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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수복) 성령 강림 대축일 독서·복음 묵상
  • 김수복
  • 등록 2018-05-18 11:3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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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독서(사도 2,1-11) 해설

<성령께서 내려오시다>


이 대목은 그리스도께서 죽임을 당하고 부활하신 뒤 50일 만에 일어난 사건에 대한 신학적인 해설이다. 그것은 히브리인들이 파스카 축제 뒤 50일 만에 지내는 오순절 축제의 의미가 완전히 성취되고 온전히 채워졌음을 주장하는 내용이다. 이 대목의 첫머리에 벌써 이런 말이 나온다. “오순절이 되었을 때 그들은 모두 한 자리에 모여 있었다.”(1절)


파스카 시기를 결산하면서 곡식을 거두어들이는 농사 축제인 오순절, 가을의 대수확 축제(초막절)를 미리 앞당겨 맛보는 오순절 축제가 그리스도인들에게는 파스카 시기(예수 죽음과 부활을 기념하는 시기)를 결산하는 축제 곧 성령강림절 축제가 된 것이다. 성령강림 축일은 영광 중에 다시 오실 그리스도를 미리 만나게 해 준다(사실, 성령께서는 예수 부활 후 세상을 다스리는 권한을 가지신 분이다.).


그리고 히브리인들의 신앙에 의하면, 오순절 축제는 시나이 산에서 하느님과 맺은 계약과 율법(십계명)을 기념했다. 거기에는 두 가지 염원이 담겨 있었다. 하나는 그 율법(십계명)이 어느 날엔가 모든 사람과 모든 백성에게도 내려질 것이라는 희망이고, 다른 하나는 장차 새로운 계약이 이루어지리라는 희망이었다.


그리스도인들이 보기에는, 그 두 가지 염원이 완전히 이루어졌다. 예수 부활 후 지낸 오순절 축제 때 성령께서 불혀의 모양으로 제자들에게 내려와서 기쁜 소식을 모든 사람과 모든 백성에게 선포할 수 있는 능력을 부어 주셨다. 성령강림 축제는 또한 미래를 지향하고 있다. 그 미래란 모든 사람과 모든 백성이 초막절 축제를 지내기 위하여 예루살렘으로 모여드는 날이고, 주님께서 모든 사람과 모든 백성을 거느리고 천상 예루살렘으로 입성하는 날이다.


시편(103) 해설

주님, 당신 숨을 내보내시어 

땅의 얼굴을 새롭게 하소서


이 시편은 창조주 하느님의 위대하심을 노래한다. 하느님은 당신 성령의 권능으로 당신이 창조하신 만물을 거듭되는 새로운 창조와 창조의 완성을 향해 이끌어 가신다. 성령께서는 끊임없이 “땅의 모습을 새롭게 하신다.” 성령 밖에서는 피조물과 인류에게 아무 희망도 걸 수 없다.


제2독서(1코린 12,3ㄴ-7.12-13) 해설

<오직 한 분이신 성령으로 세례를 받은 사람들은 모두 한 몸을 이룬다>


1코린 12-14에서 바오로는 코린토 신자 공동체가 풍성히 받은 성령의 여러 가지 선물(특은)에 관하여 말하고 있다. 그러나 잘못되어 그 특은들이 교만과 상호 불평의 원인이 되었다. 그래서 바오로는 코린토 신자들에게 온갖 특은이 모두 가장 출중한 특은인 사랑(13장)에서 우러나온다는 사실을 일깨워 준다.


이 대목에서 바오로는 특은들의 통일성을 이루는 세 가지 요인을 분명하게 밝히고 있다.


1) 모든 특은은 똑같은 성령께서 내려 주신 특은인 까닭에 그 특은을 가지고 아무도 경쟁의식을 느낄 필요가 없다.


2) 온갖 특은은 교회를 건설하기 위해 내려 주신 특은으로서 서로 보완하고 보충하면서 완전성을 지향한다. 사람의 몸이 여러 가지 기능을 가진 지체들로 이루어져 있듯이 교회도 다양한 특은을 받은 모든 신자들이 모여서 이루어지는 것이다. 그렇게 합심하고 협동함으로써 신자들(그리스도다운 삶을 사는 사람들)은 오늘의 세계 속에서 살아가시는 그리스도의 신비체가 되는 것이다.


3)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이란 성령을 생명으로 삼고 성령의 지시에 따라 사랑을 실천하면서 사는 사람이다. 세례는 마치 마술처럼 이마에 물을 붓는 순간에 구원을 이루어 주는 무엇이 결코 아니다. 세례는 사람의 온 생애를 걸쳐 죽는 순간까지 그리스도처럼 온 인류를 사랑하기 위해 몸 바치기로 고통스러운 선택과 결단과 투신을 하는 것을 뜻한다.


