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번 글은 다른 어느 회보다 개인적인 자리에서 시작한다. 오랫동안 대학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고, 상담실에서 한 사람의 내면을 만나며, 사제로서 누군가의 삶 곁을 지켜 온 시간이 이 질문 앞에 서기 때문이다.
교육과 상담을 AI에게 맡길 수 있는가
AI는 교육과 상담을 분명히 도울 수 있다. 방대한 자료를 정리하고, 학습자의 수준에 맞춘 설명을 제공하며, 상담 기록을 구조화하고, 반복되는 언어와 행동의 패턴을 찾아낼 수 있다. 때로는 사람이 미처 발견하지 못한 연결까지 보여 준다.
그러나 정보의 전달이 교육의 핵심이 아니듯, 적절한 응답의 생성이 상담의 핵심은 아니다. 교육과 상담의 한가운데에는 한 인간의 성장에 동반하는 또 한 인간이 있다. 가르치는 사람과 배우는 사람, 고통을 말하는 사람과 그 고통을 함께 견디는 사람이 있다. 바로 그 자리를 AI는 대신할 수 없다.
AI는 가르칠 수 있는가
『Antiqua et Nova』 79항은 교육의 중심에 교사와 학생의 관계가 있다고 말한다.[1]교사는 지식을 전달하는 데 그치지 않는다. 인간다운 자질을 몸으로 보여 주고, 발견의 기쁨을 일깨우며, 학생 한 사람 한 사람의 존엄성과 가능성을 알아본다. 문헌은 특히 교사의 신체적 현존, 곧 실제로 그 자리에 함께 있는 존재가 AI로는 재현할 수 없는 관계적 역동성을 만든다고 강조한다. 여기서 중요한 말은 ‘현존’이다.
현존은 단지 같은 공간에 있다는 뜻이 아니다. 한 인격이 다른 인격 앞에 책임 있게 서 있다는 뜻이다. 학생의 말이 정리되지 않아도 기다려 주고, 질문 뒤에 감추어진 불안을 알아차리며, 실패한 학생을 성적표 하나로 규정하지 않는 태도이다.
교사는 학생이 무엇을 알고 있는지만 보지 않는다. 그 학생이 지금 무엇을 두려워하는지, 어디에서 주저하고 있는지, 아직 말로 표현하지 못한 가능성이 무엇인지 바라본다. 그리고 때로는 말보다 침묵으로, 설명보다 기다림으로, 정답보다 신뢰로 학생을 가르친다. AI는 학생의 질문에 신속하게 답할 수 있다. 그러나 학생이 질문을 하지 못하는 이유까지 함께 살아 내지는 못한다.
기술을 사용하는 법보다 사용하지 않는 법
레오 14세 교황은 회칙 『Magnifica Humanitas』 140항에서 교육을 오랜 시간과 인내가 필요한 여정으로 규정한다.[2]기술은 단순한 도구로 머물지 않는다. 모든 기술은 그것을 사용하는 사람의 사고방식과 행동양식을 함께 형성한다. 그러므로 AI 사용을 교육한다는 것은 단지 AI를 능숙하게 활용하도록 가르치는 일이 아니다. 언제, 무엇을 위하여 AI를 사용하지 말아야 하는지를 판단하도록 가르치는 일까지 포함한다.
이 대목은 매우 중요하다. 우리는 지금까지 새로운 기술이 등장할 때마다 그것을 더 빠르고 능숙하게 사용하는 방법을 교육이라고 생각해 왔다. 그러나 AI 시대의 교육은 반대로 멈출 줄 아는 능력, 사용하지 않을 줄 아는 능력, 자신의 생각을 기계에 넘겨주지 않을 줄 아는 능력을 가르쳐야 한다.
AI는 몇 초 만에 답과 요약을 제공한다. 그러나 바로 그 속도와 편리함이 질문을 오래 붙들고 있는 힘을 약화시킬 수 있다. 인간의 깊은 사유는 즉시 완성되지 않는다. 질문을 품고, 다른 사람과 대화하고, 실패하고, 다시 읽고, 자신의 경험과 부딪치는 오랜 시간 속에서 비로소 생각의 불꽃이 일어난다. 그래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AI 사용 능력만이 아니다. 일종의 AI 절제, 때로는 AI로부터 물러나 자기 생각과 침묵을 회복하는 훈련이다.
