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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유’가 아니라 ‘행동’이 문제다
  • 이기상
  • 등록 2020-10-26 10:38: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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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넷포털 사이트 검색창에 ‘세계’ ‘코로나’라는 단어를 넣고 검색을 해보니 ‘코로나19 세계지도’와 함께 전 세계 코로나 현황을 알 수 있는 뉴스와 자료들이 줄지어 나왔다. 충북 괴산 칠성면 외사리의 촌구석에 앉아서도 세계가 돌아가는 면면을 실시간으로 알아볼 수 있는 시대다. 아무도 이제는 우리가 ‘지구촌 시대’에 살고 있다는 사실을 부정하지는 못할 것이다. 인터넷과 이동통신의 도움으로 우리는 어디서나 지구촌 곳곳에서 일어나는 굵직한 사건들을 접할 수 있게 되었다. 스마트폰 하나로 나는 전 세계와 연결되어 있다. 우리는 명실공이 지구인이다. 


세계시민으로서 지구인의 법과 권리를 생각하며 일찍이 ‘코스모폴리타니즘(Cosmopolitanism, 세계시민주의)’을 주창하며 ‘세계시민법’을 통한 ‘영원한 평화’를 모색한 사람이 있으니, 그가 바로 독일의 유명한 철학자 임마누엘 칸트(Immanuel Kant, 1724∼1804)다. 2백 년 전에 글로벌한 시각으로 지구촌의 평화를 위하여 인간이 세계시민으로서 어떤 의무와 책임을 가지고 살아야 할지를 고민하였다니 그야말로 그는 예언자적인 혜안을 가졌음에 틀림없다. 칸트는 인간을 인간이게끔 만드는 가장 근본적인 특성을 인간의 마음에 아로새겨진 도덕법에서 보았다. 이러한 도덕의 인간을 바탕에 깔고 전개하는 그의 인간학은 ‘도덕의 인문학’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돈 때문에 윤리도덕을 내던지는 사회


그런데 예로부터 동방예의지국임을 자랑하며 윤리와 도덕을 나라의 품격으로 내세웠던 우리 사회가 돈 앞에서 양심을 쓰레기처럼 내던지는 일이 자주 벌어져 세상이 변해도 너무 변했음을 실감나게 한다. 


돈 8천만 원 때문에 어머니와 형을 죽여 암매장한 사건이 우리 사회를 경악케 했다. 어떻게 돈 몇 푼 때문에 자기 친어머니를 죽일 수 있단 말인가! 도대체 일반 상식으로는 생각도 못할 끔찍한 일이다. 이 땅의 윤리도덕이 돈 앞에 무릎을 꿇고 있음을 보여주는 사건이었다. 그런데 이 사건이 어느 정신병자의 우발적인 범행이었다면 그냥 일회성의 일탈 사건으로 간주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렇지 않다는 것이 우리 모두를 몹시 불편하게 만든다.


몇 해 전 흥사단 투명사회운동본부에서 전국의 1만172명의 초·중·고교생을 대상으로 학생들의 윤리·정직지수를 측정하기 위해 설문조사를 실시하였는데, 그 결과가 우리를 놀라게 한다. 질문 가운데 “10억 원이 생긴다면 죄를 짓고도 1년 정도 감옥에 갈 수 있느냐”라는 항목이 있는데, “갈 수 있다”고 응답한 고등학생이 무려 절반에 가까운 47%로 나타났다고 한다. 우리 사회의 황금만능주의 풍조를 그대로 반영하고 있는 셈이다. 초등학생의 경우는 16%, 중학생은 33%가 그렇게 해도 괜찮다고 대답했다고 한다. 역설적이게도 교육을 받을수록 윤리적인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 반대라는 것이 문제다. 어떤 연구에서는 “행복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이냐”는 물음에 초등학생들은 가정이라고 표시하는데, 고등학생 대부분이 돈으로 대답이 바뀌었다고 한다. 


어린이와 학생들이 무엇을 보고 배우겠는가! 고위 공직자들의 청문회를 볼라치면 하나 같이 다들 부자들인데 정직하게 재산을 모은 사람은 눈을 씻고도 찾을 수 없다. 그러면서 다들 그런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은 축재행위가 일반적인 관행이었다고 말하며 윤리적으로 아무 문제될 것이 없다고 큰소리친다. 할 수 있으면서 하지 못한 사람이 못난 사람으로 치부 받는 세상이다. 


