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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4·3, 아우슈비츠 이후의 아우슈비츠
  • 문미정
  • 등록 2018-02-24 14:26:11
  • 수정 2018-02-26 13:2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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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8년 4월 3일, 두 진영으로 갈라진 제주에서 참극이 일어났다. 이를 두고 어떤 이는 ‘항쟁’이라 부르고 다른 이는 ‘폭동’, 또 다른 누군가는 ‘사건’이라고 부른다. 아직 어떠한 역사적 이름이 붙여지지 못한 ‘제주4·3’.  


제주4·3 70주년을 맞는 올해, 4·3이 흘러간 역사 속에서 묻혀 있는 사건이 아님을 기억하고 지금 우리 삶 속에서 화해와 상생의 길을 찾고자 하는 취지로 학술 심포지엄이 22일 서울 명동대성당 꼬스트홀에 마련됐다. 


4·3, 한국 현대사의 중요한 매듭이자 아픈 매듭


▲ 강우일 주교는 제주4·3을 “순교 행렬의 연장”이라고 표현했다. ⓒ 문미정

 

이날 기조강연을 맡은 강우일 주교(천주교제주교구장)는 제주4·3을 “우리 민족 내부의 부끄러운 참극이었고 국가가 저지른 반인륜적인 범죄”라고 강조했다. 


한국 현대사의 한 모퉁이에서 일어난 일시적인 비극적 사건으로 보면서, 시시비비를 논하고 사회적 책임을 규명하는 데에 그치는 것으로는 제대로 소화할 수 없다고도 했다. 4·3 안에서 우리 민족 삶에 숨겨진 내면적 가치와의 연결고리를 발견하는 단계로 진입해야 한다는 것이다. 


강 주교는 해방정국의 이념적 갈등과 혼란 속에서 이념과 무관한 시민들이 휘말려 희생된 우발적 사고로 인식하며 살아왔지만, 결코 우발적인 사고가 아니라고 말했다. 민족의 해방, 인간의 존엄과 자유와 권리를 억압하는 불의로부터 인간 해방을 추구하는 역사적 동력을 저지하려는 부정적인 반작용으로 많은 국민의 생명이 희생된 것이라고 덧붙였다. 


또한, 4·3은 “인간의 존엄한 인격과 자유와 평등을 위해 자신을 제물로 바친 수많은 희생자들의 순교적 행렬의 연장”이라고 표현했다. 


▲ 이날 심포지엄은 천주교주교회의 정의평화위원회와 민족화해위원회, 제주교구 4·3 70주년 특별위원회가 공동 주최했다. ⓒ문미정


| 4·3, 아우슈비츠 이후의 아우슈비츠 


아도르노에 따르면 ‘아우슈비츠 이후에도 아우슈비츠는 계속 존재해왔다’. 제주 4·3도 아우슈비츠 이후의 아우슈비츠 가운데 하나였다. 

첫 번째 발제자로 나선 박명림 연세대 교수(김대중도서관장)는 ‘제주4·3모델’을 세계보편모델로 제시했다. 제주4·3의 비극적 유산을 극복해온 제주민들은 혁명적인 자기 변혁을 통한 평화, 인권, 화해, 상생의 모습 자체였다는 것이다. 


제주4·3 극복과정에서 나타난 화해협력과 평화공존의 정신, 민관 협력과 협치 정신, 진상규명 이후에도 지속되는 도내 단합과 연대 결속의 정도, 지속성을 제주4·3모델의 핵심으로 꼽았다.


▲ 심포지엄 1부 발제자로 박명림 교수, 토론자로 백장현 교수와 박찬식 박사가 나섰다. ⓒ 문미정


이에 백장현 한신대 초빙교수 (가톨릭동북아평화연구소 연구위원)는 제주4·3모델이 일반화되기는 쉽지 않을 것이라는 의견을 냈다. 용서와 관용은 외부에서 강요할 수 있는 것이 아니며, 먼저 가해자의 반성과 사과가 이뤄져야 한다는 것이다. 


그는 당시 제주도민들이 외친 단독정부 반대라는 가치도 애국의 충정이었음을 인정해야 한다면서, 이러한 “‘차이’에 대한 인정이 민족 화해와 평화의 출발점이 된다”고 설명했다. 


| 4·3, 배반당한 항쟁


‘제주 4·3사건이라 함은 1947년 3월 1일 기점으로 하여 1948년 4월 3일 발생한 소요사태 및 1954년 9월 21일까지 제주도에서 발생한 무력충돌과 진압과정에서 주민들이 희생당한 사건을 말한다’


폭력-회심 패러다임으로 4·3을 바라본 김상봉 전남대학교 철학과 교수는 4·3은 분노와 적개심을 동반한 두 진영의 대립이며, “폭력적 대립은 제주4·3사건의 가장 본질적인 정체성에 속한다”고 말했다.  


그는 싸워야 할 대상을 회피하고 민간인들을 학살했다는 점에서 군·경 토벌대와 무장대는 한 치의 차이도 없으며, 이 폭력성은 비겁하고 비열하다고 비판했다. 


▲ 2부 발제자로 김상봉 교수, 토론자로 한재호 신부와 박찬식 교수가 나섰다. ⓒ문미정


이에 한재호 신부(광주가톨릭대학교 성서신학 교수)는 이념적 패러다임의 극복이 양비론적이어서는 안 된다고 강조했다. 토벌대와 무장대의 폭력성 모두 비열하지만, 행위 그 자체뿐만 아니라 행위의 주체, 동기, 과정, 결과가 어땠는지 통합적으로 봐야 한다고 짚었다. 


김 교수는 4·3을 “경찰의 학살과 고문에 맞서 일어난 항쟁이었으나, 더 큰 학살과 고문을 낳았고, 분단에 반대해 일어난 항쟁이지만 분단을 더욱 고착시켰다”면서, ‘배반당한 항쟁’이라고 말했다. 


이어 4·3을 생각한다는 것은 분단의 비극과 마주선다는 것이고 폭력을 내려놓고 참회해야 한다며, ‘회심’ 속에서만 참된 화해와 통일의 구원이 도래한다고 발제를 끝맺었다.  


▲ 심포지엄이 열린 서울 명동대성당 꼬스트홀은 제주4.3에 관심을 가지고 참석한 사람들로 가득찼다. ⓒ문미정


4·3을 신학적으로 바라보며 한재호 신부는 “4·3은 제주도민에게 공포와 두려움의 원체험”이라고 말했다. 교회가 제주의 원체험 안으로 들어가 제주도민이 겪고 있는 고통과 죽음의 그날에 함께 아파해야 하며, 4·3특별법 개정안을 복음적 시선으로 관심 가져야 한다고 밝혔다. 


이날 심포지엄은 천주교주교회의 정의평화위원회와 민족화해위원회, 제주교구 4·3 70주년 특별위원회가 공동 주최했다. 심포지엄을 시작으로 7일 기도회, 4·3평화신앙캠프 등 다양한 추모사업을 이어갈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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