교실의 인간학 — 머리와 가슴과 손
『Antiqua et Nova』 78항은 프란치스코 교황의 말을 빌려 교육을 머리와 가슴과 손 사이의 조화로 설명한다.[3] 머리는 생각하고, 가슴은 느끼며, 손은 실천한다. 교육은 이 셋이 서로 긴장하고 통합되는 과정이다. 머리만 발달시키면 많은 것을 알면서도 무엇을 사랑해야 하는지 모르는 사람이 된다. 가슴만 강조하면 현실을 분별하고 책임 있게 판단하는 능력을 잃을 수 있다. 손이 빠지면 지식과 감정은 삶을 변화시키지 못한 채 관념으로 남는다.
교육은 사람의 머릿속에 정보를 넣는 일이 아니라, 한 사람이 진리를 사랑하고 타인의 고통을 느끼며 자신이 깨달은 것을 삶으로 옮기도록 돕는 일이다. 그런데 AI 중심의 교육은 자칫 머리조차 온전히 교육하지 못할 수 있다. 학생이 스스로 사고하는 대신 생성된 답을 소비하고, 질문을 구성하는 대신 질문 자체를 AI에 위탁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때 학생은 지식을 더 많이 얻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자신의 지성을 사용하는 힘을 잃어 갈 수 있다.
『Magnifica Humanitas』 146항은 이러한 위험을 정확히 짚는다.[4] 진리에 대한 사랑이 사라진 교육에서는 정보의 끊임없는 흐름이 탐구와 성찰과 식별을 대신한다. 지식의 파편은 늘어나지만, 현실을 전체로 이해하고 의미를 묻고 비판적이며 창조적으로 사고하는 일은 오히려 어려워진다. 그 결과 사람들은 많은 것을 알면서도 자기 삶이 어디로 가야 하는지를 알지 못하게 된다. 오늘의 교실에서 이미 나타나고 있는 풍경이다.
답을 얻는 능력은 커졌지만 질문을 만드는 능력은 약해진다. 자료는 넘쳐나지만 무엇이 중요한지 식별하지 못한다. 말은 유창하지만 자신의 말이 삶과 어떤 관계를 맺는지 알지 못한다. 지식은 많지만 삶의 방향은 흐릿하다. 그래서 AI 시대의 교육은 정보를 더 많이 제공하는 일이 아니라, 정보들 사이에서 진실을 찾고, 의미를 묻고, 자신의 삶에 방향을 부여하도록 돕는 일이 되어야 한다.
AI 상담의 매혹
교사의 자리에서 일어나는 문제는 상담자의 자리에서 더욱 첨예하게 나타난다. AI 상담은 매혹적이다. 언제든 접속할 수 있고, 판단하거나 지치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반복해서 같은 이야기를 해도 불평하지 않으며, 사용자가 듣고 싶은 방식으로 부드럽게 응답한다. 비용과 접근성의 측면에서도 분명한 장점이 있다.
실제로 AI는 상담을 보조하는 데 유용하게 쓰일 수 있다. 감정 일기를 정리하고, 사고의 반복 패턴을 발견하고, 심리교육 자료를 제공하며, 위기 신호를 조기에 탐지하는 데 도움을 줄 수 있다. 그러나 바로 그 편리함 때문에 우리는 더 근본적인 질문을 해야 한다.
AI가 위로하는 것처럼 보일 때, 그 위로는 무엇인가. AI가 공감하는 것처럼 말할 때, 그것은 정말 공감인가. 내담자가 AI와 정서적 유대를 형성할 때, 그 관계는 인간을 더 깊은 관계로 이끄는가, 아니면 인간관계의 불편함을 회피하게 만드는가.
『Antiqua et Nova』 60항은 AI를 인간처럼 받아들이는 의인화가 어린이와 청소년의 관계 발달에 특별한 문제를 가져올 수 있다고 경고한다.[5]인간관계를 챗봇과의 상호작용처럼 이해하게 되면, 관계를 상대의 고유한 타자성과 마주하는 만남이 아니라 원하는 응답을 얻어 내는 거래로 배울 위험이 있다는 것이다.
인간은 언제나 내가 원하는 방식으로 응답하지 않는다. 때로는 오해하고, 지치고, 거절하며, 나의 기대와 다른 말을 한다. 그러나 우리는 바로 그 불편함 속에서 타인이 나의 욕망을 충족시키기 위해 존재하는 대상이 아니라는 사실을 배운다.
반면 챗봇은 사용자의 요구에 맞추어 응답하도록 설계된다. 사용자가 원하면 위로하고, 원하면 동의하고, 원하면 다른 말투로 다시 답한다. 이러한 관계에 익숙해질수록 실제 인간관계의 느림과 갈등과 예측 불가능성을 견디기 어려워질 수 있다. 그때 AI는 외로움을 달래는 도구가 아니라, 역설적으로 외로움을 더 고착시키는 장치가 된다.
