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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통’을 위해 ‘관계’에 대한 생각 전환이 필요하다 - [글로벌인문학] 8 소통의 인문학 : 산다는 것은 소통하는 것이다
  • 이기상
  • edit@catholicpress.kr
  • 기사등록 2020-12-07 13:32:37
  • 수정 2020-12-07 15:09: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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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아버지들의 가부장적인 소통방식


▲ 영화 < 아버지의 이메일 > 스틸컷


영화 < 아버지의 이메일 >을 보았다. 이 영화는 홍재희 감독이 그녀의 아버지 홍성섭(1934∼2008)이 세상을 떠나기 일 년 전 그녀에게 보낸 43통의 이메일을 재구성해서 만든 다큐 성격의 독립영화다. 격동의 시대를 지내온 이 땅의 아버지들의 노력과 좌절, 소망과 절망, 행복과 아픔이 짙게 배어 있는 우리 시대 산 가족의 역사다. 그리고 거기에는 지난 세기 우리들의 가족에서 어떤 인간적인 관계와 소통이 벌어지고 있었는지를 적나라하게 보여주고 있다. 한국이 안고 있는 소통의 문제를 가족에서부터 짚어보려는 시도가 돋보였다. 


아버지 홍성섭은 북한 체제에서는 희망이 없음을 깨닫고 보다 나은 삶을 찾아 열다섯의 나이에 죽음을 무릅 쓰고 세 차례의 시도 끝에 월남에 성공한다. 그는 먼저 인천에 와 있는 아버지와 형, 그리고 사촌들을 만나 새로운 삶을 시작한다. 6.25 전쟁이 발발하자 미군부대 근처에서 파지 장사를 하며 떼돈을 번다. 그 돈으로 집을 몇 채 구입해서 숙박업을 하려던 꿈은 군대에 가 있는 동안 계모와 사기꾼의 술수에 걸려들어 물거품이 되고 만다. 낙원을 이루려던 남한에서의 꿈은 시작부터 암초에 부딪치며 순탄치 못할 이곳에서의 삶을 예고하는 듯했다.


31살에 직업이 확실한 부유한 집안의 초등학교 여교사를 만나 결혼한다. 그 후 딸 둘과 막내아들을 낳아 가족을 이루어 나가지만 그와 그의 가족 사이에는 보이지 않는 불통의 벽이 두꺼워지기만 한다. 월남전에 기술자로 나가 돈을 벌고, 중동 붐 시절 사우디아라비아에 크레인 기사로 파견되어 어느 정도의 돈을 벌기도 한다. 그러나 그의 꿈을 펼쳐보려 할 때마다 이상하게 일이 꼬인다. 처남들이 좌익 활동을 하다가 행방불명이 되는 사건이 일어났다. 이 일로 연좌제에 걸린 그는 이국땅을 향한 꿈을 영원히 접어야 했다. 설상가상으로 둘째 딸 ― 이 영화의 감독 ― 은 진보적인 성향의 대학생으로 학생운동을 한다. “빨갱이가 싫어 한국에 왔는데, 딸년이 빨갱이라니!”


자기 이야기를 아무도 들어주지 않는 가족 안에서 그는 술로 시름을 달랜다. 술에 취하면 가족들을 모두 깨워놓고 자기가 얼마나 어렵게 남한에 내려와서 가족들을 위해 고생했는지 하소연한다. 가족들은 또 하나의 지겨운 술주정으로 받아들이며 귀를 기울이지 않는다. 술이 심해 알콜중독자가 되다시피 한 그는 가족들의 무반응과 냉대에 손찌검까지 하게 된다. 아버지의 폭력으로 가족들은 더욱 딴딴한 벽을 쌓고 아버지와 완전히 갈라선다. 


그렇게 단절 속에 지나다가 생애 마지막 해 컴맹인 홍성섭은 어렵게 컴퓨터를 배워 독수리 타법으로 둘째 딸에게 이메일을 보내기 시작한다. 43통의 이메일을 보낸 뒤 세상을 떠난다. 


6.25 전쟁, 월남전, 중동 붐, 88올림픽 그리고 아파트 재개발 광풍까지...


