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순 제3주일 (2023.03.08) : 탈출 17,3-7; 로마 5,1-2.5-8; 요한 4,5-42
1. 사순 제3주일인 오늘 우리가 듣는 말씀은 예수님께서 성령으로 생명의 물이 되시어 우리를 살리신다는 내용입니다. 육신의 양식에 빵만 있는 게 아니라 물도 있듯이, 영혼의 양식에도 생명의 빵만이 아니라 생명의 물도 있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오늘 제1독서가 전해주는 탈출기의 상황은 우리가 생명의 물을 마셔야 하는 사정을 잘 묘사해 주고 있습니다. 그것은 절박하게 하느님을 찾는 체험이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이집트를 탈출한 히브리인들은 시나이 산 아래에 모여 하느님의 법을 받고 계약을 맺기 전에 물이 없어 고통당하는 곤경을 겪었습니다. 백성은 목이 마른 나머지, 모세에게 불평을 늘어놓았습니다. 만나를 먹게 되기까지 그러했듯이 이번에도 모세는 하느님께 부르짖었습니다. 그러자 하느님께서 모세에게 호렙의 바위를 지팡이로 치게 하시어 물이 터져 나오게 하셨습니다.
▲ 이스라엘 백성이 이집트를 탈출한 경로이 대목에서 우리는 한 가지 의문을 지니게 됩니다. 이집트 고센 땅에서 가나안 땅으로 가는 오래된 지름길은 가자를 통해 가는 육로로서 이미 알려져 있었고 이 길은 걸어서 며칠이면 갈 수 있는 길입니다. 또 하느님께서 백성의 길잡이로 삼으신 모세는 미디안 광야에서 40년이나 양치기로 살아왔기 때문에 누구보다도 그 일대의 길을 잘 알고 있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도 굳이 홍해를 건너야 하고 먹을 것도 마실 것도 없는 낯선 시나이 광야 길로 들어서서 멀찌감치 돌아가게 하신 데다가 며칠이면 갈 수 있는 거리를 무려 40 년이나 걸리게 하신 하느님의 섭리는 무엇이었을까요?
2. 하느님께서는 “‘그들이 닥쳐올 전쟁을 내다보고는 마음을 바꾸어 이집트로 되돌아가서는 안 되지.’ 하고 생각하신 나머지 백성을 갈대 바다에 이르는 광야 길로 돌아가게”(탈출 13,17-18) 하셨습니다. 그것은 홍해를 건너야 하고 먹을 것이 모자라며 마실 것도 모자라는 생존의 위기에 처해서 히브리인들이 명백하게 하느님의 힘으로 그 위기를 벗어나는 체험을 해야만 비로소 하느님을 믿고 의지하는 그분의 백성이 될 수 있으리라는 섭리 때문이었습니다.
이는 굳이 수효도 적고 노예근성까지 생겨난 이스라엘을 하느님께서 당신 백성으로 삼으신 이유와도 상통합니다. “주님께서 너희에게 마음을 주시고 너희를 선택하신 것은, 너희가 어느 민족보다 수가 많아서가 아니다. 사실 너희는 모든 민족들 가운데에서 수가 가장 적다. 그런데도 주님께서는 너희를 사랑하시어, 너희 조상들에게 하신 맹세를 지키시려고, 강한 손으로 너희를 이끌어 내셔서, 종살이하던 집, 이집트 임금 파라오의 손에서 너희를 구해 내셨다”(신명 7,7-8). 즉 하느님께서 당신 백성으로 삼으신 민족은 이집트처럼 강성한 민족이 아니었고, 바빌로니아나 페르시아처럼 수효가 많은 민족도 아니었으며, 수효도 적고 힘도 약한 히브리 노예 출신 이스라엘 민족이었으니, 바로 그래야 하느님의 권능이 드러나실 수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히브리인들은 하느님 백성이 되는 계약을 체결하기 전에 왜 하느님을 믿어야 하는지 깨우쳐야 했고, 또 어떤 마음가짐으로 하느님을 믿어야 하는지를 배워야 했습니다. 그렇지 않고는 조금만 어려워도 불평을 쏟아내고 조금만 힘들어도 도망갈 구석을 찾는 노예근성을 벗어나기 어려웠습니다. 하느님의 백성이 된다는 것은 자유인이 되는 것이며, 자유인이란 주어진 자유를 누리기 위하여 반드시 자신이 이행해야 하는 책임을 스스로의 힘으로 해 내는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그리하여 노예근성에 절은 세대가 죽고 40 년이 지나는 동안 새로이 태어난 세대가 주역이 되었을 무렵에 약속의 땅에 들어갈 수 있게 하셨던 것입니다.