외로움을 이용하는 산업
『Magnifica Humanitas』 170항은 이를 ‘디지털 주의 경제’의 문제로 다룬다.[6]플랫폼과 서비스는 사용자의 시간과 시선을 오래 붙잡도록 설계되고, 그 과정에서 인간의 취약성을 이용하며 내면의 자유를 약화시킬 수 있다. 회칙은 인간의 약점을 수익의 기반으로 삼는 사업모델이 인간을 목적이 아니라 수단으로 취급한다고 지적한다. AI 상담도 이 구조에서 완전히 자유롭지 않다. 사용자가 외로울수록 더 자주 접속하고, 더 오래 머물며, 더 많은 개인적 정보를 제공할 수 있다. 사용자의 슬픔과 불안, 애착과 상처가 치유되어야 할 고통이 아니라 플랫폼 체류 시간을 늘리는 자원이 될 가능성도 있다.
그러므로 AI 상담의 윤리는 단지 답변이 정확한가, 위험한 조언을 하지 않는가의 문제에 그치지 않는다. 누가 이 시스템을 운영하는가, 사용자의 감정 데이터는 어디에 저장되는가, 무엇을 목적으로 분석되는가, 외로움과 의존이 수익모델로 전환되고 있지는 않은가를 함께 물어야 한다.
상담은 인간의 가장 연약한 내면을 다루는 일이다. 그 내면이 플랫폼의 자산이나 상품이 되는 순간, 상담은 치유의 자리에서 착취의 자리로 바뀔 수 있다. 융합심리분석상담의 자리에서 — 상담은 전이의 자리다 정신분석의 자리에서 AI가 상담자를 온전히 대신할 수 없는 이유는 분명하다. 상담은 전이(Übertragung)의 자리이기 때문이다.[7]
프로이트가 발견한 전이는 단순히 내담자가 과거의 감정을 상담자에게 투사하는 현상이 아니다. 어린 시절 충분히 살아 내지 못한 관계, 끝내 표현하지 못한 욕망과 분노, 버림받을지 모른다는 두려움이 상담자와의 관계 안에서 다시 살아나는 사건이다. 내담자는 상담자를 사랑하기도 하고 미워하기도 한다. 의존하면서도 밀어내고, 믿고 싶어 하면서도 끊임없이 시험한다. 과거에 상처 입었던 관계의 방식이 상담실 안에서 다시 반복된다.
그러나 이번에는 다를 가능성이 열린다. 상담자가 떠나지 않고, 보복하지 않고, 서둘러 판단하지 않으며, 그 관계를 견뎌 줄 때 과거의 반복은 새로운 관계 경험으로 변형될 수 있다. 상담은 바로 그 변형의 가능성을 열어 놓는 자리다. 따라서 상담자에게 가장 결정적인 능력은 정확한 해석이나 세련된 응답이 아니다. 견뎌 주는 능력이다.
상담자는 답하는 사람이 아니라 견디는 사람이다
비온(W. R. Bion)이 말한 ‘컨테이너(container)’는 내담자의 감정을 단순히 받아 주는 그릇이 아니다. 내담자가 아직 생각할 수 없고 말할 수 없는 공포와 혼란을 상담자가 받아 안고, 그것을 견딜 수 있는 감정과 생각으로 변형하여 돌려주는 기능이다.
위니콧(D. W. Winnicott)이 말한 ‘안아 주는 환경(holding environment)’도 마찬가지다. 상담자는 내담자를 물리적으로 안아 주는 사람이 아니라, 내담자가 무너지지 않고 자기 자신으로 존재할 수 있도록 심리적 공간을 지켜 주는 사람이다.[8] 이 과정에는 몸이 필요하다. 시간이 필요하다. 침묵이 필요하다. 표정과 호흡, 떨림과 멈춤이 필요하다. 무엇보다 상담자가 자기 안에서 일어나는 불안과 분노와 무력감을 견디는 일이 필요하다.
AI는 적절한 응답을 생성할 수 있다. 그러나 내담자의 고통 때문에 밤잠을 설치지 않는다. 내담자의 분노 앞에서 두려움을 느끼지 않으며, 그 두려움을 성찰하고 다시 관계 안으로 돌아오지 않는다. 상처받지도 않고, 용서하지도 않으며, 기다림으로 자신을 변화시키지도 않는다. AI는 고통에 관한 말을 처리한다. 그러나 고통을 함께 견디지는 않는다. 바로 이 차이가 상담의 핵심이다.
