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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황 방한 1주년: 개혁의 불씨가 된 교황, 그래서 중요하다.
  • 편집국
  • 등록 2015-08-14 18:01:10
  • 수정 2015-08-19 17:13: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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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번째 - 개혁의 불씨가 된 교황, 그래서 중요하다]


가톨릭교회는 1984년에 한국 천주교회 200주년을 맞이하면서 당시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의 방한과 더불어 갖가지 뜻 깊은 행사를 가진 바 있다. 이때에도 한국교회는 교회의 참된 성숙에 이바지하고자 하는 염원에서 제반 기념사업들을 추진하면서 내적으로 쇄신되고 외적으로 민족 복음화를 지향하는 선교의 터전을 마련하고자 노력했었다.


특히 한국 천주교회는 300년대를 향한 사목 방향 설정에 길잡이가 될 사목회의를 개최하면서 교회 쇄신의 결의를 공고히 하려고 시도했었다. 그러나 모두 빈 말들의 잔치에 지나지 않았다는 것을 많은 이들이 지켜보았고 많은 이들은 교회를 떠나갔다.





‘프란치스코 효과’, ‘프란치스코 신드롬’이라는 용어를 낳을 정도로 세계적인 이목을 받는 제266대 교황 프란치스코가 작년 2014년 8월 14일 청와대 방문을 시작으로 한국 사회를 향해 말하기 시작한지 꼭 일 년이다. 프란치스코 교황에 대한 찬사가 끊이지 않는다.


사회복지가 문제가 아니라 사회구조 자체가 문제라며 본질적인 자본주의의 사악함을 비판하는 그의 발언과 행보는 현재의 모순과 질곡에 대한 개량적 개혁이 아니라 사회 경제 시스템의 전면적 개혁 조치와 정책이 필요하다는 강력한 천명이다.


교황 방한으로 수많은 행사들이 있었고 방한 1주년을 기념으로 또 행사들이 기획 진행되고 있다. 그러나 방한 행사가 중요한 것은 아니다. 방한 이후 우리는 도대체 무엇을 하고 있는지 스스로를 살펴야 할 것이다.


편집국은 이러한 교황 방안 1주년을 맞이하여 프란치스코 교황의 한국 방문 당시 연설문을 분석 보도할 것이다. 프란치스코에게 많은 이들이 환호를 보내는 이유는 무엇인가? 그것은 종교권력자가 난무하는 세상의 한 복판에 참된 종교지도자가 등장했다는 것 아닌가? 약자들의 눈물을 바라보고 그들의 편이 되어 주고, 강자들을 호되게 꾸짖고 변화를 강력하게 요구하기 때문 아닐까?


프란치스코 교황이라는 한 인물을 지나치게 신성시하는 건 바람직하지 않다. 교황은 로마 가톨릭 체제라는 종교, 정치, 경제적 컨텍스트 안에 존재한다. 인물보다는 그 개혁성 자체에 집중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그리고 그러한 현상 가운데에서 교회의 시대적 과제를 찾아내는 것이 더욱 바람직한 일이 아닐 수 없다.


물론 가톨릭은 교황의 종교가 아니다. 그러나 교황의 발언에 관심과 집중을 하는 이유는 교회구조적 특성 때문이다. 지금 변화를 위한 강력한 동력은 교황에게서 나오고 있다. 가령 프란치스코 교황은 호화 주교관 건축에 4300만 달러(약 454억원)를 사용했던 독일 림부르크(Limburg)교구의 프란츠-페터 테바르츠-판 엘스트 주교의 사임을 공식적으로 승인했다.


림부르크의 교구장은 가난한 인도의 슬램가를 방문하면서 특등석에 탑승했다는 사실을 감추었다가 망신을 당하기도 했고, 종교세를 유용한 혐의로 검찰의 수사를 받기도 했다. 또한 미국 애틀랜타의 윌튼 그레고리 주교 역시 자신의 호화 저택을 지었으며 이 때문에 지역 언론과 신자들로부터 비난을 받았다.


그가 지은 집은 557㎡(168평)의 대지에 영국 튜더 왕가 시대의 양식으로 지어졌으며 15명이 묵을 수 있는 규모였다. 건축비용은 성당 예산 190만 달러와 기부금 30만 달러로 지었다고 한다. 이러한 일로 결국 그는 2014년 3월 주교직에서 사임했다. 이것은 프란치스코 교황의 힘이다. 이렇게 전 세계의 문제가 있는 주교들에게 정직과 면직처분을 내리고 썩은 환부를 도려내는 일은 현 프란치스코 교황이 아니면 불가능하다. 그것은 교황의 힘이다.


최근의 교회 변화와 관련하여 우리는 제2차 바티칸 공의회와 그것을 이끌어낸 요한 23세 교황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요한 23세는 이름조차 거명되지 않던 교황 후보였다. 그런데 바로 그 나이 많은(교황선출시 78세) 교황이 가톨릭 역사를 순식간에 뒤집어 놓았다. 요한 23세는 1959년 1월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던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소집을 명한다. 이것 역시 교황의 힘이 아니면 불가능했을 일이다.


4년의 준비를 거쳐 1962년 개최된 제2차 바티칸 공의회는 현대 교회의 쇄신(아죠르나멘토 Aggiornamento)과 세상과의 대화를 위한 4개의 헌장과 9개의 교령, 3개의 선언을 망라하여 제2차 바티칸공의회 문헌을 제출한다. 이에, 1545년 트리엔트 공의회 이후 라틴어로 봉헌되던 미사가 각 나라 언어로 봉헌되기 시작했다.