3. 지리적으로 가깝고 편리한 길을 두고 선교적 이유로 더 멀고 힘든 길을 간 경우는 복음에서도 나옵니다. 이미 요르단 강가로 가셔서 사람들에게 제자들을 통해 세례를 주신 예수님께서는 북쪽으로 조금만 더 가면 고향 땅 갈릴래아 지방으로 귀환하실 수 있기 때문에 굳이 사마리아 지방으로 우회하실 필요가 없으셨습니다(요한 5,1-3). 그런데도 굳이 예수님께서 ‘야곱의 우물’이 있던 시카르를 들르느라고 사마리아 지방을 가신 이유는 구원에 있어서 유다인들로부터 소외되어야 했던 특별한 내력을 간직한 사마리아 지방과 그 주민들에 대한 연민과 복음화 열망 때문이었습니다.
역사적으로 북이스라엘 왕국의 수도가 자리잡고 있었던 사마리아의 주민들은 더 비극적인 운명을 겪어야 했습니다. 아시리아는 북이스라엘왕국의 수도가 있었던 사마리아로 아시리아인들을 강제 이주시켜 통혼정책을 펴는 한편 아시리아의 종교관습을 강요했기 때문입니다. 본의 아니게 사마리아인들은 혈통으로도 순수성을 잃어버렸을 뿐만 아니라 종교적으로도 우상숭배에 물들도록 강요를 받았습니다. 그래서 유다인들로부터 경멸을 받게 되었던 것인데, 바로 또 이런 사정 때문에 이들을 복음화하기 위한 예수님의 이 연민과 열망이 발휘되었습니다.
▲ 야곱의 우물에서 사마리아 여자를 만나신 예수4. ‘야곱의 우물’에 도착하신 예수님께서는 먼 길에 지치신 나머지 마침 이 우물에서 만나신 사마리아 여자에게 물을 청하셨습니다. 그런데 그녀는 생면부지의 유다인 남자가 우물물을 청하자 유다인과 사마리아인이 서로 상종하지도 않아온 역사적 현실을 들어 거절했습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우물물이 아니라 영혼의 생수를, 게다가 마셔도 다시 목마를 수 있는 보통의 물이 아니라 한 번 마시면 다시는 목마르지 않게 되는 생명의 물을 줄 수 있는 존재가 바로 당신이심을 밝히셨습니다. 그제서야 사마리아 여자는 마음이 열려서 예수님의 말씀에 주목하게 되고 드디어 그 ‘생수’를 예수님께 청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는 사마리아인들이 숙명적으로 짊어지고 있었던 ‘예배’ 문제를 꺼내어 놓았습니다. 유다인들은 혈통으로도 종교적으로도 혼혈이 되어 버린 사마리아인들이 예루살렘 성전에 와서 제사를 드리지 못하도록 금지해 왔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예루살렘 성전 같은 특정한 장소가 아니라 “영과 진리 안에서 예배를 드리는”(요한 4,24) 때가 왔다고 선언하심으로써 종교적으로 소외되었던 사마리아인들의 숙원을 해결해주시는 한편, 그들도 하느님 나라에로 회개하도록 초대하시며, 결정적으로 당신이 메시아이심을 밝히셨습니다(요한 4,26).
이 말씀을 들은 사마리아 여자는 ‘물동이를 버려두고 고을로 가서’(요한 4,28) 고을 사람들에게 예수님을 전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이 사마리아 여자가 사도가 된 이 이야기는, 강대국 아시리아의 통치자들이 사악한 의도로 약소민족들에게 가한 수직 폭력의 구조 위에서, 피해자인 유다인들이 저급한 분노로 자신들보다 더 약한 사마리아인들에게 가하는 수평 폭력이 펼쳐지는 역사적 그늘에 어떻게 하느님의 빛을 비출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모범 사례라고 볼 수 있습니다. 오늘 제2독서에서 사로 바오로가 로마공동체의 교우들에게 권고한 말씀대로, 믿음으로 의롭게 된 우리는 우리가 생명의 빵으로 먹고 생명의 물로 마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느님과 더불어 평화를 누릴 것입니다.