신자(信者)라는 명칭은 구원받기로 결정되고 안심하고 자신할 수 있는 칭호가 결코 아니다. 참된 신자의 자격을 잃지 않는 것은 매 순간 죽기까지 사랑하기로 몸 바치는 선택에 달려 있다.


참된 신자란 그리스도처럼 사람・인류에 대한 사랑을 실천하고 있는 사람이고 그런 폭넓은 사랑을 품고 있는 사람 외에 다른 사람이 아니다. 그런 사람 안에 성령께서 살고 계신다. 사람의 얼굴이 천차만별이듯 각 사람을 통해 성령의 사랑이 발휘되는 모양도 천차만별이다. 그러나 그 다양성은 아름다운 조화를 이루기 위한 것이며 인류의 단합과 하느님의 영광을 찬양하기 위한 것이다.


복음(요한 20,19-23) 해설

<부활하신 그리스도께서 사도들에게 성령을 불어넣어 주신다>


요한 복음서의 이 대목은 흔히 ‘요한의 성령강림’이라고 부른다. 요한의 성령강림 이야기를 루카의 성령강림 이야기와 동시에 읽어 보면, 파스카(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와 성령강림이 긴밀히 연관되어 있음이 분명해진다.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에 비추어서만 성령강림을 제대로 설명할 수 있다. 성령강림 사건이 언제 어느 날 일어났느냐 하는 것이 문제가 아니다.


잘 생각해 보면, 성령강림은 교회 안에서 끊임없이 반복되어 일어나는 사건이다. 세례와 성찬례가 행해지는 그때마다 새로이 성령께서 강림하시는 것이다. 이때 세례와 성찬례는 단순한 예식이 아니라 생활 속에서 불의와 미움을 버리고 정의와 사랑의 합심을 택하는 삶 자체를 나타내는 표지(標識)인 것이다.


오늘의 복음이 상기시켜 주는 파스카와 성령강림의 의미는 다음과 같이 종합할 수 있겠다. 성령을 선물로 보내 주시는 사실(22절)은 부활하신 분께서 당신을 따라 당신처럼 사는 사람들과 그들의 모임 안으로 성령을 통하여 마치 생명처럼 침투하여 들어오심을 뜻한다(19절). 그리스도께서는 참된 그리스도인들이 합심하여 모여 있는 ‘그 가운데’ 성령을 통하여 현존하여 계신다.


그리스도께로부터 ‘평화’가 나온다(19절). 그 평화는 인류 대부분의 희생 위에 소수가 안일과 풍요를 누리기 위한 보호장치(군비경쟁)로 지켜지는 평화가 아니다. 참된 평화다.


참된 평화는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느님을 아버지로 모시게 된 관계, 하느님과 인류(모든 사람) 사이의 부모・자식의 관계, 똑같은 하느님 자녀들로서 서로 위해 주고 함께 나눠 먹고 사는 가운데 합심하고 뜨겁게 사랑하게 되는 관계를 뜻한다(에페 2,14.18).


이 평화(하느님과 인류, 인류 서로간의 합심과 사랑의 성장)는 필연적으로 사명을 지운다. 이 참된 평화를 인류의 사회관계 안에 구현(具現)하라는 사명이다. 이 사명은 끊임없이 사회제도의 혁신을 통해서 수행된다. 사회제도가 ‘사람이면 모두가 한 형제’라는 신앙의 원리에 따른 제도가 되도록 고쳐가기 위해 공동 작업을 펴고 거기에 참여할 사명을 지운다.


자기가 참된 신자인가 아닌가 여부를 가려내는 기준은 그 사명을 수행하고 있는가, 수행하지 않는가를 반성하면 된다. 그런 노력을 하고 있는 사람이면 누구나, 또 그런 사람만이, 그런 노력을 하고 있는 때만이 성령께서 그 안에 계시고 그리스도의 삶을 오늘에 이어가고 있는 것이다.

 

묵상


성령강림과 예수님의 생애


교회(그리스도인들의 신앙공동체)가 태동하기 시작할 때의 모습은 예수님의 생애가 시작할 때의 모습과 매우 닮았다는 사실을 주시할 필요가 있다. 예수님께서는 세례를 받으신 다음 나자렛의 한 회당에서 설교를 하심으로써 당신의 사도적(使徒的) 활동을 시작하신다. 그리스도인들의 공동체인 교회도 베드로가 성령을 받은 다음 예루살렘에서 설교를 함으로써 자기의 사명을 수행하기 시작한다(사도 2,1-4).


