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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황 방한 1주년: 청년들의 위기 이대로 둘 것인가
  • 편집국
  • 등록 2015-08-18 13:31:42
  • 수정 2015-08-19 17:11: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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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번째 - 청년들의 위기 이대로 둘 것인가]


청년들은 몸과 마음, 영혼이 그리스도 안에서 온전히 치유되고 평안함 가운데 성장과 성숙을 향하여 나아가는 여정의 최고점이다. 이 땅의 청년들은 자신들의 불안한 미래에 대한 두려움과 설렘 가운데서도 서로에게 친밀하고 따뜻한 시선을 드러내며 살아가려 노력한다.


그러나 지금의 기성사회는 청년들에게 충분한 일자리를 허락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88만원 세대’라 불리는 절대적 빈곤의 처지에 놓이게 한다. 물론 이러한 불평등이 실질적이고 절대적인 소득의 문제가 아니라 상대적 소득, 곧 비교하여 생겨난 격차, ‘불평등’에 기인한다는 것도 일면 인정한다. 그러나 '청년'은 2008년도 이후 경제 위기 속에서 취업난을 겪으며 연애, 결혼, 출산을 포기한다는 '3포 세대'를 가리키는 대명사가 되었다.


최저임금도 받지 못하고 일회용 티슈처럼 쓰고 버려지는 청년들의 절망과 분노를 교회는 어떻게 인식하고 그들에게 희망의 메시지를 줄 것인가? 청년세대가 고시원을 전전하고 노동시장에서 비정규직을 전전하게 되고, 말도 안 되는 스펙 경쟁에 내몰리게 되었다.


얼마나 많은 청년들이 편의점 아르바이트로 학비를 벌어야 하는지, 거리에서 배달통을 들고 질주하는 배달 아르바이트로 얼마나 많은 젊은 학생들이 희생되는지 우리는 너무 무관심하다. 이러한 청년들에게 교황은 다시 한 번 희망과 용기의 메시지를 던져준다.





<프란치스코 교황 아시아 청년들과 만남 연설 2014년 08월 15일 솔뫼 성지>


사랑하는 젊은 친구 여러분,


“저희가 여기서 지내면 좋겠습니다.”(마태 17, 4). 이는 성 베드로 사도가 타보르 산에서 영광 속에 변모하신 주님께 드린 말씀입니다. 정말 우리가 오늘 이곳, 한국 교회 초기에 주님의 영광을 드러낸 순교성지에서 함께 지내고 있다는 것은 참으로 좋은 일입니다. 아시아 전역의 젊은이들이 함께 모인 이 대회를 통해서 우리는, 예수님의 영광이 우리 가운데에 계심을, 모든 국가와 언어와 민족을 포용하는 교회 안에 계심을, 그리고 모든 것을 새롭게 젊게 살아있게 하시는 성령 안에 계심을 느낄 수 있습니다!


따뜻한 환대와 열정, 즐거운 찬양, 신앙 고백, 그리고 여러분의 다양하고 풍부한 문화를 보여준 아름다운 공연에 모두 감사드립니다. 특별히 여러분의 희망과 문제와 관심사들을 저와 함께 나누었던 세 젊은이들에게 감사를 드립니다. 저는 그들의 이야기를 주의 깊게 들었으며, 이를 마음속에 간직하겠습니다. 유흥식 라자로 주교님의 소개 말씀에도 감사드리며 여러분 모두에게 마음을 다하여 인사를 드립니다.


오늘 저는 여러분과 함께 제 6차 아시아 청년대회 주제의 일부인 “순교자의 영광이 너희를 비춘다”에 대하여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주님께서는 순교자들의 영웅적인 증언을 통해 당신 영광을 비추셨던 것처럼, 여러분의 삶에서 당신의 영광이 빛나게 하시고, 또 여러분을 통하여 아시아 대륙에 생명의 빛을 밝히기를 원하고 계십니다. 오늘 그리스도께서는 여러분의 마음의 문을 두드리고 계십니다. 일어나 깨어있으라고, 또 삶에서 진정 소중한 것들이 무엇인지 깨달으라고 부르고 계십니다. 뿐만 아니라, 세상 밖으로 나아가 다른 이들의 마음의 문을 두드리고, 그들의 삶 안에 그리스도를 받아들이도록 초대하라고 요청하고 계십니다.


