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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의 목적은 제물이 되는 것이다
  • 이기상
  • 등록 2020-03-09 09:19:26
  • 수정 2020-03-09 09:22: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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몸살이 차원의 삶을 끝내고 뜻(얼)살이를 시작해 말숨살이 하는 일


이제 웋일름[천명(天命)]에 따라 자신의 바탈을 태워 말숨을 쉬면서 성령의 얼김을 우주에 펴차는 얼생명의 양태를 살펴보자. 


다석에 의하면 우리말 ‘말’은 ‘마루’에서 나왔다. 하느님의 마루(뜻)라는 의미가 우리말 ‘말’의 밑바탕에 깔려 있다. 말은 하느님의 마루다. 하느님의 마루가 우리의 얼 속으로 들고날 때 우리 안에서는 생각의 불꽃이 튀게 된다. ‘말숨’은 그렇게 튀는 생각에 답하면서 하느님의 마루를 우리의 말로 세우는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하느님의 마루를 세우기 위해 인간의 말을 쓰는 것이 ‘말씀’이다. 이렇듯 말숨을 쉰다는 것은 영원을 그리워하며 하느님의 뜻을 생각하는 것이다. 우리 속에 타고 있는 참의 불꽃을 태우는 것이다. 



다석은 이 경우 속알 또는 바탈이라는 낱말을 즐겨 쓴다. 그리고 바탈이 ‘받할’에서 나온 것으로 풀이한다. ‘받할’은 ‘받’과 ‘할’이 모여 만들어진 글자로서, ‘받’은 우리가 하늘로부터 받은 것을 의미하고, ‘할’은 그 받은 것을 갖고 해야 할 바를 뜻한다. 따라서 ‘바탈’은 인간이 하늘로부터 부여받은 본성으로서 살아가면서 실행해내야 할 바를 가리킨다. 그것은 동양사상에서 흔히 쓰는 성(性)에 대한 우리말인 셈이다. 우리가 하늘로부터 받은 우리의 속알, 바로 그 안에 새겨져 있는 하느님의 뜻이, 즉 성(性)과 명(命)이 이런 식으로 연관되어 있다. 


‘말씀을 산다’ 또는 ‘말숨을 쉰다’는 것은 목숨을 쉬는 것과는 다르다. 우리는 코로 숨을 들이쉬고 내쉬면서 목숨을 연명하며 육체적인 몸살이를 살아가고 있다. 그런데 말숨을 쉰다는 것은 하느님의 뜻을 계속 이어나가는 문화를 창조한다는 뜻이다. 목숨의 차원에서 인간은 자연적인 삶을 이어나가지만, 말숨의 차원에서는 문화창조를 이어나간다. 그러기에 우리의 목숨은 말숨으로 바뀌어야 된다. ‘공자’가 ‘논어’가 되어야 한다는 말이다. 목숨으로서의 공자는 죽고 말숨으로서의 논어가 살아남아야 한다. 


말숨살이는 우리 안에 새겨진 하늘의 뜻을 찾아 세워서 그 뜻과 일치해 살기 위해 몸살이 차원의 삶을 끝내고 뜻살이(얼살이)의 삶을 시작함을 말한다. 이것이 새로운 삶의 기본이다. 깨끗이 끝내고 새로 시작하는 것이다. 나를 끝까지 깨부수어 비우고 새로운 나를 시작하는 것이다. 몸으로서의 나를 끝낼 수 있을 때 비로소 얼로서, 뜻으로서 나를 시작하여 채울 수 있다. 공자가 논어가 될 때 목숨이 말숨을 쉬고 목숨이 말씀 속에 들어가게 된다. 공자는 논어를 씀으로 인해 하느님의 말(마루)을 씀 속에서 사라져간 것이다. 우리는 누에에서 훌륭한 예를 발견할 수 있다. 누에는 죽어야 고치가 된다. 누에는 몸살이로서의 목숨을 죽여야 고치라는 집을 지을 수 있다. 다석은 “우리는 말씀의 집을 지으러 이 세상에 왔다”고 말한다. 다석은 이렇게 말한다. 


