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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수복) 연중 제30주일 독서·복음 해설
  • 김수복
  • 등록 2015-10-24 07:12:50
  • 수정 2015-10-24 20:39: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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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독서(예레 31,7-9)
<소경과 절름발이를 사랑으로 고쳐 주리라>


주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신다. “야곱에게 기쁨으로 환호하고 민족들의 으뜸에게 환성을 올려라. 이렇게 외치며 찬양하여라. ‘주님, 당신 백성과 이스라엘의 남은 자들을 구원하소서!’  내가 이제 그들을 북녘 땅에서 데려오고 땅 끝에서 모아들이리라. 그들 가운데에는 눈먼 이와 다리 저는 이 아이를 밴 여인과 아이를 낳는 여인도 함께 있으리라. 그들이 큰 무리를 지어 이곳으로 돌아오리라. 그들은 울면서 오리니 내가 그들을 위로하며 이끌어 주리라. 물이 있는 시냇가를 걷게 하고 넘어지지 않도록 곧은길을 걷게 하리라. 나는 이스라엘의 아버지가 되었고 에프라임은 나의 맏아들이기 때문이다.


시편(125)
주님께서 우리에게 큰일을 하셨기에
우리는 기뻐하였나이다


제2독서(히브 5,1-6)
<너는 멜기체텍과 같이 영원한 사제다>


형제 여러분, 모든 대사제는 사람들 가운데에서 뽑혀 사람들을 위하여 하느님을 섬기는 일을 하도록 지정된 사람입니다. 곧 죄 때문에 예물과 제물을 바치는 것입니다. 그는 자기도 약점을 짊어지고 있으므로, 무지하여 길을 벗어난 이들을 너그러이 대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연약한 탓에 백성의 죄뿐만 아니라 자기의 죄 때문에도 제물을 바쳐야 합니다. 이 영예는 어느 누구도 스스로 얻는 것이 아니라, 아론과 같이 하느님에게서 부르심을 받아 얻는 것입니다.  이처럼 그리스도께서도 대사제가 되는 영광을 스스로 차지하신 것이 아니라, 그분께 “너는 내 아들, 내가 오늘 너를 낳았노라.”하고 말씀하신 분께서 그렇게 해 주신 것입니다. 또 다른 곳에서 말씀하신 그대로입니다. “너는 멜키체덱과 같이 영원한 사제다.”


복음(마르 10,46-52)
<주님, 볼 수 있게 해 주십시오>


그들은 예리코에 들어갔다.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많은 군중과 더불어 예리코를 떠나실 때에, 티매오의 아들 바르티매오라는 눈먼 거지가 길가에 앉아 있다가, 나자렛 사람 예수라는 소리를 듣고, “다윗의 자손 예수님,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하고 외치기 시작하였다. 그래서 많은 이가 그에게 잠자코 있으라고 꾸짖었지만, 그는 더욱 큰 소리로 “다윗의 자손이시여,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하고 외쳤다. 예수님께서 걸음을 멈추시고, “그를 불러오너라.” 하셨다. 사람들이 그를 부르며, “용기를 내어 일어나게. 예수님께서 당신을 부르시네.” 하고 말하였다. 그는 겉옷을 벗어 던지고 벌떡 일어나 예수님께 갔다. 예수님께서 “내가 너에게 무엇을 해 주기를 바라느냐?” 하고 물으시자, 그 눈먼 이가 “스승님, 제가 다시 볼 수 있게 해 주십시오.” 하였다. 예수님께서 그에게 “가거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하고 이르시니, 그가 곧 다시 보게 되었다. 그리고 그는 예수님을 따라 길을 나섰다.




◇ 연중 제28주일  독서·복음해설 


제1독서(예레 31,7-9) 해설

<소경과 절름발이를 사랑으로 고쳐 주리라>


예레미야는 반역한 백성이 겪어야 될 파괴와 좌절을 자주 예고했던 예언자이다. 그러나 31장에서는 귀양살이에서 돌아오는 기쁨과 결정적으로 조국으로 귀환하게 되는 기쁨을 환희가 넘치는 상징들을 사용하여  묘사하고 있다(31,4이하).


