 주신다는 것을 강조한다. 예수 자신과 당신 살과 피와 목숨이 바로 ‘영원한 생명을 주는 참된 밥’임을 강조한다. 요한이 말하는 영원한 생명이란 ‘충만하고 완전한 전인적 생명’이요, 죽어도 죽어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삶으로 옮아가고 마지막 날에 부활할 생명이다.


48절에서 예수님께서는 “나는 생명을 주는 밥이다.”고 주장하신다. 그 밥을 먹어야 인간들은 합심하고 일치하고 뭉치고 어우러져 ‘함께 사람다운 삶을 살 수 있는 생명’을 받게 된다.


묵상


예수 그리스도야말로 인간과 인류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는 빵(밥‧음식)이시다.


인간은 음식물을 먹고 마셔야만, 그 음식물이 살과 피가 되어서 생명을 유지하고, 또 살아 움직이면서 자기 목적하는 바를 향해서 나아갈 수가 있다. 음식물을 섭취하지 못하면 말라비틀어지고 온갖 기능이 떨어지고 병에 걸리고 결국 살아 움직이는 원동력인 생명을 잃고 죽는다.


그래서 음식물은 곧 생명과 직접 연관된다. 가난한 대륙과 나라들에서는 오늘도 날마다 수많은 사람이 음식물이 없어서 굶어 죽고, 영양실조로 병들어 죽고 있다. 서러움 중에서도 가장 큰 서러움이 굶는 서러움이요, 비참한 죽음 가운데서도 가장 비참한 죽음이 굶어 죽는 죽음이라 한다.


어떻든 인류 가운데서 넘치게 소유하고 푸짐하게 소비하고 향락에 빠져 있는 사람들 수는 극히 제한된 숫자이고, 그 나머지 대부분은 빈손 빈주먹으로 일을 해야만 먹고 살 수 있다. 하루 종일 12~16시간 죽자 살자 일해 보았자 식구들 입에 풀칠하기도 힘들고, 그나마도 일자리가 없어서 안절부절 못할 지경에 처해 있고, 그렇다고 불만을 토로하고 부당하고 불의한 처사를 탓할라치면 당장 탄압을 받는다.


바야흐로 가진 것 없는 인류 대부분의 참상이, 부유한 나라들의 야욕에 따른 끊일 줄 모르는 전쟁과 마찬가지로, 시급히 무슨 해결책이 나와야만 될 지경에 이르렀다.


과거 하느님은 이집트에서 갖은 탄압과 천대와 혹사에 시달리며 노예생활을 하던 이스라엘 백성에게 ‘꿈에 부푼 젖과 꿀이 흐르는 땅, 배불리 먹고 마시며 즐거워할 수 있는 땅’을 약속하며 압제의 사슬과 올가미에서 그들을 끌어내셨다.


그 백성에게 유혹과 시련과 난관이 중첩된 사막에서, 바위에서 생수를 솟아나게 하여 마실 물을 주고, 하늘에서 만나를 내려 먹을 음식을 주시면서 약속하신 복된 땅으로 인도했다.


그 하느님이 오늘도 압제와 천대와 노역에 시달리는 노예나 다름없는 인류 대부분을 구출하고 해방하여 모든 것이 골고루 풍족한 땅으로 인도하시기 위해 개입하고 계신다.


구세주 그리스도를 인류에게 보내신 하느님 아버지께서는 과거 노예들인 이스라엘 사람들을 특별히 애착하고 구하셨듯이, 오늘도 간난과 곤경에 처한 사람들・민족들・민중들을 압제의 사슬에서 벗어나도록 각성시키고 넉넉하고 즐겁게 먹고 마실 수 있게 해 주고 풍성한 밥상에 둘러앉게 해 주시려 개입하고 계신다.


예수님께서는 “나는 생명의 빵이다. 너희 조상들은 광야에서 만나를 먹고도 죽었다. 그러나 이 빵은 하늘에서 내려오는 것으로, 이 빵을 먹는 사람은 죽지 않는다. 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살아 있는 빵이다. 누구든지 이 빵을 먹으면 영원히 살 것이다. 내가 줄 빵은 세상에 생명을 주는 나의 살이다.”(요한 6,49-51)고 말씀하셨다.


예수님의 말씀을 받아들이고 예수님의 마음씨대로 살아가는 사람, 곧 예수를 믿는 사람은 누구나 예수님의 살과 피를 음식(밥)으로 받아 모시는 사람이고 영원한 생명을 누릴 사람이다(요한 6,48).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으로 사는 사람이 그 분의 생각과 마음으로 꿋꿋이 행동하고 살아가는 사람이다. 그런 사람이라야 죽을지라도 부활하여 영원히 살 사람이다. 그런 사람이라야 굶주리고 굶어 죽어가는 노예 같은 사람들을 해방하는 구원사업에 동참한다.


