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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는 탁자 위에서 고안된 제도가 아니라, 살아있는 실재” - [글로벌인문학] 7 만남의 인문학 : 프란치스코 교황, 만남의 그리스도론
  • 이기상
  • edit@catholicpress.kr
  • 기사등록 2020-11-30 10:57:52
  • 수정 2020-11-30 00:39: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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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날 수 없는 얼굴들



2014년 4월 16일 세월호 침몰로 300여 명의 희생자들은 영영 만날 수 없는 영혼들이 되었다. 그 가운데 250여 명이 아직 피지도 못한 꽃봉오리 고등학생들이었다. 그 사건 이후로 대한민국도 침몰해가며 구조를 요청했다. 앞만 보고 달려온 지난 60년 근대화, 선진화의 신화도 ‘세월호’와 함께 바다 속으로 가라앉았다.


국민들은 슬픔, 비탄, 좌절을 넘어 끓어오르는 분노를 삭여야 했다. 그 사건을 통해 우리는 우리가 얼마나 거짓과 허상 속에서 살아왔는지를 직접 눈으로 확인하였다. 대한민국은 국민을 위한 국가가 아니었다. 국가권력을 맡은 입법ㆍ행정ㆍ사법도 국민을 위한 것이 아니었다. 경찰과 군인도 자기들의 조직만을 챙겼지 국민을 생각하지 않았다. 국민의 공복이라는 공무원들도 국민보다는 자신들의 안위를 먼저 염려했다. 한 나라의 양심이어야 할 종교도 권력의 편에 서서 그들을 비호했다. 진실을 전해야 할 언론도 권력 앞에 무릎을 꿇었다. 


세월호 사고 이후 어른들은 부끄러워 아이들의 얼굴을 마주 대할 수가 없게 되었다. 당시 국가의 수장이던 박근혜 대통령은 생각을 달리하는 사람들을 ‘만나기’를 꺼려했다. 사건 다음날 피해자 가족들이 모여 있는 진도 체육관에서 박대통령은 잔뜩 수치를 부풀려 자기 자랑을 하고 있는 해양경찰청장의 보고에 만족하고 있었다. 그때 피해자 가족의 한 사람이 자기들이 확인한 바라며, 현재 달랑 잠수부 2명만이 작업을 하고 있다고 항의를 하면서 신속한 구조조치를 해달라고 애걸한다. 여기에 박대통령은 차갑게 이렇게 대답한다. “그럴 리가 없습니다.” 한 번 더 강조해서 말한다. “그럴 리가 없습니다.” 


이렇게 피해자 가족과의 만남은 처음부터 빗나갔다. 그 자리가 누구를 위한 자리였는지 상황을 파악 못한 것이다. 바닷물 속에 갇힌 아이들을 구하기 위해 그곳에 간 것이 아니라 그저 사건보고를 들으러 갔다는 행동을 보인 것이다. 그로써 사건상황과의 만남도 어긋나기 시작했다. 


국가 수장의 이와 같은 태도는 구조의 책무를 맡고 있는 해경한테서도 발견되었다. 그들은 침몰하는 배 주위를 맴돌면서 바다에 뛰어든 사람들만 건져 올리는 것으로 임무를 대신했다. 직접 현장[가라앉는 배]에 뛰어들어 피해자들을 만나려는 노력은 조금도 하지 않았다. 그것은 승객의 안전을 책임져야 할 승무원들도 마찬가지였다. 그들은 조직의 식구들만 챙기고 승객들의 얼굴은 외면했다. 어디에서건 만남은 없었다. 


교회는 주님을 만나는 길을 열어가는 하느님 백성입니다.


20세기 들어서서 가톨릭교회는 제2차 바티칸 공의회를 통해 그동안 세상에 대하여 취해 왔던 소극적인 태도, 즉 은둔적이고 기피적인 자세를 청산하고 교회 자체가 세계 안에 자리 잡고서 “세상을 성화하는 성사”(Sacramentum Mundi)로서, 그리고 “민족들을 비추는 빛”(Lumen Gentium)으로서 역할을 다하기로 세상에 천명한다. 그리고 온 세상 다양한 민족과 문화권 속에 퍼져 살고있는 모든 “하느님의 백성”(Populus Dei)을 고루 돌보는 진정한 의미의 “하느님의 교회”로 거듭날 것을 대내외에 공표한다.


