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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수복) 연중 제29주일 독서·복음 해설
  • 김수복
  • 등록 2015-10-17 12:37:12
  • 수정 2015-10-26 09:29: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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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독서(이사 53,10-11)

<자신을 속죄 제물로 내놓으면 그는 후손을 보며 오래 살리라>


그를 으스러뜨리고자 하신 것은 주님의 뜻이었고 그분께서 그를 병고에 시달리게 하셨다. 그가 자신을 속죄 제물로 내놓으면 그는 후손을 보며 오래 살고 그를 통하여 주님의 뜻이 이루어지리라. 그는 제 고난의 끝에 빛을 보고 자기의 예지로 흡족해하리라. 의로운 나의 종은 많은 이들을 의롭게 하고 그들의 죄악을 짊어지리라.


시편(32)
주님, 저희가 당신께 바라는 그대로
저희 위에 당신의 자애를 베푸소서


제2독서(히브 4,14-16)
<확신을 가지고 은총의 어좌로 나아갑시다>


형제 여러분, 우리에게는 하늘 위로 올라가신 위대한 대사제가 계십니다. 하느님의 아들 예수님께서십니다. 그러니 우리가 고백하는 신앙을 굳게 지켜 나아갑시다. 우리에게는 우리의 연약함을 동정하지 못하는 대사제가 아니라, 모든 면에서 우리와 똑같이 유혹을 받으신, 그러나 죄는 짓지 않으신 대사제가 계십니다. 그러므로 확신을 가지고 은총의 어좌로 나아갑시다. 그리하여 자비를 얻고 은총을 받아 필요할 때에 도움이 되게 합시다.


복음(마르 10,35-45 또는 10,42-45)

<그리스도께서는 인류의 구원을 위해 당신 목숨을 바치셨다>


((제베대오의 두 아들 야고보와 요한이 예수님께 다가와, “스승님, 저희가 스승님께 청하는 대로 저희에게 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하고 말하였다.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내가 너희에게 무엇을 해 주기를 바라느냐?” 하고 물으시자, 그들이 “스승님께서 영광을 받으실 때에 저희를 하나는 스승님 오른쪽에, 하나는 왼쪽에 앉게 해 주십시오.” 하고 대답하였다.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너희는 너희가 무엇을 청하는지 알지도 못한다. 내가 마시는 잔을 너희가 마실 수 있으며, 내가 받는 세례를 너희가 받을 수 있느냐?” 하고 물으셨다.  그들이 “할 수 있습니다.” 하고 대답하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내가 마시는 잔을 너희도 마시고, 내가 받는 세례를 너희도 받을 것이다. 그러나 내 오른쪽이나 왼쪽에 앉는 것은 내가 허락할 일이 아니라, 정해진 이들에게 돌아가는 것이다.” 다른 열 제자가 이 말을 듣고 야고보와 요한을 불쾌하게 여기기 시작하였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가까이 불러 이르셨다. “너희도 알다시피 다른 민족들의 통치자라는 자들은 백성 위에 군림하고, 고관들은 백성에게 세도를 부린다. 그러나 너희는 그래서는 안 된다. 너희 가운데에서 높은 사람이 되려는 이는 너희를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또한 너희 가운데에서 첫째가 되려는 이는 모든 이의 종이 되어야 한다. 사실 사람의 아들은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섬기러 왔고, 또 많은 이들의 몸값으로 자기 목숨을 바치러 왔다.”


또는 마르 10,42-45: 위 복음에서 괄호 ((  )) 안의 것은 생략할 수 있다.




◇ 연중 제28주일 ~ 독서·복음해설 ~


제1독서(이사 53,10-11) 해설
<그는 자신을 속죄의 제물로 내놓았다>


오늘 독서는 주님의 종에 대한 네 번째 노래에 속하며(52,13-53,12), 그 해석이 그렇게 쉽지 않다. 제2이사야에게 주님의 종은 주님으로부터 영을 받은 신비스런 인물로 나타난다(52,1). 주님의 종은 국가적인 구실과 보편적(범세계적)인 구실을 동시에 부여받고 있다.


한편으로는 야곱을 다시 인도하여 결정적인 계약을 맺도록 해야 하고, 또 한편으로는 모든 사람과 모든 백성을 비추는 빛이 되어 참된 ‘종교’(하느님과의 관계)로 인도해야 할 사명을 부여받고 있다(42,2-4).


