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사 메일전송
스스로 자신을 만들어 나가는 일, ‘가능성’을 열어보자 - [글로벌인문학] 5 : 실존의 인문학, 내 삶은 내가 결정한다
  • 이기상
  • edit@catholicpress.kr
  • 기사등록 2020-11-16 11:56:54
  • 수정 2020-11-14 22:53:18
기사수정


한국의 실존적 상황!? “자살 신드롬”


몇 해 전 가난에 쪼들리고 병에 시달리며 버텨오던 서울 송파의 세 모녀가 희망의 끈을 놓아버리고 극단적인 선택을 했다. “미안하다”는 유서와 함께 집세를 남겨놓았다는 사실이 남아있는 사람들을 퀭한 먹먹함에 빠지게 했다. 이를 본받기라도 하듯이 뒤이어 경기 광주에서 엄마가 어린 아들과 딸을 데리고 아파트에서 투신해 모자가 죽고 딸이 중태에 빠지는 사건이 벌어졌다. 서울 화곡동에서는 간암을 앓던 택시기사가 아내와 함께 동반자살을 했다. 동두천에서도 생활고를 못 견뎌 30대 엄마가 아들과 함께 아파트에서 몸을 던졌다. 이 모든 사건이 한 달도 안 되는 사이에 일어났다는 것이 우리 모두를 경악케 한다. 


우리나라는 진작부터 ‘자살공화국’이라는 자조어린 자책을 해왔다. 15년째 OECD 회원국 중에서 자살률 1위를 기록하고 있는데 예외적으로 2017년에는 인구 270만 명 규모의 작은 나라 리투아니아가 1등을 했다. 그때도 우리는 2위를 기록했고 이듬해인 2018년에 다시 1위를 차지했다. 특히 심각한 것은 청소년과 노인 자살이라고 한다. 그런데 이제 신병과 생활고를 비관한 가족단위 동반자살까지 수치를 증가시키고 있다.


프랑스의 사회학자 뒤르켕(Emile Durkheim, 1858~1917)은 자살의 유형을 이타적 자살, 이기적 자살, 아노미적 자살 등 3가지로 구분하였다. 그리고 각각에 대해서 개인적인 자살동기보다는 자살이 일어나는 사회적 상황을 중요시했다. 뒤르켕은 자살의 한 요인으로 아노미(anomie) 현상을 지적한다. 여기서 아노미는 ‘행위를 규제하는 공통 가치나 도덕 기준이 없는 혼돈 상태’를 말한다. 이런 사회병리가 노이로제, 비행, 범죄, 자살 같은 사회 부적응 현상을 가져온다고 보았다.


우리가 살고 있는 현대 사회는 더 이상 조선시대의 윤리규범이 통용되는 사회가 아니다. ‘신자유주의’라는 이름의 자본주의가 판을 치는 사회다. 능률과 성과를 앞세워 경쟁시장에서 효율성의 극대화를 추구해 국가 경쟁력을 강화하자는 이념을 앞세운 경제이론이다. 이를 충실히 따르고 있는 한국 사회는 세계에서 경쟁이 가장 치열한 나라에 속한다. 경쟁에 살아남는 사람은 잘 나가지만 그렇지 못한 대다수의 사람들은 성장과 성과의 그늘 아래 상대적 박탈감을 느끼며 삶의 이유를 찾지 못한다. 


한국 사회가 놓여 있는 이러한 실존적 상황에 우리의 젊은이들은 어떻게 대처해 나가야 하는가? 여기에 한 번 ‘실존의 인문학’을 주장하는 사상가들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여 보자. 


“인간은 자유롭도록 단죄 받았다.”


실존주의자 사르트르(J. P. Sartre, 1905∼1980)는 인간의 존재양상을 이렇게 표현한다. “인간은 결코 먼저 존재하고 그 뒤 자유롭게 되는 것이 아니다. 인간의 존재와 그의 < 자유 존재 >와는 아무런 구별도 없다.” 간단히 말해서 인간은 “자유롭도록 단죄 받았다.” 


그런데 여기서 자유는 그 일반적 의미가 결정되어 있지 않은 추상적인 것으로 이해되어서는 안 된다. 오히려 자유는 각자 나의 것으로서 오직 그때마다의 상황 속에서 구현되는 특정한 자유이다. 그것은 주어진 어떤 것이 아니고, 오직 그 주어진 것을 선택하는 바로 그때 일어나는 것이다. 자유는 스스로를 투사하고 결정하는 기획투사 속에서 존재한다. 이 둘이 상황을 구성하는 자유의 수행이다. 다시 말해 “자유란 오직 상황 속에 있고, 상황이란 오직 자유를 통해 있다.” 상황은 자유의 세계-안에-있음의 양상이고, 주어진 것, 즉 즉자(卽自)와 자유와의 관계이며 즉자의 드러냄인데, 그것을 통해 즉자는 우리에 대해서 있게 된다. 



