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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제들의 강론 이대로 괜찮은가?
  • 편집국
  • 등록 2015-06-02 10:58:52
  • 수정 2015-06-03 00:14: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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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오로 6세는 “신자들은 (사제들의) 가르침에서 많은 것을 기대합니다. 그리고 단순하고, 명료하고, 직접적이며, 제대로 적용된 가르침이라면 그 가르침에서 커다란 이익을 얻을 것입니다.”라고 말했습니다. 단순성은 우리가 사용하는 언어와 관련이 있습니다. 우리가 말하는 것이 헛된 것이 되지 않기 위해서는 사용하는 언어가 백성이 이해할만한 것이어야 합니다. (복음의 기쁨, 제 158항)



사람의 마음을 주님의 능력을 통해 사로잡을 수 있어야 효과적인 강론이 될 수 있다. 미국의 심리학자 로버트 치알디니(Robert Cialdini)는 설득의 심리학에서 상호성, 일관성, 사회적 증거, 호감, 권위, 희소성을 설득의 6대 법칙으로 제시했다.


그리고 영국 케임브리지 대학의 케빈 더튼(Kevin Dutton)은 ‘초 설득’이라는 개념으로 상대방의 인지능력에 핵심을 질러 ‘5가지의 초설득’ 개념을 제시했다. 그들의 소통 개념에 기대어 사제들의 강론에 대해 고찰해보고자 한다.


강론이 단순(Simplicity)하지 않다. 사람 뇌는 짧고 단순한 말에 쉽게 설득된다. 율리우스 카이사르, 키케로, 아브라함 링컨 등 역사적으로 남은 웅변가들은 간단명료한 문장을 구사했다. 카이사르는 로마 시민에게 보낸 승전보에서 ‘왔노라, 보았노라, 이겼노라(veni, vidi, vici)’ 단 세 마디를 사용했다. 단순한 말일 수록 설득력이 높다.




그러나 본당 사제들의 강론이 성서에 대한 어려운 주석이나, 사변적인 이야기들로 가득 차 있으면 신자들은 사제의 형이상학적 사고가 쉽게 마음에 와 닿지 않게 된다. 때로는 사제들의 현학적 허세가 말들을 어렵게 만들어 이해되지 않는 강론들과 말의 범람을 피할 수 없게 만드는 경우도 있다. 인터넷에 떠 있는 주일 강론을 그대로 읽을 때 이미 온라인에 노출된 정보를 마치 자기 것처럼 읽어 내려가는 경우 강론의 진정성에 커다란 타격을 입을 수 있다는 것을 사제들이 놓치는 경우가 많다.



훌륭한 강론의 다른 특징은 그것이 긍정적이란 것입니다. 무엇을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지적하는 강론보다는 무엇을 더 잘 할 수 있는지를 제시하는 강론에 관심을 기울여야 합니다. 어떤 경우라도, 강론이 부정적인 어떤 것에 대한 주의를 끌었다면, 마찬가지로 긍정적이며 바람직한 가치를 가리키려 해야 할 것입니다. (복음의 기쁨, 제 159항)



강론 중에 의미 없는 말들이 많다. 상대방의 말이 나에게 도움이 된다고 생각하게 만들려면 복음이 나의 일상의 삶에 의미와 가치를 가지게 하도록 도와야 한다. 여기에서 긍정의 심리학이 주요한 이유는 신자들을 지적하고 겁주고 혼내는 강론이 아니라 말의 중심이 긍정에 와 닿을 수 있도록 도와야 한다는 데 있다.


‘생존율 90%’ 라고 말해주는 것과 ‘사망률 10%’ 라고 말해주는 것은 완전히 다른 어감으로 받아들이게 된다. 그러나 사제들의 강론이 한 주를 열심히 일하고 성당을 찾은 신자들에게 힘과 용기를 주는 메시지, 복음(기쁜 소식)이 아니라 혼내고, 화내고, 짜증스러운 말들을 반복한다면 신자들은 난감해진다.



강론자는 성서 본문을 인간 상황에, 즉 하느님 말씀의 빛을 얻고자 외치고 있는 그들의 체험에 연결시킬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런 관심은 약삭빠름이나 이해타산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습니다. 오히려 그것은 매우 경건하고 사목적인 것입니다. (복음의 기쁨, 제 155항)



신뢰(confidence)는 중요한 강론의 출발이다. 그러나 본당사제들은 신자들에게 신뢰를 상실 하는 여러 가지 스캔들에 놓이는 경우들이 많다. 신뢰하지 않는 사람의 말에 주의를 기울이기는 쉽지 않다. 사제가 먼저 본당에서 신뢰받을 수 있는 사람일 때 그의 모든 강론이 더욱 힘 있게 다가올 것이다.