예수님의 공생활 시작과 교회의 사명 수행의 시작은 그 형태에 있어서만 동일한 것이 아니라, 그 내용까지도 동일하다. 예수님께서 나자렛에서 행하신 설교는 교회가 수행해야 할 사명을 의도적으로 나타내고 있다. 예수님의 설교에 보편적 구원(사람이면 누구나 포함되는 온 일류의 구원)의 의지(意志)가 분명히 천명되었던 것과 똑같이, 베드로의 설교에서도 구약의 예언자들의 증언에 기초를 둔 보편적 구원의 의지가 명백히 천명된다.


예수님께서도 당신이 행하실 직분 수행을 마치시는 마당에, 당신 제자들에게 ‘오래지 않아’(사도 1,5) 성령으로 세례를 받게 될 것이라고 약속하신다. 성령의 세례는 ‘오순절 날’에 베풀어졌다. 아버지께로부터 성령을 약속받은 부활하신 그리스도께서 그 날 예루살렘에 모인 사도들 위에 성령을 쏟아 붓듯이 보내 주셨다.


성령강림은 종말론적 사건이다


하느님의 구원 계획은 예수님의 죽음과 현양(부활의 영광을 받으심)으로 끝나지 않고, 성령을 부어 주심으로써 거듭 출발되었다. 루카 9,31에서, 모세와 엘리야가 당신의 변모 때 예고한 대로, 예수님께서 이집트 탈출을 인류 전체의 해방으로 완성시키기로 결단을 내리셨음이 강조된 것처럼, 사도행전의 장엄한 서두에서 성령을 보내시겠다던 그리스도의 약속이 참으로 실현되었음이 강조되고 있다.


성령께서 쏟아 부어지듯 보냄을 받으신 사건은 종말론적 사건이다. 왜냐하면 성령께서는 하느님께로부터 나오는 능력 자체인 분으로서 인류 역사 안으로 들어오신 까닭이다.


성령께서는 역사 자체의 내부 힘에서 우러나신 분이 결코 아니고, 하느님께로부터 내려온 하느님의 능력 자체이시다. 그 성령께서 인류를 살리려고 인류 역사 안으로 들어오신 것이다. 이는 인류가 거저 받은 크나큰 선물이다. “예수님께서는 성령을 부어주셨습니다.”(사도 2,33)


성령께서 쏟아 부어져 인류 역사 안에 들어오시게 된 사건은 마지막 날의 인류공동체(새 인류: 그리스도와 성령을 통하여 하느님의 생명을 받아 하느님을 아버지로 모시게 된 인류가족)의 기원(起原)이 되는 사건이기 때문에 종말론적 사건이라 한다.


베드로는 성령강림의 사건과 요엘의 예언을 직접 결부시킨다. 요엘의 예언을 인용하여 베드로는 ‘마지막 날들’이란 표현을 사용함으로써 성령께서 오심으로써 종말론적 차원이 열렸음을 명백히 한다.


성령께서 인류 역사 안으로 들어오심으로써 주님의 재림에 앞선 구세사의 마지막 국면이 시작되었다. 그리스도 신자들의 공동체인 교회의 시대가 시작되었다. 당신의 부활로 역사의 주님이 되신 예수 자신이 성령을 통하여 당신의 구원 사업을 계속하시는 것이다.


인류는 한 사람도 빠짐없이 하느님을 아버지로 모신 한 형제로서 서로 위해 주면서 하느님께 영광을 드리는 인류가 되도록 부르심을 받고 있으며, 성령께서는 모든 사람 안에서 아버지에 대한 사랑과 서로간의 형제의 정을 키우기 위해 모든 사람을 통하여 활동하고 계신다.


성령강림의 선교적 차원


“그들은 성령으로 가득 차, 성령께서 표현의 능력을 주시는 대로 다른 언어들로 말하기 시작하였다.”(사도 2,4) 복음 선포의 출발과 내용은 성령의 활동이다. 사도행전의 이 말씀은 루카 복음서와 사도행전 전편에 걸쳐 전개되는 핵심적인 내용으로서, 성령께서야말로 교회 사명 수행의 원동력이며 나아갈 길을 지시하는 분이시라는 말씀이다.


성령께서는, 사람이면 모두 하느님의 한 자녀로 알아 똑같은 관심과 애정을 기울이는 모든 사람 안에서, 그런 관심과 애정을 기울일 때의 그 사람 안에서 당신 사랑의 능력을 펴서  인류가 한마음으로 하느님을 아버지로 모시는 행복을 누리고 아버지께 영광을 드리게 하신다. 그리고 사람 안에 사람에 대한 참된 정을 느끼게 하시는 분도 다름 아닌 성령이시다.