아시아 청년들이 모이는 이 훌륭한 대회를 통하여 우리는 하느님의 영원한 계획 안에서 교회의 역할이 무엇인지 알 수 있습니다. 여러분은 세상 곳곳에서 모인 젊은이들과 함께, 우리 모두가 평화와 우정을 나누며 사는 세상, 장벽을 극복하고 분열을 치유하며 폭력과 편견을 거부하는 세상을 만드는데 도움이 되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바로 이것이야말로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원하시는 일입니다. 교회는 전 인류의 일치를 위한 씨앗이 되어야 합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국가와 민족들이 일치를 이루도록, 그러나 다양성을 파괴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다양성을 인정하고 조화를 이루어 더 풍요롭게 하는 일치를 이루도록 부름 받고 있습니다.


하지만 세상은 이런 놀라운 전망과 계획으로부터 얼마나 동떨어져 있습니까! 우리가 뿌리려는 선행과 희망의 씨앗이, 우리 주변뿐 아니라 바로 내 마음 안에 있는 이기심, 적대감, 불의라는 잡초에 질식해 버리는 경우가 또 얼마나 많습니까! 우리를 괴롭히는 사회의 빈부 격차는 점점 더 벌어지고 있습니다. 우리 삶에 값비싼 대가를 치르게 하는 물질과 권력, 쾌락 숭배의 징후들을 우리는 봅니다. 우리 가까이에 있는 많은 친구와 동료들이 엄청난 물질적 번영에도 불구하고, 정신적 빈곤, 외로움, 남모를 절망감에 고통 받고 있습니다. 이러한 세상에 하느님의 자리는 더 이상 없는 것처럼 보입니다. 마치 정신적인 사막이 온 세상으로 퍼져나가고 있는 것 같습니다. 이는 청년들에게도 영향을 미쳐서 희망을 앗아가고, 많은 경우에 삶 그 자체를 앗아가기도 합니다.


그러나 여러분은 바로 이러한 세상 속으로 나아가 희망의 복음,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 그리고 하느님 나라의 약속을 전하고 증언하라는 부름을 받았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비유를 통하여, 희망과 구원의 메시지를 받아들이는 사람이 있는 곳이라면 어디든 하느님 나라가 조용히 와서 소리 없이 자라날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의 영은 모든 인간의 마음에 새로운 생명을 불어넣고, 그 어떠한 상황도, 가장 절망적인 상황까지도 변화시킬 수 있다고 복음은 우리에게 가르치고 있습니다. 바로 이것이 학교, 직장, 가정, 지역 공동체 안에서 여러분이 이 시대를 함께 살아가는 이들과 나누어야 할 메시지입니다. 예수님께서 죽은 이들 가운데서 되살아나셨기 때문에, 우리는 주님께 영원한 생명의 말씀이 있다는 것을 압니다(요한 6, 68). 주님의 말씀에 모든 이의 마음을 움직이고 악을 선으로 이기며 세상을 바꾸고 구원하는 힘이 있다는 것을 압니다.


사랑하는 젊은 친구 여러분, 이러한 시대에 주님께서는 바로 여러분에게 의지하고 계십니다! 주님은 여러분이 세례를 받던 그날 여러분의 마음에 들어오셨고, 견진을 받던 그날 여러분에게 성령을 내려주셨습니다. 또한 성체 안에 현존해 계시면서 끊임없이 여러분에게 힘을 주시어 여러분이 세상 앞에 주님을 증언할 수 있게 해 주십니다. 주님께 “예’ 하고 대답할 준비가 되셨습니까? 정말 준비 되셨습니까?


이제 여러분이 진실 되고 기쁜 마음으로 복음을 증언할 수 있는 방법 세 가지를 제안해 드리겠습니다. 이 세 가지를 늘 생각하시고 여러분 삶의 원칙이 되게 하십시오.