이러한 제한 없는 자유는 오직 타인에 의해서만 제약을 받는다. 나를 바라보는 타인의 시선은 마치 메두사의 눈길처럼 나에게서 모든 가능성을 박탈해 나를 지금의 나로(곧 즉자존재로) 고정시켜버릴 수 있다. 그래서 사르트르는 한 작품에서 “지옥, 그것은 타인이다”라고 외친다. 인간의 자유는 현사실적 필연성이라는 의미에서 스스로에 의해 제한되고 역사적 상황에 의해 제한되는 만큼 또한 타인의 자유에 의해 제한받고 있기 때문에, 그런 한에서 그것은 유한한 자유이다.


“나는 반항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존재한다.”


부조리의 실존철학자 카뮈(Albert Camus, 1913∼1960)는 개개의 인간이 부조리의 상황 속에 처해 있으며, 그래서 부조리의 감정으로 세상을 대한다고 말한다. 


부조리란 카뮈에게 다른 것이 아니고 단일성을 추구하는 인간의 욕구와 그것을 가로막고 있는 현실의 난관 사이에서 일어나는 불일치이다. 카뮈에게는 이러한 부조리만이 유일하게 주어져 있는 것이다. 그렇지만 그는 부조리를 인간존재에 대한 무의미한 부정으로 이해하지 않고 있다. 그에게 부조리는 출발점이지 귀결이 아니다. “만일 사람이 아무것도 의미를 갖고 있지 않다고 가정한다면, 그는 세계가 부조리함을 결론지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과연 아무것도 의미를 갖고 있지 않나! 나는 한 번도 사람들이 이런 관점을 받아들일 수 있으리라고 생각해 본 적이 없다.”


카뮈는, 인간이란 부정 속에서는 살 수 없으리라는 것을 뚜렷하게 보았다. 그렇기에 그의 문제는, 어떻게 세계의 부조리에 직면하면서도 실제로 자신의 삶을 영위해 나갈 수 있는가이다. 카뮈는 그가 출발점으로 받아들인 이 부조리를 어떤 형이상학적인 전제나 지식에로 초월해 버릴 수 없었다. 카뮈는 인간존재의 부조리한 조건들을 받아들이면서 계속 밀고 나갈 것을 촉구한다. 이런 식으로 계속 밀고 나감을 강조하기에 그의 철학은 부조리의 철학이면서도 허무주의 저편에 서 있는 것이다.


“산다는 것, 그것은 바로 부조리를 살게 놔두는 것이다. 부조리를 살게 한다는 것은 부조리를 응시하는 것이다. 견지될 수 있는, 몇 안 되는 철학적 입장의 하나는 따라서 반항이다. 반항은 인간의 끊임없는 자기 자신 안에 현존함이다.” 그래서 카뮈는 이렇게 말한다. “나는 반항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존재한다.” 이로써 그는 부조리에 대한 나의 반항이 인간의 연대적인 존재의 조건임을 강조한다. 


전쟁의 폐허 속에 모두가 힘들고 어려웠던 20세기 후반 실존철학은 이 땅의 청년들과 지식인들에게 자신의 상황을 떠맡고 새롭게 시작할 수 있는 의지와 용기를 불러일으켰다. 그 당시 젊은이들은 던져진 상황이 참담했지만, 얼마나 분명하게 자신의 처지를 인지하고 떠맡아 자신의 가능성을 십분 살리는가에 따라 위기가 곧 기회라는 것을 깨달았다. “하면 된다.”라는 “코란도(Kor-an-do, Korean can do)” 정신으로 무장하고 무엇이든지 배우고 무엇이든지 실행하려고 어디든지 쫓아다녔다. 그 결과 50년 만에 최하위의 빈곤 국가를 무역규모 8위의 경제국가로 만들어냈다. 


그러면 지금 우리가 처해 있는 실존적 상황은 어떤가? 삶의 이유와 목적을 못 찾고 방황하는 젊은이들이 너무 많다. 스스로 자신에게 살아야 할 이유와 근거를 설정해야 한다는 것이 오히려 너무 무거운 부담으로 다가온다. 자유의 행사는 자신의 가능성 전부를 건 실존적 선택이다. 그리고 그러한 선택에는 책임과 의무가 따른다. 그렇기 때문에 자유를 따라 다니는 근본적 기분은 ‘불안’이다. 잘못 선택하면 어떻게 될까 하는 불안이 엄습한다. 자유와 불안은 동전의 앞뒷면이다. 