모든 사람을 하느님의 자녀로 알아 사랑하기로 자유로이 결심하고 노력하는 사람 안에 성령께서 그 사랑을 부어 주신다. 그 사랑이야말로 구원을 주는 영원한 가치를 지닌다. 그러므로 구원은 혼자 받는 것이 아니라 사랑의 헌신과 수난을 통하여 인류와 함께 받게 되어 있다.


성령의 예언자적 차원


성령강림 때 내려오신 성령께서는 예언자적 직능도 가지고 계신다. 베드로는 자기 시대의 종교적・역사적 상황에 대처하여 하느님의 말씀인 요엘서의 예언을 인용함으로써 자기의 설교를 시작한다. 그렇게 하여 예언자적인 시각으로 역사를 읽어 내고 역사 안에서 하느님이 나타나시는 모습을 밝혀낸다.


베드로의 설교를 들은 청중들은 바로 얼마 전에 일어난 사건들(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이 구약의 예언서들과 맞아떨어짐을 깨닫도록 독려 받고 있으며, 선택과 결단을 내려야 할 입장에 처하게 된다. 예수님께서 주님이고 메시아이심을 그냥 알고 넘어가는 것이 아니라, 그 사실을 인정하고 났을 경우 인정한 그 진실에 자기실존(實存)을 투신(投身)하느냐 마느냐 결단을 내려야 할 처지가 된다. 신앙의 고백은 단순한 말이 아니라, 생활의 목표와 방향을 바꾸는 결단과 실천을 뜻한다. 이때 실천이 신앙고백의 알맹이다.


예수를 주님이시라고 고백한다는 의미는 예수님의 진리, 곧 예수님께서는 바로 하느님의 아들이요, 동시에 우리와 똑같은 사람으로 인류 안에 들어온 참 사람이라는 진리, 그리고 그분은 당신의 죽음과 부활로 모든 사람을 당신과 하나 되게 하여 하느님의 자녀가 될 수 있게 했으며, 모든 사람이 하느님 아버지의 한 자녀로서 서로 사랑할 수 있게 하셨다는 진리를 깨닫고 그 깨달음대로 살아감(실천함)을 뜻한다.


인류 중에서 가난하고 못나고 천대받는 수많은 사람들에게 애정을 품고 그 사람들을 질곡에서 벗어나게 하는 것이 참된 신앙고백이요 성령의 세례다. 이기심으로 마음이 굳어 있고 몰인정한 소수의 사람들을 회개(回改)하게 하여 인정 있는 사람으로 만드는 것, 그리고 몰인정할 때의 나를 끊임없이 인정 있는 나로 고쳐가는 것이 예수를 주님으로 모시는 신앙 고백이요 죽을 때까지 일생을 통하여 받아야 할 성령의 세례다. 성령의 세례는 정적(靜的)인 완결된 상태가 아니고, 거듭 거듭 돌아서고 나아가야 하는 생동하는 미결상태다.


성령께서 계시는 곳


외형적으로 세례를 받았거나 아니 받았거나 모든 사람 안에는 성령께서 계시면서, 뚜렷하게 의식적이든 잠재의식적이든, 하느님을 아버지로 모셔야 할 필요성을 절감하게 하신다. 하느님을 아버지로 모셔야 할 필요성을 절감한다는 말은 사람이 다른 사람을 위해 주어야 할 궁극적 이유가 절실해진다는 말과 통한다.


사람을 사람이기 때문에 진정으로 사랑해 보려고 몸부림치는 고뇌는 모두 성령의 형언할 수 없는 사랑의 탄식이다. 그런 사람 안에는 성령께서 계시고 그럴 때의 모든 사람은 하느님의 성전임이 참으로 진실이다.


바람의 향방을 어림할 수 없듯이 성령께서 어디 계신지 잘라 말할 수 없다. 세례를 받았다는 자신도 그 세례의 요청대로 죄(이기심, 무관심, 미움)에 죽고 사랑에 살아야만 성령을 모실 수 있고 구원을 받을 수 있다. 그리고 죽을 때 그 세례 받은 정도가 결정된다.