“한국 근대사의 굵직굵직한 질곡마다 아버지의 발자국은 작지만 분명한 흔적을 남겼다. 그리고 당신의 걸음이 흔들릴 때마다 우리 가족의 삶도 함께 흔들렸다. 당신의 삶은 나의 가족사인 동시에 대한민국의 시간이었다. 아버지는 어떻게 살았고 무엇을 말하고 싶었던 것일까? 그리고 왜 우리는 그에게 한 번도 묻지 않았던 것일까? 이제야 나는 아버지의 편지에 답장을 보내려고 한다.” (< 아버지의 이메일 > 공식블로그) 


▲ 영화 < 아버지의 이메일 > 스틸컷


전통적 관계의 망 안에서 일어는 소통의 문제점


이 영화에서 우리는 소통과 관련해 중요한 요소들을 확인할 수 있다. 우선 소통에는 소통의 상대방이 있다는 단순하면서도 엄연한 사실이다. 이것을 나는 ‘소통하미’라고 이름한다. 소통하미는 관계와 대화의 짝들이다. 제대로 된 관계와 대화가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상하와 우열의 상황이 전제되어서는 안 된다. 평등한 관계에서 억압받지 않은 허심탄회한 대화가 전제되어야 참된 의미의 소통이 가능하다.


그런데 우리 사회에서의 인간관계는 그렇지 못했다. 군신의 관계, 부자의 관계, 사부의 관계, 남녀의 관계, 장유의 관계 등 우리에게는 소통하미들이 어떤 관계의 망 속에 놓여 있는지가 중요했다. 그리고 거기에 따라 관계의 방식과 소통의 양태가 앞서 결정된다. 그리고 이것이 대화와 표현의 형식까지 규정한다. 이런 구조 속에서는 엄격한 의미의 평등하고 대등한 관계를 생각하기란 어렵다.


이러한 가부장제적인 남성 중심 사회에서의 소통 현상이 이 영화에서는 펼쳐진다. 그러나 이러한 사회적 틀에서 자란 아버지 개인에게만 모든 소통 부재의 책임을 돌릴 수는 없다. 아버지는 나름 가족을 위해 자신을 희생하면서 모든 노력을 다했다. 아버지는 ― 아내와 자식들은 인정하지 않지만 ― 스스로 아버지로서 대접받을 자격이 있는 것으로 생각한다. 이러한 생각의 차이가 원만한 소통을 가로막는다.


전통의 관계 중심 사고방식과 행동패턴이 위협받고 있는 지금 우리 사회는 소통과 관련해 중요한 변환국면에 처해 있다. 이 계기에 우리는 인간을 소통과 연관지어 새롭게 고찰할 필요가 있다. 그것을 “소통의 인문학”이라고 이름지어 보자.


다는 것은 소통하는 것이다


넓게 볼 때 산다는 것 자체가 소통하는 것이다. 물리화학적, 생물학적 차원에서 힘과 에너지, 유전자의 소통이 일어나고 문화적인 차원에서 다양한 양태의 정보의 소통이 펼쳐지고 있다. 개인적 삶이건 집단적 삶이건 소통, 즉 교류, 교환, 대화 없는 삶은 상상할 수 없다. 소통은 그야말로 인간의 내재적 조건이다.


소통의 목적은 개체적·종적 삶의 유지라는 물리생물학적 목적 외에 다른 문화적 목적과 지향성이 있다. 죽을 수밖에 없는 유한한 인간이 느끼는 고독감과 불안감을 떨쳐내기 위해 인간에게는 다른 사람 또는 사물[생물]과의 소통이 필요하다. 인간은 이러한 소통을 통해 신뢰감을 쌓고 친밀한 관계를 유지하여 보다 돈독한 사회적 연대와 결합을 결속하려고 한다.


소통에서 핵심은 관계다. 대화와 교제를 통해 친밀한 관계를 맺어 서로 간에 신뢰감을 얻게 되면 관계가 돈독해진다. 이 돈독한 관계의 망이 넓게 형성되면 사회적 결속력이 강화된다. 그러면 그 사회는 안전하고 안정적인 사회가 된다. 소통의 관계를 통해 사람은 함께함의 든든함[안정감]과 유쾌함, 표현의 즐거움, 연출의 짜릿함, 실천의 보람, 앎의 기쁨, 터득의 뿌듯함, 일치의 황홀함 등을 얻는다.


상호인정 속에 펼쳐지는 상대의 입장을 이해하려는 대화 



사람 사이에서 소통이 이뤄지고 있는 가장 흔한 방식은 대화다. 대화에서 중요한 것은 그것이 쌍방향이라는 것이다. 다시 말해 한쪽이 일방적으로 ‘말하미’나 ‘들으미’의 역할을 고정적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서로서로 동시에 두 역할을 다 한다는 말이다. 말하면서 듣고 들으면서 말하는 방식으로 말이다. 이 말은 또한 대화에 참여한 모두가 대화의 주체로서 다 평등하다는 뜻이기도 하다. 


