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사 메일전송
인간은 관계의 그물망 ‘사이’에 있는 존재다
  • 이기상
  • 등록 2020-03-30 10:31:27
  • 수정 2020-03-30 10:42:37

기사수정


우리시대 새로운 인간상, ‘나’는 어떤 ‘존재’인가


▲ Alberto Giacometti < The Walking Man Ⅰ >


이제 우리가 처한 시대적 상황에 대해 우리 나름대로 어떻게 대응할 수 있는지 고민해 보도록 하자. 그러자면 우리는 먼저 인간에 대한 그림까지도 새롭게 그려야 한다. 즉 서구에서는 인간을 동물이되 이성적인 동물이라는, 그리고 하느님의 모상이라는 식으로 그려냈고 그것이 변할 수 없는 진리라고 하였다. 그러나 이제 새로운 인간상이 필요하니 그것을 그려낼 수 있어야 한다. 


인간에 대한 새로운 정의를 우리는 ‘사이 존재’, ‘사이에 있음’이라는 우리말로 규정할 수 있을 것이다. 바로 여기에서 우리는 우리말의 말놀이에 유의하여 인간, 시간, 공간, 천지간(天地間)이라는 말에 주목해야 한다. 하이데거에게서 인간은 ‘세계-안에-있음’이라 명명되는데, 이는 인간은 이미 만들어진 세계 안에 던져져 있으면서 동시에 또한 거기에서부터 세계를 만들어나가는 존재자라는 의미이다. 하이데거의 인간 해석에서의 독특한 점을 우리는 다음과 같이 요약할 수 있다. 


하이데거 이전에는 세계를 확실한 것으로 보지 않고 오로지 ‘나’만이 확실한 토대가 된다고 생각하여, 우선 확실하게 있는 이 ‘나’가 세계를 만나 세계를 만들어나가는 식이었다. 이러한 근대적 사유에서 가장 큰 문제점은 “나 이외에 세계가 있다는 것을 어떻게 증명하는가?”이다. 즉 나는 확실한데 세계는 확실하지 않다는 것, 곧 나와 세계가 이분법적으로 분리되어 있다는 것이 근대의 가장 골치 아픈 문제였다. 그러나 하이데거는 오히려 반대로, 확실한 것은 ‘내’가 아니라고 말한다. 이 ‘나’는 가장 가까운 듯하면서 실은 가장 먼 것이다. 반대로 세계는 가장 먼 듯하면서 사실은 가장 가까운 것이다. 하이데거는 인간을 <세계-안에-있음>이라 규정하면서 인간에게 세계는 전제될 수밖에 없음을 분명히 한다. 인간은 자신을 세계 안에 던져져 있는 것으로 발견할 수밖에 없다. 이렇게 인간은 세계 안에 던져져 있으면서 그 세계 안에서 ‘남들’이 사는 대로 살아가기 때문에 오히려 이제 과제는 ‘나’는 누구인지, 나 자신을 찾아내는 것이다.

  

