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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이병두] 비구니 스님들이 대각성할 때가 되었다
  • 이병두
  • 등록 2016-05-12 10:33:33
  • 수정 2016-05-12 15:1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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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 주) 이 글은 지난 4월 26일 《BBS 불교방송》(라디오)의 생방송 ‘정병조의 무명을 밝히고’에 출연하여 ‘비구-비구니 역할’을 주제로 나눈 이야기를 정리한 것이라, 다듬어지지 않았다는 점을 말씀드린다.


▲ 대한불교조계종 제204회 중앙총회 정기회 (사진출처=대한불교조계종)



과거에 비하여 상황이 많이 좋아졌다고 하지만 ‘비구-비구니’ 차별 문제는 아직도 해결해야 할 과제가 많이 있다. 그럼 이 문제가 우리 한국 불교만의 문제일까, 그리고 다른 종교에는 없는 불교만의 문제인가?



첫 번째, 우리 현실을 제대로 보기 위해서 먼저 다른 이웃 종교계에서는 ‘남녀 수도자 또는 성직자’를 대하는 데에 차별은 없는지 알아보자.


천주교: 천주교에서 여성 수도자인 수녀는 성직자로 인정하지 않고 있어서, 평신도를 상대로 기독교 경전의 내용을 강설할 권리조차 없다. 미국을 비롯하여 여러 나라에서 이에 대해 저항하며, 여성 수도자도 사제와 똑같은 권리를 갖게 해달라는 청원 차원을 넘어 아예 “우리도 미사 집전을 하겠다” 선언하는 곳도 많아지고 있다. 교황청 차원에서도 이 문제로 고민이 많은 것으로 알고 있지만, 남성 수도자인 신부들의 저항 때문에 쉽지 않아 보인다.


나는 얼마 전 가톨릭 언론에 이런 문제를 지적하며, 한국 여성 수도자들이 현실을 깨닫고 떨쳐 일어나라는 칼럼을 올려서 호응을 받기도 하였다. (관련기사보기)


개신교: 개신교는 ‘천주교의 폐습을 깨뜨리겠다’며 탄생하였는데, 이곳 사정도 그리 좋지는 않다. 우리나라의 수많은 개신교계 교단 중에서 가장 진보적이라고 하는 기독교장로회조차도 여성 목사 비율이 10% 안팎에 불과하다고 하고, 얼마 전 예수회장로회의 총회신학대학에서는 여성 목사 안수를 주장하는 어느 강사의 강좌를 폐강시켜서 논란이 되기도 하다. 심지어 일부 대형교회 목사들 중에는 노골적으로 “여성들은 남성을 위한 봉사자 역할만 해야 한다”며, 여성 목사 안수를 강하게 반대하는 이도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


내 생각에는 천주교나 개신교 쪽의 여성 차별 문제는 ‘전통을 빙자한 남성들의 독점욕’에 불과한 것인데, 이것을 ‘운명’이려니 하고 받아들이고 인정해주는 여성들의 분위기도 문제가 있는 것 같다. ‘울지 않는 놈에게 젖 주지 않는 것’, 자식을 위해 모든 것을 내주는 엄마도 자식에게 그러는데 권리와 권한을 그냥 베풀 듯이 넘겨줄 사람과 권력이 어디 있겠는가?



두 번째, 이웃 종교계 상황은 어떤 점에서 우리보다도 더 어려운 현실이다. 그럼 시야를 해외로 넓혀서, 우리와는 전통이 다르지만 세상 사람들이 불교국가라고 부르는 버마‧태국‧스리랑카 등 남아시아의 이른바 상좌부 불교국가 상황은 어떤지 살펴보는 것도 우리를 들여다보는 데에 도움이 될 것 같다.


남아시아 불교국가의 ‘여성 수행자’들은 어떤 상황인가?


