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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수복) 연중 제11주일 독서·복음 해설
  • 김수복
  • 등록 2018-06-15 11:59:15
  • 수정 2018-07-13 16:48: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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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독서(에제 17,22-24) 해설

<나라를 살리는 힘은 오직 하느님에게서 나오는 위대한 능력이다>


선택받은 이스라엘 백성은 그 역사상 가장 혼란스럽고 어려운 상황에 처했다. 예루살렘이 멸망하고 백성은 포로가 되어 귀양살이를 하게 되었다. 다윗 왕조가 영원하리라는 기대도 무너지는 것 같았고, 메시아에 대한 온갖 희망이 사라지는 것 같았다.


이 때 에제키엘 예언자가 나서서 하느님이 다시금 새롭게 개입하여 백성의 마음속에 당신 자신을 심어 주실 것이고, 백성의 앞길에 희망의 서광이 비치리라고 외친다.


하느님 나라의 권능은 모든 것이 불가능하게 보이는 그 시간에 장엄하게 드러나고, 영영 뿌리부터 말라가고 숨이 넘어가는 그 순간에 하느님의 위대하신 능력이 드러난다.


인간들이 제 혼자 힘으로 기울인 온갖 노력이 허사가 되고 물거품이 되어 실망에 떨어지는 그 순간에 하느님이 개입하여 큰 나무로 자라게 하고 더 많은 열매를 맺을 수 있는 끝없는 생명의 씨앗을 심어 주실 것이다.


인간들이 하느님을 아버지로 모시지 않고서는 저희들끼리 아무리 날뛰어 보았자 다툼과 싸움과 학살과 전쟁을 피할 도리가 없다. 인간들이 자기네 한계와 근원적인 무능력을 인정하고 다소곳해져서 ‘하느님을 아버지로 모시고 모든 인간을 형제자매로 받아들이는’ 그 순간에 하느님이 강력하신 당신 팔을 펼쳐 인류에게 놀라운 구원과 해방을 안겨 주실 것이다.


시편(91) 해설

주님을 찬송함이 좋기도 하나이다


옛적 이스라엘 백성은 하느님이 은총과 선물로 내려 주신 풍성한 결실을 두고 감사하는 기도를 바쳤다. 그 기도는 오늘날 성찬식탁에 둘러앉은 온 인류가 하느님 아버지께 바쳐드려야 할 기도이다. 하느님 아버지께서 하시는 말씀을 귀 기울여 듣고 받아들이고 실천함으로써 인간과 인류는 하느님의 권능에 힘입어 놀랍도록 새로운 창조물로 변하는 것이다.


하느님 아버지께서 인간들에게 해 주신 당신 약속에 항상 충실하심을 널리 모든 사람과 모든 백성에게 알려 주고 인류에게 희망을 불어넣으면서 ‘하느님을 아버지로 모시고 모든 인간들을 형제자매로 대하도록’ 촉구할 일이다.


제2독서(2코린 5,6-10) 해설

<현세나 후세의 우리 소망은 주님을 기쁘게 해 드리는 것이다>


바오로는 육체를 떠나고 이승살이를 하직한다는 문제에 대하여 자기 소감을 피력한다.


인간존재는 죽은 다음에 오히려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초자연적 생명력을 입어 더욱 완전해진다.


죽음으로써 인간존재가 없어지는 것이 아니다. 죽음으로써 인간은 하느님 앞에 벌거벗은 채로 나서게 된다. 이승살이를 하는 동안 다른 인간들과 부대끼며 살아오면서 취한 행동들만을 가지고 하느님 앞에 나서게 된다. 인간을 인간으로, 하느님 자녀로 대하고 정을 나누면서 살아 온 사람은 상을 받고, 다른 인간을 자기가 편하게 살기 위한 이용물로 취급하면서 살아 온 사람은 벌을 받을 것이다.


이승살이에서 모든 인간을 하느님 자녀로 대하면서 주님을 기쁘게 해 드리자면, 그렇게 살지 않으려 하는 사람들에게서 갈등과 심적 고통과 박해를 당하게 된다. 죽어서 그런 고난에 찬 이승살이를 하직하고 주님 곁에서 평안하게 안식을 누리는 것도 좋겠지만, 살아 있는 동안에는 사람들의 마음속에 하느님 사랑과 사람 사랑을 심어 줌으로써 주님을 기쁘게 해 드리는 것만이 살아도 죽어도 인간의 한결같은 염원은 주님을 기쁘시게 해드리는 일이어야 한다.

 

복음(마르 4,26-34)

<모든 씨 중에 가장 작은 겨자씨가 어느 풀보다도 크게 된다>


예수님께서 당신 활동을 시작하신다. 그분이 당신 주위에 당신을 따르는 사람들을 모으기 시작하신다. 그런데 그 주위에 모여드는 사람들이 하나같이 천대받는 가련한 무리였다. 그리스도 안에서 ‘하느님의 나라’가 가난하고 볼품없는 사람들로 구성되기 시작한다. ‘하느님 나라’의 신비는 그렇듯 조용하고 은밀하게 숨겨져 있는 듯하지만, 그 세력은 뿌리 깊게 뻗어가고 마침내 경악할 정도로 놀라운 자기 모습을 드러내고야 말 것이다.