인간의 존엄성은 도덕성에 있다



칸트는 근대에 들어서 인간의 본성을 규명하며 체계적으로 집대성한 철학자이다. 근대철학의 아버지로 통하는 데카르트(René Descartes, 1596~1650)는 인간의 위대함을 ‘사유’에서 보았고 ― “나는 사유한다. 그러므로 나는 존재한다.” ― 그래서 ‘사유하는 나’를 철학의 토대로 삼았다. 그러나 칸트는 제약받지 않는 사유가 엉뚱한 형이상학적인 문제들을 양산한다는 것을 깨닫고 이성을 비판하는 것을 철학의 과제로 만든다. 그래서 그의 유명한 삼대 비판서, 즉 『순수 이성 비판』, 『실천 이성 비판』, 『판단력 비판』이 세상의 빛을 보게 된다. 여기서 칸트는 철학의 화두를 ‘사유’에서 ‘행위’로 옮겨놓는다. 이때의 행위란 자율적 행위로서 도덕적 행위를 말한다. 


칸트는 인간이 이원적 존재로서, 한편으로는 ‘자연’에 속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자유’에 속하는 것으로 보았다. 여기서 ‘자유’란 인간이 행동[행위]할 때 자신의 절대적인 자유의지 능력을 사용할 수 있는 존재라는 뜻이다. 칸트에게 인간은 자연의 다른 존재들과 구별되는 ‘존엄성’을 지닌 존재인데, 이때 그의 존엄성은 자연의 인간이 아니라 자유로서의 인간에 근거한다. 인간은 이 자유의 힘으로 자연의 세계를 넘어서 당위의 세계를 추구할 수 있는데, 바로 여기서 도덕법칙이 나오는 것이다. 


자유, 즉 의지의 자유란 ‘어떤 상태를 자신으로부터 시작하는 능력’이다.(『순수 이성 비판』) 그것은 나의 의지가 어떤 외적 세력에 의해 규정되지 않는 것을 의미한다. 인간은 한편으로 동물과 공유하는 측면, 즉 본능적 욕구들[경향성]을 가지고 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인간만이 지닌 측면, 즉 이성[자유의지]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이 후자만이 진정한 ‘나’이다. 칸트에 의해 존엄성을 지닌 것으로 표현되는 인격은 오로지 이 ‘진정한 자아’와 관련된다. 다시 말해 도덕법칙을 세우고 그것을 따를 잠재적 가능성을 지닌 ‘나’를 말하는 것이다. 칸트는 이렇게 말한다.


“인간은 분명히 신성하지 않으나, 그의 인격 속의 인간성은 그에게 신성한 것이 아닐 수 없다. 모든 피조물 중에서 우리가 의욕하고 또 우리가 지배하는 모든 것들은 단지 수단으로서 사용될 수 있다. 오직 인간, 그리고 그와 더불어 있는 모든 이성적 피조물만이 목적 그 자체이다. 즉, 그는 도덕법칙의 주체이며, 도덕법칙은 그의 자유가 지닌 자율로 인해서 신성한 것이다.” - 『실천 이성 비판』


인간을 목적 자체로서 대하라!



칸트는 행위의 선·악을 결정하는 것은 행위의 결과가 아니라 오직 그 행위를 낳은 의지일 뿐이라고 강조한다. 


“이 세상에서, 아니 이 세상 밖에서까지라도 무제한적으로 선하다고 생각될 수 있는 것은 오로지 선의지(guter Wille)뿐이다.” - 『도덕 형이상학 정초』


‘선의지’는 말 그대로 선한 의지, 즉 선(善)을 지향하는 의지다. 그렇다면 무엇이 선인가? 칸트에게 선하다는 것은 곧 도덕법칙을 따르는 것이다. 그러므로 선의지란 도덕법칙을 따르려는 의지를 뜻한다. 칸트는 선의 개념이 도덕법칙에 앞서 있는 것이 아니라, 도덕법칙이 선 개념에 앞서 있는 것으로 설명한다. 그래서 이제 선의 의미는 도덕법칙에 의해서, 도덕법칙을 통해서만 규정된다. 