여기에서는 아무런 선입견 없이 상대방을 동등한 대화의 상대로서 인격체로서 대하는 자세가 중요하다. 상대방의 눈높이에 맞추어 상대방의 관심과 이해(利害)를 헤아리고, 상대방의 입장에서 대화의 내용을 알아들으려는 노력이 필요하다. 서로 생각과 신념이 다르고 사태에 대한 시각이 다르다 해도 상대방의 다름을 인정하고 수용하려는 열린 자세가 필요하다. 대화를 통해 합의와 일치에 이르게 되면 서로 사이에 신뢰감을 얻게 되어 친해지게 되고 사회적 결속감이 한결 더 강해질 것이다. 


그러나 현실은 이러한 이상적인 대화상황과는 거리가 멀다. 대화의 또 다른 주체로서 상대방은 자기의 관점에서 자신의 생각대로 사태를 이야기하고 판단하고 수용할 권리를 갖고 있다. 내가 마음대로 할 수 없는, 나와 똑같은 위치에 선 타자가 있다는 상황이 소통을 어렵게 만드는 결정적 요인이다. 그래서 소통에서 가장 중요한 문제는 역설적이게도 ‘비소통’이다. 소통에서는 상대방에게 정보나 메시지를 그의 생각대로 해석할 권리를 준다. 소통이 강조되는 문화적 자세에서는 수용자에게 해석의 일차적 권리가 보장되어야 한다. 


소위 발신자를 떠난 정보나 메시지는 전적으로 수신자의 처분에 맡겨진다. 소통의 상대방은 자신에게 주어지거나 전달되는 정보나 메시지를 선택해서 수용할 권리부터 그것을 자신의 관심과 취향에 따라 해석하고 변형할 권리도 갖는다. 그렇게 해서 발신자를 떠나 떠도는 정보나 메시지는 발신자의 의도와 상관없이 이해되고 오해되고, 곡해되고 왜곡될 처지에 놓이게 된다. 그래서 소통이란 “진심[사실]을 말하지 않는 정보 제공자와 메시지를 자기 취향에 맞춰 해석하려는 수신자 사이의 항구적인 협상 과정”이다. (도미니크 불통, 『불통의 시대 소통을 읽다』. 채종대/김주노/원용옥 옮김, 살림, 2011, 5.) 


관계에 대한 사고전환이 요구된다


소통하기 위해서는 정보를 알려 주는 것만으론 충분하지 않다. 오늘날은 오히려 정보의 차고 넘침과 기술적 매체의 항존이 소통을 더욱 어렵게 만든다. 정보 혁명은 소통의 불확실성을 가중시키며 예측할 수 없는 결과에 이르게 한다. 이것은 정보 자체의 문제만이 아니다. 지금은 모두가 모든 것을 보고 모든 것을 알게 되는 세상이다. 언어, 철학, 정치, 문화, 종교적인 차이들이 소통과 관용을 더욱 어렵게 만든다. 정보는 메시지일 뿐이지만, 소통은 그보다 훨씬 복잡한 ‘관계’이다. 


< 아버지의 이메일 >에서 아버지는 달라진 소통의 상황을 인정하고 새로운 소통 방식을 배우려 시도한다. 이념 때문에 단절이 된 관계를 이메일이라는 소통 방식을 통해 다시 이어보려 노력한다. 이제는 강요나 압박이 아닌, 전적으로 소통하미의 자유와 처분에 내맡긴 이메일을 43통 보낸다. 거기에 그동안 못 다한 자신의 한 많고 꿈 많던 삶의 이야기를 써내려 간다. 자신을 이해해주기 바라면서…


“차마 말하지 못했던, 굳이 아무도 묻지 않았던 당신의 이야기. 일흔셋 아버지가 남긴 일생의 첫 고백이 세상을 두드린다!” (< 아버지의 이메일 > 공식블로그) 


그렇게 아버지의 세상과의 소통은 시작되었다.


▶ 지난편 보기




[덧붙이는 글]
< 소통의 인문학 - 산다는 것은 소통하는 것이다 >, 『경향잡지』 2014년 9월호에 실린 칼럼을 수정 보완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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