외형적으로 세례를 받지 않았어도 정말 따뜻한 사람의 인정(人情)은 성령의 사랑이다. 그 인정과 사랑이 성령의 세례를 받았다는 표시다. 성령께서 그 사람 안에 계시다는 말이다. 그 사람도 그리스도다운 사랑을 실천하는 참된 그리스도인에 포함된다는 말이다. 인정스러워진다는 것은 일생 순간순간 자신의 포기요 바침이기 때문에 수난의 길이다. 따뜻할 때의 자신과 따뜻할 때의 모든 사람 안에 계시는 성령을 서로 알아 모시고 거듭 새로이 더 많이 따뜻하기로 부축하고 노력할 때 성령께서 인류를 한마음 되게 하여 아버지이신 하느님께로 데려가실 것이다.



성령 강림 대축일 독서·복음


제1독서(사도 2,1-11)

<성령으로 가득 차 말하기 시작하였다>


오순절이 되었을 때 그들은 모두 한자리에 모여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하늘에서 거센 바람이 부는 듯한 소리가 나더니, 그들이 앉아 있는 온 집 안을 가득 채웠다. 그리고 불꽃 모양의 혀들이 나타나 갈라지면서 각 사람 위에 내려앉았다. 그러자 그들은 모두 성령으로 가득 차, 성령께서 표현의 능력을 주시는 대로 다른 언어들로 말하기 시작하였다. 


그때에 예루살렘에는 세계 모든 나라에서 온 독실한 유다인들이 살고 있었는데, 그 말소리가 나자 무리를 지어 몰려왔다. 그리고 제자들이 말하는 것을 저마다 자기 지방 말로 듣고 어리둥절해하였다. 그들은 놀라워하고 신기하게 여기며 말하였다. “지금 말하고 있는 저들은 모두 갈릴래아 사람들이 아닌가? 그런데 우리가 저마다 자기가 태어난 지방 말로 듣고 있으니 어찌 된 일인가? 파르티아 사람, 메디아 사람, 엘람 사람, 또 메소포타미아와 유다와 카파도키아와 폰토스와 아시아 주민, 프리기아와 팜필리아와 이집트 주민, 키레네 부근 리비아의 여러 지방 주민, 여기에 머무르는 로마인, 유다인과 유다교로 개종한 이들, 그리고 크레타 사람과 아라비아 사람인 우리가 저들이 하느님의 위업을 말하는 것을 저마다 자기 언어로 듣고 있지 않는가?”  


시편(103) 

주님, 당신 숨을 내보내시어 

땅의 얼굴을 새롭게 하소서


제2독서(1코린 12,3ㄷ-7.12-13)

<우리는 한 성령 안에서 세례를 받아 한 몸이 되었습니다>


형제 여러분, 성령에 힘입지 않고서는 아무도 “예수님께서는 주님이시다.” 할 수 없습니다. 은사는 여러 가지지만 성령께서는 같은 성령께서십니다. 직분은 여러 가지지만 주님은 같은 주님이십니다. 활동은 여러 가지지만 모든 사람 안에서 모든 활동을 일으키시는 분은 같은 하느님이십니다. 


하느님께서 각 사람에게 공동선을 위하여 성령을 드러내 보여 주십니다. 몸은 하나이지만 많은 지체를 가지고 있고 몸의 지체는 많지만 모두 한 몸인 것처럼, 그리스도께서도 그러하십니다. 우리는 유다인이든 그리스인이든 종이든 자유인이든 모두 한 성령 안에서 세례를 받아 한 몸이 되었습니다. 또 모두 한 성령을 받아 마셨습니다. 


복음(요한 20,19-23)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처럼 나도 너희를 보내니 성령을 받아라>


그날 곧 주간 첫날 저녁이 되자, 제자들은 유다인들이 두려워 문을 모두 잠가 놓고 있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오시어 가운데에 서시며, “평화가 너희와 함께!” 하고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이렇게 말씀하시고 나서 당신의 두 손과 옆구리를 그들에게 보여 주셨다. 제자들은 주님을 뵙고 기뻐하였다. 


예수님께서 다시 그들에게 이르셨다. “평화가 너희와 함께!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처럼 나도 너희를 보낸다.” 이렇게 이르시고 나서 그들에게 숨을 불어넣으며 말씀하셨다. “성령을 받아라. 너희가 누구의 죄든지 용서해 주면 그가 용서를 받을 것이고, 그대로 두면 그대로 남아 있을 것이다.” 





[필진정보]
김수복 : 살레시오 수도회에서 10년 동안 수도생활을 하고, 그 동안 서울 가톨릭 신학대학 6년을 수료했다. 40년 동안 5개 언어에서 성서와 신학 관련 서적을 우리말로 옮기는 번역노동자였다. 현재 사랑하는 아내와 아들 둘, 손자 넷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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