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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18 희생자는 "순교자"
  • 김근수 편집장
  • 등록 2015-05-18 07:49:32
  • 수정 2015-05-18 09:41: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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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0년 3월 24일 로메로대주교가 군인 총에 살해되었다. 그는 오는 5월 23일 시복된다. 80년 5월 18일 광주에서 군인들이 시민들에게 총을 쏘았다. 수백명이 살해되었다. 그들은 망월동 묘지에 또 어디에 말없이 누워 있다. 그리스도교는 그 희생자들을 무엇이라 불러야 하나.


‘이름없는 그리스도인’이라는 라너의 표현이 한때 가톨릭교회를 뒤흔든 주제였다면,‘이름없는 순교자’는 지금 활발히 논의되는 주제다. 로메로대주교의 시복 여부를 둘러싸고 계속된 논쟁이 그 한 예다. ‘이름 없는 그리스도인’은 교회밖 사람들의 구원에 대한 논의였다. ‘이름없는 순교자’는 불의한 권력에 의해 억울하게 희생된 사람들의 죽음이 그리스도교에서 어떤 의미를 지니느냐를 다루는 문제다.


‘이름없는 순교자’는 임종 직전의 칼 라너에 의해 제안되었고 해방신학자 소브리노가 ‘해방자 예수’라는 책에서 발전시켰고, 올해 로메로대주교의 시복으로 더 관심을 끌게 되었다. 프란치스코교황이 작년 방한 때 ‘이름없는 순교자’라는 표현을 4번이나 사용하는 것을 보고, 나는 깜짝 놀랐다. 그러나 한국천주교에서 이 주제가 얼마나 중요하게 여겨지는지 나는 잘 모르겠다.


소브리노의 말을 보자.“라틴아메리카에서 제2차 바티칸공의회 이후 더 많은 그리스도인이 죽임 당했다. 그 그리스도인을 순교자라고 부르거나 부르지 않거나 하는 문제가 생겼다. 이 문제를 해결하지 않으면, 교회가 묘한 상황에 빠지고 만다. 순교는 분명히 그리스도인으로 당하는 특별한 죽음이다. 그렇지만, 예수가 당한 죽임과 닮은 죽임을 오늘 당하는 사람은, 그들에게 교회법적-교의적으로 정해진 조건과 자격을 주지 않아서, 그 죽음이 그리스도교적으로 특별한 죽음으로 인정받지 못하고 있다. 그 주제를 해결하면, 예수의 죽음과 생애를, 예수가 죽임을 당한 이유를 밝히고 해결하는데 도움을 받을 할 수 있기에 아주 중요하다.”


초세기 그리스도인은 박해를 겪으면서 순교는 뜻밖에 닥친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교 신앙이 특별히 저항적 성격을 가진 덕분에 생긴 필연적 결과로 여겼다. 순교는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에 동참하는 방법으로, 하느님이 베푸는 가장 큰 은총으로, 하느님과 이웃에 대한 가장 귀한 사랑으로, 살아남은 사람을 위해 구원을 낳는 죽음으로 여겨졌다.


역사를 거치면서, 순교 개념은 신학적으로 더 정교해지고 교회법적으로 표현되었다. 우리 시대에 공식적으로 순교는“신앙 때문에, 전적으로 구체적인 교리를 존중해서, 죽음을 자유롭고 인내롭게 받아들이는 것”을 뜻하게 되었다. 순교는 ‘신앙에 대한 미움(odium fidei)에 의해 생기며, 순교자 편에서 먼저 한 선제 폭력에 대한 대응이 아니라는 것이다.


‘신앙에 대한 미움뿐 아니라 정의에 대한 미움(odium iustitiae)으로 죽은 사람을 순교자로 인정할 수 있느냐 하는 주제는 해방신학에서 진지하게 논의되었다. 남미에서 그런 이유에서 죽은 사람들이 많았기 때문이다. 정의에 대한 미움(odium iustitiae)이 순교자로 인정될 수 있느냐 하는 주제를 5.18 희생자들에게 적용하는 시도는 신학적으로 무리인가.


정의를 실현하기 위해 의식적으로 불의한 세력과 싸우다가 목숨을 잃은 사람을 ‘적극적 순교자’라고 부르자고 소브리노는 제안하였다. 정의에 대한 뚜렷한 의식은 없었지만, 갈등 현장에 있었다는 이유로 죽은 어린이, 노인, 여인, 청년 등의 죽음은 어찌할 것인가. 이런 사람들을 ‘수동적 순교자’라고 부르자고 소브리노는 제안하였다. 5.18 희생자들을 세월호 희생자들을 ‘수동적 순교자’라고 부르면 어떨까.


5.18은 국가가 결코 해서는 안 될 일을 해서 낳은 참사다. 세월호 참사는 국가가 꼭 해야 할 일을 하지 않아서 생긴 참사다. 두 참사 모두 국가권력이 저지른 범죄라고 말할 수 있다. 국가권력에 희생된 분들의 죽음을 교회는 반드시 언급해야 한다. 세월호 희생자들과 5. 18 희생자들은- 불의한 세력의 잘못 탓에-죄없는 어린 양처럼, 고통받는 야훼의 종처럼 자기 탓 없이 희생되었다.


영문도 모른 체 역사의 소용돌이에 휩싸여 죽음을 맞은 그들은 자기 희생으로써 우리들에게 민주주의와 생명의 소중함을 일깨우고 있다. 그들은 교회를 위해서가 아니라 인류를 위해 희생하였다. 그들의 죽음은 예수의 죽음을 많이 닮았다.


그리스도교는 그들의 죽음을 신학적으로 가치있는 죽음으로 인정하고 복권시킬 의무가 있다. 교회가 그들을 이름없는 순교자로 부르든, 수동적 순교자로 부르든, 그들의 죽음이 무의미하지 않다고 나는 말하고 싶다. 이 주제에 대해 한국교회 안에서 활발한 논의가 있기를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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