흔히 인간들이 싫어하고 피해의식을 느끼고 배척하며 이용하는 그런 천대받는 사람들을 예수님께서 당신 사람들로 받아들이고, 가진 것 없고 힘없고 당하기만 하는 그런 천덕꾸러기들에게 당신 능력과 권위를 부여하신다.


팔레스티나 문학에서 ‘큰 나무’와 ‘누룩’이라는 상징은 ‘악의 세력’이 자기 폭력을 확장시키는 과정에 전형적으로 적용하던 상징들이었는데, 예수님께서는 대담하게도 ‘하느님 나라’의 생명력이 ‘악의 독성’보다도 훨씬 강력하다고 발표하시기 위해 그 상징들을 사용하신다.


하느님과 친한 사람들이 견뎌 내는 깊은 인내심으로 말미암아 ‘하느님 나라’의 신비가 자라고 익어간다. 그 성장을 물질적 소유욕과 향락에 사로잡힌 사람들은 볼 수가 없고 느낄 수도 없다.


천대와 박해와 학살을 당하는 사람들이 참아내는 인내는 ‘하느님 나라’의 성장을 앞당길 것이다. 그 인내는 불같이 단죄하려고 벼르고 있는 소극적인 인내가 아니다. 그 인내는 그리스도를 통하여 이루어지는 ‘하느님 나라’의 승리를 믿고 있기에 끈질기게 나를 포함한 모든 사람과 모든 백성을 포용하려는 인내다.


묵상


‘하느님 나라’를 다스리는 분은 하느님이시다


구체적인 인간들로 구성되어 있고, 구체적인 인간들 속에 자리 잡고 있는 ‘하느님의 나라’에서는 하느님과 인간들이 어떻게 함께 공존하며 어떠한 관계를 맺고 있는가? ‘하느님 나라’에서 절대권자는 하느님이시다. 하느님은 당신 절대권을 먼저 당신 나라 안에서 행사하셔야 하고, 다음으로는 당신 나라를 통하여 온 세계와 온 우주 안에서 행사하셔야 한다.


하느님의 절대권이야말로 하느님 나라의 초석이요, 그 나라가 나아가고 발전하는 데 유일하고 안전한 바위이다. 그 나라가 아무리 보잘 것 없는 작은 씨앗이나 소금이나 누룩같이 보일지라도, 하느님의 절대권에 순종하는 하느님 나라가 아니고서는 인류공동체가 지향해야 할 고향은 아무 데서도 찾을 수 없다.


하느님의 절대권은 무엇보다 먼저 당신 교회 위에 군림하여야 한다. 하느님의 자녀들로 이루어진 살아 있는 성전인 교회를 세우고 기초를 놓은 분이 하느님이고, 교회에 생명력을 주는 분이 하느님이고, 교회에 성장할 활력을 주는 분이 하느님이고, 교회를 마지막 완성으로 이끌어가는 분이 하느님이시다.


오늘 읽은 마르코 복음서에 나오는 씨앗이라는 상징과 비유는 하느님 나라의 성장과정에서 그 시작과 끝 사이에 믿기 어려운 대조가 있음을 암시한다. 하느님의 능력은 씨를 심는 인간의 능력이 아니고, 성장하게 하는 것도 땅의 능력이 아니고, 씨앗의 생명력 자체의 능력도 아니다. 씨앗에 생명력을 주고 인간으로 하여금 씨앗을 심게 하고, 씨앗을 자라게 하는 것은 하느님의 능력이다.


인간의 능력은 하느님의 능력에 아무것도 더할 수가 없다. 하느님의 절대권과 하느님의 능력에 의해서만 하느님의 나라는 성장한다. 하느님의 절대권과 하느님의 능력을 그릇된 인간적 요소로 바꿔 놓아서도 안 되고 표방해서도 안 된다.


그렇다면 ‘하느님 나라’의 적극적인 구성원이 되어야 하는 인간들이 떠맡은 구실은 무엇인가?

하느님은 당신 능력을 땅 위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하느님 나라’를 통하여 발휘하신다.


하느님이 ‘당신 나라’ 위에 펼쳐 보이시는 기적은 단지 죽어 있는 땅에 던져진 무의미한 씨앗을 살려 내고 충만한 생명으로 성장하게 하시는 믿을 수 없는 활력으로만 나타나지 않는다. 시작은 보잘 것 없었지만 마침내 커다란 나무로 자라나서 그 무성한 가지에 공중에 사는 온갖 새들이 깃들게 하신다는 사실에서도 나타난다. 하느님은 그저 자라게만 하는 것으로 그치지 않고, 당신께 부어 주시는 활력으로 성숙하게 하고 열매를 맺게 하신다.