세속법에 의한 비구니 출가와 수계 규제 등 장애가 높고 단단하다: 태국에서는 1928년 비구 승단 최고 의결기관에서 비구니 수계를 불법으로 규정한 이래 세속 법률 규정과 승단 규정에 변화가 없다.


지난 4월 3일 태국의 어느 비구니 수행처에는 경찰 단속 소식이 전해져 그곳에서 수행하던 비구니 스님들이 갑자가 사방으로 흩어져 숨는 일까지 있었다. 그러나 이런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일부 진보적인 비구 스님들 가운데 비구니 수계를 강행하는 분들이 있었는데, 지난 1998년에는 포티락(Photirak)이라는 스님이 비구니 80명에게 계를 주었다가 승단에서 추방되고 고발되어 세속법정에서 66개월 징역형을 선고받아 투옥되기도 하였다.


최근에는 미국이나 호주 등지에 가서 계를 받고 들어와 활동하는 비구니 스님들이 늘어나고 있지만, 비구들의 신고를 받은 공권력 투입으로 어려운 상황을 맞기도 한다. 최근 활발한 활동을 펼치는 빤나와띠(Pannavati) 스님도 미국에서 계를 받았는데, 2010년에는 미국에 있는 캄보디아 사찰에서 캄보디아 불교계의 어른 비구 스님을 증명법사로 캄보디아 사미니 열세(13) 명에게 그리고 2012년에는 캄보디아에 가서 태국 비구니 다섯 명과 캄보디아 비구니 한 명에게 구족계를 주기도 하였다. 


빤나와띠 스님이 비구니 수계를 강행할 수 있는 데에는 주로 머무는 곳이 외국이라는 점과 태국 왕비의 전폭적 지지 등의 배경도 있지만, 내 생각에는 무엇보다도 상황을 변화시키려는 그분의 의지와 원력이 큰 덕분이 아닐까 한다. 비구니 수계식 후 법문 말미에 빤나와띠 스님이 하시는 말씀이 있다. “드디어 부처님 가족이 다시 함께 하게 되었다. At last the Buddha’s family is together again!”


또 한 사례는 우리나라 불자들에게도 그 이름이 잘 알려진 아잔 브람 스님이다. 영국 출신의 엘리트인 아잔 브람 스님은 태국에서 출가하여 호주에서 주석하며 전 세계로 활동 무대를 넓힌 분인데, 2009년 9월 22일 호주의 퍼스(Perth)에서 비구니 네 명에게 구족계를 준 뒤 그분의 소속 교단에서 제명을 당한 적도 있다. 그리고 미얀마에서도 ‘투옥’ 위험이 있는데도 나라 밖으로 가서 구족계를 받고 귀국해 비구니로 활동하다가 실제로 구속‧수감된 용감한 비구니 스님도 있었다.



세 번째, 이웃 종교계의 여성 수도자‧성직자들과 남아시아 불교국가 비구니 스님들이 매우 힘든 조건에 있음을 알겠다. 그렇다고 해서 “천주교나 남아시아 불교국가들보다는 좋은 조건에 있으니, 비구니 스님들은 아무 불만 하지 말고 비구들이 해주는 대로 가만히 있으라”고 할 수는 없지 않겠는가? 어쨌든 우리 불교계에도 엄연히 비구-비구니 사이에는 차별이 존재하고 있고, 「비구니 팔경계법」을 차별을 정당화하는 근거로 제시하곤 한다.


그럼 우리 비구니 스님들은 어떻게 해야 할지, 방향을 제시해 보자!


먼저 「비구니 팔경계법」의 현실성을 살펴봐야 한다.

「비구니 팔경계법」과 관련해 태국의 어느 비구 스님이 2006년 5월 《방콕포스트》지에 <부처님은 성차별주의자였나?>라는 도발적인 제목의 칼럼을 기고한 것을 내가 번역해서 소개한 적이 있다. (관련기사보기)


이 스님은 전직 의사로 태국 출라롱콘대학과 영국 옥스퍼드 미국의 하버드 대학을 거쳐 독일 함부르그대학에서 철학박사 학위를 받은 분인데, 삼장(三藏)의 그 어느 곳을 찾아보아도 “부처님께서 여자보다 남자를 더 편애했다”는 대목은 찾을 수 없고 오히려 탁월한 비구니 수행자를 칭찬하는 장면이 많다고 주장한다. 


