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사 메일전송
[칼럼-이병두] 한불(韓佛)수교 130주년, 과연 경축(慶祝)할 일인가?
  • 이병두
  • 등록 2016-08-24 11:21:29
  • 수정 2016-08-24 11:26:52

기사수정


▲ (사진=한·불상호교류의해 공식홈페이지 갈무리)

올해 2016년이 우리나라와 프랑스가 정식으로 외교 관계를 맺은 지 130년이 되는 해라고 해서 정부가 앞장서서 다양한 경축 행사를 벌이고 있다. 심지어 프랑스의 명품 제조사들의 요구로 서울의 국립중앙박물관에서 ‘한불수교 130주년을 축하하는 명품대전’을 열려고 하다가 전임 관장의 반대로 이루어지지 못하게 되었고, 이 기념전이 무산된 데에 진노한 정부는 국립중앙박물관장과 그를 담당하던 문화체육관광부 제1차관을 경질하여 ‘프랑스에 대한 극진한 사모(思慕)의 마음’을 드러냈다.


‘한불수교’는 오랜 동안 바깥세계에 문을 닫은 채 중국(明 ‧ 淸) 및 일본(日本) ‧ 류우큐우(琉球 ‧ 沖縄) 왕국 등과만 관계를 유지해오던 조선이 영국 ‧ 미국에 이어 맺은 외교관계였으니 '그런 일이 있었다'정도로 기념할 수는 있을 것이다. 그러나 '130주년'에 특별한 의미를 부여하며 지나칠 정도로 행사 등을 개최하는 것에는 누구라도 동의하기 어렵다. 여기서 지엽적인 사항을 하나 지적하자. 동아시아의 오래 된 기년(紀年) 방식인 60갑자(甲子) 식으로 하여 '60주년'이나 '120주년'을 기념할 수도 있고, 서양식으로는 '50주년, 100주년'을 기념할 수는 있을 것이다. 그러나 '130주년'이라고 해서 다채로운 이벤트를 준비한다는 데에는 동서고금(東西古今)의 어느 법과 관례 ‧ 전통에도 맞지 않는 엉터리 발상이라고 할 수밖에 없다.


다 좋다. 현재의 대통령께서 프랑스에 대한 그리움과 애정이 각별하시니 자신의 임기 중에 ‘한불수교 기념’을 하고 싶을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렇더라도 ‘과연 130년 전에 있었던 그 수교(修交)가 정상적인 외교 상황에서 조선정부의 자주 의지에 따라 평등하게 이루어졌던가, 조약 체결 이후에는 두 나라 관계가 그야말로 호혜평등(互惠平等)의 원칙대로 유지 되었는가’ 따져보고 그것에 대해 ‘그렇다’는 답을 얻어낼 수 있을 때에만 수교 몇 주년을 기념하는 사업을 펼칠 수 있는 것이다. 


▲ 제주대정 삼의사비(濟州大靜三義士碑). 중앙정부에서 파견한 봉세관(捧稅官)의 부패와 일부 천주교도들의 행패에 맞서 1901년 5월 제주도민들이 봉기한 사건인 ‘이재수난’의 세 장두(狀頭)인 강우백·이재수·오대현을 기려 세운 비이다. (사진출처=디지털서귀포문화대전)

그런데 지난 역사는 전혀 그렇지 않았고, 오히려 조약 체결 이후 가톨릭 사제를 비롯한 프랑스 사람들의 행패에 가까운 악행(惡行)으로 백성들이 큰 고통을 겪었던 것이다. (제주도에서 프랑스의 힘을 배경으로 한 가톨릭 신도들이 저지른 악행은 소설가 현기영이 『변방에 우짖는 새』를 통해 생생하게 그 실상을 전해주었고, 이 소설을 바탕으로 한 영화 <이재수의 난>은 ‘프랑스국립영화센터 CNC(Centre Nationale de la Cinematographie)’가 예산 일부를 지원하여 제작되기도 하였다. 1890년대 말과 1900년대 초 제주도에서는 프랑스 사람은 ‘법국(法國)놈들’이라고 ‘놈’을 붙였고, 이 말은 곧 ‘나쁜 놈들’과 동의어였다고 한다.)


여기서 잠시 130년 전에 이루어진 ‘한불수교’의 내용을 간단하게 살펴보자.