그리스도께서도 당신이 세우신 공동체에 대하여 당신 약속을 충실히 이행하신다. 그 공동체의 장래는 인간이 상상할 수 있는 온갖 희망을 뛰어넘어서 완전하게 드러난 ‘하느님의 나라’가 될 것이다. ‘모든 사람 안에서 모든 것이 되시는 하느님’이 될 것이다.


예수님의 제자들이 지닌 위대한 확신과 희망과 놀라운 기쁨은 의심할 여지없는 미래에 대한 주님의 말씀을 믿고 받아들이는 데서 비롯한다. 오늘날 온갖 것이 뒤흔들리고 동요하는 가운데서도 충실하신 하느님께 굳게 닻을 내리고서 어느 날엔가 모든 사람과 모든 백성이 주님의 공동체 안에 들어오고 그 안에서 함께 살게 되는 그러한 미래를 확신하는 데서 비롯한다.


그리스도를 믿고 따르는 모든 사람은 자기 일생을 주께서 하신 그 같은 말씀에 전적으로 내맡기고서, 그리스도께서 하느님 나라를 이룩하는 데 자유자재로 이용하실 수 있는 도구가 되어야 한다.


거짓되고 허황된 자족감과 안전을 포기하고 끊어 버리는 사람에게, 하느님의 말씀은 위대한 확신을 안겨 주고 그 어떠한 시련에도 흔들리지 않게 하실 것이다.




연중 제11주일 독서·복음


제1독서(에제 17,22-24)

<낮은 나무는 높인다>


주 하느님이 이렇게 말한다. 내가 손수 높은 향백나무의 꼭대기 순을 따서 심으리라. 가장 높은 가지들에서 연한 것을 하나 꺾어 내가 손수 높고 우뚝한 산 위에 심으리라. 이스라엘의 드높은 산 위에 그것을 심어 놓으면 햇가지가 나고 열매를 맺으며 훌륭한 향백나무가 되리라. 온갖 새들이 그 아래 깃들이고 온갖 날짐승이 그 가지 그늘에 깃들이리라. 그제야 들의 모든 나무가 알게 되리라. 높은 나무는 낮추고 낮은 나무는 높이며 푸른 나무는 시들게 하고 시든 나무는 무성하게 하는 이가 나 주님임을 알게 되리라. 나 주님은 말하고 그대로 실천한다.’” 


시편(91)

주님을 찬송함이 좋기도 하나이다


제2독서(2코린 5,6-10)

<함께 살든지 떠나 살든지 우리는 주님 마음에 들고자 애를 씁니다>


형제 여러분, 우리가 이 몸 안에 사는 동안에는 주님에게서 떠나 살고 있음을 알면서도, 우리는 언제나 확신에 차 있습니다.  보이는 것이 아니라 믿음으로 살아가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확신에 차 있습니다. 그리고 이 몸을 떠나 주님 곁에 사는 것이 낫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므로 함께 살든지 떠나 살든지 우리는 주님 마음에 들고자 애를 씁니다. 우리 모두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나서야 합니다. 그래서 저마다 좋은 것이든 나쁜 것이든, 이 몸으로 한 일에 따라 갚음을 받게 됩니다. 


복음(마르 4,26-34)

<어떤 씨앗보다도 작은 겨자씨가 어느 풀보다도 커진다>


예수님께서 또 말씀하셨다. “하느님의 나라는 이와 같다. 어떤 사람이 땅에 씨를 뿌려 놓으면, 밤에 자고 낮에 일어나고 하는 사이에 씨는 싹이 터서 자라는데, 그 사람은 어떻게 그리되는지 모른다. 땅이 저절로 열매를 맺게 하는데, 처음에는 줄기가, 다음에는 이삭이 나오고 그다음에는 이삭에 낟알이 영근다. 곡식이 익으면 그 사람은 곧 낫을 댄다. 수확 때가 되었기 때문이다.” 예수님께서 다시 말씀하셨다. “하느님의 나라를 무엇에 비길까? 무슨 비유로 그것을 나타낼까? 하느님의 나라는 겨자씨와 같다. 땅에 뿌릴 때에는 세상의 어떤 씨앗보다도 작다. 그러나 땅에 뿌려지면 자라나서 어떤 풀보다도 커지고 큰 가지들을 뻗어, 하늘의 새들이 그 그늘에 깃들일 수 있게 된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이 알아들을 수 있을 정도로, 이처럼 많은 비유로 말씀을 하셨다. 비유를 들지 않고는 그들에게 말씀하지 않으셨다. 그러나 당신의 제자들에게는 따로 모든 것을 풀이해 주셨다.  





[필진정보]
김수복 : 살레시오 수도회에서 10년 동안 수도생활을 하고, 그 동안 서울 가톨릭 신학대학 6년을 수료했다. 40년 동안 5개 언어에서 성서와 신학 관련 서적을 우리말로 옮기는 번역노동자였다. 현재 사랑하는 아내와 아들 둘, 손자 넷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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