여기에서는 인간을 한번 세계-안에-있음이라기보다는 <사이에-있음>이라고 규정해보자. 이렇게 시도해보면 우리가 처해 있는 환경문제와 관련지어서도 새로운 돌파구를 찾을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환경이란 인간이 사는 삶의 영역이다. 이것이 나중에 자연환경이라는 개념으로 바뀌게 된다. 환경이라는 개념 자체는 이미 인간중심적인 것이다. 서구의 인간중심적 사고가 환경이라는 개념으로 나오게 된 것이며, 더 나아가 환경학 혹은 환경철학이라는 개념이 생기게 된 것인데, 이것은 다분히 인간이 중심이 되어 인간이 잘살아보기 위해 땅을 포함한 모든 인간 삶의 주변을 돌아보게 하는 것이다. 생태학(Ökologie, Ecology)과 경제학(Ökonomie, Economy)은 같은 어원을 갖는다. 즉 오이코스(οικος)라는 그리스어로부터 나온 것이다. 거기에는 ‘집, 주거, 거주’라는 뜻이 있는데, Ökonomie는 ‘집안 살림살이’를, Ökologie는 ‘지구 살림살이’를 의미하는 것이다. 우리말에서는 Ökologie와 Ökonomie가 나누어져 있지 않고 <살림살이>라는 말로 합쳐져 있다. 즉 살림을 생활화하는 살이라는 우리말 <살림살이>는 살림을 두 번이나 강조하는 말이다. 이렇게 <살림살이의 철학>은 인간중심적 사고를 대체할 수 있는 방향을 지시할 수 있다. 환경학이 가지고 있는 인간중심적 사고는 인간이 중심이 되어 모든 것을 지배하고 정복하고 관장하는 관점인데, 이를 극복할 수 있는 것은 살림살이의 철학이다. 인간은 <사이에 있는 존재>이다. 인간은 어떤 <사이>에 존재하고 있는가?  


빔-사이에-있음 : ‘나눔’


인간은 우선 <빔-사이>에 존재한다. 애초부터 인간의 빔-사이는 삶의 공간으로서, 인간이 비워[베어]내가며 닦아 가는 삶의 텃밭이다. 빔-사이에 있는 인간이 빔-사이에서 빔-사이를 이으며 관계 맺고 있는 가장 전형적인 행위는 <노동>이다. 이 노동활동은 도구, 기술, 예술, 제작, 생산, 거주라는 방식으로 전개된다. 빔-사이를 존재하는 인간의 중심축은 <몸나>라고 할 수 있다. 몸으로서의 나가 모든 것을 활용해서 땅이라는 공간을 일구어 나간다. 이 몸나가 경험해 나가는 차원은 감각적, 미학적 차원이며 그 주된 방식은 제작이라는 형태를 띤다. 몸나가 살기 위해 쉬는 숨을 <목숨>이라 이름한다. 


현대에 와서는 이 빔-사이의 간격을 없애려고 하지만 이 사이는 없앨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다양성의 시대, 차이의 시대에서 인간은 서로 가까워지기는 하여도 차이를 차이로서 인정하여 받아들이고 그런 태도 속에서 차이를 차이로서 뛰어넘도록 노력해야 할 것이다. 서로의 차이를 인정하지 않는다면, 인간은 인간으로서 존재할 수 없다. 다시 말해 인간이 네 가지 차원에서의 사이에-있음을 유지하고 견지하지 않는다면, 인간은 인간다움을 잃어버릴 것이다. 공간이라는 빔-사이를 우리는 다양한 기술로써 없애면서 온갖 형태의 거리를 좁혀나간 결과 이제는 비행기, 인터넷, 위성통신 등과 같은 첨단기술을 이용해서 전지구가 하루생활권에 들어온 시대에 살고 있다. 그러나 과연 그런 식으로 공간적인 간격을 없앰으로써 인간이 의도한 가까움을 얻었는가 하는 문제는 또 다른 문제이다. 빔-사이를 존재해 나가기 위해 필요한 덕목은 <나눔>이다. 


사람-사이에-있음 : ‘섬김’


인간은 <사람-사이>에 존재한다. 사람-사이를 잇는 가장 전형적인 행위는 <말>이며, 사람 사이의 전형적인 관계맺음의 방식은 <실천>이다. 말함과 실천에서 관습, 윤리, 도덕, 사회, 국가 등이 생겨난다고 할 수 있다. 사람-사이를 존재함인 실천 행위는 윤리적인 행위, 만남, 인격적인 체험 같은 것인데, 그것을 통해 사람-사이의 이음이 가능해진다. 그것이 인간의 사람-사이에 있음이 사이를 두면서 사이를 나누며, 사이를 이으면서 사이를 존재하는 관계맺음의 방식이다. 사람-사이에 있음을 이어나가는 중심축을 우리는 <맘나>라고 이름할 수 있다. 맘나는 마음씀이다. 사람-사이에 생명의 숨을 불어 넣어주는 숨은 말의 숨으로서 <말숨>이다. 사람-사이의 간격을 없애려는 것이 평등이며, 여기에서는 각자가 자신으로 서 있음을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섬김>이 중요한 덕목으로 부각된다. 사람-사이에 있음이 무너지게 되면 도덕과 윤리가 설 땅을 잃게 된다.  


