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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나눔-김혜경] 수전 롤링스의 ‘자기만의 방’
  • 김혜경
  • 등록 2018-09-07 12:23:42
  • 수정 2018-09-07 12:24: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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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부터 그림 그리기, 일명 드로잉을 시작했다. 연필로 스케치를 한 후, 가느다란 펜으로 선을 그리고 나름대로 색칠을 하고 있는데 그 재미가 쏠쏠하다. 전부터 한번 해보고 싶던 거였는데 여태껏 왜 차일피일 미루고 있었는지 모르겠다. 아직 선도 비뚤배뚤하고 균형도 잘 맞지 않지만, 모양을 그리고 색연필이나 물감으로 색을 입히는 과정이 괜스레 뿌듯하다. 작은 소품이지만 완성된 그림을 보면 기분도 좋아진다. 스케치북과 즐거운 씨름에 빠져 있다 보면 어느새 시간이 훌쩍 지나있다. 재미난 책에 푹 빠져 시간가는 줄 모르고 읽는 느낌이라고나 할까.


무엇보다 잡념 없이 손끝의 움직임에 집중하는 그 시간이 참 좋다. 혼자 있는 시간을 오롯이 즐길 수 있는 그림을 시작하게 된 건, 아마 최근에 읽은 『19호실로 가다』의 수전 롤링스 때문인지 모른다. 어쩌면 수전의 뒷모습이 그려진 컬러풀한 책 표지에 마음이 가서일지도 모르겠고.


수전과 매슈는 아주 이상적인 부부였다. 매슈는 대형신문사 차장급 기자였고 수전은 재능을 인정받은 광고회사 인재로 모두가 부러워하는 인기 만점의 젊은 부부였던 거다. 그러다 수전이 아이를 갖게 되면서 직장을 그만두었고 아들과 딸, 아들딸 쌍둥이까지 넷을 낳았다. 지혜롭고 책임감 강한 롤링스 부부는 가정생활을 현명하게 잘 꾸렸고 당연히 행복한 삶을 살았다.

 

그러나 결혼생활이 대체로 그렇듯 단란한 수전과 매슈의 가정도 시간이 지남에 따라 어느 정도 단조로워질 수밖에 없었다. 솔직히 어떤 삶에서든, 딱히 “다른 것은 모두 이것을 위해서”(p.280)라고 내세울 만 한 건 없다. 그건 사랑하는 마음으로 결혼한 부부도 마찬가지다. 아이들이 있지 않냐고? 아이들이 부모에게 더할 나위 없는 기쁨과 재미, 만족을 주는 건 맞지만, 그렇다고 해서 삶의 근원이나 존재의 이유가 될 수는 없는 법이다. 그나마 서로를 사랑하는 마음 정도가 삶의 중심이자 원천이라 할 수 있겠다. 하지만 수전도 매슈도 이미 안다. 그 사랑하는 마음이란 게 다른 모든 것을 버텨 낼만큼 지속적으로 강렬하지는 않다는 것, 그리고 아무리 사랑하는 사이라 해도 사람이 사람에게 전부가 될 수는 없다는 걸 말이다.


어느 날 수전은 매슈에게서 파티에서 만난 여자와 하룻밤을 보냈다는 고백을 듣는다. 그녀는 남편의 바람이 이성적으로는 이해(?)가 되지만, 감정적으로는 받아들여지지 않음을 느낀다. 이 일을 계기로 수전은 매슈와의 삶을 돌아보면서, 결혼과 함께 자신의 삶을 남편과 아이들에게 넘겨버렸음을 알게 된다. 그네들의 리듬에 맞춰 사느라 한순간도 자신만의 시간을 가진 적이 없었음을, 그러면서도 언제나 시간 때문에 동동거리며 살아왔음을 깨닫는다. 


매슈가 회사에 가고 아이들이 학교에 있는 동안에도 늘 해야 할 일거리들을 잊지 말아야 한다는 생각에서 한시도 벗어나지 못했다. 30분 뒤, 한 시간 뒤, 두 시간 뒤에 이런저런 일들을 해야 한다는 생각에 매 순간 매달려 있었다. 모든 것을 잊고 자신을 내려놓은 적이 없었다. 남편과 아이들이 없어 자유로운 시간 같지만 실제로는 전혀 자유롭지 않았던 거다. 특히 방학이면 아이들 넷을 돌보느라 하루가 어찌 가는지 알 수 없을 만큼 정신이 없었다. 



