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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나눔-김혜경] 찬란하고 쓸쓸하신, 神의 침묵
  • 김혜경
  • 등록 2017-02-09 10:26:32
  • 수정 2017-02-09 18:18: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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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본 나가사키에서 화형을 당하는 그리스도인들


유명한 일본의 가톨릭 소설가 엔도 슈사쿠가 오십여 년 전에 쓴 「침묵」은 본질적인 무언가를 찾고 싶을 때 읽게 되는 책이다. 여기저기 말도 안 되는 일들이 다반사인 요즘, 북적거리는 마음이 영 가라앉지 않을 때, 믿음이나 사랑이라는 말이 가진 무게감을 새삼 느끼게 하는 작품. 밀도 있는 구성으로 나를 다시 돌아보게 한다. 예수가 말하는 사랑이란 게 뭔지 되새겨 주는 동시에, 한없이 나약한 나에게 그래도 괜찮다. 그렇게 살아도 괜찮으니 낙심하지 말라고 위안을 주는 책이기도 하다. 


17세기 일본은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정책을 바꾸면서 그리스도교를 탄압하던 에도 막부시대였다. 수많은 신자와 사제를 처형하고 배교를 종용하면서, 선교활동은 불가능한 상태가 되었다. 이 와중에 포르투갈의 예수회 신부였던 페레이라가 배교했다는 소식이 교황청에 전해진다. 그의 제자였던 로드리고 신부는 그렇게 신앙심이 깊었던 스승이 순교를 했으면 했지, 고문을 이기지 못해서 배교를 했다니 믿을 수가 없었다. 페레이라 신부는 일본에 파송된 33년 동안 어려움 속에서도 여러 사제와 신자들을 잘 이끌면서 많은 칭송과 존경을 받아온 주교였기 때문이다. 진위를 확인하고자 가까스로 일본으로 숨어든 로드리고 신부는 비밀리에 선교활동을 하면서 페레이라 신부의 소식을 알아본다. 그러다 일본인 배교자 기치지로 때문에 결국 붙잡히고 만다. 


▲ 영화 <사일런스> 중 페레이라 신부


잡혀온 신자들은 끓는 물을 며칠 동안 조금씩 부어 죽이거나 화형에 처하기도 한다. 나무에 묶어 죽을 때까지 바닷물 속에 세워놓는다, 오물을 가득채운 구멍에 거꾸로 매달아놓아 죽이기도 한다. 관리들은 로드리고 신부에게 비참하게 죽어 가고, 고통 받는 신자들을 가리키며, 어서 성화를 밟고 침을 뱉으라고, 배교를 하라고, 그러면 그들을 풀어주겠다고 끊임없이 회유하고 협박한다. 


이렇게 처절하게 죽어 가는데도, 뜨거운 신앙심으로 간절히, 아무리 애끓는 기도를 드려도 하느님은 말이 없다. 사람들을 집어삼킨 파도는 무심한 듯 잠잠하고 갈매기는 자유로이 푸른 하늘을 날고 있다. 따사로운 햇살은 여전히 눈부시다. 


도롱이벌레처럼 거적에 말린 신자들이 깊은 바닷물에 던져지고 있는데도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그저 그뿐, 침묵만 지키는 하느님. 인간적인 고뇌가 극에 달한 로드리고 신부는 고문으로 죽어가는 신자들을 살리기 위해 아픈 마음으로 성화를 밟는다. 지난날의 페레이라 주교처럼 말이다. 어쩔 수 없는, 정말 어쩔 수 없는 선택을 두고, 두 신부는 얼마나 많은 번뇌와 자책에 빠져야 했을까. 


그런데 여기 거슬리는 인물 하나가 있다. 이야기 초반부터 끝날 때까지 로드리고 신부를 떠나지 않는 사람, 배교한 일본인 기치지로. 로드리고 신부 일행의 일본 밀항을 도왔지만 관리들이 무서워 신부를 밀고해버린 한심한 사람이다. 그래놓고는 거지꼴로 찾아와 울며불며 징징거린다.