그러면서도 여전히 교회는 성직자 중심의 위계질서에서 벗어나지 못하였다. 성직자가 중심이 되어 움직이는 시스템[조직체계]으로서의 교회에서는 하느님의 백성들과의 진정한 만남을 기대하기 어렵다. 여기에 교황 프란치스코는 교황이 된 첫 담화에서 이렇게 분명히 말한다. “교회는 하느님의 백성,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는 길을 열어가는 거룩한 하느님의 백성입니다.”(매튜 번슨, 『교황 프란치스코, 그는 누구인가』, 제병영 옮김, 하양인, 2013, 16.) 교회가 곧 “하느님의 백성”이라고 천명하고 나선 것이다.


그리고 가톨릭 사상가 로마노 과르디니의 말을 인용하며 교회는 변화하는 시대를 만나 변해야 한다고 말한다.


“교회는 탁자 위에서 고안되고 만들어진 제도가 아니라, 살아있는 실재입니다. 교회는 오랜 시간 살아있고, 살아있는 다른 모든 것처럼 그 모습이 변하며 성장합니다. 그렇지만 그 본질은 항상 같습니다. 교회의 심장은 그리스도라는 것입니다. (…) 교회의 정신은 다시 깨어납니다.” (사베리오 가에타, 『교황 프란치스코. 새 시대의 응답자』, 강선남 옮김, 성바오로, 2014, 30.)


또한 교회는 변화하는 거리[상황]에 뛰어들어 실제의 사건[사태]에 맞닥뜨려 그것과 마주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교회는 자기 안에서 나와 변두리로 가야 합니다. 교회는 자기 자신을 확신하는 영적 병듦을 피해야 합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교회는 탈이 납니다. 교회가 거리로 나가면 모든 사람이 그런 것처럼 여러 사건과 마주하게 될 겁니다. 그렇지만 교회가 자신을 가두고 있으면 고립된 의식으로 늙어 갑니다. 거리로 나가서 사건과 조우하는 교회와 자신을 확신하는 병에 걸린 교회 중에 저는 분명 앞의 교회를 선호합니다.” (같은 책, 46)


프란치스코 교황은 교회의 복음화 과제에서 최우선인 것은 규정의 축소나 삭제가 아니라 “거리로 나가서 사람들을 찾고 그들을 직접 인격적으로 만나는 것”이라고 선언한다. 그러면서 이 모든 것을 그리스도와 함께, 그의 십자가와 더불어 시작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그리스도는 교회의 심장이며 근본이고 기준임을 단언한다. 그리고 이 모든 일을 십자가 없이 하려고 한다면, 십자가 없이 일구어 나가거나 십자가 없이 그리스도를 고백한다면, 우리는 주님의 제자가 아니라 세속인에 불과할 뿐이라고 힘주어 말한다. (매튜 번슨, 16) 그리고 거기에 바로 가톨릭교회의 영성이 자리하고 있음을 분명히 한다.


“교회의 본질은 정치적인 것이 아니라 영적인 것입니다.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기 위한 방법을 모색하는 하느님의 백성, 거룩한 하느님의 백성들의 것입니다. 이렇게 해야 교회의 생명이나 활동을 만족스럽게 설명할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는 교회의 목자이지만, 역사 안에서 그분의 현존은 인간 존재의 자유 안에 스며 있습니다.”(같은 책, 193)


어찌하여 살아 계신 분을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찾고 있느냐?(루카 24,5) 


프란치스코 교황은 우리 시대의 시대상을 “폭력과 증오, 무죄한 이의 고통과 돈이 지배하는 제국의 그림”이라고 묘사한다. 그것은 온갖 형태의 이기주의에 갇혀 자기만족에 안주하려는 현대인의 속성에서 기인하고 있다. 그 결과 “세상은 자아도취와 소비지상주의, 쾌락주의에 빠져 있다”. (호르헤 마리오 베르고글리오/아브라함 스코르카, 『천국과 지상』, 옮긴이 강신규, 율리시즈, 2013, 94.) 


