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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수복) 연중 제13주일 독서·복음 해설
  • 김수복
  • 등록 2018-07-01 18:53:10
  • 수정 2018-07-01 18:55: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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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독서(지혜 1,13-15; 2,23-24) 해설

<마귀의 시기로 이 세상에 죽음이 오게 되었다>


정당한 비관주의도 있을까?


인간은 제 혼자 곰곰 생각해 볼 적에 자기가 도저히 행복한 존재가 될 수 없다고 단정하기 마련이다. 사실 자기 생명이 확실한 죽음에 부쳐져 있다는 사실을 두려워하는 사람은 행복해질 도리가 없는 것이다. 인생의 고통스럽고 어두운 처지와 죽을 운명을 직시하고, 자기 자신을 속이려 들지 않는 사람은 별 도리 없이 비관에 떨어지기 마련이고, 인간을 그런 존재로 만드신 창조주께 대들기 마련이다.


예수 부활에 기초를 둔 낙관주의


지혜서의 저자는 창세기를 따라서 인간의 처지와 현실을 다른 각도로 바라본다. 인간의 그런 처지와 운명에 대한 책임이 결단코 하느님께 있는 것이 아니라고 강변한다. 죄를 지어 자연의 조화를 깨드린 장본인은 다름 아닌 인간 자신이며, 하느님의 창조 활동에 역행한 장본인이 인간이라고 강변한다. 하느님은 언제까지나 인간이 죽지 않고 살기를 바라신다는 것이다.


우리가 지니고 있는 낙관주의는 더 근본적이다. 예수 부활에 기초를 둔 낙관주의인 까닭이다. 예수 부활은 우리 부활의 보증이 되고 시발점이 된다.


인간 생명과 존재는 죽음으로 끝나지 않고 불멸하며, 올바르게 산 사람에게는 죽음이 죽음이 아니라 새로운 삶 곧 부활한 삶으로 옮겨감이 된다.


시편(29) 해설

주님, 제가 당신을 높이 기립니다

당신께서는 저를 구하셨나이다


이 시편의 주요 내용은 하느님께로부터 받은 놀라운 은혜에 대한 감사다. 시편 작가는 아마 죽을병에서 낫게 되었거나, 원수들의 손아귀에서 벗어난 일을 두고 하느님께 감사드리고 있는 것 같다. 실상 주께서는 올바른 사람을 무덤 속에서 썩도록 버려두지 않고, 올바른 사람들이 당하는 고통을 보고 당신 원수들이 기뻐하지 못하게 하실 것이다.


하느님은 당신 종에게 생명과 기쁨을 도로 주어 기뻐 날뛰게 하고, 슬픔이 기쁨으로 변하게 하실 것이다.


제2독서(2코린 8,7.9.13-15) 해설

<그리스도께서는 가난한 사람이 되셨고, 당신의 가난으로 우리를 부유하게 하셨다>


바오로는 사도로서 자기 직분을 수행하는 과정에서 때때로 모금하는 일이 있었다.


바오로가 보기에는, 돈이란 사용하기에 따라서 좋은 것이기도 하고 나쁜 것이기도 하지만,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가져다주신 은총과 복음을 전달하는 데 유용하게 쓰일 수단이 될 수도 있는 것이었다. 그리스도께서는 우리 인간들에게 모든 것을 다 내놓고 생명까지도 나누어 주고 바치심으로써 우리를 당신 생명에 참여케 하셨다.


바로 이 사실 때문에 우리는 가난한 형제들에게 가진 것을 모두 내놓지 않을 수가 없다. 재물과 돈, 개인 능력, 하늘과 땅, 그 안에 있는 모든 것이 하느님의 소유물이며, 하느님은 그 모든 것을 모든 사람이 공평하게 골고루 나누어 서로를 위해서 사용하기를 바라신다.


