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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이병두] ‘깨달음 논쟁’을 지켜보면서 드는 소박한 생각 몇 가지
  • 이병두
  • 등록 2016-02-05 11:57:09
  • 수정 2016-02-05 16:41: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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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깨달음’을 둘러싸고 이런 저런 말과 글이 오고가는 와중에 부산의 어느 스님이 “깨달음은 벼락처럼 다가온다”고 했다는 언론 보도가 있었다.


이 말이 맞을 수 있다. 어떤 사람에게는 깨달음이 벼락처럼 올 수도 있다. 그런데 그 벼락을 받아들여 소화할 수 있는 사람들이 몇 %나 될까. 아니 매년 조계종의 전국 선원에서 안거(安居)를 난다는 2,000여명의 선사들 중에서는 몇 %가 그 벼락을 맞고도 온전히 버티고 그 벼락같이 다가온 ‘깨달음’을 세상에 회향할 수 있을까.


벼락 맞은 대추나무는 자신의 생명을 잃지만 그 때문에 더욱 단단해져서 도장을 새기는 최고급 재료로 인기가 높다. 그러나 무방비 상태로 벼락을 맞고서 살아남은 사람은 드물다. 천만다행(千萬多幸)으로 살아남는다고 해도, 80~90%는 심각한 장애를 안고 살아갈 수밖에 없으니 벼락을 맞고서 살아남는 것이 오히려 죽음보다도 더 고통스러울지도 모른다.


그래서 이런 위험을 피하기 위해 곳곳에 피뢰침(避雷針)을 세우기도 하고, 어려서부터 “벼락이 칠 때에는 이렇게, 저렇게 하라. ……”는 주의사항을 귀가 따갑게 들었던 것이다. 그런데 우리 선가(禪家)에서는 그 벼락 피하는 법을 가르쳐주지 않는다. 벼락처럼 다가올 그 ‘깨달음’, 성취 가능성이 단 1%도 안 되는 그 ‘깨달음’을 얻기 위해 벼락에 맞서라는 것이다. 이런 식으로 ‘깨달음 장애’를 당한 이가 몇 %인지 살펴보기는 했을까.


아! 무엇보다도 “깨달음은 벼락처럼 온다”고 말한 당사자는 ‘그 벼락에 맞서서 그것을 이겨내 보았을까’, 그게 궁금하다.


경북 문경시 희양산 봉암사는 스스로 ‘한국 불교에 마지막 남은 수행처’라고 자처하고 바깥세상에서도 그렇게 인정해주는 곳이다. ‘수행 환경을 지키기 위해’ 1년에 단 두 세 차례만 일반인에게 산문(山門)을 개방하는 곳으로 알려져 있어서, 가톨릭의 봉쇄 수도원(封鎖修道院)과 비슷한 이미지로 불자들뿐 아니라 일반 대중들에게도 알려져 있고 그래서 더욱 많은 사람들이 그곳에서 수행하는 수좌들을 존경한다.


이 희양산 봉암사가 정부에서 수십억 원 예산 지원을 받게 되었다. 절 아래쪽에 ‘명상 마을’을 지어 참선을 대중화 ‧ 국제화하겠다는 생각으로 이 예산을 받기 위해 전임 기획재정부장관에게 부탁을 해서(또는 압력을 행사해서) 문화체육관광부의 ‘관광레저’ 관련 예산을 받아낸 모양이다. 그리고 이 사업에 참고하기 위해 선원수좌복지회(禪院首座福祉會)의 내로라하는 유명한 선사들이 유럽의 불교와 가톨릭 수행공동체(修行共同體) 여러 곳을 다녀왔다고 유력 언론에 자랑을 하였다. (돌아가신 법정스님께서 “안거 기간에 바깥을 돌아다니는 승려들은 다리를 분질러도 된다”고 했던 적이 있지만, 이분들의 유럽 순방이 동안거 기간에 이루어졌던 점에 대해서는 어찌 보아야 할지 확신이 서지 않는다.)


글쎄, 이분들이 무엇을 보고 어떤 느낌을 갖고 돌아왔는지 잘 모르겠다. 다만 내 생각에 이들이 꼭 놓치지 말았어야 할 것 한 가지가 있다. ‘유럽의 불교와 가톨릭 수행 공동체 중 단 한 곳이라도 국민 세금에서 나오는 막대한 정부 예산을 지원받아 시설을 지은 곳이 있던가?’ 선사들의 순방에서 이 점을 확인하고 “이번 순방 결과 우리도 이미 확보된 정부 예산 지원을 받지 않고 우리 스스로 땀을 흘려서 우리 환경에 맞는 수행 공간을 짓겠다”는 의지를 밝혀준다면 더 바랄 것이 없겠다. 그러나 이렇게 기대하기는 ‘히말라야 설산(雪山) 꼭대기에서 고래와 어울려 춤을 추기를 바라는 것’보다도 더 어려울 것이다.


선사들이 입으로는 ‘하루 일하지 않으면 하루 먹지 않는다(一日不作 一日不食)’는 백장청규(百丈淸規)를 자주 거론하면서 실제로는 정치인들에게 부탁해 국민들의 세금을 축내고 ‘수행을 관광 레저 상품’으로 만드는 일에 앞장선다면, 설사 그들의 깨달음 경지가 높다고 할지라도 신뢰를 얻을 수 있을까 궁금하다.


정부 예산을 지원받아 추진하는 희양산 봉암사 명상마을 사업이 겉으로 번지레한 건물을 짓는 데까지는 성공할지 모르지만, 결국 실패할 가능성이 높음은 물어보지 않아도 환하게 그 결과가 보이는 일이 아니겠는가. 선의 기본정신을 버리고 스스로 ‘관광 레저’ 상품 판매자로 나서면서, “선을 대중화하고 세계화하겠다”는 구호, 이것은 ‘1층과 2층은 짓지 말고 멋진 3층만 빨리 지어내라’고 목수를 닦달했던 어리석은 부자의 요구와 같지 않은가.


요즈음 전개되는 ‘깨달음 논쟁’을 보면, 논쟁과 토론이 없는 한국 불교계에 그나마 다행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러면서도 “깨달은 선사가 있기는 있는 것인가? 깨달은 선사가 있다고 치자. 그런데 그분들이 깨달은 이후에 중생을 위해 무엇을 했는가, 어떤 가르침을 펼쳤는가? 중생들의 안락과 행복에 무슨 도움이 되었는가? ……” 묻지 않을 수 없다. 예토(穢土)를 떠난 정토(淨土)가 있을 수 없듯이, 중생을 외면하고 중생에 아무런 도움도 되지 않는 깨달음은 존재할 수 없을 것이다.


이왕 깨달음 이야기를 나누는 김에 한 번 속 시원하게 말해보자. 누가 무엇을 깨달았고, 그 깨달음을 세상에 어떻게 전했으며 원효(元曉)스님의 말씀처럼 ‘중생들을 널리 행복하게’ - 요익중생(饒益衆生)했는가? 그런 선사가 열(10), 아니 다섯(5) 분만 계셔도 앞으로 참선 수행자들을 받들어 모실 것이다.





[필진정보]
이병두 : 종교 칼럼니스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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