그녀 자신은 직장을 그만두는 게 현명한 선택이었다 여겼고 그 선택에 대해 책임을 다하며 살았다. 그러나 결과적으로는 남편에게 경제적으로 예속된 삶이 되고 말았다. 또 수전이 정성을 다해온 집안일과 육아는 사회적으로 인정을 받는 일도, 경제적으로 보상이 있는 일도 아니다. 아이들과 매슈를 위해 퇴근도 휴일도 없이 신체적, 정신적 노동을 매일 되풀이해야 했지만 존재감이 드러나지도 않는다. 수전이 아니어도 누군가 대신할 수 있는 일이기도 하다. 이를 깨달은 수전은 알 수 없는 분노에 휩싸여 전에 없이 히스테리칼해진다. 사랑하는 아이들에게 짜증을 내기도 한다.


안타깝게도 수전이 느끼는 갑갑함을 매슈는 이해하지 못한다. 능력 있고 매력적인 남편에다 사랑스러운 아이들, 넓은 저택과 잘 가꿔진 정원, 그녀를 돕는 파커스 부인까지 완벽한 가정처럼 보이니 말이다. 그러나 수전은 이런 행복과 상관없이 자신의 삶이 사막처럼 막막하다. 우울하고 불안하다. 시시각각 다른 사람을 위해 뭔가를 해야 한다는 압박감에서 벗어나고 싶다. 매슈 롤링스의 아내로서 해야만 했던 온갖 역할을 깡그리 잊고, 아무런 신경도 쓰지 않은 채, 그저 홀로 가만히 있고만 싶다. 


마침내 수전은 엄마노릇을 대신할 젊은 가정부를 들이고는 집에서 멀리 떨어진 허름한 호텔에 방을 잡는다. 젊은 가정부를 엄마처럼 잘 따르는 아이들을 보며 좀 씁쓸하지만 그래도 마음이 놓인다. 수전은 주기적으로 호텔방을 찾아가 몇 시간씩 머물며 혼자만의 시간을 갖는다. 프레드 호텔 19호실, 싸구려에 더러운 방이지만 아무도 그녀를 알지 못하는 그곳에서 모든 걸 내려놓고 그녀만의 시간을 만끽한다. 이제야 좀 살 것 같다. 철저한 고독 속에서 비로소 자유로움을 느낀다. 


그런데 새 연인과 밀회를 즐기던 매슈는 호텔을 드나드는 아내에게 다른 남자가 생긴 걸로 오해하고는, 오히려 다행이라 여기며 수전에게 호기롭게 더블데이트를 제안한다. 남편이 자기 자신을 이해하는 건 아예 불가능한 일임을 절감한 그녀는, 아무도 없는 19호실에서 조용히 그리고 기꺼이 자신의 생을 마감한다.


▲ 프레드 호텔 19호실 (사진출처=문예출판사)


누구에게나 자기만의 공간이 있어서 고요히 시간을 보내며 자신을 돌아보는 건 정말 중요한 일 같다. 나만 해도 집에 남편을 위한 공간은 있었지만 내 공간은 따로 없었다. 제일 넓은 안방을 쓰지 않느냐고? 하지만 알다시피 안방은 남편과 내가 공유하는 곳이다. 거실과 주방 역시 식구들과 함께 쓰는 장소다. 아이들은 꼬맹이 적부터 줄곧 자기 방을 하나씩 갖고 있었는데, 정작 성인인 나는 이제껏 나 혼자만의 공간이 없었다니. 결혼을 하면서 이런 어처구니없는 상황을 너무나 당연하게 여기며 살아왔다니. 생각해보면 한심하기 짝이 없는 노릇이다.


여러 날 고민 끝에, 나는 원래 혼자 있는 시간과 장소가 필요한 사람이라고, 나도 내 공간이 있어야겠다고 당당히 선언했다. 다행히(!) 다 자란 아이들과 남편은 내 입장을 이해했고 드디어 나도 나의 방을 갖게 되었다. 내 책들을 위한 책꽂이와 책상도 마련했다. 식탁과 테이블을 전전하며 책을 읽었는데 이제는 내 방에 혼자 앉아 편하게 책을 읽고 글도 쓴다. 어쭙잖지만 그림도 그린다. 따뜻한 차를 마시며 음악도 듣는다. 아무 생각 없이 한참을 멍때리고 있기도 한다. 


아, 혼자 있는 이 행복함이라니. 누구의 방해도 받지 않는 나만의 공간에 있으면 에너지가 쌓이는지 식구들은 물론이고 뭣보다 내가 나 자신에게 여유롭고 너그러워진다. 아주 묘한 느낌이다. 


그래서 결혼을 하더라도 각자 자기만의 공간은 꼭 있어야 한다고 강추하고 싶은데… 결혼, 그거 아주 뜨겁게 사랑해서 언제나 둘이 붙어있고 싶어서 하는 거 아니냐며, ‘자기만의 방’이라니 거 모르는 소리 하지 말라 그러려나.


덧붙이는 글

글제목 ‘자기만의 방’은 버지니아 울프의 『자기만의 방』에서 가져왔습니다.


[필진정보]
김혜경 : 서강대학교를 졸업했다. 광주문화원 편집기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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