그래서 인류 가운데 가난한 사람이 존재하는 한, 나는 가난해져야 할 의무가 있다. 본래 인간의 처지가 하느님 앞에서 ‘무소유자’일 따름이다. 아무도 남보다 많이 차지하고 많이 소비할 권리가 도무지 없다. 으스대고 자랑할 근거가 하느님 앞에서는 아무것도 없다. ‘소유자’는 오로지 하느님 한 분뿐이며, 인간들에게는 ‘공평하게 서로를 위해 사용함으로써’ 합심하는 기쁨을 창조해내야 하는 의무만 남는다.


그리스도께서는 모든 사람과 모든 백성을 위해서, 인간이라면 하나도 빼지 않고 모든 사람을 위해서 당신 목숨을 바치고 나누어 주셨다. 바로 그 이유 때문에 인간과 인간 사이, 인종과 인종 사이, 민족과 민족 사이, 나라와 나라 사이를 가로 막는 장벽이 허물어진 것이다. 이제 인간은 가장 먼 나라 사람들, 얼굴색과 생활 풍습이 다른 사람들끼리도 싸우지 않고 서로 위해 주고 아껴 줄 수 있는 이유와 의무가 생긴 것이다. 이것이 가톨릭적(인류 보편적) 신앙이다.


복음(마르 5,21-43 또는 마르 5,21-24.35ㄴ-43) 해설

<그리스도께서는 새 인류를 낳기 위하여 인간 조건을 고스란히 취하셨다>


사람들 사이에서 한 사람으로 살아가시는 그리스도


그리스도께서는 인간의 처지와 조건을 고스란히 받아들여 살아가면서, 치료할 수 없는 병, 젊음을 앗아가는 죽음 등 절망적인 상황들에 직면하신다. 그뿐 아니라 당신 자신이 몸소 죽음을 예감하신다. 헤로데가 당신을 죽이려고 음모를 꾸미고, 세례자 요한은 이미 처형당했음을 알고 계신다. 예수님께서는 그런 절망적인 상황들을 피하지 않고 맞닥뜨리고 맞서 극복하고 이겨내신다.


다시 태어난 ‘새 인류’


그리스도께서는 온갖 비참과 절망을 극복하고 이겨낸 ‘새 인류’를 만드시려 한다. 못 고칠 병을 고쳐 주고 죽은 사람을 살려 냄으로써 그런 가능성과 희망을 불러일으키신다.


예수님께서는 죽은 야이로의 딸을 살림으로써 ‘새롭고 젊음에 넘친 인류’를 당신 부활 안으로 받아들이려 하신다. ‘새 인류’를 죄악과 병고와 죽음에서 구출하고 해방하여 아버지께서 베풀어 주시는 놀라운 선물을 받도록 하신다.


온갖 병고와 고통과 죽음을 겪는 사람들을 그리스도께서 당신 죽음과 부활로써 낫게 하고 다시 살아나게 하셨다.


묵상


죽음이 세상 안으로 들어왔다.


죽음은 고통으로 가득 찬 인생살이를 나타내는 상징으로 간주할 수 있다. 인생은 생각하기조차 싫은 두려운 끝장을 향하며 한 걸음 한 걸음 다가가는 발걸음이다.


우리 생명력에 타격을 주는 병마, 일순간도 지체하지 않고 우리를 재촉하여 일몰을 향해 흐르는 시간, 끊임없이 우리를 지겨운 시련으로 몰아붙이는 삶의 투쟁, 이 모든 것이 우리에게 인생살이란 죽음에 부쳐진 인간들의 고뇌에 차고 몸부림치는 투쟁임을 증명하고 있다.


죽음이란 단지 피안에 속하는 어떤 것일 뿐 아니라, 우리 가운데서 그리고 우리 안에서 작동하고 있는 어떤 세력이다. 죽음을 눈앞에 두고서, 인생은 무엇인가를 열렬히 욕구한다. 그러나 깨어지기 쉬운 그 욕구는 무엇인가를 잡았다 싶은 순간 곧 놓치고 만다. 그 욕구가 잡은 것은 구름이요, 숨결이요, 실상 허무이기 십상이다. 성경이 그렇다고 말해주고 있다(시편 39,5-7; 89,48-49; 욥 14,1-12).