주님의 종은 가르치는 사명을 가질 것이고(50,4이하), 시련과 모함과 치욕과 죽임을 당할 것이며, 그 수난과 죽음은 구속과 구원의 의미를 갖게 될 것이다(53,5).


주님의 종에 대한 네 번째 노래를 하느님이 하시는 말씀(53,12-15)과 비탄에 잠긴 노래(52,2-10)와 하느님이 내리시는 마지막 단언(52,11이하)으로 구분할 수 있을 것이다.


노래가 시작되면서 나오는 하느님의 말씀은 종이 처하게 될 장래 운명과 종이 현양되고 영광을 받게 될 일을 예고하고, 모든 사람과 모든 백성이 들어 높여진 주님의 종을 보고 놀라고 경탄하리라고 묘사한다.


중심 부분은 ‘슬픔과 고통을 겪는 사람’에 관한 시적인 묘사이다. 그는 우리 죄 때문에 멸시와 천대를 받고 끝내는 죽임을 당한다. 그렇지만, 주께서 그의 날들을 무궁히 연장시키실 것이고 속량해 낸 많은 후손들을 보게 하실 것이다(10절).


마지막 부분에 가서 주께서는 당신 종이 희생당할 것이라고 선언하신다. 그는 빛을 보게 될 것이고, 완전한 ‘깨달음’을 얻게 될 것이며, 모든 사람의 죄를 대신 짊어짐으로써 그들을 ‘올바른 사람들’로 만들어 주실 것이다(11절).


우리는 그 주님의 종을 단지 이스라엘 백성 가운데서 ‘남은 사람들’ 중의 한 사람으로만 알아들을 것이 아니라, 고통 받는 예언자로서의 성격을 지닌 미래의 인물, 그의 수난과 죽음이 대신 속죄하는 효과를 나타내고 마침내는 생명을 다시 보시게 될 인물로 알아들어야 할 것이다.


신약성경에서 ‘종’에 해당하는 인물은 예수시다. 예수님께서는 53,12을 분명히 당신께 적용하신다(루카 22,37). 세례자 요한이 한 말도 53,6이하를 은연중 반영하고 있다(요한 1,29). ‘마치 골고타 밑에서 쓰인 것처럼 보이는’ 53장 전체가 예수님의 구속사업을 미리 예연하고 있다. 수난에 대한 예고를 비추어주고 있다(참조. 마르 10,33이하). 사람의 아들이 대신 속죄하는 죽음을 예고하고 있다(마르 10,45).


시편(32) 해설

<주님, 저희가 당신께 바라는 그대로 저희 위에 당신 자애를 베푸소서>


이 시편은 백성이 부른 찬미가이며 또한 백성을 위한 찬미가이기도 하다. 넓은 시각 안에 하늘과 땅과 바다가 포함된다. 다시 말하면 히브리인들이 사용하던 개념에 따라 온 우주가 그 안에 포함되고, 창조주 하느님의 사업이 그 풍요로움과 위대함을 드러내고 있다.


그러나 하느님이 품고 계시는 예민한 사랑이 비단 창조 때만 발휘되는 것이 아니다. ‘당신을 두려워하는 모든 사람들’ 위에 끊임없이 쏟아진다(18절).


그러므로 백성이 하느님을 그리워하고, 하느님께 모든 것을 기대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하며, 하느님은 항상 그들 위에 당신 손을 뻗쳐 구해주실 것이다(20-22절).


제2독서(히브 4,14-16) 해설
<확신을 가지고 은총의 어좌로 나아갑시다>


14-16절은 앞부분과 뒷부분 사이를 연결해 주는 다리 구실을 한다. 특히 14절은 예수를 자비롭고 충실하신 최고 대사제라고 말한 13,1절에서 시작된 부분을 결론짓는다. 저자는 3,1-4,13에서 충실한 사제의 특징을 열거하면서, 독자들에게 신앙을 꿋꿋하게 고백하고 증거하도록 독려한다.


15절 이하에서는 히브리인들이 생각하는 최고 대사제의 모습을 소개하고, 그 모습을 예수 그리스도께 견준다. 예수님께서는 실제로 사람들과 더불어 고통을 받으셨고 고통을 받고 계신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이 약하다는 것을 잘 알고 계신다. 사람들이 신체적으로 그리고 윤리적으로 비참함을 잘 알고 계신다.