“말숨(말씀)은 숨의 마지막이요, 죽음 뒤의 삶이라고 할 수 있다. 말숨 쉼은 영원을 사는 것이다. 말숨을 생각하는 것은 영원을 생각하는 것이요, 말숨이 곧 하느님이기도 하다. 말숨(말씀) 쉬는 것이 하느님을 믿는 것이요, 하느님을 사는 것이다. 말숨은 우리 속에 타는 참의 불이다. 속에서 장작처럼 쓰여지는 것이 말숨이다. 참이란 맘속에 쓰여지는 것이다. 중용이란 우리 맘속에서 쓰여진다는 말이다. 우리 맘속에 영원한 생명의 불꽃이 타고 있다. 하느님의 말씀이 타고 있다. 그것이 생각이다. 사람은 하느님의 말숨이 불타는 성화로(聖火爐)이다. 이것이 현존재다. 하느님의 말숨을 숨쉬지 못하면 사람이라고 하기 어렵다.” 


말숨이 곧 하느님이기에 말숨을 쉬면서 우리는 몸이 아닌 얼로 숨을 쉬는 것이다. ‘얼’로 숨쉬는 한에서 말숨은 다른 말로 ‘얼숨’이기도 하다. 그것은 하늘에 있는 한얼[우주생명]과 하나가 되어 쉬는 숨이다. 그러기에 얼숨은 또한 ‘우숨’(우주적인 숨)이다. 가장 큰 우숨은 절대생명과 하나 되는 가운데 모든 것을 초월해서 짓는 웃음[우숨]이다. 얼숨은 바로 존재의 소리를 듣고 그에 따라 사는 양상이며, 그 임무는 우주 안의 보이지 않는 한얼을 우주만물 속에 펴차는[우주만물에 펼쳐 채우는] 데에 있다. 다석은 유비적으로 ‘그리스도는 하느님의 펴참이다’라는 말을 한다. 


다석에 따르면, 우리는 가슴에 생명의 숨길을 가지고 있고 우리의 배(속)에는 얼뜻을 가지고 있다. 태양과 씨알이 하나가 되듯 우리의 얼나가 한얼을 만나서 하나가 되어야 한다. 씨알이 태양을 만나 바탈이 터서 자라 나무가 될 때 태양과 하나가 되듯, 우리의 속알(바탈)이 한얼을 만났을 때 비로소 우리도 나무가 될 수 있다. 다석은 이처럼 생명의 잎과 바탈의 꽃과 얼뜻의 열매라는 차원을 고루 헤아려서 인간의 참 생명의 길을 유추해낸다. 우리는 생명의 숨결을 받아 잎사귀를 키우고 우리의 바탈을 꽃피워 얼뜻의 열매를 맺는다. 

 

얼숨으로 살아야 하는 삶은 ‘하루살이’ 삶이다


다석은 ‘사이에 있는’ 인간을 그 사이에 따라 네 가지 차원으로 구별하여 다룰 수 있다고 본다. 빔-사이를 차지하고 있는 몸으로서의 ‘몸나’는 나의 전부가 아니다. 사람-사이를 오고가는 마음으로서의 ‘맘나’도 나의 전부가 아니다. 시간 속에 살며 때-사이를 잇고 있는 역사적 주체로서의 ‘제나[뜻나]’도 나의 전부가 아니다. 무엇보다도 하늘과 땅 사이를 잇고 있는 ‘얼나’로서의 나가 참나다. 얼로서의 나가 우주의 얼인 ‘한얼’과 서로 통하기 때문이다. 다석은 노장사상과 무속종교가 너무 몸나에만 관심을 보였다면, 불교는 너무 맘나에만 치중하였고, 유교는 너무 맘나의 공동체인 ‘가(家)’에만 신경을 쏟았고, 기독교는 종말론적인 역사관 속에서 제나의 구원에만 유의하였다고 지적한다. 