우리나라와 프랑스는 1886년 6월 4일 조불수호통상조약朝佛修好通商條約(또는 대조선국대법민주국통상조약大朝鮮國大法民主國通商朝約)을 체결하면서 공식 외교 관계를 수립한다. 이 조약은 전문 13조의 조법수호통상조약朝法修好通商條約과 부속통상장정附續通商章程 및 세칙稅則, 세칙장정稅則章程, 선후속약善後續約으로 구성된 조약 내용은 앞서 체결된 한영韓英 조약을 모방한 것으로서, 내용은 거의가 불평등不平等조약이었다.


조약을 체결할 때에, 프랑스에서는 가톨릭 선교의 자유를 얻으려고 청淸나라의 실권자인 위안스카이袁世凱를 동원했으나, 고종高宗이 허락하지 않았다. 다만 조약을 맺을 때 제9관에 교회敎誨라는 두 글자와 “학자든 통역이든 일꾼이든 조선 사람을 고용할 수 있다”는 내용을 어렵사리 삽입할 수 있었는데, 이것은 기존에 체결된 다른 나라와의 조약과 다른 점이었다. 프랑스 측은 이것으로서 ‘선교의 자유를 얻은 것’으로 해석하여, 선교 사업을 통한 교육 문화에 전력을 기울이게 된 것이다.


이 조약은 고종 24년인 1887년에 프랑스 측의 콜랭 드 플랑시(Collin de Plancy, 葛林德)과 조선의 외무독판外務督辦 김윤식金允植과 비준을 교환하여 정식으로 효력이 발생하고, 양국 간에 정식외교관계가 수립되었다.


당시 어쩔 수 없는 상황에서 불평등조약을 체결할 수밖에 없었던 그 상황을 십분 이해할 수 있고 그래서 고종이나 김윤식 등에게 이제 와서 책임을 물을 생각은 없다. 그러나 우리가 이 시점에서 130년 전에 이루어진 ‘한불수교’를 기념하려면, 그 ‘어둡고 부끄러운 역사’를 짚어보고 그것이 오늘 우리에게 주는 메시지와 교훈이 무엇인지 곰곰 생각해보는 기회가 되어야 마땅할 것이다. 그런데 그게 아니라, 일방적으로 ‘짝사랑 경축 행사’를 펼치는 현재의 정책은 1901년 일명 ‘이재수의 난’이 일어났던 제주도에서 프랑스 신부와 그 하수인들에게 쩔쩔 매던 제주 관아의 벼슬아치들이나 고종 정권의 고위 인사들이 하던 짓과 하나도 다를 바가 없는 것이다.(프랑스 외방선교회 출신의 귀스타브 샤를 마리 뮈텔-Gustave-Charles-Marie Mutel, 한국식 이름 민덕효(閔德孝)-이 가톨릭 조선교구장으로 우리 민족에 저지른 악행에 대해서는 이 자리에서 언급하지 않는다.) 


누군가에게 뺨을 맞거나 흠씬 두들겨 맞고서 그 일이 10년 ‧ 50년 ‧ 130년 되었다고 해서 그것을 경축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를 보고 뭐라고 하겠는가. ‘바보 ‧ 멍청이’라고 하지 않겠는가. 그런데 현재 한국 정부 하는 짓이 그렇다. 130년 전, 공식적으로 우리 뺨을 때릴 수 있는 권리를 넘겨준 프랑스에게 그 ‘권리 이양’을 기념하는 정부 차원의 다양한 행사를 하고 있으니, 한국 정부는 ‘왼쪽 뺨을 맞으면 오른쪽 뺨을 내밀라!’고 하는 기독경(基督經)의 가르침에 충실한 곳 같다. 이러다가 을사늑약(乙巳勒約) 120년이 되는 2025년이 되어 “한일 양국 공동으로 을사보호조약 체결 120주년 경축행사를 해서 동양평화를 성취하자!”는 미친 정권이 등장하는 것은 아닌가 모르겠다.




이병두 

(종교칼럼니스트·종교평화연구원장)



[필진정보]
이병두 : 종교 칼럼니스트이며 종교평화연구원장이다.
TAG
키워드관련기사
0
  • 목록 바로가기
  • 인쇄


가스펠툰더보기
이전 기사 보기 다음 기사 보기
모바일 버전 바로가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