개신교(Protestant)에 대한 ‘이단’이라는 멸시적 표현을 ‘갈라진 형제들’로 고쳤고 다른 종교의 구원문제에 대해 유연한 입장을 취하였다. 교회의 사회적 책임, 사회적 불의에 하느님의 말씀으로 저항하는 예언자적 책임과 역할을 강조했다. 이 변화가 남미의 해방신학 운동을 비롯하여 가난하고 무력한 민중들과 함께하는 교회에 힘을 실어준 것은 물론이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교리 부분에서 혁신은 ‘교회 밖의 구원’을 인정한 것이다. 그리스도교가 구원의 유일한 방법이라면, 다른 종교를 믿거나 그리스도교가 전파되지 않은 곳의 사람들은 꼼짝없이 지옥에 갈 수밖에 없었다. 이런 논리가 얼마나 많이 야만과 제국주의 식민지 수탈의 빌미가 되었던가.


제2차 바티칸 공의회는 ‘익명의 그리스도인’이라는 표현으로 교회 밖에도 구원이 있을 수 있음을 인정한다. 인간의 입장에서 교회는 하느님과 소통하는 유일한 방법이라 해도 하느님 입장에서는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는 것이다. 하느님이 ‘교회’라는 감옥에서 풀려난 것이다. 또한 교회는 ‘하느님의 백성’으로 규정하며 복음화를 그 본질로 한다.


요한 23세는 공의회를 마무리하지 못하고 1963년 6월 선종한다. 보수세력은 후임 바오로 6세가 교회 지도부에 대한 ‘충격적인 상황’을 종식하길 기대했지만 바오로 6세는 공의회를 지속하여 완료한다. 이후 30여년 동안 교황 이름은 ‘요한 바오로’가 된다. 요한 23세와 바오로 6세의 개혁정신을 이어받는 의미다.


2005년 ‘요한 바오로’라는 이름을 떼고 즉위한 베네딕토 16세는 가톨릭의 개혁 정신을 후퇴시켰다는 평가를 받았다. 하지만 교황 베네딕도 16세에 대한 평가는 앞으로도 여러 부분에서 촘촘하게 진행되어야 할 것이다. 그는 2013년 3월 교회 역사상 500여 년 만에 자진 사임했고 지금의 프란치스코 교황이 가톨릭의 개혁 정신을 잇고 있다. 곧 프란치스코 교황의 선출배경에는 베네딕토 16세 요셉 라칭거의 역할이 중요했음을 우리는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가톨릭의 개혁 정신은 신자유주의적 자본주의의 거센 물결 앞에서 잦아들었고 앞서 언급한 베네딕토 16세 시기에는 ‘제3차 바티칸 공의회가 필요하다’는 여론이 들끓었다. 그 여론이 결국 자본주의를 비판하는 교황을 만들어낸 것이다. 나쁜 교회 때문에 신자들이 고통 받는다는 말은 사실이되, 절반만 사실이다. 교회는 신자들 신앙의 반영이기 때문이다.


어리석은 신자는 나쁜 교회를 만들며 심지어 하느님을 살해한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신학적 구심이었던 칼 라너는 “대부분의 그리스도인들이 믿는 하느님은 고맙게도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물론 이것은 가톨릭이나 개신교를 넘어 다른 모든 종교도 마찬가지다.


지난 해 교황 방문을 앞두고 사회관계망서비스(SNS) 에서는 <중앙일보>의 기사로 떠들썩했다. “돈이 도네요, 고마워요 프란치스코”라는 제목을 붙인 경제면 톱기사 때문이었다. 누리꾼들은 “교종 방한이 돈벌이냐”“생명보다 돈을 추구하는 언론사임을 드러내는 것인가”라며 질타했다. 교황의 방문이 미치는 긍정적 영향력을 일컫는 ‘프란치스코 효과’는 세계적으로 나타나는 현상이지만, 국내 언론들이 유독 ‘경제적 효과’를 노골적으로 부각하고 있다는 비판이 나왔다.



살인해서는 안 된다’는 계명은 인간 생명을 보호하기 위해 분명한 한계를 제시한 것과 마찬가지로, 오늘날 우리는 배제와 불평등의 경제를 “해서는 안 된다”고 말해야만 합니다. 그 같은 경제는 사람을 죽입니다. 어떻게 나이 든 노숙자의 죽음은 뉴스가 되지 않으면서, 주식시장이 2포인트 하락한 것은 뉴스가 될 수 있단 말입니까? 이것은 배제를 보여주는 사례입니다. 사람들이 굶주리고 있는데, 다른 한편에선 음식을 버리는 상황에서, 우리는 아무렇지도 않은 듯이 서 있을 수 있습니까?(복음의 기쁨, 제53항)


어떤 이들은 낙수이론을 계속해서 옹호하고 있습니다. 이 낙수 이론은 자유시장으로 이루어진 경제성장이 세상에 더 큰 정의와 포용을 가져올 것이라고 주장합니다. 이런 견해는 사실로 입증된 적이 결코 없습니다. 오히려 경제 권력으로 무장한 이들의 선심과 신성시 되고 있는 지배적 경제시스템의 기능에 대해 조악하고 순진한 신뢰를 보이는 것에 불과합니다. 그러는 동안 배제된 이들은 여전히 기다리고만 있을 뿐입니다. 다른 이들을 배제하는 생활 방식을 유지하는 것이, 혹은 이기적 이상에 몰두하는 것이 바로 무관심의 세계화를 발전시킨 것입니다.(복음의 기쁨, 제54항)



덧붙이는 글

연재 그 두 번째 시간에는 [평화는 단순히 전쟁이 없는 것이 아니라,“정의의 결과”입니다.] 가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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