“주님, 당신 백성과 이스라엘의 남은 자들을 구원하소서!”(7절) 이 주장과 단언은 31장의 핵심을 이루고 있으며, 이스라엘 종교에서 가장 의미 깊은 구절 가운데 하나이다.


구원은 무엇보다도 지독한 곤경과 죽을 위험에서 구출되어 해방되는 인간적 체험을 말한다. 위험과 위기의 종류에 따라 구원행위는 보호나 해방이나 구속이나 승리나 생환(구사일생)등으로 나타난다.


구약에서 이스라엘 백성은 위기를 모면하고 구원되는 체험을 많이 겪었다. 주께서는 아시리아의 왕으로부터 구원하신다(2열왕 18,30-35). 이는 주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이집트 탈출 때 구원하고(탈출 14,13), 판관들을 통하여 구원하고(유딧 2,15.18), 성경이 말하는 성조들 시대에 하느님이 요셉을 통하여 야곱을 구원하고(창세 45,5), 노아를 홍수로부터 보호하신(창세 7,23. 지혜 10,4) 바와 마찬가지다.


그러므로 이스라엘 백성이 온갖 재난 중에 주님께 구원해주시라고 부르짖고(예레 4,14), 기대했던 구원이 이루어지지 않을 때는 주님께 탄원한 사실을 이해할 수가 있다. 이스라엘 백성은 자기 하느님 외에는 다른 구원자가 없음을 잘 알고 있으며(이사 43,11; 호세 13,4), 주께서 이룩하신 과거 구원업적을 기억하여 또다시 구원해주시도록 간청한다(이사 63,8; 2마카 4,30).


오늘 독서에서도 구원이 도래하여 귀양살이 하던 백성이 해방되리라는 신탁이 나온다. 그러나 ‘이스라엘의 온 백성’이라는 표현이 그 신탁의 내용을 규정하고 있다. 그 구원은 국수주의적인 색채를 띠는 구원이 아니라, 마지막 시대에 정화되고 내적으로 해방된 이스라엘 백성으로 만드시는 구원이다. 에제키엘은 그 개념을, 주께서 당신 백성에게 당신 영을 선물로 보내어 온갖 불결함으로부터 구원하시는 뜻으로 해석한다(36,29).


예수님께서도 그 같은 구원의 개념을 취하신다.


시편(125) 해설

<주님께서 우리에게 큰일을 하셨기에 우리는 기뻐하였나이다>


귀양살이에서 처음 돌아온 사람들 마음속에 기쁨과 감사하는 정이 넘쳐흐르고, 이방인들은 하느님이 이스라엘 백성을 해방하신 위대한 업적을 보고 경탄하여 마지않는다. 그러나 시간이 지남에 따라 고국으로 돌아오게 되는 데 대한 장밋빛 묘사들은 부분적으로밖에 실현되지 않고, 급기야 실망과 허탈감에 빠지고 만다.


시편작가는 아직 귀양살이에서 돌아오지 못한 사람들을 위해 기도하는 동시에, 온갖 일이 그 시작에는 어려움이 따르고 항상 위험이 도사리고 있음을 생각하면서 마음을 다잡는다. 씨를 뿌리는 사람은 성공적으로 추수를 하기 위해 온갖 걱정을 하고 있지만, 추수할 시가가 오면 기쁘게 곡식을 거두게 될 것이다.


제2독서(히브 5,1-6) 해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영원한 대사제이시다>


이 대목은 구약성경에 나오는 대사제의 성격에 대하여 요약하여 서술하고 있으며, 그 서술이 그리스도께 적용되고 있다(5-10절). 대사제가 지닌 첫째 성격은 ‘사람들 사이에’ 한 사람이 되는 데 있다. 이렇게 사제는 바로 자기 자신이 약한 인간이고 죄인이기 때문에 자기 자신과 다른 사람들을 위하여 하느님께 자비를 빌어 ‘올바르게’ 되는 단계에 서 있다. 대사제는 백성을 위하여 속죄의 제사를 바치기 전에 먼저 자기 자신을 위하여 제물을 봉헌할 의무가 있다(참조. 레위 9,7; 16,6.11).