“성화를 밟은 자에게도 밟은 자로서의 할 말이 있어요. 밟은 이 발은 아픕니다. 너무 아파요. 나를 약한 자로 태어나게 하시고, 강한 자를 흉내 내라고 하느님은 말씀하십니다. 그건 무리라고요. 무리이고말고요. 저 같은 겁쟁이는 어떻게 하면 좋단 말입니까? 돈이 탐나서 신부님을 넘긴 건 아닙니다. 관리들에게 협박을 받아서 입니다…” (p.141) 


얻어맞은 개처럼 슬픈 눈으로 묻는다. 지금껏 살아오면서 나쁜 일이라곤 하지도 않았는데, 비천한 나에게 하느님은 왜 이런 고통을 겪게 하는지 모르겠다고. 그런 넋두리를 늘어놓으면서 로드리고 신부가 옮겨가는 곳곳마다 남몰래 신부의 뒤를 따른다. 고백성사를 하겠다며 감옥으로 찾아와 소란을 피우기도 한다. 


▲ 영화 <사일런스> 중 로드리고 신부


치사하고 비굴한 사람이라고, 차라리 멀리 떠나버리기라도 하지 구차하게 무슨 짓인가 싶었다. 그런데 가만, 내가 기치지로의 상황에 처한다면 어떻게 했을까. 그 무시무시한 고문을 견디고, 끝내 성화를 밟지 않고 죽어갈 수 있었을까. 과연 그럴 수 있었을까. 그렇게 강직하고 순수한 신앙심이 내게 있기나 할까. 겁도 많고 심약하기 짝이 없는 나는 아마 십중팔구 그러지 못했을 게다. 그러고는 기치지로처럼 죄의식에 젖어 구질구질한 삶을 살고 있겠지. 그를 다시 보니 남 같지 않다. 안쓰러워 지기도 한다.


그러면서 만약, 포르투갈이니 네덜란드니 하는 외국에서 신부나 선교사들이 자신들의 종교를 퍼뜨리려 일본으로 오지 않았더라면, 그래서 기치지로가 하느님의 존재를 몰랐다면 어땠을까. 그러면 굳이 하느님에 대한 죄책감 같은 건 느낄 필요도 없었을 테고, 마음이 약하게 태어났으니 겁도 많을 터, 조금 비굴한 삶이면 어떤가. 그 나름대로 생을 살다 가면 되지 않았을까. 그리고 기치지로와 달리 의리도 강한데다 성실하고 용감한 사람이었다면, 꼭 신자가 되지 않았더라도 열심히 땀 흘리며 하루하루 건강한 삶을 살 수 있지 않았을까. 아까운 생목숨을 잃은 건 아닌가. 

   

그렇지만, 하느님은 말 없는 ‘침묵’으로 페레이라와 로드리고 신부에게서 구체적인 ‘행위’를 이끌어 낸다. 두 신부는 자신들 때문에 잔인하게 고통 받고 비참하게 죽어가는 신자들을 보면서, 먹지도 못하고 잠도 못 잔다. 몇날며칠 밤낮으로 고뇌하고 번민한다. 그리고는 마침내 침묵하고 있는 신에게서 어떻게 해야 신자들의 죽음을 막을 수 있는지, 어떤 게 제대로 된 사랑인지를 어렵고 어렵게 읽어낸다. 


“밟아도 좋다. 밟아도 좋다. 나는 너희들에게 밟히기 위해 이 세상에 태어났고, 너희들의 아픔을 나누기 위해 십자가를 짊어졌다.” (p.208)


이건 어쩌면 순교보다 더 힘들고 괴로운 길일지 모른다. 신부들이 자신의 삶 전체를 걸고 소중하게 지키고 쌓아온 거룩함과 신성함 같은 가치들을 송두리째, 그것도 스스로의 손으로 무너뜨려야하기 때문이다. 또 그로 인해 자신들에게 쏟아질 온갖 도덕적이고 종교적인 비난과 수모까지도 오롯이 혼자서 감내하며 살아야 한다.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아니 오히려 평생 손가락질 받을 각오를 해야 할 너무나 외롭고 두려운, 그런 사랑이다. 


겁쟁이에다 찌질한 이치지로 같은 이들을 살리기 위해 하느님을 부정하는 방식이어도 좋다는, 존재 자체의 정체성조차 기꺼이 부서뜨리라는, 기어코 사람을 살려내야겠다는, 아프고도 슬픈 사랑의 역설. 말 없는 신의 무겁고 무거운 요청. 예수쟁이라면 감당하며 살아야 할 이 찬란하고도 쓸쓸한 ‘사랑’이라는 신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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