여기서 우리는 솔직하고 겸허하게 인생살이가 그렇다는 것을 인정할 일이다. 먼지에 불과함을 인정할 일이다(창세 3,19). 우리는 모두 슬픔과 고통과 병고와 사랑하는 어떤 사람의 죽음을 체험하고 있다.


우리 모든 사람과 마찬가지로, 그리스도께서도 줄곧 심란한 동요와 유혹을 견디셨고, 고통과 죽음을 앞에 두고 심각한 고뇌에 빠지셨다. 친구 라자로가 묻힌 무덤 앞에서 오열을 참지 못하고(요한 11,33-38), 당신 자신이 죽는다는 신비 앞에서 어둠에 싸인 심연을 느끼셨다(12,27; 13,21). 병자들과 고통 받는 사람들을 보고 크게 상심하고 사뭇 절망적인 상태에 빠진 사람들을 만나고는 그들을 구출하셨다.


병자를 고쳐 주고 죽은 사람을 살려 주시는 그분의 기적적인 말씀과 행동은 슬픔과 고통과 죽음을 앞에 둔 그분의 심정과 태도를 드러낸다. 그분은 그처럼 괴롭고 슬픈 현실을 타파하려 하신다. 더 이상 그런 현실이 발 들여 놓을 수 없는 세상에 대한 확고한 희망을 안겨 주신다. 그런 현실을 깨뜨리고 추방할 수 있는 능력을 당신이 가지셨음을 증명하신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예기치 못한 모양과 방법으로 그 승리를 쟁취하신다. 우리들의 부족한 정신으로는 도무지 납득할 수 없는 방법으로, 아버지께서 품으신 신비스런 계획에 따라 당신 승리를 쟁취하신다. 그분은 죽음을 쳐 이기시되, 죽음을 당신 것으로 삼음으로써 이기신다. 수모와 고통을 피하지 않고 나누어 받으셨다. 우리의 슬픔과 모멸, 고통을 함께 겪으심으로써 우리가 겪는 슬픔과 모멸과 고통에 의미를 부여하고, 죽음을 받아들이심으로써 죽음 자체를 분쇄하셨다. 그분은 우리와 똑같이 하느님 앞에서 근본적으로 가진 것 없는 가난한 사람이 됨으로써 우리를 하느님 외아들인 당신의 풍요로운 상속에 참여시키셨다.


이 같은 방법으로 그분은 우리에게 높디높으신 하느님의 사랑을 보여 주셨다. 하느님은 어느 누구도 그리고 만물이 죽기를 바라지 않고 살아서 행복을 누리기를 바라신다는 것을 똑똑히 보여 주셨다. 그리하여 그분은 ‘죽은 자들 가운데서 살아난 첫 사람’이 되고(콜로 1,18), 우리 모든 인간이 당신처럼 부활할 수 있다는 보증이 되셨다.


그리스도인이 취해야 할 태도


고통과 멸시와 죽음을 대하는 우리 태도는 그리스도의 태도를 본받아야 한다. 우선 고통과 멸시와 죽음이라는 신비스런 현실을 앞에 두고서 싫어하고 두려워하고 피하려는 감정이 있어서는 안 된다는 말은 아니다. 그런 감정은 본능에서 나오는 당연한 감정이지만 말이다.


그리스도께서도 그러한 현실 앞에서 번민하고 고뇌에 휩싸이셨다. 욥이 느꼈던 거부하고 반항하는 감정은 인간이 자기 한계 안에서 느끼는 당연한 감정이다. 인간이면 누구를 막론하고 치유할 수 없는 병마 앞에서 그리고 피할 수 없는 죽음 앞에서 당혹감을 느끼게 마련이다.


그러나 우리는 그런 반항심을 이겨 내고, 고통과 죽음을 다소곳이 받아들일 줄도 알아야 한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의 죽음 안에서 우리 인간 모두가 죽었고(2코린 5,14), 그리스도 안에서 죽는 죽음은 우리 모든 인간 안에서 그 효능을 발휘해야 하기 때문이다. 