첫째, 그리스도께서 여러분에게 주시는 힘을 믿으십시오. 그분 말씀의 진리와 은총의 힘에 대한 희망을 잃지 마십시오. 여러분은 죽음에서 생명으로 건너가는 주님의 파스카로 세례를 받았으며, 우리 마음에 살아 계시는 성령의 힘으로 견진을 받았습니다. 이러한 영적인 힘을 결코 의심하지 마십시오.


둘째, 날마다 기도 안에서 주님과 가까이 지내십시오. 하느님을 경배하십시오. 주님께 대한 경배를 잊지 마십시오. 주님의 성령이 여러분의 마음을 들어 올려 아버지의 뜻을 알고 실행하는데 도움을 주시게 하십시오. 성체 성사로부터 기쁨과 힘을 얻으십시오. 정기적으로 고해성사를 받아, 여러분 마음이 순수함을 잃지 않고 흐트러지지 않게 하십시오. 본당의 일에 적극적으로 열심히 참여하시기를 바랍니다. 또 사랑의 복음을 외면하지 마십시오. 최선을 다해 사랑의 실천에 참여하십시오.


마지막으로, 복음에 반대하는 수많은 유혹들이 우리를 에워싸고 있으니, 여러분의 모든 생각과 말과 행위가 그리스도 말씀의 지혜와 진리의 힘으로 인도되게 하십시오. 그리스도께서는 여러분이 모든 일을 어떻게 해 나가야 하는지 가르쳐 주시고, 또 매일매일 당신이 여러분에 대해 어떤 계획을 갖고 계시는지 알려 주실 것입니다. 만약 그리스도께서 여러분에게 사제직이나 수도생활로 당신을 섬기도록 부르신다면, 두려움 없이 “예”하고 대답할 수 있는 은총도 함께 내려주실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참된 행복과 완성을 향한 길을 여러분에게 보여주실 것입니다.


이제 제가 가야 할 시간입니다. 주일 미사 때 여러분을 다시 만나 이야기하기를 기대하고 있겠습니다. 이제, 우리가 이렇게 함께 할 수 있도록 강복해 주신 주님께 감사드리고, 아시아와 전 세계에 주님의 사랑을 기쁜 마음으로 충실히 증언할 힘을 주시도록 간청합시다.


우리의 어머니이신 성모 마리아께서 여러분을 보살펴 주시고 여러분이 그 아들 예수님 곁에 늘 가까이 머물게 해주시기를 빕니다. 또한 세계 청년 대회를 처음 시작하신 성 요한 바오로 2세께서도 하늘로부터 항상 여러분을 이끌어 주시기를 빕니다. 크나큰 사랑으로 여러분에게 저의 강복을 드립니다.



교황은 특별히 청년들의 정신건강에 대한 문제를 적극 제기한다. 가까이에 있는 친구와 동료들이 엄청난 물질적 번영에도 불구하고, 정신적 빈곤, 외로움, 남모를 절망감에 고통 받고 있다는 사실을 간과하지 않는다.


청년들의 실업과 사회적 불평등이 개인에게 스트레스를 유발하고, 이 스트레스가 몸과 마음, 영혼의 건강을 악화시키는 과정을 우리는 종종 가까운 곳에서 볼 수 있다. 불평등한 사회에 사는 사람들은 자신의 존재가치를 잃을까 전전긍긍 하게 되고, 타인과 비교하거나 경쟁하는 과정에서 심리적 스트레스를 받을 수밖에 없다. 그런데 이러한 만성적인 스트레스는 심혈관계와 면역체계를 비롯한 우리 몸의 생리적 체계에 악영향을 주고 정서적 불안과 불면, 강박 등 수많은 정신적, 신체적 질병을 유발 한다는 데에 더 큰 문제가 있다.


청년들의 스트레스를 유발하는 사회심리학적 요인은 여러 가지다. 그 가운데 하나는 청년들의 낮은 사회적 지위이다. 이는 물질적 생활수준뿐만 아니라 멸시 당한다는 느낌, 열등한 위치에 있다는 느낌, 자신의 일에 결정권을 가지지 못한다는 느낌처럼 사회적 지위가 낮아서 생기는 모든 사회적 감정을 포함한다.