또한 예수님께서는 우리들과 똑같이 유혹을 받으셨고, 그러셨기 때문에 우리가 시련을 겪을 때 우리를 도우실 수 있다. 그러나 그분은 죄를 범하시지 않았다. 죄를 짓지 않으셨다함은 그분이 우리와 똑같은 허약한 인간성을 가지고 계시지 않았다는 말이 아니라, 유혹을 기어이 이겨내고 하느님 아들다운 성덕을 발휘하셨다는 뜻이다(요한 8,46, 1요한  2,1이하: 코린 후 5,21).


그분이 하느님의 아들다운 인간으로서 유혹을 싸워 이기고 죄를 짓지 않으셨다는 사실로 인하여, 우리를 위한 그분의 전구는 무한한 가치를 지니게 되는 것이며, 구약의 다른 사제들처럼 먼저 자기 자신의 죄를 속량할 필요가 없으셨다(7,27이하).


이렇게 하여 그리스도의 거룩하게 하시는 덕행에 힘입은 신자들은 자비와 은총을 받기 위하여 충만한 신뢰심을 가지고 하느님께 나아갈 수 있게 된 것이다. 그리하여 먼저 죄인들이 하느님의 자비로우신 은총을 다시 받게 되었고, 다음으로는 모든 시련 가운데 필요한 은총을 받을 수 있게 되었다. ‘은총과 옥좌’라는 표현은 구약성경에 나오는 ‘영광의 옥좌’라는 표현이 변형된 것이다(이사 22,23; 예레 14,21; 17,12; 집회 47,11). 그 옥좌는 하느님이 자비를 베푸시려고 앉아계시는 옥좌다.


복음(마르 10,35-45 또는 마르 10,42-45) 해설

<그리스도께서는 인류를 구원하시기 위해 당신 목숨을 바치셨다>


일반적인 의미로, 오늘 복음은 제자들이 받은 소명이 진정 어떠한 것인가를 설명하고 있다고 규정할 수 있다. 예수님께서는 사도직에 대한 그릇된 개념을 배척하신다. 사도직을 담당하는 일은 당신 영광에 참여하기 전에 반드시 당신 수난을 먼저 나누어받는 일임을 분명히 하신다.


41-45절은 제자들이 겪게 될 상황과 처지를 분명히 밝힌다. 제자도 스승 예수(사람의 아들)가 겪을 비참한 운명을 똑같이 겪게 된다. 예수와 당신 제자들은 통치하고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자기 생명을 ‘바치기’ 위해서 왔다. 제자들도 예수님의 운명을 따르지 않을 수 없게 될 것이다.


예수와 당신 제자들은 하느님의 아들이 과연 어떤 분이신가를 공공연히 드러내야 할 사명을 띠고 있다(37,42). 예수님께서는 당신 영광과 당신 제자들의 영광을 고의적으로 ‘감추신다.’ 제자들의 사명도 스승의 사명처럼 세력과 권세를 쥐어 세상을 이기는 데 있지 않고, 사람의 아들처럼 자기네 생명을 바쳐 세상을 구원하고 세상의 죄 값을 대신 치르는 데 있다.


이 같은 일반적인 지평에서 마르코가 즐겨 사용하는 소재가 부각된다. 그것은 제자들이 스승이 하시는 말씀을 도무지 깨닫지 못한다는 사실이다. 제자들이 보인 몰이해는 예수님께서 당신 수난을 예고하실 때 그들이 보인 태도에서도 명백히 드러나고, 다른 경우들에서도 마찬가지로 드러난다.


모든 것을 포기하라는 요구를 받을 때 보인 그들의 당황함(10,24.26), 하느님 나라에서 가장 높은 사람이 되려거든 모든 사람의 종이 되어야 한다고 말씀하실 때 보인 그들의 어리둥절함(9,3; 10,13-16), 결혼의 결합은 결코 풀 수 없다고 주장하실 때 보인 그들의 불신, 베드로의 부인과 도망간 모든 제자들은 그러한 몰이해의 극치를 이룬다.


그러나 우리는 오늘 복음이 말하려 하는 의도를 잊지 말아야 한다. 예수를 도저히 이해하지 못하고 끊임없이 직접적인 지상의 영광을 추구하던 제자들 이야기 안에서 마르코 복음서가 쓰인 교회가 처한 불안과 갈등을 엿볼 수 있다. 그 교회는, 폭풍이 세차게 때리는 가운데서도, 당신이 주무시고 계신 듯 하는 바로 그 때에 부활하신 그리스도께서 힘차게 현존하여 계시므로 결코 두려워 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묵상


당신 잔을 받아 마시라고 부르심 받은 우리들


예수님께서는 세 차례에 걸쳐 당신 수난을 예고하셨고, 제자들은 세 차례 다 그 간절한 말씀을 알아듣지 못했다. 예수님께서 세 번째로 당신 수난과 죽음을 예고하시자, 그 반응으로 제베대오의 아들들이 엉뚱하게도 예수께 높은 자리를 달라고 은근히 부탁드린다.