그렇다면 도덕법칙을 우리는 어떻게 알 수 있을까? 칸트는 사람이 이러한 도덕법칙을 “직접적으로 의식한다”고 말한다.


“도덕법칙은 순수 이성의 사실로서 주어져 있고, 우리는 그것을 선험적으로 인식하며 절대적으로 확신한다.” - 『실천 이성 비판』


여기서 ‘순수 이성의 사실’이란 경험에 앞서서, 경험과 상관없이 우리가 미리부터 가지고 있는 추론 능력으로 알아낼 수 있는 사실을 말한다. 수학적 계산 능력이 그러한 능력의 예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이러한 이성 능력은 시대와 장소 및 개개인의 특성을 초월한 보편적이고 필연적인 진리를 우리에게 알려준다. 아마도 이성적 존재라면 누구나 다 ‘2+3=5’라는 계산을 해낼 수 있을 것이며, 이것은 고대인이나 현대인, 유럽인이나 아시아인이 다 똑같을 것이다. 칸트는 도덕의 영역에서도 인간이 이와 같이 보편적인 사고를 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고 전제한다. 칸트는 이러한 도덕법칙의 예로 다음과 같은 두 가지 명령을 제시한다.


“너 자신의 인격이나 다른 모든 사람의 인격에서 인간성을 항상 동시에 목적으로서 대하고 결코 단순한 수단으로서 사용하지 않도록 행위하라.” - 『도덕 형이상학 정초』


“네 의지의 준칙이 항상 동시에 보편적인 입법의 원리로서 타당할 수 있도록 행위하라.” - 『실천 이성 비판』


자연[존재]의 세계를 넘어 도덕[당위]의 세계로


칸트에게 도덕법칙은 인간이 자신에게 부과하고, 인간이 인간이기 위해 그것에 스스로 복종해야만 하는 법칙이다. 인간이 악으로 나갈 수도 있는 자연적 경향성을 제압하고 스스로를 도덕법칙 아래에 세워야 하는 것은, 그렇게 함으로써만 인격적 존재자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여기서 주목해야 할 점은 도덕법칙을 따라야 하는 자와 그것을 부과하는 자가 바로 동일한 자기 자신이라는 사실이다. 도덕법칙은 이렇게 외적 강제에 의해서가 아니라 자기 스스로에 의해 부과되는 것이므로 타율(他律)이 아닌 자율(自律)의 성격을 띤다. 


그런데 바로 이 양자가 동일하면서도 서로 다른 나[자기]라는 점이다. 자연인으로 나는 현상[감성]계에 속해 있으면서 자연법칙의 지배를 받는 반면, 자유인인 나는 지성[예지]계에 속해 있으면서 자유 의지를 가지고 자신의 목표를 스스로 설정한다. 이와 같이 인간은 자연[존재]의 세계와 도덕[당위] 세계에 동시에 속해 있으면서 전자의 한계를 극복하고 후자를 향해 나아갈 수 있는 능력을 지닌 존재이다. 칸트의 묘비명에는 다음과 같은 글귀가 새겨져 있다.


“두 가지의 것이, 그것에 대해 자주 계속해서 사색하면 할수록, 언제나 새롭고 더욱 커가는 감탄과 경외심으로 나의 가슴을 채운다. 이 두 가지 것이란, 내 머리 위 별들로 휘덮인 하늘과 내 안에 심겨져 있는 도덕법이다.”


오늘의 한국을 살아가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유인이기를 포기하고 욕망의 자연인으로 남기를 바라는가 보다. 아니면 자유를 편하게 ‘제 마음대로 할 수 있음’이라 생각하는가 보다. 만약 그것이 보편적인 법률이 된다면 인간 사회는 짐승세계보다 못한 약육강식의 전쟁터가 될 것이다. 참된 자유인이기를 바란다면 스스로에게 도덕법칙을 부과하는 도덕적 인간이 되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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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이는 글

<도덕의 인문학. 사유가 아니라 행동이 문제다>, 『경향잡지』 2014년 2월호에 실린 칼럼을 수정 보완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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