대사제가 지닌 둘째 성격은 그가 ‘소명’을 받았다는 점이다. 그는 사제가 됨으로써 사람들과 하느님 사이에 중개자가 되며, 사람들은 그의 중개를 통해서만 하느님께 가까이 나아가게 된다. 그러므로 사제는 ‘부르심’을 받을 필요가 있다. 아론과 그 후계자들은 모세의 법률에 따라 사제로 임명되었다. 민수 16,35를 해석하는 율법학자들은 아론이 하느님 자신으로부터 사제로 임명되었다고 주장한다.


이상에서 말한 특징들을 새로운 대사제이신 예수 그리스도께 적용시킬 수 있을 것인가. 저자는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죄가 없으시기 때문에 자기 죄를 속죄할 필요가 없다고 말한다(4,15). 더 나아가 예수님께서는 백성을 위하여 대사제의 임무를 완벽하게 수행하실 뿐 아니라, 구약의 대사제들을 훨씬 능가하고 계신다고 말한다.


저자는 계속해서 아론과 예수를 비교한다(병행시킨다). 아론과 예수님께서는 두 분이 다 자기 스스로 자기 영광을 위하여 사제직을 취한 것이 아니라, 하느님으로부터 부르심을 받아 대사제로 임명된 것이다. 예수님의 경우 하느님으로부터 소명을 받으신 순간은 육화하시는(사람이 되어 오시는) 순간이다. 인간인 동시에 하느님이신 예수님께서 완전한 중개자로 소명을 받은 것이다.


마지막으로 시편 110,4를 인용함으로써 히브 7,1 이하에 전개될 주제를 예고한다. 시편작가는 멜키세덱에 대하여 언급하면서 그가 왕으로서의 기능과 사제로서의 기능을 동시에 가지고 있음을 역설하는 것 같다. 그러나 히브리서의 저자는 영원한 사제직에 대한 이 예언이 그리스도께 제대로 적용된다고 생각하고 있다.


복음(마르 10,46-52) 해설
<주님, 보게 해 주소서>


예리코에서 예루살렘으로 가는 길목, 성지 순례하러 가는 길목에서 바르티매오라는 소경이 나자렛 예수님께서 지나가신다는 소리를 듣고 “다윗의 자손 예수님,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주십시오.”라고 소리 지른다. 사람들이 자기를 꾸짖어 말려도 막무가내로 소리 지른다. 예수님께서 “내가 너에게 무엇을 해주기를 바라느냐?”라고 물으시자, 그는 “제가 다시 볼 수 있게 해 주십시오.”라고 간청한다. 그 때 예수님께서는 “가거라. 네 믿음이 너를 구하였다.”고 말씀하신다. 그 말씀대로 눈을 다시 뜨게 된 바르티매오는 예루살렘을 향해 가시는 예수 뒤를 따른다.


마르코 복음서의 배치에 따라 이 사건은 마지막 치유 기적이 되며, 마태 11,6과 요한 9,3에서처럼 분명히 메시아적 증표가 된다. 이 사건에서 ‘다윗의 자손’이라는 호칭도 의미가 깊다. 그 호칭은 단순한 족보에 관한 언급이 아니라, 유다인들이 생각하는 정치적 내지 종교적 메시아를 가리키는 영예로운 칭호다.


그리고 소경이 “저에게 바지를 베풀어주십시오.”라고 부르짖은 간청은 유다인으로서 오직 하느님께만 드릴 수 있는 간청이다(참조. 시편 6,2; 9,13; 40,5 등). 따라서 그 간청에는 예수님께서 메시아며 하느님의 아들이시라는 확신이 깃들어 있다. 또한 이 일화에는 주께서 기름을 발라 소경을 눈뜨게 하시리라는 이사 42장의 예언을 상기시킨다.