가난한 사람들・무시와 천대를 받는 사람들・힘들게 노동을 해야 먹고 살 수 있는 사람들도 자기들이 받는 수탈과 수모와 고통과 죽음으로 예수님의 수난에 동참해야 한다. 그런 사람들에게 고통과 죽음은 새로운 의미를 띠게 된다.


그러할 때, 수모와 박해와 고통과 죽음은 피할 도리 없는 지겨운 운명이거나 죄벌이 아니다. 막일꾼들이나 천덕꾸러기 인생들도 자기들을 통하여 자기들 자신으로 당신 모습을 드러내시는 주님과 더불어 하느님의 나라를 실현하기 위하여 목숨을 바치는 값지고 보람 있는 인생을 살게 되는 것이다. 고뇌를 거치는 그런 죽음은 복된 죽음이다. 주님 안에서, 천덕꾸러기들 가운데서, 그들 중 하나로 죽어가는 사람들은 복되다(묵시 14,13).


그들은 어느 날엔가 ‘죽음이 더 이상 존재하지도 않는’(묵시 21,4) 세상 안으로 들어갈 것이다. 그 새로운 세상은 이미 이 땅 위에 성령으로 살아가는 사람들로 구성된 하느님의 성전으로 시작되어 자라나고, 죽음에서 생명으로 건너가고 있으며, 그리스도와 더불어 부활하고 있는 것이다(갈라 5,24).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 그리스도 때문에 명성이 아니라 모멸을 자기 것으로 삼는 사람은 천하게 보여도 가장 귀하고, 죽어 없어지는 티끌 같아도 그 안에 영원한 생명의 보증을 가지고 있다.


그리스도인에게 죽는다는 것은 이익이다(필리 1,21). 보잘 것 없이 매장되는 것 같아도 그 안에서 살아 움직이는 생명은 바로 그리스도이시다.



연중 제13주일 독서·복음


제1독서(지혜 1,13-15; 2,23-24)

<악마의 시기로 세상에 죽음이 들어왔다>


하느님께서는 죽음을 만들지 않으셨고 산 이들의 멸망을 기뻐하지 않으신다. 하느님께서는 만물을 존재하라고 창조하셨으니 세상의 피조물이 다 이롭고 그 안에 파멸의 독이 없으며 저승의 지배가 지상에는 미치지 못한다. 정의는 죽지 않는다. 정녕 하느님께서는 인간을 불멸의 존재로 창조하시고 당신 본성의 모습에 따라 인간을 만드셨다. 그러나 악마의 시기로 세상에 죽음이 들어와 죽음에 속한 자들은 그것을 맛보게 된다. 


시편(29)

주님, 제가 당신을 높이 기립니다

당신께서는 저를 구하셨나이다


제2독서(2코린 8,7.9.13-15)

<여러분이 누리는 풍요가 그들의 궁핍을 채워주게 하십시오>


형제 여러분, 이제 여러분은 모든 면에서 곧 믿음과 말과 지식과 온갖 열성에서, 또 우리의 사랑을 받는 일에서도 뛰어나므로, 이 은혜로운 일에서도 뛰어나기를 바랍니다. 여러분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총을 알고 있습니다. 그분께서는 부유하시면서도 여러분을 위하여 가난하게 되시어, 여러분이 그 가난으로 부유하게 되도록 하셨습니다. 그렇다고 다른 이들은 편안하게 하면서 여러분은 괴롭히자는 것이 아니라, 균형을 이루게 하자는 것입니다. 지금 이 시간에 여러분이 누리는 풍요가 그들의 궁핍을 채워 주어 나중에는 그들의 풍요가 여러분의 궁핍을 채워 준다면, 균형을 이루게 됩니다. 이는 성경에 기록된 그대로입니다. “많이 거둔 이도 남지 않고 적게 거둔 이도 모자라지 않았다.” 