신뢰는 하루아침에 쌓아지는 것도 아니고, 기교나 테크닉이 있는 것도 아니다. 그것은 사제의 진정성 있는 삶과 부족함을 가리지 않고 표현하여, 인간미와 순수성이 드러나게 할 때 비로소 얻어질 수 있는 것이다. 사제가 갈등을 피하기 위해 직설을 회피하면 사람들과의 진정성 있는 대화와 강론은 불가능하다.



강론자는 여러 가지 열망들, 부와 한계점, 기도하는 법, 사랑하는 법, 삶을 바라보는 법 그리고 세상에 대해 말합니다. (복음의 기쁨, 제 154항)



사제들의 강론이 신자들과 공감(empathy)하지 못한다. 상대방의 마음을 헤아리지 못하고 강론을 한다면 그것은 공염불이 될 확률이 높다. 그러나 신자들과의 공감 형성은 쉽지가 않다. 그것은 사제들의 삶과 신자들의 삶이 분리되어 있고, 공감할 내용이 별로 없다는데 이유가 있다.


‘신앙’ 안에서가 아니라면 그들의 대화는 계속해서 겉돌 수가 있는데 사제들은 그들 주변의 삶, 신앙 아닌 영역을 말하고, 오히려 신자들은 사제들에게 영적인 갈망을 갖는다는 서로 엇갈린 기대와 바람이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서로에 대한 지나친 배려의 문제라기보다는 사제는 영적으로 빈곤하고, 신자들은 사제를 통하여 무엇인가 영적인 것을 얻으려 기대 한다는 데에서 공감의 지점이 엇갈리는 것이다.


부조화(incongruity)도 하나의 문제가 될 수 있다. 삶에서 흘러나오는 유머는 관계의 서먹함과 유리벽을 무너뜨릴 수 있는 요소(Ice Breaking)가 될 수 있다. 그러나 대다수 사제들은 너무나 경직되어 있다.


그것은 존재 방식의 문제일 수 있다. 옳은 것, 윤리적인 것, 영성적인 것을 보여 주려 하다 보니 거꾸로 자연스럽지가 않다. 인위적인 웃음과 포커페이스가 때로는 앞서 언급한 신뢰에 어려움을 줄 수도 있다는 것을 인지해야 할 것이다.


공감과 신뢰 없이는 효과적인 강론을 할 수 없다. 성경에 대한 끊임없는 탐구와 묵상, 준비와 기도를 통해, 지금 여기 삶에 대한 묵상을 통해 또, 새로운 길을 볼 수 있는 강론이 나와야 한다. 삶의 의미와 가치에 대한 자기 확신을 가지게 하고 하느님의 섭리에 머물 수 있는, 그리하여 기쁨이 충만한 복음이 될 수 있도록 사제 자신부터 변화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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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기사에 2개의 댓글이 달려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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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Joseph2015-06-03 09:41:45

    저는 개인적으로 100점 강론은 예수님 따르는 제자가 될 수 있도록 잘 인도하는 것(불의에 침묵하지 않으며 가난한 사람들을 돕도록 하는)이고 빵점 강론은 도대체 무슨 말씀을 하셨는지 아무 생각도 안 나게 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주제도 복잡난해하고 말도 많아서 쉽게 내용정리가 잘 되지 않는 경우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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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1232015-06-02 21:04:09

    지난 3월 잊을 수 없는 사순절을 보낸 런던한인 공동체 최악의 강론중,교중미사때 개인적 감정에 의한 사제의 마음에 안드는 신자를 악마로 표현하여 신자들 가슴에 대못을 박았으며,구역모임전 평일미사중 큰 사랑을 주겠다며 체벌을 선포한 강론후 막가파 구역원들의 구역장 몰아내기 작전 성공 사례를 고통스럽게 바라보면서, 다시는 부정적인 사제의 사악한 무기로 둔갑한 강론은 절대로 허용하지 않고 사양하고 싶습니다.또한 형식적인 시간 때우기 공염불 강론과 인터넷에 의존한 성의 없는 강론및 신뢰가 깨진 사제의 강론도 귀기울여 듣고 싶지 않습니다.

        간단하고 순수하면서도 명쾌한 강론은 가끔 런던 본당에 들렀다가 말씀을 정성껏 준비하여 선물로 주고 가시는 손님 신부님들이 그나마 목마른 영적 갈증을 해소시켜 주십니다. 올바른 성경 인용 강론 대부분은 평신도가 아니라 사제 자신에게 적용되는 가르침임을..본당 사제 입으로 누가 누구를 향하여 강론하는 것인지 헷갈릴 때 참으로 안타깝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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