다석은 이 모든 ‘나’의 차원들을 나름대로 다 살리면서 궁극적인 참나인 ‘얼나’로서의 삶에 정진하여야 한다고 가르친다. 그래서 몸을 건강하게 보존하며 ‘몸성히’, 마음을 놓아보내며 ‘맘놓이’, 자신의 속알[바탈]속에 새겨진 하느님의 뜻을 찾아 그 뜻을 태우며 [= 바탈태우, 뜻태우] 살아야 한다고 말한다. 온 우주, 모든 빔, 모든 사이 속에 없이 계시며 모든 생성소멸과 변화를 주재하는 하느님의 성령인 한얼과 소통하여 하늘과 땅 사이에 있는 모든 것을 살리고 섬기며, 자신을 나누며 비우는 우주적 ‘살림살이’를 사는 우주인이 될 것을 다석은 우리에게 조용하게 이른다. 


하늘의 뜻을 이루며 살아야 하는 ‘얼나’는 ‘바탈태우’의 삶을 살아야 한다. 내 안에 주어져 있는 뜻(바탈), 속알을 태워야 하는 것이다. 나 혼자만 잘 살자고 할 것이 아니라 가족, 사회, 국가라는 공동체를 위해서, 그리고 더 나아가서는 인류문화와 세계평화, 지구와 우주를 위해서 내가 받은 바탈과 속알, 내 안에 새겨져 있는 깔, 꼴, 결을 찾아 태워서 모든 공동체가 한얼을 품을 수 있도록 살라는 것이다. 무한 경쟁 속에 무한 소유를 부추기며 무한 소비를 조장하면서 욕망을 고무풍선처럼 한없이 키우고 있는 현대인에게 하나뿐인 삶의 터전인 지구가 쓰레기통과 도살장으로 변해가고 있다. 우리 인간이 다석의 가르침처럼 얼나로서 살림, 섬김, 비움, 나눔의 우주적 살림살이에 동참한다면 이 지구는 아직 희망이 있다.


얼숨으로 살아야 하는 삶은 ‘하루살이 삶’이다. 그러한 삶을 대표적으로 산 사람이 바로 다석이다. 다석은 자신의 나이를 몇 살이라 표기하지 않고 몇 날을 살았는가 날수를 세어 말하였다. ‘하루살이’는 말 그대로 하루를 사는 살이를 말한다. 다석은 칠성판에서 자고, 먹고, 읽고, 사색하고 사람들을 맞으며 생활하였다. 새벽에 칠성판에서 일어나 하느님께 하루를 새로 주심에 대해 감사드리고 냉수마찰을 하였다. 다시 그 칠성판 위에서 자신만의 독특한 가부좌를 하고 동서양의 경전들을 읽으며 사색하였다. 그리고 저녁 한 끼니만을 들었다. 다석(多夕)이라는 호도 그저 많은 저녁이라는 의미다. “나의 저녁은 그저 많을 뿐이다. 그렇지만 하느님의 저녁은 영원하다.” 밤이 되면 다시 칠성판에 누우면서 “이제 나는 우주와 하나가 된다”며 죽음을 맞이하는 마음으로 잠자리에 들었다.


다석은 예순다섯이 되던 해에 “나는 내년에 죽을 것”이라고 예언한다. 그 소리를 들은 제자들은 선생님의 말씀도 제대로 적어놓은 것이 없는데 돌아가신다니 이 무슨 청천벼락 같은 말씀이냐며 속기사를 동원하여 다석의 강의를 기록하도록 시킨다. 이렇게 하여 다석어록이 나왔다. 그렇게 해서 나온 책이 『죽음에 생명을, 절망에 희망을』이라는 책이다. 이것이 다석의 유일한 강의록이다. 그런데 1년이 지났는데도 다석이 살아있으므로 사람들이 놀라서 물었다. 다석은 “나는 이미 몸으로는 죽었다. 그리하여 하루하루를 산다”고 하였다. 사람들이 그의 말뜻을 제대로 알아듣지 못했던 것이다. 일년 뒤의 삶은 목숨이 아닌 얼숨을 의미한 것이었다. 다석은 하루를 ‘할우’라 표기하기도 하였다. ‘할’은 무엇을 할 것임을 말하고 ‘우’는 ‘위’를 가리킨다. 우리의 하루는 끊임없이 한얼에게로 올라가는 ‘할우’가 되어야 하는 그런 하루살이를 위한 ‘하루’인 것이다. 다른 말로 그것은 얼생명을 사는 ‘얼살이’다. 