때-사이에-있음 : ‘비움’


▲ James Turrell < Tycho White >


사람은 <때-사이>를 존재한다. 기억이 과거의 것에 주로 머물고 있기 때문에 우리는 때-사이의 가장 전형적인 행위를 <생각>이라고 이름하며 거기에서 반성적인 측면을 부각시킨다. 때-사이는 역사, 학문, 지평, 엄격한 의미의 역사의식이 생겨나는 곳이다. 인간은 삶의 순간에서 과거, 현재, 미래를 살아나가는 순간적인 존재이기 때문에 전체를 내다 볼 수 있다. 하루살이에게 내일이란 없다. 동물은 생존적인 시간만을 몸으로 살다가 죽을 뿐이다. 그러나 인간은 앞을 내다보고 뒤를 되돌아 볼 수 있는 유일한 존재자이다. 역사의 발견은 바로 때-사이의 발견이라 할 수 있다. 인간은 시간적인 존재로서 자신의 근원과 유래를 돌아봄으로써 과거의 전통을 세우고 현재가 과거에 의해 새롭게 의미부여 받도록 한다. 더 나아가 아직 도래하지 않은 미래에까지 눈을 돌려 때-사이로서의 존재가능성을 확대시켜 그 가능성에 비추어 현재를 변화시켜 새롭게 발전시켜 나간다. 


이렇듯 자신의 존재를 유래와 미래로 뻗치며 때-사이를 잇고 있는 인간은 그 뻗쳐있음으로 인해 환한 밝음의 장소 안으로 들어서게 된다. 땅의 공간뿐 아니라 [역사적] 시간의 공간이 얼마나 넓으며 밝은가에 따라서 인류의 문명이 얼마나 발달했는가를 가늠할 수 있다. 인간은 때-사이를 잇기 위해 글을 발견한다. 인간은 글을 통해 자신의 뜻이 후대에까지 전달되도록 노력한다. 그래서 때-사이를 잇는 사람의 중심축은 <뜻나>이다. 여기 ‘뜻나’에서는 <주체>의 의미가 부각된다. 주체로서의 나는 몸나와 맘나가 사라진 뒤에도 계속 빔-사이와 때-사이를 이을 나를 걱정해야 한다. 공자의 뜻나는 『논어』에 그 뜻이 담겨 있기에 오늘날까지 우리에게 전해져 이어지고 있다. 이렇듯 때-사이를 이어주는 생명의 숨은 <글숨>이다. 때-사이를 존재해야 하는 모든 존재자가 지켜야 할 가장 중요한 원칙이자 덕목은 <비움>이다.


하늘-땅-사이에-있음 : ‘더불어 삶’


사람은 천지간(天地間), <하늘-땅-사이>를 존재한다. 여기에서 하늘은 천체적·우주적 하늘이기보다는 신적인 하늘이라 할 수 있다. 인간은 우주적인 하늘-땅-사이에 있음을 책임져야 할 뿐 아니라 하느님과 인간의 사이도 책임을 져야 한다. 서양에서도 처음에는 인간의 이러한 신적인 차원이 고려되었는데, 역사의 전개와 더불어 서양인들의 생각이 근대화·세속화 되어오면서 이 차원이 배제되었다. 즉 차츰차츰 인간에게서 기도, 감사, 초월, 성스러움, 신, 종교 등으로 이야기될 수 있는 차원이 중요하지 않은 것으로 밀려났다. 