이 세상의 권력가들은 살아 계신 하느님을 내쫓고 그 자리에 유행이라는 우상을 대신 앉혀 놓았다. 그래서 하느님께서 창조하시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구원 사업을 통해 인류에게 베풀어 주신 풍요로운 삶이 소위 ‘죽음의 문화’로 대체되고 있음을 보게 된다. 우리가 인간적, 그리스도교적 가치를 배제한 채 현세 권력에만 매료되어 있을 때 우리는 우리 자신이라고 하는 우상의 포도주에 취해 있는 것이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 이후 인류는 두 가지 선택지 앞에 서게 되었다고 말한다. 한 부류는 예수의 무덤만을 보고 절망에 빠져 세속적인 것으로 도피하여 자신들만의 우상을 만든다. 다른 한 부류는 베드로처럼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생명 그 자체로 믿고 생명을 향해 자신의 마음을 연다. 천사는 무덤 주위를 맴돌며 주님을 찾는 사람들에게 “어찌하여 살아 계신 분을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찾고 있느냐?”(루카 24,5)고 일깨운다. 


영적 세속주의가 판을 치는 오늘날 많은 사람들은 거짓 영에 빠져 거짓 신을 섬기며 거짓 신에게 헌신하고 있다. 많은 공장 노동자들이 이윤이라는 신을 섬기는 자본주 때문에 적정한 임금을 받지 못하고 있고, 많은 여성들은 통치라는 신 밑에서 희생당하고 있다. 많은 어린이들은 욕정이라는 신을 위해 제물이 되고 있고, 아름다운 산과 들은 개발이라는 신을 위해 황폐화되고 있다. 많은 가난한 사람들이 욕심이라는 신을 위해 희생당하고 있고, 무방비 상태의 많은 사람들이 국가안보라는 신을 위해 희생당하고 있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교회 공동체도 이러한 이기주의가 보여주는 잘못과 죄악의 풍경화 밖에 있지 않다고 고백한다. 그러면서 개인적 이기심을 합리화시키며 가족·지역 주민·민족·시민의 공존을 붕괴시키는 사회 중심부의 윤리적 가치의 부재와 맞서 싸워야 한다고 말한다. 


영혼 안에 주님의 자리를 마련하십시오!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믿는다고 고백한 우리 신도들도 이기주의에 빠져 나만의 무덤을 만들어 그 속에서 안주하느라 나 자신을 불러 세우는 주님의 초대를 못 듣고 있는 것은 아닌가? 나는 생명이신 주님을 만날 준비가 되어있는가? 나는 과연 내 안에 주님을 위한 자리를 마련하고 있는가? 나는 매일의 삶에서 주님께서 활동하시도록 그분께 시간을 내드리는가? 혹여 그분께서 들어오시는 것을 거부하고 내가 모든 것을 해결하려 드느라 너무 바쁜 것은 아닌가?


프란치스코 교황은 주님과의 만남을 이루기 위해서는 내 마음, 내 영혼 안에 주님의 자리를 마련해야 한다고 말한다. 그리고 그러기 위해서는 구체적으로 행동을 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자선과 단식, 고행과 기도를 통해 우리는 주님과의 만남을 준비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일은 분명 어렵습니다. 하지만 그렇게 해야 합니다. 그것은 마치 고름을 짜내는 일과 같습니다. 그렇게 할 때 우리의 마음은 비로소 주님과 만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주의하십시오! 겉으로만 그렇게 하지 마십시오. 그리스도의 적은 위선이기 때문입니다.” (호르헤 마리오 베르골료, 『프란치스코. 한 사목자의 성찰. 자비』, 윤주현 옮김, 생활성서, 2014, 107.)


▲ (사진출처=Vatican)


프란치스코 교황은 주님과 함께 십자가를 지며 가톨릭 신도로서 살아가야 하는 영성의 길을 다음과 같이 제시한다. (같은 책, 73-74) 


먼저 사랑의 길로서 자선의 길이 있다. 자선은 무엇보다도 고통받고 있는 사람들, 고독한 사람들, 나아가 살아갈 권리를 박탈당한 사람들을 발견할 줄 아는 자세를 말한다. 그러므로 자선은 우리의 시간과 우정, 도움을 필요로 하는 모든 사람을 받아들이고 서로 연대하는 것을 말한다. 고통받고 있는 사람들 안에서 그리스도를 만나는 사랑이야말로 그리스도인을 구별해 주는 표지다.