식사(食事)는 장사(葬事)며 제사(祭祀)



다석은 얼나로서 얼살이가 어떠해야 하는지를 자신의 삶으로 보여주었다. 탐욕과 성냄 그리고 음욕이라는 세 가지 못된 욕망의 뿌리를 근원부터 뽑아버리고 하루 한 끼만 먹으며 25년간의 결혼(結婚)을 해혼(解婚)으로 풀고, 40여 년간 금욕생활을 한다. 여기서 우리는 식사에 대한 그의 생각이 독특하고 오늘날의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많기에 그것만을 좀 더 살펴보기로 한다.


다석은 “식사(食事)는 장사(葬事)다”라는 충격적인 말을 하였다. 우리가 먹는 음식은 ― 그것이 동물이냐 식물이냐의 차이는 있지만 ― 모두 생명체다. 우리 자신이 살기 위해서 먹는 식사라는 것이 다른 생명체들의 죽음이라는 희생을 통해서 이루어지고 있는 것이다. 그러기에 따지고 보면 매 끼니가 장례식인 것이다. 내가 살기 위해서 나는 끊임없이 무언가를 죽이고 있다. 그러기에 다석은 “식사는 장사다”라고 말한 것이다. 그런데 모든 생명체가 이 지구 위에서 평화롭게 더불어 살아가기 위해서는 이와 같은 장례식을 될 수록 적게 지내야 한다. 그것을 실천하기 위해서 다석은 하루 한 끼니만[일일일식(一日一食)] 들었다. 그러면서도 다석(1890~1981)은 91세까지 장수하였다. 


하루 한 끼니만 먹을 때, 나머지 두 끼니때는 내 몸과 내 살을 먹는 셈이 된다. 그것은 내 몸을 제물로 바치는 산 제사나 다를 바 없다. 그래서 다석은 이렇게 말한다. “하느님께 예배드리는 극치는 하루에 한 끼씩 먹는 일이다. 그것은 정신이 육체를 먹는 일이며 내 몸으로 산 제사를 지내는 일이기 때문이다.” 더 나아가 다석은 식사가 곧 제사라고 말한다. “사람은 모든 것을 먹으면 그것이 피가 되고 그 피는 뜻이 있어서 위로 올라가니, 향불 모양으로 사상을 피워 올리는 것을 먹고 사는 것이 사실이다.”  


“밥 먹고 자지 말고, 밥 먹고 깨어나도록 밥을 먹어야 한다. 밥은 제물(祭物)이다. 바울은 너희 몸은 하느님의 성전이라고 한다. 우리 몸이 하느님의 성전일 줄 아는 사람만이 능히 밥을 먹을 수 있다. 밥은 하느님께 드리는 제사이기 때문이다. 내가 먹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 드리는 것이다. 내 속에 계시는 하느님께 드리는 것이다. 그러니까 밥을 먹는다는 것은 예배요, 미사다. 내가 먹는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제물을 도적질하는 것이다.”


다석은 하느님의 뜻을 이루기 위하여 밥을 먹어야 한다고 말한다. 예수는 십자가에 자기를 바쳤는데, 이때 ‘바쳤다’는 말은 밥이 되었다는 말이다. 밥이 되었다는 말은 밥을 지을 수 있는 쌀이 되었다는 의미다. 쌀이 되었다는 말은 다 익었다는 것이다. 성숙하여 무르익은 열매가 된 것이다. 인생은 무엇인가? 무르익는 것이다. 제물이 되는 것이다. 밥이 되는 것이다. 밥이 될 수 있는 사람만이 밥을 먹을 자격이 있다. 완전한 사람, 성숙한 사람이 아니고는 밥을 먹을 자격이 없다. 