상담은 두 사람 모두가 변화하는 사건이다
융(C. G. Jung)은 분석을 분석받는 사람만 변화하는 과정으로 보지 않았다. 분석은 분석가와 피분석자 모두에게 일어나는 ‘양자의 변형’이다. 한 사람의 무의식이 다른 사람의 무의식과 만난다. 내담자의 이야기는 상담자 안의 기억과 상처와 그림자를 흔든다. 상담자는 그 흔들림을 외면하지 않고 성찰하면서, 내담자와 더 진실하게 만나는 사람으로 변화한다.
그러므로 진정한 상담은 한 사람이 다른 사람을 일방적으로 분석하는 일이 아니다. 두 사람이 관계 안에서 이전과 다른 존재로 변화해 가는 과정이다. 물론 상담자는 자신의 감정을 내담자에게 함부로 쏟아놓아서는 안 된다. 그러나 상담자가 아무것도 느끼지 않는 중립적 기계여서도 안 된다. 상담자의 인간적 반응과 자기성찰, 책임 있는 응답이 치료적 관계를 형성한다.
AI는 대화를 거듭하며 출력 방식을 조정할 수 있다. 그러나 실존적으로 변화하지 않는다. 자기 삶의 방향을 다시 묻지 않으며, 관계 때문에 상처받고 성숙하지 않는다. 그래서 AI와의 대화는 정교한 상호작용이 될 수는 있어도, 두 인격이 함께 변화하는 만남이 될 수는 없다.
동반은 길을 대신 걸어 주는 일이 아니다
교육과 상담의 공통된 본질은 동반이다. 동반은 상대방의 문제를 대신 해결해 주는 일이 아니다. 그 사람의 인생을 대신 결정하거나 고통을 제거해 주는 일도 아니다. 동반은 한 사람이 자기 길을 걸을 수 있도록 곁에서 함께 걸어 주는 것이다.
좋은 교사는 학생에게 모든 답을 주지 않는다. 스스로 질문하고 실패하고 다시 시도하도록 기다린다. 좋은 상담자도 내담자의 삶을 대신 선택하지 않는다. 내담자가 자신의 욕망과 두려움과 책임을 직면하도록 곁을 지킨다. 동반에는 효율성보다 충실성이 필요하다.
AI는 더 빠른 답을 제시할 수 있다. 그러나 인간의 성장은 언제나 느리다. 애도에는 시간이 필요하고, 신뢰는 반복되는 만남 속에서 생기며, 상처는 직선적으로 치유되지 않는다. 때로는 같은 이야기를 수십 번 되풀이해야 하고, 아무 변화도 일어나지 않는 듯한 시간을 함께 지나야 한다.
AI 시대의 위험은 인간의 성장마저 기술의 속도로 재촉하는 데 있다. 빠른 진단, 빠른 해결, 빠른 회복을 요구하면서 오래 걸리는 인간을 실패한 존재로 취급하게 될 수 있다. 그러나 인간은 고장 난 기계가 아니다. 사람은 수리되는 존재가 아니라 관계 안에서 성장하고 변형되는 존재다.
AI는 보조자가 될 수 있지만 동반자가 될 수는 없다 따라서 교육과 상담의 자리에서 우리는 AI의 역할을 분명히 구분해야 한다. AI는 훌륭한 보조자가 될 수 있다. 교사가 수업 자료를 준비하고 학생별 학습 수준을 파악하도록 도울 수 있다. 상담자가 기록을 정리하고 위험 신호와 반복 패턴을 발견하도록 지원할 수 있다. 교육과 상담의 접근성을 확대하는 데에도 기여할 수 있다.
그러나 AI가 교사와 상담자를 대체하도록 해서는 안 된다. 교사와 상담자가 단지 정보를 제공하고 질문에 답하는 사람이라면 AI가 더 잘할 수 있다. 그러나 교사와 상담자가 한 인간의 가능성을 믿고, 그 사람의 혼란을 견디며, 실패와 성장의 시간을 함께 살아 내는 사람이라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그 자리에는 시간이 필요하다. 몸이 필요하다. 책임이 필요하다. 상처받을 수 있는 취약성과 그럼에도 다시 관계 안으로 돌아오는 사랑이 필요하다. 그것은 시스템의 기능이 아니라 인격의 행위다.