그 다음 고행의 길로서 단식의 길이 있다. 단식은 물질적 재화가 그리스도인의 유일한 목적이 될 수 없음을 상기시켜 주는 예언적 행위다. 하느님의 마음에 드는 단식은 하느님 나라를 이루는 가치들에 대해 최대한 책임을 지는 것이다. 그리고 그 가치란 정의와 사랑, 평화, 연대를 말한다.(이사 58장) 고행은 우리를 죄로부터 회복시켜 줄 뿐만 아니라 고통 중에 있는 사람들과 연대하는 구체적 방법이다. 단 몇 시간만이라도 ‘인간적 빵’을 포기하고 배고픔을 느낌으로써 우리는 ‘진정한 빵’은 오직 그리스도와 그분의 말씀뿐이라는 점을 되새기게 된다. 또한 그것은 아무 대책도 없이 일 년 내내 강제로 단식해야 하는 사람들의 힘겨움을 몸소 느끼게 해 준다. 단식은 다른 사람들의 고통에 더 민감하게 해 주며 더 자비로워지게 해 주고 더욱더 그들에 대한 책임을 지게 해 준다.


그 다음 기도의 길이 있다. 하느님을 흡족하게 해 드리는 기도는 그분과의 인격적 만남에서 출발해 다른 사람들에게 봉사하기 위해 축성된 삶으로 나아가는 기도다. 기도는 하느님을 향해 자신을 개방하고 그분을 신뢰하는 것이며 우리에게 그분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표현하는 행위다. 스스로 충분하다고 느끼는 사람은 기도하지 않고 스스로 만족해할 뿐이다. 진정한 기도에는 투명성과 항구함, 참됨이 요구된다.


절망 속에 불평만 하렵니까?


이윤, 소비, 쾌락 그리고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그것을 얻기 위해 혈안이 되어있는 서로 다른 이익 집단들이 판을 주도하는 황금만능주의 시대에 가진 자와 못 가진 자, 부유한 사람과 가난함 사람의 차이는 갈수록 커져가고 있다. 갈등과 불신의 골은 깊어가며, 그에 따라 서로 외면하고 자신과 자신의 주변만을 챙기는 집단 이기주의가 사회를 해체하는 어두운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우리는 엠마오의 제자들처럼 절망 속에 불편만 하고 있으려는가?


그들은 무덤만을 보고 생명이신 그리스도를 알아보지 못하고 비통함과 절망에 대해 이야기하며 부활의 기쁨으로부터 도망치고 있었다. 생명 자체이신 주님께서 그들 곁으로 다가와 함께 걷고 계신데도 그분을 알아보지 못했다. 주님을 만날 준비가 되어 있지 못한 것이다.

 

주님께서는 늘 이렇게 말씀하신다. “나는 문 앞에 서서 문을 두드립니다. 누군가 내게 문을 열어 준다면, 들어가서 함께 만찬을 들겠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삶 속으로 스며 들어오신다. 그리고 늘 이렇게 물으신다. “나와 함께 가지 않겠습니까?” “한 걸음 더 내디딜 준비가 됐나요?”라고.


주님께서는 굶주린 사람에게 먹을 것을 나누도록 명하셨다. 그리스도의 몸을 받아 모신다는 것은, 빵을 나누는 행위를 모든 형제를 비롯해 삶의 모든 차원으로 넓혀 가기 위해 책임을 진다는 것을 전제로 한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우리에게 이렇게 묻는다. “그렇다면 과연 여러분은 빵을 나눌 준비가 됐습니까?” 우리는 이 물음에 이렇게 대답해야 한다. “예, 준비됐습니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우리 사회에 만연한 이기주의와 부도덕 그리고 무관심이 많은 사람에게 일 년 내내 원치 않는 단식과 고행을 강요하며 그들을 단죄한다고 말한다. 그는 이것이 하느님께서 당신 자녀들을 위해 준비하신 계획이 아니라는 사실을 확신한다. 그분의 계획은 우리 모두가 이 지구상의 재화를 함께 나눔으로써 우리 가운데 그 누구도 먹을 음식을 갖지 못한 채 버림받지 않고, 그 누구도 의사의 도움을 받지 못한 채 죽어가지 않으며, 그 누구도 인간 이하의 상황을 견디지 않아도 되게 하는 것이다. 그러나 슬프게도 오늘날 각 개인의 죄, 더 나아가 이 사회가 안고 있는 구조적인 죄는 이런 하느님의 꿈이 실현되도록 놔두지 않고 있다. (호르헤 마리오 베르골료, 71) 프란치스코 교황은 단호하게 말한다. 