그런 사람들이라야 하느님의 나라가 완전히 이루어지지 않은 단계에서 세상의 야심가들을 굴복시키고 인류 전체에게 넉넉하고 화기애애하고 푸짐한 밥상을 차려 줄 수 있고, 그 ‘잔칫상’이 그대로 뜻밖의 환희로 넘칠 영원한 천상 잔칫상에로 옮겨가게 될 것이다.


다른 사람들은 아랑곳하지 않고 기름지게 먹고 마시며 방탕하게 놀고 허세를 부려보았자 허탈감과 쓴맛만 남는다. 그리스도처럼 바치고 나누어 주는 생명, 자기 자신까지 모든 것을 송두리째 내놓고 함께 골고루 나누고 어우러지는 공동체의 삶만이 우선 수난과 죽음을 당해도 부활할 영원한 생명이요 삶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살과 피와 생명만이 인류공동체를 영원히 함께 살게 하는 참된 음식이요 밥인 것이다.



연중 제19주일 독서·복음


제1독서(1열왕 19,4-8)

<그 음식으로 힘을 얻어 하느님의 산 호렙에 이르렀다>


자기는 하룻길을 더 걸어 광야로 나갔다. 그는 싸리나무 아래로 들어가 앉아서, 죽기를 간청하며 이렇게 말하였다. “주님, 이것으로 충분하니 저의 목숨을 거두어 주십시오. 저는 제 조상들보다 나을 것이 없습니다.” 그러고 나서 엘리야는 싸리나무 아래에 누워 잠이 들었다. 그때에 천사가 나타나 그를 흔들면서, “일어나 먹어라.” 하고 말하였다. 엘리야가 깨어 보니, 뜨겁게 달군 돌에다 구운 빵과 물 한 병이 머리맡에 놓여 있었다. 그는 먹고 마신 뒤에 다시 누웠다. 주님의 천사가 다시 그를 흔들면서, “일어나 먹어라. 갈 길이 멀다.” 하고 말하였다. 엘리야는 일어나서 먹고 마셨다. 그 음식으로 힘을 얻은 그는 밤낮으로 사십 일을 걸어, 하느님의 산 호렙에 이르렀다.  


시편(33)

너희는 맛보고 눈여겨보아라, 주께서 얼마나 좋으신지! 


제2독서(에페 4,30-5,2)

<그리스도처럼 여러분도 사랑 안에서 살아가십시오>


형제 여러분, 하느님의 성령을 슬프게 하지 마십시오. 여러분은 속량의 날을 위하여 성령의 인장을 받았습니다. 모든 원한과 격분과 분노와 폭언과 중상을 온갖 악의와 함께 내버리십시오. 서로 너그럽고 자비롭게 대하고, 하느님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여러분을 용서하신 것처럼 여러분도 서로 용서하십시오. 그러므로 사랑받는 자녀답게 하느님을 본받는 사람이 되십시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사랑하시고 또 우리를 위하여 당신 자신을 하느님께 바치는 향기로운 예물과 제물로 내놓으신 것처럼, 여러분도 사랑 안에서 살아가십시오. 


복음(요한 6,41-52)

<나는 하늘에서 내려 온 살아 있는 빵이다>


예수님께서 “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빵이다.” 하고 말씀하셨기 때문에, 유다인들이 그분을 두고 수군거리기 시작하였다. 그들이 말하였다. “저 사람은 요셉의 아들 예수가 아닌가? 그의 아버지와 어머니도 우리가 알고 있지 않는가? 그런데 저 사람이 어떻게 ‘나는 하늘에서 내려왔다.’고 말할 수 있는가?”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대답하셨다. “너희끼리 수군거리지 마라.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이끌어 주지 않으시면 아무도 나에게 올 수 없다. 그리고 나에게 오는 사람은 내가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릴 것이다. ‘그들은 모두 하느님께 가르침을 받을 것이다.’라고 예언서들에 기록되어 있다. 아버지의 말씀을 듣고 배운 사람은 누구나 나에게 온다. 그렇다고 하느님에게서 온 이 말고 누가 아버지를 보았다는 말은 아니다. 하느님에게서 온 이만 아버지를 보았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믿는 사람은 영원한 생명을 얻는다. 나는 생명의 빵이다. 너희 조상들은 광야에서 만나를 먹고도 죽었다. 그러나 이 빵은 하늘에서 내려오는 것으로, 이 빵을 먹는 사람은 죽지 않는다. 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살아 있는 빵이다. 누구든지 이 빵을 먹으면 영원히 살 것이다. 내가 줄 빵은 세상에 생명을 주는 나의 살이다.” 그러자 “저 사람이 어떻게 자기 살을 우리에게 먹으라고 줄 수 있단 말인가?” 하며, 유다인들 사이에 말다툼이 벌어졌다.  




[필진정보]
김수복 : 살레시오 수도회에서 10년 동안 수도생활을 하고, 그 동안 서울 가톨릭 신학대학 6년을 수료했다. 40년 동안 5개 언어에서 성서와 신학 관련 서적을 우리말로 옮기는 번역노동자였다. 현재 사랑하는 아내와 아들 둘, 손자 넷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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