5. 사마리아와 유다의 관계 이상으로 꼬이고 꼬인 복잡한 매듭이 한민족에게도 있습니다. 백 년 전 강제합병과 식민통치를 자행한 일본의 책임 문제를 비롯해서, 70여 년 전 6·25 전쟁을 일으켜 남침한 북한의 책임 문제, 해방 직후 전범국 일본 대신에 남북한을 갈라놓았으며 전쟁 때 임시로 맡겼던 군사주권을 지금까지도 반환하지 않고 있는 미국의 책임 문제 등 남북 간은 물론, 한일 간이나 한미 간에도 풀어야 할 매듭은 만만치 않습니다.
그러나 국제 정세의 현실은 부당한 잘못을 저지른 가해자가 피해자에게 사과를 하는 산술적 방식으로는 풀리지 않음을 보여줍니다. 그랬다면 벌써 풀리고도 남았을 것입니다. 한반도의 평화 문제는 고차 방정식처럼 얽히고 설킨 실타래와도 같습니다. 결자해지(結者解之)라는 말에 따라서 가해자가 풀어야 하겠지만, 그걸 기다렸다가는 아무리 세월이 흘러도 영영 매듭을 풀지 못할 것 같은 예상이 들기 때문에, 차라리 피해자가 나서서 매듭을 푸는 것이 수월해 보입니다. 한국교회를 찾아와 충고한 두 교황의 메시지가 그러했습니다.
이는 천주교 신자들이 부당하게 당했던 백 년 박해의 문제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가해자였던 정치 세력은 양심의 가책도 느끼지 않고 있을 뿐만 아니라 더군다나 사과할 생각은 조금도 없어 보입니다. 피해를 당한 희생자의 입장에서 보면, 박해도 일제강점도, 강제분단도 전쟁도 모조리 다 억울하기 짝이 없는 일이었습니다. 왜 우리 민족이 이렇게 연이어서 고난을 당해야 하는 것일까요? 혹시 시나이 광야에서 지름길을 놓아두고 홍해를 건너서 광야를 가는 동안에 당신을 절박하게 찾게 하신 것처럼, 하느님께서 우리 민족에게도 하느님을 찾게 하시려는 섭리는 아닐른지요?
여기서 우리는 굳이 사마리아 지방으로 돌아감으로써 한 여인을 만나 사마리아 사람들의 복음화를 위한 단초를 마련하신 예수님처럼, 민족이 마주하고 있는 이 역사의 매듭을 풀어야 한다는 역사적 당면과제를 의식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목마른 사람이 샘물 파는 심정으로 결국 피해자가 힘을 길러서 역사의 빚을 받아 내야 할 판인데, 이 힘은 군사력이나 경제력 같은 하드파워 즉 물리적인 힘만이 아닙니다. 국제 사회에서 책임을 다함으로써 자유를 행사하는 국가 집단으로 성숙한 외교력과, 국가 운영에 있어서 나라의 주권자로서 맞갖은 책임을 다하는 국민의 정치력도 반드시 필요한 힘입니다.
또한 이를 위해서도 그 옛날 이스라엘 백성이 시나이 사막에서 체험했듯이, 명백하게 하느님의 힘으로 민족의 위기를 벗어나는 집단 체험 즉 역사적인 신앙의 힘도 우리에게 꼭 필요합니다. 이러한 소프트 파워가 발휘되자면 사마리아로 찾아가신 예수님처럼 먼저 움직여야 할 우리 교회와 신앙인들이 의식해야 할 책임감과 이를 바탕으로 동족들에게 증거해야 할 역사의식이 필요한데, 이 책임감과 역사의식이 우리가 마셔야 할 생명의 물이요 성령의 선물이라고 보입니다.
“주님, 당신은 참으로 세상의 구원자이시니, 우리에게 영원히 목마르지 않을 생명의 물을 주소서”(복음 환호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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