이 「비구니 팔경계법」은 부처님께서 제정하신 게 아니라 후대에 만들어진 내용이라는 것이다. 게다가 이 「비구니 팔경계법」을 내세우는 “불교 교단의 성차별주의가 불교 발생지인 인도에서 불교를 파괴하고 전멸시키는 데에 책임이 있다”는 혁명적인 주장까지 펼친다.


국내에서도 ‘비구-비구니 차별’을 당연하게 여기며 그런 주장을 서슴지 않으면서 이 「비구니 팔경계법」을 거론하는 분들에게는 “그처럼 계율을 잘 지키신다면 비구계에 설해진 250개를 다 잘 지킬 수 있으십니까?”라고 묻고 싶다.


그러나 이 문제를 모두 비구 스님들 책임으로만 돌릴 수는 없다. 권리는 스스로 쟁취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위에서 말한 대로 태국 등 남아시아 비구니 스님들의 용기 있는 사례뿐이 아니다. 미국에서 법적으로 흑인 투표권이 보장된 뒤로도 행정 절차를 까다롭게 하고 ‘전통’을 내세우며 투표를 방해하는 것을 해결한 것도 고 마틴 루터 킹 목사가 남부의 작은 도시 셀마라는 곳에서 일으킨 저항운동 덕분이었다(참고로 이 실화는 <셀마>라는 제목의 영화로 제작되어 우리에게도 익숙하다).


가장 최근에는 미국에서 가장 많이 쓰는 화폐인 20달러짜리 표지 인물을 제2대 대통령 앤드류 잭슨에서 흑인 여성 인권운동가 해리엇 텁만(Harriet Tubman)으로 바꾼다는 발표가 있었다. 인종차별주의자였던 앤드류 잭슨에서 ‘노예로 태어났지만 탈출하여 평생 자유를 위한 투쟁에 몸 바친 흑인 여성’으로 화폐의 인물이 바뀐다는 것이, 백인들의 시혜 덕분일까? 결코 그렇지 않을 것이다. 이제 흑인 없이 미국을 유지할 수 없게 되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받아들이는 것이다.


세상이 변하고 있고 그 흐름에서 벗어날 수 없는 곳이 종교이다. 조계종을 비롯한 종단 현실이 비구니 스님들의 도움을 받지 않으면 안 되는 상황으로 변하고 있다. 1994년 조계종단 개혁 이후에 중앙종회의원 열(10) 자리를 비구니에 배분하고 2004년부터는 중앙종무기관 부실장 소임도 맡게 되는 것은 비구 스님들의 시혜가 아니라, 그만큼 비구니의 역할이 중요해졌고 이것을 종단에서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는 뜻이다. 이 흐름을 지혜롭게 파악하고 그것을 활용하여야 하는데, 그 책임은 비구니 스님들에게 있다고 확신한다.


비구니 스님들은 무엇보다도 비구 스님들에게 비굴하게 매달리지 말아야 한다. 그러나 비구니 역할이 중요해지고 비구니 스님이 없이는 종단이 유지되기 어렵다고 해서 재가자에게 오만하지도 말고 “역시 비구니 스님들은 다르다. 훌륭하고 신뢰할 수 있다”는 평가가 나올 수 있도록 모범을 보여주어야 한다. 성직자로 인정을 받지 못하는 열악한 조건에서도, 전 세계에 걸쳐 어려운 이들을 돕는 일에 애쓰고 있는 천주교 여성 수도자인 수녀님들에게서 배울 점도 많지 않을까 생각한다.



[필진정보]
이병두 : 종교 칼럼니스트이며 종교평화연구원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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