그들에게 예수님께서는, 너희들은 너희가 무엇을 청하고 있는지를 알지 못하고 있으니, 내가 마실 잔을 너희도 먼저 마셔야 할 필요가 있으며, 내 생명에 충만히 참여하기 위해서는 먼저 고통으로 세례를 받아야 할 필요가 있으며, 그리한 연후에라야 비로소 내 영광에 참여할 수가 있다고 답변하신다.


우리는 흔히 그리스도께 그러한 부탁을 드리고 있지는 않는가? 그러한 부탁과 요구에 대한 그리스도의 답변은 변함이 없다. 그리스도의 부활과 영광에 참여하려면 먼저 필수적으로 슬픔과 고통과 가난과 천대와 죽음을 통과해야만 한다.


예수님께서 살고가신 지상생애가 과연 어떠한 것이었는가를 탐구하노라면, 부활하는 영광을 받으시기 전까지 그 분 생애는 온통 십자가의 길이었음을 분명히 깨달을 수 있을 것이다. 우리 인간들도 예수님께서 가신 길을 따르자면, 모든 인간관계와 사회 속에 하느님의 정의와 사랑을 실현시키기 위해 십자가와 형극의 길을 걷지 않을 수 없게 될 것이다.


십자가에 높이 매달려 계신 그리스도께서 우리 모든 인간들을 그윽이 내려다보고 계시며, 애정을 다 쏟아 우리를 애타게 부르고 계신다. 당신 수난과 죽음에 동참하여 당신 부활과 영광에도 동참하라고 부르고 계신다.


우리 운명은 그리스도께서 겪으신 천대와 고통과 외로움과 가난과 죽음이요, 그 다음에 눈부시게 드러날 부활과 영광이다. 내 생명·다른 모든 사람들의 구원·정의·자비·사랑보다 더 귀중한 것이 어디 있겠는가? 살기 위해 죽는 법을 받아들이고 배워야 한다. 부활하는 영광을 차지하기에 앞서 반드시 십자가의 생애를 거쳐야 한다는 철칙을 골수에 새길 일이다.


십자가는 구원에 이르는 길


예수님께서는 야고보와 요한에게 답변하시면서 희생하는 방법을 구체적으로 제시한다거나 일반적인 고통을 말하지 않고, 초자연적인 구원경륜을 말씀하신다.


그리스도인은 죄악에 죽음으로써 그리스도의 생명으로 부활한다. 인간은 개인이기주의와 집단이기주의를 벗어남으로써 죄악에 죽어야만, 시기·질투·증오·다툼·전쟁에서 헤어날 수 있고, 자기 마음을 다른 사람들에게 열어줄 수 있고, 잘못을 용서할 수 있고, 가난하고 궁핍한 사람들을 위해 자기 자신을 바칠 수가 있고, 사랑과 정의와 평화가 넘치는 사회와 세계를 창조해낼 수가 있다.


죄악이란 하느님과 친밀한 관계의 단절이다. 그리고 다른 모든 인간과 친하게 사는 길은 십자가의 길이다. 모든 인간을 하느님의 귀중한 자녀요 내 형제로 대하기 시작할 때, 나는 이미 십자가의 길에 들어서 있다.


예수님께서 개인적인 신심을 기르고 덕행과 공로를 쌓는 것으로 만족하라고 가르치셨는가? 아니다. 예수처럼 우리 각자가 자기가 서 있는 위치와 처해 있는 상황과 가정과 직장과 사회에서 자기 자신으로부터 비롯하여 하느님의 정의와 사랑을 구현하기 위해 생명을 바쳐 죽기까지 치열하게 십자가의 길을 꿋꿋하게 걸어가야 한다. 그 같은 십자가의 길을 통과해야만 부활의 영광에 도달할 수 있다.


[필진정보]
김수복 : 살레시오 수도회에서 10년 동안 수도생활을 하고, 그 동안 서울 가톨릭 신학대학 6년을 수료했다. 40년 동안 5개 언어에서 성서와 신학 관련 서적을 우리말로 옮기는 번역노동자였다. 현재 사랑하는 마누라와 아들 둘, 손자 셋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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