또한 친구나 신뢰하는 사람이 없고, 참여하는 공동체가 없는 등 빈약한 사회적 관계로 내몰린 청년들의 비참한 현실이 그 요인일 수 있다. 청년들은 충분히 인정받고 사랑받고 보호받고 있지 못하다. 그리고 어린 시절 애착관계의 결핍이나 불안정에서 기인하는 ‘타인에게 어떻게 보일까 걱정하는 태도’ 역시 청년기를 지내는 많은 이들의 불안한 사회심리적인 요인이 된다. 사회적 불안, 수치심, 우울, 폭력이라는 감정들은 모두 사회적 비교에서 생겨나는 것이다.


이것은 신자유주의 경제시스템과 그 맥을 같이한다. 곧 경쟁을 극대화 시켜 생산을 최대화 하자는 신자유주의의 논리는 인간을 대상화하고 나의 성공과 번영을 위해 타인의 희생은 어쩔 수 없다는 개인주의적 의식을 합리화 한다. 그들에게 당장 필요한 것은 사회구성원 모두에게 존중 받고 있다는 느낌일 것이다. 그리고 인간의 치유, 해방, 성장을 위해서는 ‘상호간의 친밀함과 따뜻한 시선’이 중요하다는 사실을 그들은 알아갈 것이다.


교회는 모든 사람에게 - 사제, 수도자와 평신도 - 이런 “동반의 기술”을 전수해야 할 것입니다. “동반의 예술”은 다른 사람이 서 있는 거룩한 땅에서 신발을 벗는 법을 가르칩니다.(탈출기 3,5 참조) 이 동반하는 걸음걸이는 그리스도교 생활 안에서 치유하고, 해방하며, 성장을 장려하는 우리의 친밀함과 우리의 따뜻한 시선을 드러내는 것으로서, 확고하고 안정된 것이어야 합니다.(복음의 기쁨, 제169항)


불평등한 사회일수록 청년들의 강력범죄 발생률과 10대의 임신율이 높고 타인에 대한 신뢰도가 낮으며 공동체 생활에 잘 참여하지 않는 경향을 보인다. 여기에서 바로 동반의 걸음이 필요한 것이다. 그 걸음걸이는 그리스도교 생활 안에서 치유하고, 해방하며, 성장을 장려하는 우리의 친밀함과 따뜻한 시선을 드러내는 걸음으로, 확고하고 안정된 신앙에 기반 하여 그들에 대한 지지를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선언해야 한다.



약자에 대한 우선적 배려가 바로 그리스도의 정신이다. 그들이 모두 하느님 앞에 같은 인간으로 존재하며, 영원한 생명을 얻는 것이 세상의 어떤 부귀나 영화보다 더 나은 것이라는 확신을 가질 수 있는 성숙한 동행이 필요한 것이다.


사회적인 불평등은 구조적인 문제임에 틀림없다. 그것은 개인의 도덕성과 연관되는 것이 아니라 구조적 폭력이고, 불공평한 게임이다. 이러한 사회적 시스템을 개선하는데 우리의 청년들이 앞장서게 해야 한다. 청년 그리스도인의 사회참여가 바로 그것이다.


교회 안에서 참여를 촉구하기 위한 전제는 올바른 신학적 전망이다. 올바른 신학과 건강한 신학이 뒷받침 되지 않으면 끊임없는 참여와 지속적인 투쟁이 불가능하다. 1980-90년대 시대를 움직였던 전국가톨릭대학생연합회가 역사 속으로 사라져간 것은 ‘신학의 빈곤’이 초래한 결과일 수도 있다.


이제, 평신도들이 신학을 더 많이 연구해야 한다. 가난하고 젊은 평신도들의 신학이야 말로 새로운 가능성이고, 새로운 지평을 열어나갈 기회이기도 하다. 그러나 신학을 밥벌이로 생각하며 돈 벌 궁리를 한다면 신학은 그 자체로 또 다른 함정이 될 수 있음을 잊지 말자.



덧붙이는 글

※ 연재 그 다섯 번째 시간에는 [한국 가톨릭교회의 순교문제를 바라보는 시각] 이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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