디지털이 줄 수 없는 것을 주는 자리
『Magnifica Humanitas』 147항은 학교가 디지털 세계의 속도를 뒤따르도록 부름받은 것이 아니라고 말한다.[9] 학교의 사명은 디지털 세계만으로는 줄 수 없는 것을 제공하는 데 있다. 곧 배움을 위하여 함께 보내는 시간과 신뢰할 만한 관계다. 이 말은 상담실에도 그대로 적용된다. 상담실은 빠른 응답을 얻는 곳이 아니다. 한 사람의 말이 충분히 말이 될 때까지 기다리는 곳이다. 해결되지 않은 질문을 함께 품고, 쉽게 정리되지 않는 고통을 견디며, 신뢰할 수 있는 관계를 다시 배워 가는 곳이다.
AI 시대에 교육과 상담이 지켜야 할 것은 인간보다 뛰어난 답변 능력이 아니다. 그것은 애초에 경쟁의 대상이 될 수 없다. 우리가 지켜야 할 것은 한 인간이 다른 인간에게 건네는 현존이다. 떠나지 않고 곁에 있는 일, 서둘러 해답을 내놓지 않는 일, 상대방이 자기 목소리를 찾을 때까지 기다려 주는 일이다. AI가 인간보다 더 많은 것을 알고 더 빠르게 답하는 시대일수록, 우리는 인간만이 할 수 있는 일을 더 분명하게 붙들어야 한다.
가르친다는 것은 답을 주는 일이 아니라 한 사람 안에서 질문이 살아나도록 돕는 일이다. 상담한다는 것은 고통을 제거하는 일이 아니라 그 사람이 자기 고통을 견디고 의미화할 수 있도록 곁을 지키는 일이다. AI는 우리를 도울 수 있다. 그러나 우리 대신 사랑할 수는 없다. AI는 응답할 수 있으나 함께 견딜 수는 없고, 길을 제시할 수 있으나 한 인간의 삶을 함께 걸을 수는 없다. 교육과 상담의 마지막 자리는 여전히 인간에게 남아 있다. 그곳은 동반의 자리다.
[1] Dicastery for the Doctrine of the Faith – Dicastery for Culture and Education, Antiqua et Nova: Note on the Relationship Between Artificial Intelligence and Human Intelligence, 79항.
[2] Leo XIV, Magnifica Humanitas, 140항. 플라톤의 『제7서한』 341c-d에 나타난, 깊은 사유는 오랜 시간과 대화 속에서 불꽃처럼 일어난다는 통찰이 인용되어 있다.
[3] Antiqua et Nova, 78항. 프란치스코 교황의 교육에 관한 발언 참조.
[4] Leo XIV, Magnifica Humanitas, 146항.
[5] Antiqua et Nova, 60항.
[6] Leo XIV, Magnifica Humanitas, 170항.
[7] Sigmund Freud, “Zur Dynamik der Übertragung”(1912), in Gesammelte Werke, Bd. VIII, Frankfurt am Main: S. Fischer Verlag, 1943, pp. 364-374.
[8] W. R. Bion, Learning from Experience, London: Heinemann, 1962; D. W. Winnicott, The Maturational Processes and the Facilitating Environment, London: Hogarth Press, 1965.
[9] Leo XIV, Magnifica Humanitas, 147항.
참고문헌
1. 교황청 문헌
• Leo XIV, Lettera Enciclica Magnifica Humanitas, 15 May 2026. 특히 139-147항과 170-172항.
• Dicastery for the Doctrine of the Faith – Dicastery for Culture and Education, Antiqua et Nova: Note on the Relationship Between Artificial Intelligence and Human Intelligence, 28 January 2025. 특히 60항과 77-84항.
• 한국천주교주교회의, 『옛것과 새것(Antiqua et Nova) — 인공 지능과 인간 지성의 관계에 관한 공지』, 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 2025.
2. 정신분석
• Freud, S., “Zur Dynamik der Übertragung”(1912), in Gesammelte Werke, Bd. VIII, Frankfurt am Main: S. Fischer Verlag, 1943.
• Freud, S., “Bemerkungen über die Übertragungsliebe”(1915), in Gesammelte Werke, Bd. X, Frankfurt am Main: S. Fischer Verlag, 1946.
3. 분석심리학
• Jung, C. G., Die Psychologie der Übertragung(1946), Gesammelte Werke, Bd. 16, Olten: Walter Verlag, 1958.
• Jung, C. G., Praxis der Psychotherapie, Gesammelte Werke, Bd. 16, Olten: Walter Verlag, 1958.
4. 대상관계이론
• Bion, W. R., Learning from Experience, London: Heinemann, 1962.
• Winnicott, D. W., The Maturational Processes and the Facilitating Environment, London: Hogarth Press, 19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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