인간의 실존은 “스스로 자신을 만들어 나가는 데” 있다


‘실존(Existenz)’이라는 개념은 인간만의 독특한 존재방식, 존재양태를 지칭하기 위해 고안된 개념이다. 다른 존재자, 예를 들어 인간이 제작해낸 모든 인위적인 도구들과 자연적으로 존재해온 자연 사물들은 그 존재방식이 누군가 ― 그 제작자나 창조자 ― 에 의해 이미 확정되었다. 그것들은 그렇게 존재이유를 부여받아 그 목적에 맞추어 존재해야 한다. 그런데 인간만은 그렇지 않다. 인간은 스스로에게 존재이유를 부여해 스스로 자기가 설정한 목적에 따라 존재하는 유일한 존재이다. 다른 존재자들은 그 존재방식이 고정되어 있지만 인간의 실존은 (존재)가능성에 활짝 열려 있다. 이것을 다른 말로 ‘존재가능’이라고 표현한다. 한마디로 인간은 스스로 존재할 이유를 세워서 자신이 살아갈 방식을 스스로 결정해야 하는 그런 존재이다. 이것을 철학적으로는 “자신의 존재를 존재해야 한다”고 표현한다. 


인간은 자신의 있음을 과제로 떠맡아 거기에다 자신의 존재의 의미와 목적을 새겨 넣을 수 있고, 새겨 넣어야 한다. 그렇게 그가 되려고 하는 바 미래의 자신의 존재를 위해 모든 것을 바칠 수 있다. 비록 지금 여기 선택의 여지없이 내던져지긴 하였지만 그렇게 내던져진 존재를 떠맡아 나름대로 존재해 나가야 한다. 이것을 실존철학자들은 <현사실>이라 이름한다. 자연 속의 사실과는 다른, 인간이 떠맡아 자기 것으로 변화시켜야 하는 그런 사실을 말한다. 인간은 이제 비로소 자신의 존재를 만들어나가야 한다. 인간 각자에게는 그의 존재가 그의 양심에 비추어 각기 자유롭게 만들어나가야 할 존재로, 즉 과제로 주어져 있다. 


그런데 인간은 우선 대개 자기에게 주어진 이러한 실존의 자유를 행사하지 않고 < 그들(사람들) >의 지시를 따라서 살아나간다. 인간은 < 그들 >에게 자신을 내맡겨 버리고 거기에서 가정과 같은 안온함과 포근함을 느낀다. 그렇지만 인간의 과제는 자신이 이처럼 < 그들 >의 사슬에 옭아매어져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 거기에서부터 해방되어 < 참된 자신 >을 찾는 데 있다. 그래서 하이데거(Martin Heidegger, 1989∼1976)는 자기 자신을 잃어버린 채 살아나가고 있는 현대인들에게 < 너 자신이 되어라! >고 외친다.


그러나 현재 우리의 사회적 상황은 젊은이들에게 다양한 가능성을 펼칠 마당을 제공하지 못하고 있다. 교육은 획일화되어 있어 청년들을 확정된 인형으로 조립해내고 있다. 사회에 팽배해 있는 황금만능주의는 오로지 돈을 기준으로 모든 것을 평가하게 만들고 있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선택이란 사회의 규칙을 따르든가 아니면 그것을 부정하든가 일 것이다. 


부정하기에는 너무나 나약한 젊은이들이 아예 삶 자체를 포기하는 극단적 선택으로 내몰리고 있다. 우리 사회는 젊은이들에게 실존의 방식을 위한 천차만별의 가능성을 만들어 제공해 줄 수 있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먼저 어려서부터 이들이 가지고 있는 소질과 재능, 끼와 멋을 다양하게 펼치게 할 수 있는 쌍방향 소통의 교육제도부터 만들어야 할 것이다.


▶ 지난편 보기





[덧붙이는 글]
< 실존의 인문학. 나 자신의 삶은 내가 결정한다 >, 『경향잡지』 2014년 5월호에 실린 칼럼을 수정 보완하였습니다.
기사수정

다른 곳에 퍼가실 때는 아래 고유 링크 주소를 출처로 사용해주세요.

http://www.catholicpress.kr/news/view.php?idx=6811
기자프로필
관련기사
댓글
※ 로그인 후 의견을 등록하시면, 자신의 의견을 관리하실 수 있습니다.
비회원 이름 패스워드 자동등록방지
모바일 버전 바로가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