복음(마르 5,21-43)

<소녀야, 내가 너에게 말한다. 일어나라>


예수님께서 배를 타시고 다시 건너편으로 가시자 많은 군중이 그분께 모여들었다. 예수님께서 호숫가에 계시는데, 야이로라는 한 회당장이 와서 예수님을 뵙고 그분 발 앞에 엎드려, “제 어린 딸이 죽게 되었습니다. 가셔서 아이에게 손을 얹으시어 그 아이가 병이 나아 다시 살게 해 주십시오.” 하고 간곡히 청하였다. 그리하여 예수님께서는 그와 함께 나서시었다. ((많은 군중이 그분을 따르며 밀쳐 댔다. 그 가운데에 열두 해 동안이나 하혈하는 여자가 있었다. 그 여자는 숱한 고생을 하며 많은 의사의 손에 가진 것을 모두 쏟아 부었지만, 아무 효험도 없이 상태만 더 나빠졌다. 그가 예수님의 소문을 듣고, 군중에 섞여 예수님 뒤로 가서 그분의 옷에 손을 대었다. ‘내가 저분의 옷에 손을 대기만 하여도 구원을 받겠지.’ 하고 생각하였던 것이다. 과연 곧 출혈이 멈추고 병이 나은 것을 몸으로 느낄 수 있었다. 예수님께서는 곧 당신에게서 힘이 나간 것을 아시고 군중에게 돌아서시어, “누가 내 옷에 손을 대었느냐?” 하고 물으셨다. 그러자 제자들이 예수님께 반문하였다. “보시다시피 군중이 스승님을 밀쳐 대는데, ‘누가 나에게 손을 대었느냐?’ 하고 물으십니까?”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누가 그렇게 하였는지 보시려고 사방을 살피셨다. 그 부인은 자기에게 일어난 일을 알았기 때문에, 두려워 떨며 나와서 예수님 앞에 엎드려 사실대로 다 아뢰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 여자에게 이르셨다. “딸아,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평안히 가거라. 그리고 병에서 벗어나 건강해져라.” 예수님께서 아직 말씀하고 계실 때에 회당장의 집에서 사람들이 와서는, “따님이 죽었습니다. 그러니 이제 스승님을 수고롭게 할 필요가 어디 있겠습니까?” 하고 말하였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이 말하는 것을 곁에서 들으시고 회당장에게 말씀하셨다. “두려워하지 말고 믿기만 하여라.” 그리고 베드로와 야고보와 야고보의 동생 요한 외에는 아무도 당신을 따라오지 못하게 하셨다. 그들이 회당장의 집에 이르렀다. 예수님께서는 소란한 광경과 사람들이 큰 소리로 울며 탄식하는 것을 보시고, 안으로 들어가셔서 그들에게, “어찌하여 소란을 피우며 울고 있느냐? 저 아이는 죽은 것이 아니라 자고 있다.” 하고 말씀하셨다. 그들은 예수님을 비웃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다 내쫓으신 다음, 아이 아버지와 어머니와 당신의 일행만 데리고 아이가 있는 곳으로 들어가셨다. 그리고 아이의 손을 잡으시고 말씀하셨다. “탈리타 쿰!” 이는 번역하면 ‘소녀야, 내가 너에게 말한다. 일어나라!’는 뜻이다. 그러자 소녀가 곧바로 일어서서 걸어 다녔다. 소녀의 나이는 열두 살이었다. 사람들은 몹시 놀라 넋을 잃었다. 예수님께서는 아무에게도 이 일을 알리지 말라고 그들에게 거듭 분부하시고 나서, 소녀에게 먹을 것을 주라고 이르셨다. 





[필진정보]
김수복 : 살레시오 수도회에서 10년 동안 수도생활을 하고, 그 동안 서울 가톨릭 신학대학 6년을 수료했다. 40년 동안 5개 언어에서 성서와 신학 관련 서적을 우리말로 옮기는 번역노동자였다. 현재 사랑하는 아내와 아들 둘, 손자 넷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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