 

다석에 의하면 인생의 목적은 제물이 되는 것이다. 인생이 밥을 먹는 것은 자격이 있어서도 아니고 내 힘으로 먹는 것도 아니다. 하느님의 은혜로, 수많은 사람의 덕으로, 대자연의 공로로 주어져서 먹는 것이다. 밥이 되기까지에는 태양빛과 바다의 물과 그 밖의 온갖 신비가 총동원되어야 한다. 그러니까 밥은 우리가 거저 받는 하느님의 선물인 줄로 알아야 한다. 인생뿐만 아니라 일체가 하느님에게 바쳐지기 위한 제물이다. 일체가 밥이다. 다석은 인생이란 밥을 통해 우주와 세상이 얻는 영양은 무엇일까 묻는다. 그것은 곧 말씀이라고 답한다. 인생이란 밥에는 말씀이 있다. 성령의 말씀이 있다. 온 인류를 살리는 우주의 힘이 되는 성령의 말씀이 있다. 


다석에 의하면 인생은 짐승처럼 자기의 육체를 바치는 밥이 아니다. 인생은 밥을 먹고 육체를 기르고, 이 육체 속에 다시 성령의 말씀이 영글어 정신적인 밥인 말씀을 내놓을 수 있는 그런 존재다. 인생이 제물이 되는 것은 육체적 제물이 아니다. 영적인 제물이다. 인생이 제물이 되는 것은 말씀이지 목숨이 아니다. 목숨은 껍데기요, 말씀이 속알이다.


▶ 다음 편에서는 ‘없이 살아야하는 인간’에 대한 이야기가 이어집니다. 


▶ 지난 편 보기



⑴ 류영모, 『다석어록』,  205.


⑵ “언제 숨이 질지 모르는 것이 인생이다. 숨지기 전에 숨을 길러놓아 영 지지 않는 목숨을 길러내는 것이 오늘의 할 일이다. 그 길은 목숨을 말숨으로 바꿔놓는 일이다. 목숨을 말숨으로 바꾸고 말숨을 웃숨으로 바꾼다. 웃숨(天命)을 웃는 말숨만이 영원한 목숨에 들 수가 있다.” 류영모, 『제소리. 다석 류영모 강의록』, 김흥호 편, 76. 


⑶ 참조 김흥호, 『다석일지 공부. 류영모 명상록 풀이 1』, 510 이하.


⑷ 김흥호는 이렇게 풀이한다. “나는 이어 이어 예 한 점이 내가 아닐까. 이 한 점에 힘이 붙고 능력이 붙고 수가 생겨 몸성히 마음놓이 이것이 내가 아닐까. 마음이 놓일 때 마음은 비어 진리를 담을 그릇이 준비되고 몸성히 불이 될 때 몸은 살아 임을 그리워하게 된다. 목숨 쉼은 불사름이요, 말씀 쉬면 물 씻음이니 깨끗하게 비고 아름답게 태워서 새로운 바탈을 내놓음이 숨쉬는 한 목숨이요, 영원히 이어나갈 이 목숨이기에 맘 비고 몸성히 숨쉬는 한 목숨이다. 나의 바탈을 비고 비어 참을 그리는 것인데 몬으로 지어 먼지가 되면 흙덩이처럼 가득 차 새로운 바탈을 내지 못하고 힘도 없고 수도 없어 숨도 못 쉬는 흙덩이가 되고 만다.” 류영모, 『제소리. 다석 류영모 강의록』, 57.


⑸ 류영모, 『씨알의 메아리. 다석어록. 죽음에 생명을 절망에 희망을』, 박영호 편, 홍익재, 1993. 이 강의록은 다석학회에 의해서 새롭게 수정 보완되어 출간되었다. 참조 류영모, 『다석강의』, 다석학회 엮음, 현암사, 2006.


⑹ 다석은 이렇게 말한다. “우리 입이란 열린 무덤이다. 식물, 동물의 시체가 들어가는 문이다. 식사(食事)는 장사(葬事)다.” 류영모, 『다석어록』, 355.


⑺ 류영모, 『다석어록』, 52.


⑻ 류영모, 같은 책, 91.


⑼ 류영모, 같은 책, 186.


⑽ 참조 류영모, 같은 책, 187.


⑾ 참조 류영모, 같은 책, 188.



덧붙이는 글

이기상 교수님의 ‘허무주의 시대와 영성 - 존재의 불안 속에 만나는 신(神)의 숨결’은 < 에큐메니안 >에도 연재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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