“누군가 자신의 권리를 위해 싸우지 않고 낙원에 가기만을 바라면서 무조건 참는다면, 그는 아편에 심각하게 중독된 사람입니다.”(『천국과 지상』, 208) 


한국인들이여, 윤리적·영적으로 새롭게 태어나십시오!


2014년 4월 24일 대전교구장 유흥식 주교가 프란치스코 교황과 만났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대전교구장 유흥식 주교와 만난 자리에서 세월호 사건을 언급하며 “한국인들이 이 사건을 계기로 윤리적, 영적으로 새롭게 태어나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우리 안의 이기심을 인식하고 그로부터 회심하기 전까지, 우리는 어떠한 신뢰도 평화도 이룰 수 없을 것이라고 말한다. 회심하기 전까지 우리는 어떠한 기쁨도 환희도 누리지 못할 것이다. 권력과 돈, 명예에 대한 지나친 야망은 커다란 내적 공허함만을 만들 뿐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내면이 공허한 사람은 기쁨과 평화 그리고 희망을 전해 줄 수 없을 뿐만 아니라 만사를 부정적으로 바라보게 된다. 그들은 결코 형제간의 결속을 이룰 수 없다.(호르헤 마리오 베르골료, 198)


프란치스코 교황은 권력자들에게 진정한 권력과 권한이 어떠해야 하는지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진정한 권한은 봉사라는 사실을 절대로 잊지 마십시오. 그리고 권한을 행사할 때는 교황도 마찬가지로 십자가 위에서 최고로 빛나는 봉사를 위해 더욱 더 충실해야 합니다.” 


교회의 권력자든 국가의 권력자든 백성을 보호하기 위해 존재해야 함을 잊지 말아야 한다. 하느님의 백성 또는 국민을 보호하기 위해 자신들의 팔을 펼쳐야 하고, 부드러운 애정으로 아주 가난하고, 약하고, 중요하게 여겨지지 않는 사람들을 끌어안아야 한다.(같은 책, 204) 


세월호 사고 이후 연인원 3만여 명의 자원봉사자가 진도 팽목항을 찾았다. 사고 소식을 접한 후 생업도 포기한 채 전국 각지에서 진도를 찾은 봉사자들은 실종자 가족들의 슬픔에 동참하고, 그들에게 필요한 것을 살피고 채워주고 있다. 아이를 잃어버린 부모와 바닷가에 나가 돌아오지 않는 자녀의 이름을 목 놓아 부르며 함께 울었다. 행여 다친 마음에 상처가 될까봐 말 대신 팻말을 들고 체육관 여기저기를 돌며 실종자 가족들에게 필요한 밥과 물품을 챙겨준다. 애도의 마음을 담은 노란 리본이 SNS와 시민들의 가슴에 달렸고, 세월호의 참상을 잊지 않겠다고 다짐하는 결의의 촛불이 주말마다 전국의 광장을 메웠다. 시대가 아플 때마다 권력보다 먼저 일어서고, 먼저 분노하던 대한민국 국민의 연대가 시작되었던 것이다. 


절망 속에 온갖 조직과 제도를 원망하며 분노를 삭이지 못하는 한국인들에게 프란치스코 교황은 이렇게 조용히 말하는 듯하다. 


“희망이 없어도 희망을 가집시다! 오늘날 칠흑 같은 어둠 가운데서 우리는 희망의 빛을 찾아야 하고, 다른 사람들에게 그 희망을 전달해야 합니다.”(호르헤 마리오 베르골료, 204)


“악은 선의 힘으로 정복되고 고통은 사랑의 힘으로 정복되며 궁핍은 연대의 힘으로 정복됩니다.”(같은 책, 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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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이는 글]
< 프란치스코 교황의 만남의 그리스도론. 거리 사람들과의 만남 속에 그리스도를 만나다 >, 『경향잡지』 2014년 7월호에 실린 칼럼을 수정 보완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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