예수와 소경 사이에 오고간 대화는 우리에게 결정적인 암시를 주고 있다. 즉 신앙의 기초는 전면적(전인적) 자유이고, 신앙의 빛을 받아 눈을 뜨게 된 사람은 반드시 예수를 ‘따라’ 예루살렘과 칼바리아 산정에 선 십자가를 향해 나아간다는 것이다.


묵상

신앙은 새로운 그리스도인 생활의 원리이다


예리코에 있던 소경 바르티매오가 “제가 다시 볼 수 있게 해 주십시오.”라고 말씀드린 단순한 요구는 인간이 하느님 앞에서 마땅히 가져야 될 필수적인 마음 자세를 가리키고 있으며, 인간의 가장 깊은 데서 울려나오는 절규를 나타내고 있다. 인간은 하느님이 원하셨기 때문에 존재하게 되었다는 것 그리고 하느님과 친교를 누리도록 부르심을 받았다는 것을 인정할 때 비로소 ‘믿기’ 시작하게 된다.


현대 세계에서 인간이 맞닥뜨리는 난관은 무수히 많다. 오늘날에도 예수 시대와 마찬가지로 신앙을 고백하고 심화하지 못하게 가로막는 장애물들이 엄청나게 많다. 현대 사회의 가장 두드러진 특징 가운데 하나는 “세상이 자기 정체를 망각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 사실은 특히 신앙이라는 문제에서 그렇다. 그리스도교는 참으로 하느님이 인류 역사에 개입하심으로써 비롯되었으며, 그리스도교 신앙도 그것을 깨달은 데서 우러나온 산물이다.


우리가 살고 있는 현대 세계에서는 형식적이고 소극적인 신앙을 위한 자리는 없다. 신앙은 하느님의 신비를 받아들이고 생활하라고 부르심을 받은 인간의 생명과 생애 자체와 긴밀히 연관되어 있다. 하느님이 몸소 당신이 시작하신 구원사업의 신비를 계시하신다. 지혜롭고 어진 하느님은 당신 자신을 계시하고 신비스런 당신 뜻을 흔연히 드러내 보이셨다. 그것은 모든 사람으로 하여금 사람이 되신 말씀이신 예수를 통하여 성령 안에서 아버지께 나아가고 하느님의 본성에 참여하도록 하시기 위함이었다. 하느님은 위대하신 당신 사랑으로 사람들을 마치 친구들에게처럼 말씀을 건네고, 당신과 친교를 누리도록 허락하고 초대하신다.


인간은 하느님이 부르시는 소명을 받아들일 때 비로소 믿는 사람이 된다. 계시하시는 하느님께 인간은 마땅히 복종해야 하며, 자기 자신을 전적으로 내맡기고서 오롯한 사랑을 바쳐드려야 한다.


‘참된 신앙.’ 신앙은 먼저 인간을 사랑하고 당신과 친교를 맺도록 부르시는 아버지의 사랑에서 비롯된다. 그 같은 아버지의 사랑을 받아야만 인간은 신앙을 가질 수 있다. 신앙은 밑으로부터 인간 자신의 자질과 능력에서 생기는 것이 아니고, 높은 데서부터 하느님으로부터 생겨나는 것이다.


또한 신앙은 인격적인 부르심으로서, 개인주의적 고립에서 벗어나 그리스도에 의하여 성령 안에서 하느님의 사랑을 받아들이고 서로 사랑하는 생활을 하라는 초대이다. 신앙은 어떤 진리를 인정하는데 그치는 행위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라는 인물을 받아들이는 행위이며, 살아계신 인간 하느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와 인격적인 관계를 맺는 생생한 만남이다.


그리스도께서는 전면적으로 받아들여지셔야 한다. 먼저 그리스도의 죽음에 동참한 다음 그분의 부활에 동참해야 한다. 사회 현실과 온갖 구조를 전면적으로 그리스도화하기로 투신하고, 그 투신으로 말미암아 초래되는 고통과 죽음을 먼저 달게 받은 다음 그분의 부활과 승리에 동참해야 한다. 그리스도를 끝까지 충실히 따라야 우리는 구원받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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