어쨌건 여기에서 말할 수 있는 것이 영성의 차원이다. 얼로서의 나인 <얼나>가 나의 참 모습이고 이 얼나가 모든 것을 아우르면서 우주(하늘)와 하나가 될 수 있다. 모든 것을 아우름은, 하느님과 하느님이 만들어놓은 이 우주가 하나가 될 때 이루어진다. 바로 이 하나로 아우러진 일치된 우주생명의 숨을 쉬는 것이 <얼숨>이다. 또는 우주의 숨이라 해서 <우숨>이라고도 한다. 우숨이 우주와 조화가 되어, 우주와 하나가 되어 쉬는 숨이기에 그 우숨을 또한 참된 숨이라는 의미로 <참숨>이라 이름하기도 한다. 하늘과 땅-사이에 존재하는 모든 것은 우주생명에 동참하고 있기에 여기에서 가장 중요한 원칙과 덕목은 서로 함께 더불어 살아나가는 삶으로서의 <살림>이다. 


인간은 이렇듯 사이에 있는 ‘사이존재’다. 공간존재, 시간존재, 인간존재, 천지간존재다. 인간은 사이를 살고, 사이를 나누고, 사이를 살리고, 사이를 이어야 하는 사이존재다. 바로 이러한 사이로서 사이역할을 하면서 사는 사이존재인 것이다. 여기에 서양사람들이 보지 못한 새로운 면, 새로운 차원이 있다. 서양에서도 요즘 존재를 보는 눈, 자연을 보는 눈을 그전과 같은 원자적 시각에서 관계적 시각으로 바꾸고 있다. 서양적인 사고방식은 나눌래야 나눌 수 없는 가장 근본적인 것을 찾아나가는 환원적인 방법에 익숙해 있다. 그러한 방법으로 그들이 찾아낸 것은 원자고 개체고 개인이다. 이렇게 각기 떨어진 낱낱의 원자 또는 개체에서부터 전체의 그림을 그려나가는 것이 서양의 사유방식이고 이것을 실체론적 사고방식이라 한다. 


이와는 다르게 동아시아는 예전부터 관계론적 사고방식에 익숙해 있다. 우리는 애초부터 따로 떨어진 개체를 보지 않고 그것이 어떤 관계의 그물망 속에서 자신의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지를 보려고 노력했다. 개인으로서의 내가 있는 것이 아니고 오직 관계 속에서 내가 아들이고 아버지이고 남편이고 교원으로서 있는 것이다. 서양사람들도 최근에 와서는 실체론적 사고방식으로는 세상을 제대로 설명할 수 없으니까 관계론적 사고방식으로 바꾸려 하고 있다. 그래서 동아시아에 관심을 가지는 것이다. 그물망적 사고방식이라고 하는 관계론적 사고방식이 그들의 주목을 끌고 있다. 


“우리는 모두 알고 있다. 한 가족이 혈연으로 이어지듯 삼라만상이 모두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 지구에서 벌어지는 모든 일은 지구의 딸과 아들들에게도 그대로 닥친다. 인간들이 생명의 그물을 짜는 것이 아니다. 인간이란 단지 그 그물 속의 한 올일 뿐. 그 그물에 가하는 모든 일은 스스로에게 향한 것이다.” (인디안 추장 테드 페리의 말 중에서) 



▶ 다음 편에서는 ‘몸-맘-뜻-얼’에 대한 이야기가 이어집니다. 


▶ 지난 편 보기



덧붙이는 글

이기상 교수님의 ‘허무주의 시대와 영성 - 존재의 불안 속에 만나는 신(神)의 숨결’은 < 에큐메니안 >에도 연재됩니다.

TAG
키워드관련기사
0
  • 목록 바로가기
  • 인쇄


가스펠툰더보기
이전 기사 보기 다음 기사 보기
모바일 버전 바로가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